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15 죄. (5)
왕궁 근처에 있던 이 구역은 이 시간만 되면 무척이나 조용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높아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드는 듯 했다.
내일을 위해서 일지도, 아니면 단순히 고된 하루를 보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골목길을 희미하게 가로등이 비춰주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어두운 밤길이 무서워서 부모님의 손을 꼬옥 잡았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커버린 지금은 무척이나 조용한 공기를 혼자서 만끽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은 참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변화한다.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으면서도 기호는 쉽게 변하고 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내 자신이 싫어서 쉽게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뚝심이 있어야 한다.
별것 아니지만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줏대가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기도 어려워질 뿐더러, 나에 대해서 명확해지는 것이 사라진다고도 생각한다.
나는 내 등에 업혀있는 페퍼를 여전히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와는 맞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세뇌를 당했다고는 하나, 어떻게 내 손으로 소중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한단 말인가?
나는 내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등에 업고 가는 것도 분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보다 친근해 보이는 루틴의 등에 업혀서 가는 것이 훨씬 더 나아보였다.
…나는 이렇게 그녀의 곁에 계속 있어도 되는 것인가?
발걸음을 차분히 내딛으며 왕궁으로 가는 속도를 늦췄다.
내가 페퍼에게 해를 끼쳤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둑어둑 해진 밤길을 조용히 걸어갔다.
등 뒤에서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과분했다.
나는 또 이렇게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버리고 말았다.
'이런 내가 계속 곁에 있어도 되는 것인가.' 하고 나는 마음이 착잡해져 버렸다.
부모님이 생각난다.
부모의 손길을 겪은 것은 몇년도 채 안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부모님의 얼굴이 더 이상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물론, 부모님이 떠나간 것은 내 책임이 아니었다.
나는 어렸고, 세상 물정을 몰랐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어째서인지, 부모님이 떠나간 것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은 그렇게 생각하려 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은 그렇게 생각해 버린다.
나는 가끔 내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내 마음이 싫었다.
나는 여전히 페퍼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페퍼는 나를 알고 나서 부터 왕궁에서 위험한 일을 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좋지 않은 경험도 했고, 심지어는 오늘처럼 목숨을 잃을 뻔 했다.
그런 것들이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하고 오만한 생각을 하고 만다.
등 뒤로 들리는 작은 숨소리가 나에게 비수가 되어 마음에 꽂혔다.
이 사람을 나는 잘 지켜낼 수 있을까?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나는 그만 눈물이 나왔다.
…치욕스러웠다.
한심스러웠다.
눈물을 흘리는 내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분했다.
지키지 못한 이유는 단순하게도 내가 나약했기 때문이다.
더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세뇌 따위는 이겨내 버렸을 것이다.
…단순히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어리석고 무지하며, 나약하다.
이런 내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가슴 언저리가 지끈거렸다.
아프다.
다치지도 않았는데 칼에 찔린 듯이 아프다.
“…하아.”
나는 마음의 무게에 대한 버거움에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페스틴.”
내가 숨죽여 훌쩍이고 있을 때 즈음,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렀다.
힘이 없고 지친듯한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에, 나는 마음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앞으로 향하던 나의 발걸음도 제자리에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일어났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응…. 여기는…?”
내 등 뒤로 나의 목을 머리카락으로 간지럽히며, 좌우로 살피는 듯한 페퍼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여기는… 왕궁으로 가는 골목길이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페스틴.”
“…응?”
어두운 내 감정을 내비치고 싶지 않아 최대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페스틴.”
“응…. 듣고 있어.”
“왜… 울어…?”
…나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던 것 같았다.
역시 나는 그녀의 안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 아니야…. 목이 좀 아파서 그래.”
“거짓말.”
나의 구차한 변명에도 그녀는 나의 속마음을 알아챈 듯 했다.
“…”
나는 그녀의 일침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말들이 내 목에 걸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저 그 말들은 목 언저리에서 멤돌 뿐이다.
“페스틴….”
“응…?”
“라이브 씨는…?”
“…솔직하게 말하면. 아니, 말해도 괜찮겠어…?”
나는 말하려다, 그녀가 기절을 해서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이 기억나 망설여졌다.
과한 충격은 사람의 심신에 좋지 않는다는 것을 몇번 경험해 보았다.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응…. 괜찮아.”
조용하고 작게 흘러나온 그녀의 대답은 내 마음속을 마구 휘저었다.
“…자결…하셨어…. 그래서 루틴 씨랑 묻어드리고 왔어.”
묻은 것은 실질적으로 지하이지만, 내 나름대로의 예를 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마녀이며, 사람들을 혼란 시키고 이용했다.
결국에는 그들을 상처 입혔으며 무고한 시민들을 괴롭혔다.
나도 겪어보았지만, 세뇌란 것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더이상 이런 폭력적인 힘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으면 했다.
“…그렇…구나.”
나의 어깨에 따뜻한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필시 페퍼의 눈물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슬퍼하고 있는데, 나는 그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원인은 나였고, 내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페스틴.”
“…응?”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 마음, 이해해.”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
나의 말에 그녀는 묵묵무답이었다.
“…미안해, 페퍼.”
“…”
나의 사과에도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느껴지는 것은 등 뒤에서 미세하게 떨고있는 그녀의 슬픔 뿐이었다.
“미안해. 내가 일을 그르쳤다. …더이상 네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나는 다시 한 번 사과를 하며 나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나의 몸을 꽉 붙들어 맸다.
“…아니야.”
“…?”
나는 그녀가 말한 의외의 대답에 눈동자가 커졌다.
“…나는 이제… 너 밖에 없어.”
페퍼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너를 죽이려 했었어도?”
나의 어리석은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는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나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나는… 너를 지켜줄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다고?”
나의 말에 그녀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분위기를 통한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녀는 나를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까스로 참았던 눈물이 다시 새어 나오려고 하는 바람에 입을 꾹 다물고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해 구원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페스틴.”
그녀의 부름에도 나는 울음을 참느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페스틴…?”
다시 들려오는 부름에 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수고했어. 그리고 고마워.”
“…응. 나야말로, 고마워.”
나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나는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
나는 결코 이 따뜻한 감정을 잊지 않겠다.
절대로.
* * *
페퍼를 방에 데려다 주고 나는 다시 내 방으로 향했다.
천천히 걸어오는 바람에 조금 시간이 늦어버리고 말았다.
“후우….”
나는 여러모로 지치는 바람에 서둘러 욕탕으로 향했다.
제 21시가 넘어서면 기계를 돌리지 않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지친 몸을 이끌며 욕탕으로 향했다.
나를 반기는 것은 욕탕의 따뜻한 온기와 습한 공기가 있었다.
욕탕의 물 온도는 아무래도 좋았다.
옷을 탈의하고 탕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 열에 의한 수증기가 조금 옅은 상태로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완전한 찬물로 씻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찬물도 나름 씻기 좋은 물의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만, '몸을 풀어주는 것은 역시 따뜻한 물이 제격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남성들을 위한 욕탕은 이렇게 한곳에 크게 지어져 있지만, 여성들을 위한 곳은 조금 다른 듯 했다.
아무래도 자기 관리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지만, 다르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금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둘째 치고 이 왕궁에서 지내면서 이상하다고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왜 선생님들과 욕탕에서 마주치지 않는 것일까?
물론, 그들과 마주치고 싶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쓸데 없는 생각은 이제 그만두고 얼른 씻고 나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드르륵—
한참 몸을 씻어내는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 즈음, 누군가 들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렀다.
“아~ 식어버린 듯 하지만! 가끔은 이런 곳도 좋지~”
산뜻하고 밝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왕이 발개 벗고 걸어오고 있었다.
‘…?’
나는 조금 아니, 굉장히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아, 아니 여…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나는 공손하게 물었다.
말을 더듬 거리며 묻는 나를 남들이 보게 된다면 조금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왕이다.
신분의 격차가 너무 크고, 인격 조차도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다.
당연히 거북할 수 밖에….
“음~? 페스틴 군 이었네요~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아서, 분위기 전환 삼아 오고는 하죠.”
나의 질문에도 그는 눈깜짝 하나 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그의 그런 태연함 때문에 왕궁을 조직하는데 한 몫 했다고 할 수도 있는 것 같았다.
“아하하하;; 그렇군요…. 혼자…이신가요?”
“…? 네, 그렇죠? 사실, 조이드를 꼬시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베피에게 잡혀있더라고요. 그래서… 보이는 것처럼 저 혼자죠.”
“아하하….”
왕의 하소연에 나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대체 왜…?
그가 여기에 왜 왔을까?
정말… 단순한 기분 전환인가?
“음? 뭐 묻었나요?”
“예? 아, 아하하;; 아닙니다.”
너무 왕을 뚫어지게 쳐다본 모양이다.
그쪽에서 이상함을 눈치채고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페스틴 군. 조금 지쳐보이네요? …무슨 일 있었나요?”
왕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따듯했다.
차가워진 심장을 어루만지는 따듯한 물 온도도 나의 경계심을 풀게 만들었다.
나는 그만, 지쳐있는 나를 제어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