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79화.
르나르국의 선단의 수는 30척이었다.
모두 목재로 지어져 있었으며, 노와 돛을 이용하는범선이었다.
가장 작은 소형 범선이 15척, 노도 많고 사람도 많이 탄 중형 범선이 10척.
끝으로 현대의 페리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큰 초대형 범선이 5척이었다.
소형은 돛이 1~2개 정도이고, 중형은 3~4개, 대형은 6~7개까지 있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누선(樓船)을 닮은 모습이었다.
배 아래가 바나나처럼 굽어 있으며 선수와 선미 모두 사각형으로 각이 져 있었다.
앞뒤 구분을 위함인지 선수, 뱃머리 자리에는 7개의 뿔이 달린 칠각룡의 용머리가 달려 있고, 선미의 양쪽에는 소뿔처럼 굽은 장식이 달려 있었다.
선창에는 노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며, 중앙에는 레고 블록 같은 함교가 세워져 있었다.
함교의 머리 위에는 여러 개의 깃대가 세워져 있으며, 선체 사이사이에는 커다란 돛대가 세워져 있었다.
소형부터 대형까지 모든 돛에는 검은색 바탕에 백색의 칠각룡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 노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 서풍이 잘 불어서 바람을 타고서 순항 중이었기 때문이다.
[잘 만든 배네. 정말 아름답게 잘 만들었어.]
감탄이 나왔다.
지구에서도 배를 타본 경험이 없어서 배에 대해선 잘 모른다.
하지만 르나르국의 범선들을 보니 이곳 사람들이 이곳 사람들이 그저 미개하기만 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선수부터 선미까지 동양적인 장식이 아주 대단했다.
고전적인 풍취가 물씬 느껴질 만큼 아주 훌륭한 작품이었다.
특히 뱃전에 새겨진 아름다운 문양과 용의 그림이 걸린각기 다른 색상의 방패들은 바이킹을 연상케 해서 매우 흥미로웠다.
오죽하면 배가 아까워 공격이 주저될 정도였다.
[전부 다 침몰시키면 죄 없는 사람들까지 다칠 것 같은데…. 그냥 정각만 잡고 갈까? 분명,대형 범선 중 하나에 있을 것 같은데….]
조용히 대형 범선을 살피는 그때였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눈여겨보던 대형 선박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새벽을 몰아낼 듯 밝은 섬광에 놀라 고개를 옆으로 젖히니 빛에 휘감긴 검이 밤하늘을 가르며 사라졌다.
멀리 사라져 바다로 떨어지는 검,
나는 그 검의 주인을찾았다.
중앙에 위치한대형 범선의 갑판이었다.
그곳엔 짐승 같은 인간이 서 있었다.
야수처럼 갈기가자란 목에 사자의 얼굴을 한 자였는데, 근육이 돋보일 정도로 꽉 끼는 무사의 옷에 거대한짐승의 이빨로 만들어진 무기를 매고 있었다.
2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무기는 검이라기보단 톱에 더 가까웠다.
톱처럼 사이사이에 홈이 파여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바로 수인인가. 이족 보행하는 사자를 보네.]
“피했나?악취 나는 놈치고는 제법이로구나! 하하하!”
사자는 내가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자 옆에 있던 수인족 부하에게 뭔가를 달라고 손짓했다.
부하는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자신의 검을 뽑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사자가 다시 한 번 힘을 실어 무기를 투척했다.
“어디 이것도 피해 봐라!”
팔 근육이 부풀면서 상의의 오른팔 부분이 찢어지더니 검이 총알처럼 날아왔다.
100미터도 넘게 거리를 벌려 놓았는데도 단숨에 거리를 좁히는 검!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생긴 대로 강한 놈이네.]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젖혀 사자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자를 보았다.
“썩은 내가 풍겨서 추잡한 놈이 왔나 싶었더니,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로구나! 나 야왕(야수의 왕) 아슬란이 명한다! 이름을 밝혀라, 뼈다귀!그 정도 기회는 주겠다!”
뼈다귀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내 정체까지 파악한 모양이다.
하긴, 수인이면 코도 인간보다 우수할 테니 마법으로 모습을 바꿔도 냄새로 내 정체를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검을 던지는 속도도 그렇고, 냄새를 잘 맡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평범한 수인이 아닌 것 같네. 게다가 야왕이라는 거창한 별명까지 가진 걸 보면 이국의 영웅일 가능성이 높겠어.]
바룸에게 들은 대로 이국의 수인들이 르나르국의 사절단으로 가는 것이라면 평범한 하수인이 아니라 그래도 어느 정도 명망이 있는 고위직이 사절단으로 파견되었을 것이다.
그 고위직의 호위라면, 아슬란 같은 영웅을 대동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문제는 영웅급 실력자를 몇 명이나 포함됐느냐인데….]
“네 이놈! 무시하고 말고 대답해라!”
아슬란이 새로운 부하에게서 검을 받아 던지며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거리를 벌려 그 공격을 피하고 라이프 센서를 펼쳤다.
[대충 3천 명 정도인가.]
30척의 범선에 탑승한 생명 반응은 3천 명 정도다.
아직 내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아슬란이 탑승한 배 위의 병사들을 제외하면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괜히 집중포화라도 당하면 귀찮아진다. 아깝지만 역시 한 번에 처리하는게 낫겠어.]
나는 까마귀를 사방에 퍼트린 후 유령마를 타고 하늘로 향했다.
“도망치는 것이냐!”
내가 공중으로 올라가자 아슬란이 소리쳤다.
쫓아오지 않고 소리만 치는 것을 보면 하늘을 나는 능력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어떡할까요? 아슬란님. 르나르국에 도움을 요청할까요?”
“기다려라, 놈의 의도를 알 수 없지 않으냐. 공격하려는 게 아닐 수도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저쪽에서는 이미 우릴 적으로 생각했다면….”
“하하하! 이 정도는 인사치레 아니겠느냐? 설마 칼 몇 자루 던졌다고 소인배처럼 굴진 않겠지.”
아슬란이 부하의 충언을 웃음으로 때웠다.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으리라.
[풍마우세(風磨雨洗).]
나는 교룡의 술법을 펼쳤다. 그러자 밤하늘에 먹구름이 몰리더니 비바람이 불며 천둥‧번개가 쳤다.
이것으로도 풍랑을 만들 수 있겠지만, 그 정도로는 대형 범선을 좌초시키기엔 부족하다.
[다크 토네이도.]
좀 더 강력한 한 방을 위해 나는 네빌의 마법을 곁들였다.
마법을 사용하고 마법진이 공중에 나타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범선 선단의 중심에 거센 토네이도가 몰아쳤다.
“어? 자, 잠깐! 치사하다! 내려와서 정정당당히 싸워라!”
아슬란이 당황을 감추지 않고 소리쳤다.
나는 무시하고 마법을 계속 사용했다.
비바람과 솟아오른 바닷물이 용오름에 뒤섞여 거센 물보라를 만들어냈다.
갑판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몰려온 물보라를 버티지 못한 채바다로 떨어지거나 토네이도에 휩쓸려 저 멀리 날아갔다.
사람이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강해지면서 돛이 찢어졌다.
돛대는 부서졌다.
망가진 돛대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배가 전복되었고, 파도에 휩쓸린 소형 범선은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다.
부서진 범선의 파편이 토네이도를 따라 사방으로 튀며 2차 피해를 일으켰다.
거기에 벼락까지 내리치자 바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겁한 놈! 쓰레기 같은 놈!”
“적이다! 공중에 적 마법사다!”
“언데드!리치로 보인다!”
아슬란이 욕지거리를 뱉자 그의 부하들이 소리치며 내 존재를 알렸다.
“내려와라! 이 비겁한 뼈다귀 놈!!”
숨을 들이쉰 아슬란이 우렁찬 사자후를 터뜨렸다.
엄청난고성에 아슬란의 앞에 있던 대기가 밀렸다.
갑판에 쏟아지던 비바람도 뒤로 밀려 바다에 떨어졌다.
심지어 파도와 토네이도의 기세까지 한순간 멈칫할 정도.
[폼으로 사자 머리를 달고 있는 건 아니구나.]
누가 사자 아니랄까 봐 실로 우렁찬 포효였다.
나는 토네이도를 유지하며 까마귀의 눈으로 대형 범선을 주시했다.
아슬란의 포효를 들은 병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경계심이 약한 병사 몇몇은 그대로 토네이도에 휩쓸려 날아갔지만, 조심성이 강한 병사들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튼튼한 구조물을 잡고 버티며 공간을 만들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갑판으로 나와소리쳤다.
“닻을 내리고 결계를 쳐라! 배가 침몰해서는 안 된다!”
“주술사들이 결계를 유지하는 동안 돛을 내려라!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버텨야 한다!”
“마법을 오래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명령을 받은 주술사들이 나왔다.
지팡이를 든 주술사들은 먼저 나와 있던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흔들리는 몸을지탱하더니 결계를 펼쳤다.
덕분에 대형 범선은 돛몇 개가 부러졌다 뿐 전복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중형 범선의 사정은 달랐다.
주술사들이 없는 것인지 중형 범선은 그대로토네이도에 휘감겨 난파되었다.
그 안에 타고 있던 르나르국의 병사들 역시 바람에 휩쓸린 채 바다 곳곳으로 떨어졌다.
20척에 달하는 배가 풍랑을 버티지 못하고 전복되거나 침몰했다.
생존자는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부표를 끌어안고서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끄아악!”
“살려줘!”
“이 비열한 뼈다귀 놈!”
곳곳에서 비명이 나오자 책임감을 느낀 아슬란이 갑판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 도약에 튼튼한 갑판 바닥이 함몰되는 것은 물론, 배 전체가선수 쪽으로 기울었다.
“없애주마!”
바람을 가르며 단숨에 수십 미터를 솟아오른 그는 매고 있던 톱 같은 검을 뽑더니 우렁찬 기합과 함께 휘둘렀다.
기합만큼이나 큰 검기가 나왔지만, 이미 하늘에 맞닿은 용오름을 지울 정도로 크지 않았다.
크기가 작았기에 나는기껏해야 토네이도의 바람을 조금 죽이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슬란의 검기가 토네이도에 닿자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다크 토네이도를 펼친 마법진이 찢어지더니 바람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교룡의 술법으로 만든 비바람의 술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쉽게? 설마 마법을 지운 건가?!]
나는 네빌의 기억을 빌려 이 현상에 대한 답을 찾았다.
아슬란의 힘이 강해서 지워진 것은 아니다.
마법이 지워진 요인이 있다면 그건 그가 가진 무기의 영향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비열한 뼈다귀 놈! 내 진작 네놈을 베었어야 했다!”
분노한 아슬란이 공중에서 소리쳤다.
사자가 어떻게 하늘을 나나 싶었더니 발아래에 결계가 생겨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밟으며 공중에 떠 있었다.
[본인이 만든 결계 같지는 않은데.]
나는 지상을 보았다.
예상대로 수인족 2명이 아슬란의발판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사라져라!”
아슬란이 결계를 밟아 움직이며 검기를 날렸다.
그의 갈기처럼 황갈색을 띤 검기가 예기를 머금고 사방에서 날아왔다.
나는 얼른 검을 들어 막았다.
“음!? 마법으로 모자라 검술까지 쓰는 것인가?!”
놀란 아슬란이 검기를 발사하며 소리쳤다.
나는 답하지 않고 그에게 검기를 발사했다.
그러자 아슬란이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영웅보다 빠른 움직임으로 내 검기를 피했다.
그리고 사방에 생긴 결계들을 밟으며 당구공처럼 이리저리 튕겼다.
잔상까지 남기며 움직이는 아슬란.
그가 튕길 때마다 복수의검기가 사방에서 날아왔다.
[좀 빠르네.]
수인족 영웅이라 인간보다 신체능력이 높은 것인지 검기는 약해도 움직임은 다른 영웅들보다 훨씬 날랬다.
처음에는 검 한 자루로 따라갈 수 있었지만, 공격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아슬란의 속도도 빨라져 검으로 쳐내는 것이 어려운 수준까지 되었다.
검술 역시 지금까지 사용한 기사들의 검술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편.
[얕잡아 볼 수 없는 놈이었네. 라이언.]
끝도 없이 빨라지는 아슬란의 움직임 탓에 방어 마법을 펼치는 것을 고민했다.
하지만 아슬란의 검기는 마법과 주술을 지운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설프게 방어 마법을 펼치는 것은 위험하다.
안전하게 방어하려면 마찬가지로 검으로 정확히 쳐내야 한다.
나는 빠르고 정확한 아슬란의 검술에 가네샤의 기억이 떠올랐다.
썩어도 준치라고 수십 년 동안이나 동명의 왕 노릇을 해온 가네샤는 검술의 귀재였다.
동명에서는 내게 큰 활약 없이 허무하게 당했지만,수백 년 동안이나 검술을 연구하고 연마한 고수였다.
비록 말년에는 술독에 빠져 지냈지만, 근력을 상승시키는 주술과 여섯 자루나 되는 검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검술은 지금까지 벤 그 어떤 망자와 괴이보다 뛰어났다.
[그녀석의 쌍검술이라면….]
나는 아공간을 열어 보물창고에서 주운 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검기를 불어넣은 후 가네샤의 기억을 따라 쌍검술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