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변신 (2)
쾅쾅쾅.
잠에서 깼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아니, 그 반대인가. 머리가 아파서 잠에서 깬 것일까.
실눈을 뜨자 자신의 방이었다. 거주구역 3동 2006호. 그것이 해무의 유일한 다섯 평짜리 안식처였다.
해무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제 어땠더라?
단하와 청홍에서 국수를 먹고, 창관 야화에 갔다. 그리고 메이린을 데리고 나와서 또 술을 마시러 갔다. 얼마나 마신거지? 더 기억을 떠올리려 하자 두통이 심해졌다.
쾅쾅쾅
숙취의 정도를봤을때 이건 틀림없이 폭탄주다. 맥주나 백주만 먹는 거라면 괜찮았다. 하지만 맥주에 고도수의 다른 술이 섞이기 시작하면이런꼴이 나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지독한 숙취를 조금이나마 줄여보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써 봤다. 우유를 마시거나, 생 파를 씹거나, 아니면 코로 식촛물을 삼키거나. 하지만 전부 쓸모 없었다. 해무가 알기로 유일하게 효과가 있는 방법은, 물을 잔뜩 마시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 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해무의 정신은 늪으로 가라앉듯 다시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쾅쾅쾅!
문턱이 덜그럭거렸다. 해무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쾅쾅거리는 소리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해무는 전라 차림으로 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인 채 문으로 향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현관문에 뚫린 구멍으로 바깥을 확인했다. 왼쪽 눈에 세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두 명은 검은 양복 차림. 그리고 가운데의 한 명은 중국식 관복 차림이었다.
가운데 남자의 가슴팍에 그려진 뱀 문양을 확인한 해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금장치를 풀었다.
커다란 황동색 자물쇠 하나.
그 위에 은색 자물쇠 하나.
마지막으로 그 위에 길쭉한 안전 고리까지.
총 세개를 풀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방(幇)에서 왔다."
문 앞에 서 있는 관복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그렇겠지.
이른 아침부터 을급 살수 두 명을 데리고, 치렁치렁한 관복 차림을 한 채 이곳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릴 무뢰한이 구룡방 살수회 관리들 밖에 더 있겠는가.
"그래서, 무슨일로?"
"어제 일을 하나 끝냈더군."
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가 말하는 살수의 일이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목표의 숨통을 끊는 것.
그리고 해무는 바로 어제마무리했던 일을 떠올렸다. 총 네 명의 숨통을 끊었다.
하지만 관리가 직접 찾아온 이유는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명령을 따르는 과정에서 문제될 내용은 없었다. 전부 깔끔하고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놨으니까.
그렇다면 임무 때문에 트집을 잡으러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터. 그리고 해무의예상대로 관리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일처리를 한 곳에서 살수가 하나 죽었다."
살수가 죽었다고? 해무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두통과 현기증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기억을 떠올렸다.
"오조 말이지."
"이름 같은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건 살수 하나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 또한 방의 명을 수행하던 중이었다는 거다. 바로 너처럼."
해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조도, 자신도, 독립적으로 일한다. 각자 방과 계약한 관계이다. 자신와 단하가 서로를 파트너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오직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비공식적 협력 관계일 뿐. 살수회 차원의 정식 관계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오조의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 오조와 자신은 공동임무를 수행하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각자의 업(業)을 수행하던 중 우연히 마주친 것일 뿐이었다.
별개의 명령을 받은 살수가 현장에서 마주치는 것은 드물게 생기는 일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암살 목표가 우연히 겹치거나 했을 때 말이다. 원래 방의 목표가 되는 위험분자들은 이곳저곳에 발을 걸치고 동시에 여러가지 일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관리의 이야기가 가리키는방향은 그와는 달랐다.
"그리고 그는 업을 다하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것이 그 자신의 부족함 탓이건,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이건, 그 사실은 중요치 않다."
그리고 관리는 소매 안에서 대나무 통을 꺼내들었다.
"방이 너희 살수들에게 내리는 명, 그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네가 자신의 업을 완수한 것처럼, 오조에게 주어졌던 업 또한 완수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하자, 아침을 방해받은 짜증을 담고 있던 해무의 표정은 이제 무표정한 차가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관리에게 살수의 기분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관리는 대나무 통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서 칙서를 꺼내들었다. 구룡방이 살수들에게 업을 내릴 때 전하는 명령서였다.
그것을 펼쳐 해무에게 내밀며 관리가 말했다.
"상황이 이러한 바, 응당 네가 그의 업을 승계해야 할 것이다."
"개소리."
개소리였다.
"대체 내가 왜? 나는 아무런 책임도 잘못도 없어. 나는 내 임무를 완수했다고! 네놈들에게 나머지 숙제를 받을 입장이 아니야."
"정말 자네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로군. 네놈이 조금 더 빨리 일을 처리했으면 그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이런 젠장, 그게 말이나되는 소리야? 거기서 오조가 뭘 했던건지 나는 몰라. 그저 우연일 뿐이야.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내가 그자식의 일을방해한 것도 아니라고!"
"이봐, 살수. 내가 지금 너를 엿먹이고 싶어서 이러는 것 같나?"
관리가 해무를 쏘아보며 말했다.
아닐 것이다. 해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살수회 관리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살수들이 사고치지 않고 일이나 잘 처리하는 것. 그것만 지킨다면 살수들이 평소에 창관에서 뒹굴던, 아니면 만취해서 술주정을 부리던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건 단 하나다. 방의 명이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이행되는 것. 그것이 또한 성채의 주인이신 방주께 봉사하는 유일한 길이다."
해무는 더이상의 반론을 포기했다. 마음 속에는 부당한 취급에 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더이상 얘기해봤자 의미는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결정을 내려놓고 방문한다.
"방의 지침, 다음과 같다. 갑종살수 오조의 죽음은 현재 시점에서 불가피한 일. 허나 갑종살수 해무의 행업(行業)이 신속했다면 당히 막을 수 있었던 일. 이에, 갑종살수 오조의 업을 갑종살수해무에게 승계한다."
명령서를 다시 말아 통 안에 집어넣은 관리는 그것을 해무에게 내밀었다.
"해당 업의 기한은 일주일 후까지. 그 업을 필히 시간에맞춰 완수할 수 있기를. 그렇지 않다면, 방은 네 제사를 지내도록 할 것이다."
해무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낚아채듯 명령서가 담긴 통을 받아들었다.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관리는 말없이 떠났다.
해무는 쾅 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대로 축 늘어져 주저앉았다.
구룡방의 방문.
해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쾌하게 아침을 시작하는방법이었다.
ㅇ ㅇ ㅇ
피와 콘크리트 먼지, 화약 냄새가 하루라도 멎을 날이 없는 곳이 성채였으나, 그 또한 사람 사는 곳이었다. 총 인구의 80퍼센트가범죄자고 나머지 20퍼센트도 곧 범죄자가 될 예정인 곳.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누군가는 요리를 하고, 누군가는 세탁을 했고, 누군가는 청소를 했다.
그리고 이 에그타르트 또한 누군가가 노동에 매진한 결과일 것이다.
상업구역 2동. 상점이 몰려있는 시장 한 구석.
시장은 생선을 해체하고, 고기를 썰고, 채소를 나르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찻집에서 해무는 에그타르트와 밀크티로 늦은 아침식사를 때우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놈들.......'
갑작스런 구룡방 관리의 방문은 하루의 시작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황당한 요구까지 강요당한 신세였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불쾌해도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아무리 대접받는 살수라 하더라도 방의 지시에 항명했다가 벌어질 일은 오직 하나였다.
첫 번째로는 계약이 끊기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다른 살수에게 추격당하고 사냥당할 것이다.
길거리에 널린 수준낮은 살수들의 추격이라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방과의 계약을 해지 당한다면, 자신을 쫒을 살수들은 분명 다른 갑종 놈들이 될 것이 틀림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직 죽음 뿐이다. 때문에 해무에게 관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임무를 당장 수행하기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변명같은 소리였지만 정신이 여전히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멍했다. 약간 열도 있는 것 같았고.
어제 체력과 정신력을 너무 많이 소비한 모양이다.
어쩌면 정력도.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차피 오조의 업을 마저 처리하기 전에 들릴 곳이 있었으니까.
해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남은 에그타르트 한 개를 통째로 입에 밀어넣었다.
진한 밀크티가 몸에 남아있는 피곤을 씻어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ㅇ ㅇ ㅇ
[기타구역 1동, 204호.]
복도를 따라 늘어서있는 창문 밖으로 색색깔의 유리병과 페트병 쓰레기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걸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바닥에 붉고 푸른 그림자를 만들었다. 마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처럼.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잰 발걸음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지르는 새된 웃음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해무는 쓰레기로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 복도를 지나 굳게 닫혀있는 나무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열렸다.
"해무."
"테레사."
수녀가 해무를 맞았다. 은은한 미소는 입가와 뺨에 잔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반가움과 곤혹스러움이 뒤섞인듯한 미소였다.
"들어오렴."
테레사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이 높은 홀이 나타났다. 한때 연회장으로 쓰였을 법한 장소였다.
홀 한 가운데는 낡은 벤치들이 삐뚤빼뚤 놓여있었다. 그리고 정면의 벽에는 허름한 나무 십자가가 매달려 있었다.
해무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여덟 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자신이 살수가 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장소. 바뀐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의자와 제대(祭臺)가 조금 낡아 허름해졌을 뿐.
"구룡방의 살수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까?"
"이유가 없으면 못 오나?"
과거의 기억에 빠져있던 해무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까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고향집이잖아?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찾아올 수 있어."
"고향집이라....... 스스로 이곳을 버리고 떠난게 아니었니? 육 년 전에 말이야. 아직도 고향으로 생각하는 줄은 몰랐구나."
"서운한 소리를. 내가 언제 버렸다고 그래? 그냥 집을 나온거지."
까칠했던 목소리에 변명의 기색이 약간 섞여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찾아오잖아."
사실은 어제 오려고 했다. 다만, 동전 던지기 결과 때문에 창관에순서가 밀렸을 뿐.
그리고 해무는 손에 들고 있던 갈색 봉투를 내밀었다. 온기가 남아있는 봉투에서는 진하고 달콤한 버터 냄새가 풍겨왔다. 안에는 에그타르트가 가득 들어있었다.
"고맙구나. 아이들이 좋아하겠어. 하지만 앞으로는 돈으로 주면 더 도움이 될 것 같구나."
"이것도 돈 주고 산거야."
해무는 낡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품 안에서 수첩을 꺼내 펼쳤다.
페이지에는 연필로 글씨가 빼곡이 적혀있었다. 일시, 장소, 처리 대상. 말하자면 해무의 업무일지였다.
"그럼 성사(聖事)를 시작하자고."
일을 끝낸해무의 루틴 중 하나. 바로 성당을 방문하여 업에 대한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었다.
한때는 성당에도 고해소가 있었지만 한참 전에 부서졌다. 어차피 상관은 없을 것이다.지금 이 홀에 있는 것은 해무와 테레사가 전부였으니.
해무는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읽었다.
"우선 한달 전 꺼부터 시작하지. 이건 무단으로 러시아에서 화기를 수입한 놈들을 처리했던 건이네. 다섯 명 정도였어. 그리고 이건 구룡방에 잠입을 시도했던 놈들이고. 정체는 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게 가장 최근 일. 어제 처리한 네 명이야. 얘네도 뭔지 잘 모르겠네. 밀매꾼들 같던데."
그렇게 제멋대로 성사를 시작한 해무의 맞은 편에 앉은 테레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정작 성사를 주관해야 하는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무는 그런 테레사는 신경쓰지 않은 채, 수첩에 적인 내용을 줄줄 읊고는 그 페이지를 부욱 찢었다.
"다 봤지?"
해무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찢겨진 페이지에 불을 붙였다. 종이는 순식간에 불에 타서 완전히 재가 되어 흩날렸다.
"자, 성사 끝! 그럼 나 죽으면 천국 보내줘야 한다? 꼭이야."
시원스레 할 말을 마친 해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무."
성당을 떠나려는 해무를 테레사가 불러세웠다.
"왜?"
"너는 천국에 못 갈 거란다."
해무의 눈가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내가...... 천국에 못 갈 거라고?"
"그래."
"어째서지?"
해무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다. 흥분한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신자야. 회개했어. 성사도 했어."
한층 커진 목소리가 홀의 높은 천장을 울렸다.
"내가 죽으면 너와 빌어먹을 네 신은 나를 약속한 땅으로 보내줘야 할 거야. 그게 니가 할 일이라고."
"해무. 마리아 수녀님을 기억하렴."
그 말에 떨리던 해무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해무가 이곳의 고아원에 몸을 의탁하던 시절에 성당의 책임자였던 수녀의 이름.
자신의 어린시절 중 3분의 1은 마리아 수녀와 지금의 테레사 수녀가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이나 죽이고 다니라고 마리아 수녀님이 너를 키운게아니란다."
"좆 까."
머리에 열이 올랐다.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를 죽일 듯한 얼굴이었다. 손은 자신의 리볼버를 꽉 움켜쥐고 있는 채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레사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색이 안 좋구나. 몸이 안좋으면 병원에 가 보렴. 여기서치료할 수 있는건 메마른 영혼들 뿐이니."
그래. 메마른 영혼들 말이지.
현기증을 느끼며 해무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 멈춰서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이어 두꺼운 봉투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봉투가 터지며 가득 들어있던 오만원 짜리 지폐가 성당에 휘날렸다.
"돈 냈다."
그 말을 남기고 해무는 성당을 떠났다. 등 뒤에서 성당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솟아 오르는 열과 밀려오는 현기증을 느끼며 해무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씹어삼키듯 다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천국에 갈 것이다.
고통은 이승에서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