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변신 (1)
넓이 2제곱 킬로미터. 거주 인구 150만명. 인구밀도 75만명/km^2 에 달하는 기형적인 공간.
그것이 이곳, 여의도 구룡성채에 대한 가장 간결한 설명이었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보이는 것은 외장 마감조차 되어있지 않은 노출 콘크리트 빌딩들 뿐. 네모 반듯한 모양의 창문과 복도가 끝없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리고 그 성채 안, 상업구역 건물들 중 한 곳.
해무는 양 옆으로 상점들이 늘어서있는 복도를 걸었다. 거주용으로 지었던 낡은 아파트를 상가로 재활용한 거리였다. 약속 장소는 국수집 '청홍'. 그곳에 도착한 해무는 문 대신 입구에 걸어놓은 노렌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요리점의 카운터 자리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해무와는 대조적으로, 그레이 수트를 입은 검은 머리의 소년이었다.
해무는 그 옆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 완탕면 한 그릇과 맥주 한 잔.
"일은 끝냈어?"
"응."
소년의 질문에 해무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고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는 안면이 있는 상대였으니까. 아니, 안면이 있다는 정도로는 부족할 것이다. 소년의 이름은 단하. 해무의 동료, 혹은 파트너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형은?"
"나도."
단하도 우육탕면을 주문하며 대답했다.
"지하조직 중 한 곳을 추적했는데, 그놈들 미쳤더군. 아편을 몰래 빼돌려서 유통하고 있었어. 어쩐지전매청 관리들이 미쳐 날뛰더라니."
"왜 하필 아편이래. 그런 구식 물건을."
"그야 나도 모르지. 어쨌든 올해도 구룡방이랑 갑종살수(甲種殺手) 계약 연장은 문제 없을 것 같아."
중국이 한강 이북까지 점령한 한반도에서, 동서남북 사방이 강물로 뒤덮힌 여의도는 말 그대로 무법지대였다. 정부조차 없는 야생의 도시. 그럼에도 실질적으로 도시를 통제하는 조직은 존재했다.
구룡방(九龍幇).
구룡방은 이 작은 도시의 모든 것을 거머쥐고 있었다. 정치와 경제, 사회, 치안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그리고 구룡방의 손아귀에 있는 것은 살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구룡방 산하 살수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아, 구룡방 직속이 아닌 일대일 계약을 맺고 활동하는 살수들이 바로 갑종살수였다. 말하자면, 해무와 단하는 구룡방과 전속 계약을 맺은 프리랜서 살수인 셈이었다.
"뭐 그딴걸 걱정해? 갑종계약 연장이라니, 당연히 해야지. 연장에 실패하는건 머저리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점주가 자신의 앞에 내려놓은 완탕면을 받아든 해무가 말했다. 하지만 단하의 생각은 달랐다.
"말 조심해. 이 바닥 수천 명 살수 중에 갑종 급은 열 명도 채 안돼. 그 위치에 있는걸 당연하게 생각하다가는 너야말로 오래 못 버티고 굴러 떨어지게 될껄? 수많은 살수들이 너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한다고."
"그 쓰레기같은 을종 놈들이 내 자리를 탐내건 말건 신경 안써. 하지만 나는 절대 강등당할 생각 없어. 내가 이 자리 하나 못 지킬 정도로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럼 쓸데없는 걱정 좀 그만둬. 을종 살수로 강등이라니, 내가 들은 것 중 가장 끔찍한 소리라고.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강등됐다가 복귀한 적이 없잖아. 한번 갑종에서 을종으로 강등되는건 '여의대로를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래. 틀린 소리는 아니지. 해무의 말에 마치 볼멘 소리처럼 중얼거린 단하는 막 나온 국수를 뜨려던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옆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해무에게 내밀었다.
"뭐야."
"선물. 스무번째 생일 축하한다."
껍데기가 파삭파삭하게 익은 교자를 젓가락으로 가르며단하가 말했다. 하지만 선물을 받아든 해무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딱히 별 의미도 없는걸."
"왜 의미가 있어? 20년이나 살아남았는데."
구룡성채에서 20년을 살아남았다. 충분히 축하할만한 일이었다. 특히나 하루하루를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살수들에게는.
"시계네."
포장을 북북 찢고 상자를 열어 안을 확인한 해무가 말했다.
"블랑팡? 이거 비싼거 아냐?"
"그냥저냥."
단하는 면을 후루룩 삼키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찌푸린 얼굴로 시계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해무가 입을 열었다.
"작년에 내가 형한테 무슨 선물 했었지?"
"나 스무살 생일 때?"
"응."
"기억 안나?"
"모르겠는데."
"한번 떠올려봐. 뭐 했을거 같애?"
"어..... 총?"
자신없는 목소리로 해무가 답했다. 단하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그럼 뭐 했는데?"
"아무것도."
"......."
해무는 입을다물었다. 그러고보니 자신은단하의 생일도 확실히 기억하지 못 했다. 보통 생일에 선물을 주는건 단하 쪽이었다. 괜스레 찔리는 기분이었다.
"억울하면 선물 다시 가져가던가."
"됐어.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리고 둘은 말없이 국수를 먹었다.
한쪽 눈으로 선물을 바라보며 해무는 생각했다.
20번째 생일이라......
"참, 그러고보니 오조가 죽었어."
"그래? 걔가 몇 살이었지?"
마지막으로 남은 우육탕의 면발을 후루룩 삼킨 단하가 물었다.
아마 스물 셋쯤 됐었을 것이다. 아니면 스물 넷?
하지만 이내 흥미를 잃어버렸다.
아무려면 어떤가. 죽은 나이쯤이야. 스물 셋이건, 스물 넷이건, 어차피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세 발의 총알이 몸뚱아리를 꿰뚫은 시점에서 나이는 더이상 늘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살수인해무와 단하 또한 언제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뭐 할꺼야?"
"글쎄."
식사를 마친 단하의 질문에 해무는 고민했다. 해무가 일을 끝마치고 하는 것은 보통 둘 중의 하나였다. 성당에 가거나, 혹은 창관에 가거나.
"동전 던지기라도 해 볼까."
해무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튕겨올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던 동전이 해무의 손 안을 향해 떨어졌다.
ㅇ ㅇ ㅇ
[상업구역 5동. 7층 복도.]
해당 구역의 5층 부터 8층 까지는 창관들이 몰려있는 곳이었다. 매춘은 구룡성채에서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는 산업 분야 중 하나였다. 그 사실을 대변하듯, 복도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해무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걸었다.
홍등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복도에는 방문 입구마다 걸어놓은 등이 붉은 조명을 뿌리고 있었다. 마치 정육점에서 고기를 고르는 손님들 처럼, 사람들은 가게의 여자들을 꼼꼼히 살피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무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에 한 가게를 향해 곧바로 직행했다.
"어, 해무다."
해무가 창관 '야화' 안으로 들어서자, 여자들이 그의 방문이 익숙한 듯 반겼다.
"안녕안녕?"
"오랜만이야~"
자신을 향한 인사 세례에 해무는 정신을 차리지 못 할 정도였다. 훠이훠이 손을 내젓자, 그제서야 여자들은 해무에게 달라붙는걸 그만두었다.
해무는 가게를 힐끗 둘러보았다. 마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맞아주는 여자들도 생각보다는 많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 손님을 받고 있을 것이리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일로 왔어?"
"생각좀 하고 다녀라. 너는 남자가 창관에 왜 왔을거 같냐?"
메이린의 질문에 해무가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메이린은 기분나쁜 기색 없이 히죽 하고 웃으며 재차 물었다.
"으으응, 뭘 하러 온건지는 알지. 내 말은, 뭐 하다 온건지 궁금해서."
"뭐 하다 왔냐니?"
"그냥 심심해서 놀러온건지, 아니면 '일'을 끝내서 온 건지?"
"됐어. 신경 꺼."
해무의 대답에, 여자들이 뭐가 웃긴지 깔깔 웃었다.
"근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오늘은 독방이 없는데."
"뭐?"
해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좁디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있는 구룡성채에서, 공간은 곧돈이었고 권력이었다. 계급에 따라 누리는 공간의 크기가 갈리는 곳이 바로 성채였다.
낮은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몸 하나 뉘일 공간조차 부족했다. 반면, 구룡방의 상급 관리같은 지배계층은 과할 정도로 넓은 공간을 누렸다.
그러한 법칙은 창관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독방, 2인실, 최대 6인실까지. 지불할 수 있는 비용의 능력에 따라 다른 크기의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해무는 독방 손님에 속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손님이 유난히 붐비는 날이면, 아무리 해무라 하더라도 손 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혼잡으로 계획이 틀어지자, 해무는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 기다리면 자리가 나지 않을까?"
"으응~ 그래도 되긴 하는데, 다 방금 찼거든.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해무는 잠시 고민했다. 다른 가게로 갈까. 창관이 여기만 있는건 아니다. 이곳이 가장 익숙한 곳이긴 했지만 다른 가게도 많았으니까. 그저 적당히 둘러보다 맘에 드는 곳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껏 찾아왔는데 다시 나가는 것도 귀찮았다. 나가면 또다시 수많은 인파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녀야 한다는 점도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곳으로 간다 해도 독방이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금요일 밤이었다. 어디나 붐빌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무는 2인실을 고르는 수 밖에 없었다.
메이린의 안내를 따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안에는 진한 정사(情事)의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한쪽 침대에서는 알몸의 뚱뚱한 남자가 여자를 밑에 깔아둔 채, 숨을 헐떡이며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삐걱이는 침대 소리와 억누른 신음이 이어졌다. 해무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미 몇차례 사정한 남자의 성기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계속해서 여자를 향해 허리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었다.
"적당히 하지?"
찬물처럼 분위기를 깨트리는 해무의 나지막한 말에, 남자의 허리가 멈췄다.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은 남자는 투실투실한 턱살까지 분노로 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하지만 해무의 행색을 보고 흠칫하며 물러섰다. 온통 검정 일색의 정장 차림. 그만큼 해무의 모습은 누가 봐도 살수로 보였다.
주섬주섬옷을 챙겨든 남자가 황급히 방을 떠나자 해무와 메이린, 그리고 남자 밑에 깔려있던 수아, 셋 만이 남았다. 수아는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신 채, 피로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 있어. 침대 두개분 지불할 테니까."
"정말?"
해무의 말에 수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그 맞은편, 깨끗이 정리되어있는 새 침대에 걸터앉은 해무를 따라 메이린도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해무의 옷을 벗겼다.
먼저 자켓을 벗기고, 넥타이를 풀고, 셔츠의 단추도 하나씩 풀었다. 그러자 해무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어? 피다."
메이린의 말대로, 해무의 어깨에는 희미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작은 주삿바늘의 흔적과 함께. 메이린은 티슈를 뽑아 조심스레 해무의 상처를 닦았다.
"됐어, 신경쓰지 마."
"하지만 피가 났잖아."
"일하다 보면 이정도야 매번 흘리는걸."
"나도 그런데."
메이린이 킥킥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일 끝내고 온거 맞구나?"
"맘대로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해무는 메이린을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쉬자, 여자의 체취가 한가득 느껴졌다.
눈을 감은 채 해무의 품 안에 안겨있던 메이린이 문득 생각난듯 말했다.
"몸이 뜨거워."
"그런가?"
해무가 반문했다. 하지만 해무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이상하게 열기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살인의 흥분을 느낄 때는 지났을텐데.
해무가 이 일을 업으로 삼은 것도 6년 째. 첫 살인의 흥분은 몸이 와들와들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다시 느끼기에, 해무는 이미 충분히 원숙한 수준의 살수였다
"그럼 둘이서 알아서 잘 놀다 가. 나는 좀 잘께."
수아가 누운 채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해무와 메이린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둘은 이미 한창 뒤엉켜 서로의 몸을 탐하는 중이었고, 해무가 메이린의 슬립을 벗겨내고,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얇은 천 안으로 손을 밀어넣자, 잠시 후 소녀의 달콤한 교성이 방 안을 채웠다.
모두에게 언제나와 같은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