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5 트러블 메이커 (4)
‘여관’이라 불린 건물에 들어가니 어떤 아주머니가 세티를 반겼다.
“어머, 다녀왔니?"
"물건 잘 전달해주고 왔어요!"
본 적이 없는 미소로 답하는 세티였다.
‘아? 저런 미소도 지을 줄 알아?’
이 소녀의 속마음을 캐묻고 싶을 정도로 뭔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 나만 따돌리는? 그런거 말이다.
세티가 소개해 준다던 사람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를 뒤늦게 보고는 힘차게 말했다.
"어서오세요! 여관, 유토피아에!"
‘여관 유토피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의 출처를 생각하기 보다, 시선을 다른 곳에 집중시킬 수 밖에 없었다.
밖에서 본 것과 같이 여관 안은 시야에 다 담아내기 힘들 정도로 매우 넓었다.
그리고 그런 넓직한 공간에서 눈길을 확 사로잡는 사내가 앉아있었다.
팜 아저씨에 버금가는 덩치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피폐해진 눈을 가진 사내는 자신 앞에 놓인 많은 음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기와 컵들이 여러개 있는 것을 보아 여러사람이 같이 먹는 것 같았지만, 자리에는 그 사람 밖에 없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인지 모를 그 사람은 음식이 식어감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하는 것 처럼 보였다.
"오빠!"
세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세티와 아주머니가 서있었던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세티는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그런 세티를 보면서 빙그래 웃고 계셨다.
느낌상 나에게 무슨 말을 하셨었고, 내가 응답하지 않았던 상황인 것 같아 나는 황급히 사과를 했다.
"아, 죄송합니다. 둘러보느라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하니, 그 아주머니는 내 등을 두드리며 나를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일단, 이쪽에 앉으렴 무언가 마시겠니?"
“어… 아뇨, 괜찮습니다.”
나는 막 배를 채우고 온 참 이었기도 했고, 마음을 비우고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아주머니는 할일이 많이 쌓여있는 것인지 서둘러 발걸음을 옳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잊은 것이 있는지 잠시 멈추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세티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 나는 제시라고 해. 편하게 제시 누나라고 하렴? 아하하하!"
외모로 보이는 나이와 맞지 않는 발언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본인 스스로도 멋쩍었는지,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두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편하게 있어!"
‘제시… 누나…? 음…?’
한참 멍해있는 나에게 세티가 다가왔다.
복장은 아까와는 사뭇 다른 옷이었다.
세티는 여관일을 돕고 있는 것인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페퍼 언니도 곧 온다고 했으니까,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까의 그 사람에게 시선을 옳겼다.
그 사내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의 뺨에는 한방울의 눈물이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 * *
"페스틴!"
얄미운 그 사람이 왔다.
나는 금방 올 것이라는 말에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심심해진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제시 누…아니 아주머니에게 방을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
방을 잡았어도 여전히 시간이 남아서, 내가 도울 일은 없는지 물어보았더니, 홀이라던지 주방이라던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시 아주머니에게 주방 일을 도울 수 있는지 질문을 했다.
내가 요리를 조금 할 줄 알고 있다고 말해보았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제시 아주머니는 흔쾌히 주방 일을 맡겨주셨다.
지금 막 재료를 손질 중 이었고, 쌓여진 재료를 바라보며 지루해 하던 참이었다.
"지금 뭐하는거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어보는 페퍼에게 괜히 심통이 났다.
"보면 알잖아."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조금은 소브와 세티의 기분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심통한 마음을 마구 내뿜어 내면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열심히 재료 손질에만 몰두하니, 바보스럽게 보였나 보다.
페퍼를 흘겨보니,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하아… 왜 이리 늦게 왔어."
얄미운 미소가 보기 싫어져 절로 눈이 감겨진다.
"페퍼 왔네? 오랜만이야~ 페스틴도 그 즈음 하면 됐어. 고생했네~"
"아… 아닙니다. 도울 수 있어서…."
"후후… 어서 가봐. 세티가 기다린다."
"네, 네."
제시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와 페퍼는 주방을 나왔다.
할일이 다 끝난 것인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세티가 여관 홀에 있었다.
가까운 탁자에 앉아 나와 그녀들은 수다 아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얻어맞을 뿐이다.
때로는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화가 난다.
억지로 미소짓는 얼굴 근육이 살살 떨려오기 시작할 때 즈음, 페퍼가 갑자기 나에게 어떤 책을 건넸다.
"이건 뭐야?"
나는 책을 구석구석 살피기 위해, 이리 돌려도 보고 저리 돌려도 보고 하면서 페퍼에게 물었다.
"책 이잖아."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페퍼의 얼굴이 왜인지 더 얄미워 보였다.
"아니, 왜 나한테 주는거냐고."
나는 알면서도 그러는 페퍼 때문에 살짝 짜증이 났다.
"그새 까먹은거야? 내가 보답한다고 했잖아."
한심하다는 듯이 페퍼가 쳐다보았다.
이 상황이 웃기는지 세티는 옆에서 소매로 입을 가리면서 쿡쿡하고 웃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이?’
"안 까먹었다."
나는 대충 대답해주고 페퍼가 준 책을 펼치고 읽어보았다.
적절하게도 팜 아저씨의 설명으로는 부족했던 부분의 이론이 기술되어 있는 책이었다.
딱히, 팜 아저씨의 설명이 부실했던 것은 아니었다.
팜 아저씨도 흘러흘러 듣게 된 것이라 정확한 설명은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어차피 왕궁 근처에 도서관이 있으니 거기서 찾아봐도 된다면서 대충 설명해 준 것이었다.
“정말 고맙지?”
으쓱해 하고있는 페퍼를 멀뚱멀뚱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상대할 바에야, 차라리 무시하는게 낫다.
“엥?”
나는 책을 펼쳐들고 당황스러워 하는 페퍼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저자의 이름을 처음 보아서 누군지는 몰라도 자세히 설명이 되어있어 이해가 쉬웠다.
‘감사합니다! 이름 모를 선생님!’
내 앞에서 페퍼와 세티가 뭐라뭐라 했지만 나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마, 나에 대한 험담일 것이다.
이 두사람은 아마 '공동의 적' 이라는 존재가 생겨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공동의 적' 이란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팜 아저씨의 공장에서 가까운 책방에서 보았던 책에 나왔던 이야기다.
뭐… 책방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작은 곳이긴 하다.
아무튼, 그 책은 왕궁의 학자들이 기피한다고 하는 '심리학' 이라는 학문에 대해서 기술 되어있었다.
공동의 적 역시, 사람들의 심리 상태에 관해 언급되면서 나온 말로 기억한다.
내 앞의 두 사람은 자신들의 '공동의 적'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아서 질렸는지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책 속의 이론의 바다에 빠졌고, 시간이 꽤 흘렀을 것이다. 아마도.
* * *
정신을 차려보니 페퍼와 세티가 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기억을 되새겨 얼핏들은 말들을 기억해보았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 둘은 제시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심부름을 가는 것 같았다.
나는 안심하고 다시 자세를 고치고 책에 몰두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문쪽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구조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고, 그려져 있는 삽화조차 훌륭해서 나는 읽기를 그만두는게 쉽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유익한 정보 수집은 1순위로 자리잡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여전히 읽고있네."
세티의 목소리가 들렀다.
"그러게, 지치지도 않나봐?"
이어서 페퍼의 비꼬는 말이 들렀다.
그리고 곧바로 심각한 내용이 담긴 제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렀다.
"아, 그러고 보니 페퍼, 오늘 왕궁 가야한다고 하지 않았어?"
‘어…? 왕궁…?’
"아!"
"아!"
나와 페퍼는 동시에 외쳤다.
"아니, 뭐야 그 반응? 혹시 너도 왕궁에 가?"
놀란 것도 잠시 나에게 물어보는 페퍼였다.
"어…. 나도 방금 기억났지만, 오늘까지 가야해."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로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는 지정된 시각이 곧 다가오는 것 같은데?"
제시 아주머니가 밖의 괘종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지금 몇…시에요…?"
페퍼는 현실을 자각하는게 무서웠는지, 시간을 보기가 두렵다는 듯이 고개를 전혀 돌리지 않으려 하면서 물었다.
나는 제시 아주머니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잔뜩 긴장하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왕궁에 가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팜 아저씨와 소브가 안다면 나는 분명 짧은 인생을 마무리 하고 자리에 누울 것만 같았다.
"제 5시 44분인데?"
나와 페퍼는 제시 아주머니의 입에서 나온 현재 시각을 듣고는 우리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들었던 말을 되새기고 되새겼다.
우리는 제시 아주머니가 제발 시각을 잘 못 보았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왕궁에서 일러준 시각은 '제 5시 정각' 이지만 44분이나 지나버린 것이다.
페퍼는 의자에 앉아있던 나의 오른쪽 손목을 콱 움켜쥐더니 황급히 문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휘청거리며 페퍼에게 붙잡힌 채로 달려가게 되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페퍼는 힘차게 인사하면서 뛰쳐나갔다.
나도 페퍼를 뒤따라 가면서 인사했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제시 아주머니와 세티의 얼굴은 보지 못하였지만 분명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에 당황한 얼굴일 것이라 생각된다.
‘아아… 큰일났다.’
* * *
경비대가 지키고 있는 몇달 전에 들어갔었던 그 입구로 왔다.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었던 페퍼 덕분에 빨리 올 수가 있었다.
우리는 품속을 더듬었고, 국왕으로부터 받은 초대장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는 어렵지 않게 찾았지만 페퍼는 한참을 뒤적이다가 울상이 되었다.
"도서관에 놓고 왔나봐…."
페퍼가 힘없이 말했다.
"침착하게 다시 한 번 찾아봐."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잠시 더 뒤적이더니 페퍼의 얼굴은 금세 환해졌다.
"찾았어!"
페퍼의 얼굴은 매우 기뻐보였다.
"그럼, 가자!"
나와 페퍼는 힘차게 경비대원들에게 다가갔다.
경비대원들은 조금 경계하는 듯 싶었고, 우리는 국왕이 친히 보낸 초대장을 보여주고는 얼른 들여보내 달라는 눈빛을 쏘아댔다.
경비대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일단은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우리는 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방으로 안내받았고, 일단락 된 상황에 우리는 웃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