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변신 (6)
여의도는 작은 섬이었다.
과거에는 남서쪽의 샛강이 모래로 덮혀있었다. 때문에 지금보다는 조금 더 넓었다.
하지만 중국이 한때 북한이었던 땅을 차지하고, 거기에 온갖 지리적, 정치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모래로 덮였던 땅이 다시 수몰되고, 폭 1km 정도의 샛강이 열리면서 완전히 고립된 섬으로 거듭났다.
중국도 남한도 아닌, 한강 가운데에 붕 떠있는 섬.
때문에 행정적으로도 여의도는 중국이나 남한이 소유한 땅이 아니었고, 그것이 구룡방이 여의도에서 융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현재는 그 작은 섬 마저도 여의대로에 의해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여의대로의 동남쪽이며 동시에 구룡성채가 위치한 A지구. 그리고 여의도의 북서쪽인 B지구로.
여의대로를 따라서는 이중 철조망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군부대의 것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해무와 단하는 그 철조망 안쪽으로 나 있는 도랑을 따라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두 소년의 구두에 진흙과 흙탕물이 튀었다.
"빌어먹을. 건너기 싫은데."
해무의 뒤를 따라 걷던 단하가 투덜거렸다.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성채의 주민에게 있어 대로를 건넌다는 말은 '돌이킬 수 없는 행동' 과 같은 뜻이었다.
대로를 건넌다는 말이 그런 뜻을 갖게 된 이유는 명확했다.
추방.
범죄자들의소굴인 성채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내려지는, 살인과 함께 가장 극단에 있는 판결. 그것이 바로 B지구로의 추방이었다.
구룡성채가 아무리 현세의 지옥이라 해도 동시에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터전에서 추방된다는 것은 여전히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구룡성채의 주민들 중 하나인 단하에게 있어서도, 자진해서 여의대로를 건넌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너무 성급한거 아냐? 명령 마감일은 다음주 까지라며."
"형은 날짜도 제대로 기억 못 해? 다음주가 살수회합 날이잖아."
"......그렇네."
해무의 핀잔에 단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회합(殺手會合).
살수회 관리와 소속 살수들이 모이는 자리.
일년에 비정기적으로 두세차례 개최되며, 동시에 갑종 살수들의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 중 하나였다.
을급 살수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행사가 아니다. 애초에 살수회합이라는게 제멋대로 굴어서 한번 모이기도 힘든 계약살수, 즉 콧대높은 갑종 살수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 위한 행사였다.
그리고 회합에서는 급수산정이나 계약연장같은 중요한 내용을 공지하기도 했다.
때문에 B지구 침투를 연기하자고 주장하려던 단하도 살수회합이라는 말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 밖에는 없었다.
살수회합 때문에 자신의 말이 간단하게 논파되자 단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일 분쯤 말없이 해무의 뒤를 따라 걷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오조의 주머니에서 나온 열쇠가 확실한 물건은 맞아? 거기에 적힌 주소만 보고 갑자기 B지구로 간다는건 너무 황당한 얘기잖아. 좀 더 확실한 실마리를 찾는게 먼거 아닐까?"
"다른 실마리 있으면 줘. 그거 따라갈게."
"......."
단하에게 그런 실마리가 있을리 없었다. 그리고 또다른 실마리를 찾을때 까지 시간이 기다려줄리도 없었다.
이번에도 간단하게 논파당했다.
단하의 머릿속이 다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파트너라지만 요구사항이 너무 큰거 아니야? 니가 지금까지 나를 도와줬던건 전부 성채 안에서의 일이었잖아."
"그래도 도와줘야지. 약속이잖아."
"수지 타산이 안 맞아. 너는 성채 안의 작전만 도와줬는데 나보고 B지구에 같이 가달라는 요구는 불합리해."
"그럼 돌아가던가."
이번에는 논파당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순간 단하는 기뻤다. 하지만 이내 다시 시무룩해졌다.
자신의 논리로 해무를 논파한다고 해서 지금 진행중인 B지구로의 진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무만 남겨둔 채 혼자 도망가는 것도 싫었다.
파트너라는 관계.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라, 해무와 단하가 스스로 원해서 만든 관계였다.
서로 도와준 일을 계산해서 수지타산을 따지는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계를 B지구에 가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깨고싶지는 않았다.
철조망을 따라 계속 이동하자, 눈 앞에 허름한 간이 오두막 같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국경 사이의 검문소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 앞에는 세 인영(人影)이 서 있었다.
공안들이었다.
공안들은 오랜만의 통행인을 확인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사람이 이곳을 오가는 경우는 극도로 드물었다. 때문에 상시 검문 인원을 배치하지는 않았다.
저들은 해무와 단하가 통행증을 신청해 두었기에 나와있는 것이었다.
세 공안들은 해무와 단하가 가까이 다가올 때 까지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껌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둘이 눈 앞까지 다가와 서자, 턱짓으로 지시했다.
해무와 단하는 품 안에서 신분증과 통행증을 꺼냈다. 그것을 받아든 공안이 두소년의 얼굴과 신분증을 번갈아서 확인했다. 그리고는 다시 돌려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한명이 자물쇠를 풀고 철조망 문을 열었다.
세 공안은 그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다. 통과 허가만 받으면 그만이다.
해무와 단하는 철조망 문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뻥 뚤린 여의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강풍이 해무와 단하를 덮쳤다.
옷깃이 제멋대로 요란하게 펄럭였다.
A지구와 B지구라는, 빌딩으로 가득찬 거대한 거주구. 그 사이로 뚫린 유일한 바람길이었던 탓에 여의대로에는 언제나 강풍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해무는 고개를 돌려 길의 끝을 바라보았다. 도로에는 녹슬어 삭아버린 차들이 듬성듬성 세워져 있었다. 그 끝에는 무너진 철골로 막힌 마포대교가 보였다.
해무와 통과한 검문소가 중국과 가장 가까운 최북단의 검문소였기에 마포대교까지도 손에 잡힐 정도로 보이는 것이었다.
이만큼 넓은 평지를 본게 얼마만이더라.
해무는 잠시 감상에 빠져 풍경을 바라보았다.
A지구 안쪽, 구룡성채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모든 공간이 꾸역꾸역 건물을 올려 빈 땅이라고는 한 톨도 남지 않은 구룡성채에서 이 정도로 넓은 공간을 마주할 일은 없었다.
"그만 가지."
단하의 재촉에 해무는 감상을 지워냈다. 그리고 목걸이에 걸린 십자가를 꺼내 입을 맞추고 대로를 건넜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세 공안이 자신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저들 외에도 숨어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은 많을 것이다. 구룡성채에서도, 어쩌면 B지구 쪽에서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한 흥밋거리일 것이다. 누군가가 이 길을 가로지르는건 드문 일이니까.
여의대로를 가로질러 B지구쪽 철조망에 도착하자 마자, 해무와 단하는 뜯어진 철조망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해무와 단하는 총을 꺼내들고 달려서 건물에 몸을 은폐했다.
구룡성채 쪽에는 검문소가 있었지만 B지구에는 그런게 없었다. 구룡성채가 범죄자들로 가득한 끓어오르는 냄비 같은 곳이라면, B지구는 말 그대로 폐허였다.
오히려 거리와 건물들은 더 깨끗했다. 바람에 풍화된 흔적만이 군데군데 조금씩 있었을 뿐.
극악한 인구밀도로 사람이 꽉꽉 들어찬 구룡성채와는 다르게, B지구는 사람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가용용지에 콘크리트 건물이꽉꽉 들어선 성채와 달리, B지구에서는 아무 이유없이 텅 빈 공터도 군데군데 보였다.
때문에 해무와 단하는 정말 여기가 여의도가 맞는지 이질감조차 느낄 정도였다.
"위치가 어디랬지?"
"3동 120호."
둘은 계속해서 몸을 은폐한 채 낡은 건물들 사이를 이동했다. 콘크리트가 아니라 대리석과 유리로 쌓아올린 건물이었다. 양식으로 봤을때 지금보다 한참 옛날에 지어진 건물 같았다.
3동은 그리 멀지 않았다. 북쪽 한강변과 접한 위치에 있는 건물이었다.
'우리은행' 이라는 푸른색 간판이 매달려 있는 건물을 지났다. '여의도 호텔' 이라고 쓰여있는 건물도 지났다. 당연히 모두 폐허가 된 채였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자 한강 북쪽과 무너진 서강대교, 그리고 저 멀리 앞에서는 돔 천장의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국회의사당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둘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었다. 국회의사당은 B지구 제 1동 건물이다. 3동은 그보다는 가까웠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한 해무와 단하는 예상치 건물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B지구 제 3동.
그 위치에 우뚝 서 있는 건물은 둘의 상상과는 매우 달랐다.
거대한 크기.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외벽.
성채에서 보기 드문 원통형의 형태.
간판에 쓰여있는 글씨는 다음과 같았다.
여의복음교회.
"설마 저거야?"
단하의 말에 해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더럽게 크네."
단하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의말대로 건물은 거대했다. 아파트만큼 높지는 않았지만 부지 면적은 아파트 몇 개 동을 합친 수준이었다.
정문쪽에는 커다란 공터가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오벨리스크 모양의 흰색 게이트가 우뚝 서 있었다. 게이트 사이에는 철골로 만들어둔 거대한 십자가가 반쯤 기울어진 채로 매달려 있었다.
"쉽지 않겠는걸."
예상치 못한 현장의 모습을 마주한 해무가 말했다.
저런 건물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해무와 단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단순히 장소가 크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변칙적인 지형 속에서 일을 하는 것은 수많은 변수를 만들어낸다. 규격화된 통로와 계단이 가로세로 교차하는 복도식 아파트 건물에서는 지형에 의한 변수가 생길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저 교회처럼 흔치 않은 형태의 건물은 변수를 만들어낼 여지가 충분했고, 그 변수는 해무와 단하에게 위험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동 경로, 진입 및 탈출 동선을 포함해서 고려할 것이 많았다. 적들이 은폐 잠입할 공간도 차고 넘칠 것이다. 그리고 그 리스크는 고스란히 해무와 단하가 떠안아야 할 것들이었다.
"형은 건물 밖에서 대기해줘."
"혼자 들어간다고?"
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하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해무의 지시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둘이 함께 진입하는게 우선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밖에서 작전 공간 전체를 조감(鳥瞰)하며 해무를 지원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그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것은 단하 뿐이었다.
"이걸로 연락해."
해무는 단하에게 통신기를 건넸다. 보청기같은 생김새. 귀에 꽂는 소형 근거리 통신기였다.
"여기서 다시 만나."
단하의 말에 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폐를 유지한 채 움직이며, 해무는 교회의 뒷문을 통해 안쪽으로 진입했다.
ㅇ ㅇ ㅇ
B지구 3동. 한때는 여의복음교회라고 불리던 건물.
해무는 그안을 홀로 걸었다. 온 몸의 촉각을 곤두세운 채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억누른 구두 소리가 높은 복도 천장에 메아리쳤다.
외관이 그러하듯 건물의 내부 또한 구룡성채의 건물들과는 크게 달랐다. 벽면은 온통 곡면이었다. 효율적으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제 1목표로 하는 구룡성채의 대명제에 반하는 형태였다.
그 말은, 애초에 이곳이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뜻했다.
교회라는 이름은 난생 처름 들어보는 해무였지만, 모습을 보아하니 성당과 비슷한 곳인 것 같았다. 구룡성채 안의 성당에 비한다면 수십배나 큰 공간이긴 했지만.
허나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호화로운 모습이었을 교회는, 다른 수많은 B지구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폐허가 되어있었다.
유리창은 깨져있었고, 복도와 벽에 붙어있는 나무 패널들은 군데군데 뜯겨져 있었다. 불을 피워 벽과 천장에 검게 그을린 흔적들을 보아하니, 누군가가 패널들을 뜯어내서 땔감으로 쓴 모양이었다.
그리고 해무는 생각했다.
기묘한 공간이다.
단순히 교회만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B지구 전체가 기묘한 공간이다.
같은 여의도지만 한쪽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고, 다른 한 쪽은 텅 비어있다.이 불균형의 근원을 해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동시에 해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B지구에 찾아온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과거에도 한번 여의대로를 넘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 교회 건물은 아니었지만, 다른 장소에 찾아갔었다.
하지만 대체 어떤 이유에서였더라?
여의대로를 건널 정도의 일이라면 분명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었을 법 한데,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살 때였는지. 어떤 목적이었는지. 누구랑 함께 왔는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마치 기억이라는 그림을 검은 먹물로 덧씌우기라도 한 것처럼.
옛날 일을 떠올리려하다보니 또다시 이마에 열이 올랐다. 이리나가 처방해준 해열제는 전혀 듣지 않았다.
이 일만 끝내면 휴식이라도 가져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걸었다. 벽을 따라 늘어서있는 문 위에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118호.
119호.
그리고 120호.
이번 여행의 종착역이었다.
해무는 리볼버의 실린더를 열어 안쪽을 확인했다. 황동색 .44 매그넘 탄환 6발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서 오조의 열쇠를 꺼내 문고리의 잠금쇠에넣었다. 조심스레 돌리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 장치가 풀렸다.
해무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10평 정도 되는 공간에는 부서진 예배용 벤치가 한쪽 구석에 쌓여 있었다. 그 외에는 찍찍거리며 몸을 숨기는 쥐새끼들이 전부였다.
해무는 총을 다시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밀매꾼들이나 지하조직의것으로 보이는 무기나 돈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허탕친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쏠까?
잠시 고민한 해무는 그 선택지를 부정했다.
아니야, 지금은 방아쇠를 당길 때가 아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조금 전 해무가 지나쳐온 문을 세 명의 남자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
"뭐냐, 너."
셋 중 가운데 서 있던 항공 점퍼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긴장과 흥분으로 피부가 따끔거렸다. 하지만 드러내서는 안된다.
해무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쪽이 날 부른거 아닌가?"
되려 질문하는 해무의 모습에 세 남자는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헛소리지?"
"배달 건이 있다고 들어서 왔는데."
"그런 연락 한 적 없다."
대답을 들은 해무는 곧바로 총을 꺼내들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 난분명히 연락 받고 왔어."
그 모습에 뒤쪽의 두 남자도 허둥지둥 총을 꺼내들어 해무를 향해 겨누었다.
잠시 동안의 대치. 그 침묵을 깨고 항공점퍼가 말했다.
"어디로 뭘 배달하려고 온 거냐."
"기타구역. 뭘 배달시킬건지는 네 놈들이 알겠지."
"기타구역? A지구에 있는 곳을 말하는건가? 아니면 B지구?
"질문이 멍청하군. 나한테 내는 배달비가 꽤 되는 걸로 아는데. 그 돈 내고 B지구 내 배달을 요청할 거라면 나야 고맙지."
빈정거리는 태도로 해무가 말했다. 하지만 입술은 바싹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짧은 침묵.
그 침묵을 깬 것은 남자가 바닥에 가래침을 뱉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A지구. A지구로 보내는게 맞다. 당연히 그래야지. 네놈 배달비로 얼마를 내는데."
그 말에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둘도 낄낄 웃으며 총을 거두었다. 그제서야 해무도 총을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두 남자가 수레에 담긴 박스 하나를 가져왔다. 크지는 않았다. 충분히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깨질 수도 있으니까 조심히 배달해라."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박스를 열어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보였다. 그리고 물건을 본 순간 하마터면 해무는 평정을 깨뜨릴 뻔 했다.
남자가 들고있는 유리 앰플에는 푸른 액체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깨달았다.
이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 확인한 배달품의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오조의 업과 푸른 약물. 이 두 가지는 별개의 일이 아니었다. 오조가 쫒고 있던 밀수꾼들이 다루는 물건은 마약도, 금괴도, 무기도 아니었다. 바로 저 푸른 약물이었다.
해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생각했다.
오히려 잘 됐다. 자신의 몸에 주입된 정체불명의 약품. 그 샘플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오조의 업까지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해무는 남자로부터 박스를 넘겨받았다. 이제 남은 일은 이걸 들고 구룡성채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잠깐."
방을 나가려는 해무를 남자가 불렀다.
해무는 우뚝 멈춰섰다. 뺨을 따라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너, 배달비를 어떻게 받을 건지 얘기를 안 했어. 설마 공짜로 배달해 줄 셈인가?"
"......수령자한테 받지. 그쪽에대금은 전달해 둘 수 있겠지?"
"어려울 것 없지."
남자가 씩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 해무가 그제서야 방을 나서려던 순간, 또다시 누군가가 앞을 막아섰다. 새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었다.
벙거지 모자를 쓴 남자. 제 3의 인물이었다.
그가 잠시 눈치를 살핀 후에 말했다.
"배달할 물건이 있다고 들어서 왔는데......."
그 말에 해무, 그리고 세 명의 의뢰자들의 얼굴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그리고 곧이어 의뢰자들의 리더인 항공점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우리가 연락했던 배달꾼이 아니라ㅡ"
해무가 방아쇠를 당겼다.
세 발의 연사가 세 명의 의뢰인을 쓰러뜨렸다. 피와 뇌수가 벽을 더럽혔다. 새로 나타난 배달부는 갑작스런 총격전에 경직되어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해무는 마저 남은 한 발을 그 배달부의 머리에 쐈다.
그리고 달렸다. 총성은 결코 작지 않았다. 만약 이곳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분명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그 전에 탈출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코너를 지나던 해무의 몸이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이런 씨발!"
연사된 5.56mm 탄환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복도에는 끝에는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해무를 향해 발포하고 있었다.
허리쪽에 뜨끔한 통증이 일었다.
옆구리에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직접 맞은 것은 아니다. 도탄(跳彈)이었다.
하지만 무시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통증은 둘째쳐도 출혈이 이어지고 있었다.
교전은 불가. 피하자.
찰나의 순간에 결론을 내린 해무는 곧바로 돌아왔던 방향을 향해 다시 몸을 틀었다. 단하와 다시 접선하기로 했던 장소는 교회 후문. 하지만 탈출 방향을 바꿔서라도 교회를 빠져나가는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정문을 향해 달리려던 순간,
두근.
심장이 멈추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흉통(胸痛).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굳어서게 만드는 통증이 해무의 가슴을 짓눌렀다.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시야가 암전했다.
뒤이어 자신의 몸이 복도 위로 쓰러지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젠장, 거의다 끝났는데......."
그리고 해무의 의식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깊고 검은 물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