〈 77화 〉76화.
[저 사람은?]
“엊저녁 물건을 챙겨 탈출한 노예입니다.”
산맥에 남지 않고 먼저 출발한 250명의 노예 중 한 명이라는 소리였다.
심각한 부상에 나는 남자의 곁에 다가가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르나르국의 부대에당했습니다.”
[르나르국이라고요? 설마 내가 어제 서창을 공격한 걸 알고 놈들이 벌써 여기까지 왔단 말입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사절단의 깃발을 걸고 있었으니까요. 아무래도 이국의 사절단을 마중하기 위해 온 것 같습니다.”
저쪽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르나르국에서도 이국을 환영하기 위한 사절단을 보냈다는 뜻이다.
나는 망자의 눈으로 웨일 산맥으로 보낸 까마귀들의 시야를 확인했다.
산맥을 넘은 까마귀들의 눈에 르나르국 사절단의 모습이 잡혔다.
그들은 황야를 가로지르며 웨일 산맥으로 향하고 있었다.
까마귀를 보내 확인하니 칠각룡의 깃발을 든 기수의 옆으로 관복 차림을 하고 가마 비스무리한 뭔가를 탄 남자가 보였다.
딱 봐도 지체 높아 보이는 그 양반이었다.
그의 뒤에는험상궂은 얼굴에 비범해 보이는 고수들이 따르고 있었다.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 또한 있었다.
사절단의 규모만 해도 무려 1만은 족히 되는 듯했다.
[많네.]
나는 사절단 사이에서 빛을 내는 여인을 보았다.
내리쬐는 햇볕에 온몸이 밝게 빛나는 여성이었다.
목표 중 하나인 칠각보전 희각이었다.
희각은 아라타가 보여준 강명 법사의 기억 속 모습과 똑같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아름답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실물은 더 아름답네. 강명이 넋이 나간 이유가 있었어.]
희각이 하늘을 보았다.
까메라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빛으로 이뤄진 활을 만들어 쏘았다.
빠르고 정확한 화살에 까마귀들이 모두 죽고 시야가 사라졌다.
[들켰나. 하긴, 한 나라의 영웅이라면 까마귀들 정도는 눈치채겠지.]
아무튼, 바다에서는 정각이 오고 있고, 황야에서는 희각이 오고 있었다.
특히, 희각은 이미 까마귀의 존재를 눈치챘으니, 정오 전에 서창으로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
[어쩌다 습격을 받은 것인지 말해주십시오.]
“우, 우리가 공격받은 건 오늘 새벽입니다. 용병단으로 위장한 채 달아나고 있었는데, 야영 중이던 병사들이 출신이 어디냐고 트집을 잡더니 우리들의 신분을 검사했습니다. 그때용병으로 위장한노예가 손등에 난 표식을 들키는 바람에…. 그만 공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표식이 있는 노예는 용병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려면 표식부터 지워야 했다.
아라타가노예들을 불러 모아 표식을 지우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말을 타고 있던 저는 무사히 도망쳤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잡힌 동료도 쉬이 불지 않겠지만, 그들이 고문을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저도 확답을 해 드리기힘들 것 같습니다.”
내 정체가 들통 난다는 말이었다.
먼저 떠난 노예는 서창의 사람들과 달리 내가 언데드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염치없이 먼저 떠난 것으로 모자라 이런 민폐까지 끼쳐 드려서….”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늘 아침에 노예상인들과 용병들을 풀어줬으니까요. 그들이 르나르국 사절단과 만났다면 들킬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건 르나르국에서도 사절단을 보내리라 예상하지 못한 내 잘못입니다. 미리 예상하고 말렸어야 했는데,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는 자책하는 남자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노예들에게 말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이 사람은 아라타에게 데려가서 치료하라고 전하세요. 그러면 아라타도 사정을 알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다시 돌아오실 거죠? 두영님.”
[그래. 다시 돌아오마.]
나는 걱정하는 앤디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래주고워프 마법으로 웨일 산맥으로 이동했다.
이동하자 산맥 아래에 르나르국의 사절단이 진군 중인 것이 보였다.
[정각과 합세하면 귀찮아진다. 미리 처리하는 게 좋겠지.]
나는 네빌의 아공간에서 크리스털을 꺼냈다.
마력이 가득 담긴 크리스털에 손을 대고 그 안에 담긴 마력을 흡수했다.
본래는 좀 더 아껴두려고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크리스털에 담긴 마력을 흡수하는 게 나았다.
[적의 수는 1만,그렇다면 이쪽도 1만을 소환하는 게 싸게 먹히겠지.]
나는 네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대규모 병력을 소환할 때처럼 웨일 산맥 일대에 망자의 군대를 일으켰다.
데스나이트와 리치 같은 스켈레톤 군대뿐만 아니라 산맥에서 죽은 몬스터와 인간들의 시체까지 좀비로 만들어 망자의 군대를 일으켜 세웠다.
몰려드는 먹구름과 점점 늘어나는 언데드 군대에 산맥 아래에서 희각이 소리쳤다.
“정지하라!”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졌다.
“라반 관리! 부정한 자가 있습니다! 전투 준비를 명하세요!”
그녀는 내 존재를 파악한 것인지 마력을 일으키며 명령을 내렸다.
“예! 희각님! 전 병력 전투를 준비하라!”
관리의 외침에 전투를 준비하는깃발이 올라갔다.
무기를 든 병사들이 앞으로 나오고, 다수의 주술사와 검사들이 늘어섰다.
두려움이없는 병사들.
나는 네빌의 말을 떠올렸다.
[어설픈 인정은 독이 되어 돌아오고, 그 독은 결국 내 꿈과 바람을 무너뜨리는 초석이 될 것이다.]
파이로 대신이 이끄는 르나르국의 군대와 싸우기 전에 네빌이 내게 해줬던 말을 다시 복기하며 병사들을 보았다.
[놈들은무고한자들이 아니다.]
그렇게 임전의 각오를 마치고 손을 뻗었다.
부활한 언데드 군대가 르나르국의 사절단을 향해 진군했다.
“언데드! 고약한 놈이로구나! 놈들을 살려두지 마세요!”
“희각님을 따르라!”
“언데드를 없애라!”
희각과 르나르국의 군대 역시 도망치지 않고 함성을 내지르며 전의를 다졌다.
언데드들도 산비탈을 내려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 속도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기세가 엄청났다.
선두에 선 것은 트롤과오우거처럼 덩치가 큰 좀비였다.
놈들은 웨일 산맥의 커다란 나무를 수수깡처럼 부수며 내려가더니 풀쩍 뛰어올라 병사들이 밀집한 지역에 떨어졌다.
“결계를 쳐라!”
공중에서 떨어지는 대형 좀비들의 등장에 검은 관복에 면류관을 쓴 남자가 활짝 펼친 부채를 휘두르며 외쳤다.
희각이 라반이라 부른 남자였다.
그의 명령에 사절단 후미에서 대기 중이던 주술사들이 움직였다.
지팡이를 든 주술사들이 품에서 부적을 꺼내더니 공중으로 던졌다.
수백 장의 부적이 공중으로 펄럭이며 날아오르자 부적에서 전기가튀더니 원형 돔을 연상시키는 결계가 생성되었다.
반투명한 결계는 좀비들을 막았고, 결계에 부딪친 좀비들은 감전된 것처럼 부들부들 떨며 쓰러졌다.
“하찮은 언데드 놈들! 네놈들 따위에 뚫릴 결계가 아니다! 각궁(角弓) 부대! 화살을 쏘아라! 나 라반이 도울 것이다!”
라반이 부채를 들고 마력을 일으켰다.
웨일 산맥 방향으로 바람이 일었다.
거센 동풍이었는데, 바람의 기세가 어찌나 센지 주위의 나무가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릴 정도였다.
[무슨 제갈량도 아니고.]
라반이 동풍을 일으키자 각궁을 든 르나르국의 부대가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기더니 언데드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엄청난 수의 화살이 라반이 일으킨 바람을 타고 날아와 언데드들의 몸에 박혔다.
평범한 화살이라면 몸이 부서지더라도 다시 움직이겠지만, 라반의 각궁 부대는 평범한 화살이 아닌 마력이 실린 화살을 쏘았다.
그래서 위력이 더 강했다.
[과연, 나무를 꿰뚫을 정도인가.]
화살에 꿰뚫린 나무를 보았다.
성인남자 셋이 안아야 겨우 안을 수 있는 크고 두꺼운 나무였는데, 그 나무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라반이 일으킨 바람의 기세까지 더해서 화살의 위력이 몇 배나 오른 것이다.
제법이라면 제법이었다.
“칠각룡의 피를 이은 르나르국의 병사들이여! 로나스 왕의 이름으로 사악한 망자를 몰아내라!”
라반이 사자후를 터트렸다.
곧 희각을 필두로 병사들이 진군했다.
스켈레톤을 단숨에 부수고, 정화하며 전진하는 희각과 병사들.
그들은 화살이 만든 그림자 아래에서 물러서지도 않고 용맹하게 맞섰다.
데스나이트와 리치가 나서지 않은 상태로 맞붙으니, 아무리 내가 소환했어도 하급‧중급 언데드로는 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낱 언데드 따위가 분수도 모르고!”
희각이 소리쳤다.
푸른색 형광을 띤 빛의 날개를 소환한 그녀는 좀비들과 스켈레톤들의 진형을 단숨에 파훼하더니 팽이처럼 핑그르르 돌며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산중턱까지 솟아오른 그녀는 빛의날개를 휘저으며 깃털처럼 생긴 검기를 내뿜었다.
날카롭고 매서워 보이는 그녀의 검기에 주위에 남아 있던 리치들이 손을 뻗었다.
검은색을 띤 반투명한 방어막이 나타나 희각의 공격을 모두 막았다.
빛을 잃은 깃털들이 하늘거리며 떨어지자 이번엔 호위를 맡은 데스나이트들이 솟구쳐 올랐다.
검기를 만든 데스나이트들이 희각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동풍을 가르며 나아간 검기가 자신을 노리자 희각은 날개에 마력을 실어 방어했다.
빛의 날개가 그녀를 감싸 검기를 모두 막아냈다.
공격을 다 막은 그녀는 접근한 데스나이트들을 밀치더니 아래로 활강했다.
그리고 둥글게 뭉친 빛의 구체를 만들며 외쳤다.
“라반 관리! 이쪽입니다!”
“각궁 부대! 희각님을 지원해라!”
라반이 부채를 휘둘렀다.
그가 타고 있던 가마의 뒤에서 검들이 솟구쳐 올랐다.
상자를 깨고 나온 수백 개의 검이 순식간에 공중으로흩날려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마치 청어 떼가 하나로 뭉쳐 포식자를 위협하듯이 형태를 갖추는 수백 개의 검들!
[장관이네. 이놈들 역시 약하진 않구나.]
그 장관의 너머에서 각궁 부대가 발사한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화살이 날아오자 공중에 있던 검들도 화살에 합류해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풍을 타고 화살과 검이날아왔다.
전략‧전술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연계 같았다.
다만, 그런 공격도리치들이 단합해서 방어를 펼치자 막혀 튕겨 나가고 말았다.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로군! 다시 공격하라!”
라반이 사자후를 터뜨리더니 부채를 움직였다.
쏟아진 검들이 다시 일어나 공중에서 자리를 잡았다.
한편, 화살과 검의 그림자 아래에 있던희각은 양손에 만든 빛을 하나로 뭉치더니 그것을 레이저처럼 쏘았다.
[저건 리치의 결계론 못 막겠어. 역시 내가 나서야겠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나는 얼른 검을 소환했다.
본래는 최소한의 마력을 이용해 처리할 셈이었지만, 희각과 라반의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이대로는 장기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으니, 아까워도제대로 힘을 휘두를 필요가 있어 보였다.
호위를 맡은 리치와 데스나이트를 물리고 묵직한 이블 나이트의 대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검기가 집채만큼 커진 순간!
수미산에서 사용한 기술을 떠올리고 검을 휘둘렀다.
새까만 검기가 산비탈과 대기를 통째로 가르며 뿜어져 나갔다.
칠금산과 칠해를 통째로 벤 바로 그 기술이었다.
일반 스켈레톤과 좀비들까지 통째로 가르며 나아간 검기는 희각이 발사한 빛의 레이저 따위는 가소롭게 갈라버리며 라반이 이끄는 사절단을 노렸다.
“피해, 피해라! 어서!”
“모두 흩어져라!”
위험을 깨달은 희각은 공중으로 솟구쳐 거리를 벌렸고, 지상에 있던 라반은 가마를 타고 날아올랐다.
공중으로 솟구쳐 피한 둘은 내 검기가 만든 재앙을 보았다.
초승달의 검기가 적들을 휩쓸었다.
주술사들이 결계를 쳐서 막았으나, 그들이 펼친 결계는 단 1초도 버티지 못한 채 지워졌다.
그 안에 숨어 있던 병사 또한, 내가 만든 검기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계와 병사 그리고 사절단이 이끌고 온 물자와 자원까지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웨일 산맥의 비탈길을 가르고 뻗어나온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남긴 대지의 상처뿐이었다.
살아남은 병력 또한, 1만 중 고작 1천에 불과했다.
“이, 이럴 수가…. 바, 바닥이 다 꺼질 정도의 검기라니…!”
“마,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이!”
몇 미터인지 확인도 되지 않는 깊이의 검기자국이 축구장 10개 너비에 새겨진 것과 전체 병력의 9할이 사라진 것을 본 희각과 라반은 충격에 빠졌다.
그것은 생존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런 괴물이 대체 어디서….”
“이, 이길 수 없다. 저건 평범한 괴물이 아니다!”
“달아나야 한다! 달아나야 해!”
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깊이 파인 절벽을 본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힘에 공포를 느꼈다.
지형을 바꾸는 힘, 그들에겐 재앙 그 자체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