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20 심판자. (1)
잠에서 깬 나는 꿈의 여운에 잠겨 잠시 동안 가만히 앉아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무릎베게를 해주며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런 꿈이었다.
얻지 못할 가능성이 전혀없는 목표는 희망이 아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그 조그만 가능성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다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슬프게도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그리워하는 것 같다.
나는 내 양볼을 몇번 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으로 나는 의지를 다졌다.
* * *
여느때 처럼, 씻기 위해 욕탕으로 나왔더니, 토니가 씻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토니.”
나는 기분 좋게 인사를 할 겨를이 없는 마음 상태였지만, 그래도 하루를 버티기 위해서 내 자신을 채찍질 했다.
“…응, 좋은 아침.”
나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기분좋게 나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역시, 그는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준다.
그래서 그가 나의 아군이었으면 하는 바램이 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제의 그가 토니일 것이라 나는 확신하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행동했다.
눈치를 못챈 나를 상상하며, 그가 나의 거짓된 모습을 알아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제… 나갔다 온 것 같던데….”
그 역시 아무렇지 않게 나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묻는 것 자체가 나에게 실마리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나라면, 행동의 변화를 알기 위해서 주의 깊이 관찰한 다음에 지나가는 말로 한번씩 찔러 보았을 것이다.
“응, 옷도 좀 사고, 자재도 살겸해서 나갔지.”
“혼자?”
나의 자연스러운 대답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확고하게 굳히고 싶어서인지 질문을 이어나갔다.
“아니, 페퍼랑.”
“아….”
그는 그 감탄사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만둔 그의 태도에 나는 의아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서로 간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어떤 편에 섰든지, 나에게 정체를 들키는 것은 좋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기도 했고, 서로의 생각과 신념을 알기 위해서는 더 깊이 그와 친해질 필요가 있어보였다.
하지만 토니는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단서가 매우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토니와 친해지기 위해서 그런 고생을 했던 것이다.
이제서야 효과를 보나 했지만, 아직 때가 아닌 듯 했다.
아무튼, 그가 어디에 속하든지, 그는 나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즈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를 주의해야 할 필요도 있겠지만,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면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느정도 그를 경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나는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사람일은 절대로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절대로 놓지 말아야 겠다고 스스로에게 언질을 주었다.
“오늘 아침 식사가 기대되는 걸?”
나는 오늘도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와의 사이를 조금이라도 좁히려고 했다.
“늘 항상 같은 건데.”
토니는 항상 그렇게 말한다.
그가 반찬 투정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에 나는 무어라 답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난감하다는 나의 반응을 알아챈 것인지, 아니면 불편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그는 일어섰다.
“그럼, 먼저 나가볼게.”
“그래, 이따가 보자고.”
나는 등을 돌려 떠나가는 토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내 시커먼 속을 말이다.
* * *
“페퍼는?”
식당의 식탁에는 줄리와 마리 뿐 밖에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씻고 나오자 마자, 내 옆에 따라붙은 테리스도 앉아있었다.
“페퍼? 글쎄~?”
나의 물음에 마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음…?’
“어제 페퍼랑 무슨 일 있었어?”
“페퍼랑?”
그녀의 물음에 나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 캥기는 것도 있기도 하지만, 내 마음속 구석에서 한가닥의 자존심 때문에 대답하기를 주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맞아~ 맞아~ 페퍼가 기운이 없어보이던데?”
마리도 자신이 실제로 본것처럼 말을 했다.
“그래?”
여기까지만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 좋아보였다.
사건의 당사자 외에도 다른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안좋은 모습을 보이면, 변명할 여지가 없어진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시치미 떼는 것을 그만두고 그녀들의 앞에 살포시 앉으며 말했다.
“페퍼랑 어제 같이 나갔다 왔어.”
“나갔다 왔다고?”
“단둘이~?”
“그러더군요.”
나는 갑자기 대화에 참여한 테리스를 흘깃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경비대 사람을 보아서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러 갔죠.”
“페퍼는?”
“버려둔거야~?”
“그것 참 남자로서 어떨지….”
“…제 옷을 골라준다고 하길래, 밖에서 기다리다가 마주쳤거든요.”
“버렸네.”
“와~ 페스틴 그렇게 안봤는데~”
“실망이군요.”
‘것참…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나는 그녀들의 눈빛에서 장난스러움이 묻어 나온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진지하게 계속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 때 말도 없이 간 것 때문에 페퍼가 화났을 겁니다.”
“당연히 화나지!”
“그럼, 그럼.”
“하아… 정말이지… 당신은 당연한 걸 묻는군요.”
“그래서 어떻게 용서를 구할까 고민중이라는 거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들에게 내가 이야기 할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나의 태도가 그녀들에게 역부족이었는지, 다시 왁자지껄 해진다.
그녀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역시… 자리를 잘못 잡았다.’
나는 이곳에 앉은 것을 후회하며, 페퍼에게 어떻게 사과를 해야할지 머리를 굴렸다.
전의 나는 그녀의 곁에 있어도 되는지 물었었다.
나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내가 그녀의 은인을 죽게 내버려 두었고, 여러번 실망을 시켰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렇게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하고서도 내가 여전히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녀에게 굉장한 실례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내 앞에 놓인 식사를 먹고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홀로 차분하게 강의실로 향했다.
* * *
강의실에서 만난 페퍼는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싫다.
그리고 나의 소중한 사람이 내 곁을 떠나는 것은 더더욱 싫다.
아무래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될 문제인 것 같았다.
나는 나쁜 의도는 없었지만, 그녀를 상처입혀버린 꼴인 이 상황에 골머리를 썩혔다.
나와 조금 떨어져 앉은 그녀를 잠시 동안 바라보며,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결심 끝에 조심스레 다가가 말했다.
“페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있어. 나에게 조금의 시간만 줄 수 있어?”
나는 최대한 그녀를 존중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서 말했다.
그녀는 조용히 나를 올려다 보더니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 내 공방으로 와 줄래?”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의 말에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그래… 좋아, 어디 한번 들어볼게.”
그녀는 살며시 웃었다.
밤사이에 깊은 생각을 해온 것은 나뿐 만이 아니었는지, 그녀의 미소에 나는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안심하는 것도 잠시, 다시 나의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페스틴… 이제 시작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부러 거리를 좀 좀혀서 말이다.
이제, 길고 긴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조이드는 부드럽게 웃으며 수업을 진행했고, 나는 다시 나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 * *
시간이 꽤나 빠르게 흘렀다.
아니, 시간은 제 속도에 맞추어 변함없이 흘렀지만, 사람의 기분이란게 그런 것을 늦추거나 빨라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적 있는가?
오늘따라 하루가 짧다고 느껴진다거나, 길다고 느껴진다거나 하는 기분 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시간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을까?
농담이다.
만약, 모두가 다른 생각을 손톱만큼도 하지 않고 한마음이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모두가 비슷한 것이 아니라 똑같았다면 어땠을까?
모두 같은 동선을 향해 움직였을까?
그것은 나의 생각의 틀 밖에 있는 것들이라, 현재의 나로서는 의문만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똑- 똑-
일정하게 울려퍼지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문가로 시선을 옮겼다.
“네, 들어오세요.”
나는 차분하게 밖에 있는 외부인을 초대했다.
“흠흠… 나 왔어.”
페퍼가 쭈뼛거리며 나의 공방에 들어오자, 나는 기쁘게 웃으며 그녀를 환영했다.
“안 올줄 알았어.”
나는 살며시 웃으며 조심스러운 나의 마음을 비쳐보였다.
“나는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나를 이해하는데 지쳐보이는 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미안해.”
나의 사과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내가 옆에 있으면 상처를 주고 불안함만 생기게 할거야.”
나는 그녀를 위해 자재를 수업이 끝난 뒤에 바로 구매해 왔다.
“어제처럼 실망시킬 일이 굉장히 많을 거야. 나는 부족하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준비도 안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자재들을 정리하며 솔직한 나의 감정을 전달했다.
여전히 말이 없는 페퍼를 대신해 내가 계속해서 말을 했다.
“네가 나를 정말 많이 이해해 주려고 하고, 도와주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알아.”
그리고 그녀가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그녀의 표정을 통해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과분할 뿐인 너에게 실망만 안겨줄 뿐인 내가 너무 싫더라.”
나는 그녀 몰래 그녀를 위해 만들어온 장비 하나를 꺼냈다.
그녀라면 충분히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무언가가 되려고 했지만, 내가 없이도 잘 지내는 너를 보니, 내가 굳이 있어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해.”
그녀는 말없이 나의 말을 들어주었다.
“참, 바보같지? 번복하는 어리석은 내 자신이 말이야.”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저… 이런 나라도 너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
나는 손에 들린 기계를 페퍼에게 건넸다.
“이건… 너를 위해 만들어온 장비야. 네가 주문한 것과 별개로 말이야.”
내가 만들었던 장비를 받아들은 그녀는 장비를 이리저리 살폈다.
“사과의 의미로 주고싶어. 원래는 감사의 의미로 주고 싶었지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내 자신이 얼마나 못나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눈을 볼 수가 없던 것이었다.
“…고마워.”
자그마한 페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현실을 직시했다.
…그녀의 상기된 얼굴이 심장이 조여왔다.
이것은 죄책감인가?
아니면… 그녀를 아끼는 마음 일까?
역시, 사람에게 지나친 감정은 독이 된다.
“시계도 볼 수 있고, 중요한 쪽지 같은 것을 담을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녀에게 버튼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위급한 상황 때 쓰라고 만든 건데…. 이걸 누르면 기계의 압력이 앞으로 방출돼.”
눌러 보려는 페퍼의 손을 잡아 막은 뒤에, 검지 손가락을 세워 강조하며 말했다.
“절대로 위급할 때만 써야해. 그리고 사용 가능한 횟수는 두번이 최대니까 잘 생각해야 하고….”
바삐 설명을 하다 말을 멈추고 페퍼를 바라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의 흥분으로 인해, 우리의 거리는 매우 가까워져 있었다.
“아… 음… 크흠….”
‘왠지 모르게 기가 빨린다고 해야 하나?’
“아….”
그렇다.
의식된다.
이런 야심한 밤에 이 좁은 공간에 나와 그녀 둘뿐임을 뒤늦게 알아챘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침이 이렇게나 무거웠을 줄이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