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화 〉살수회합 (2) (10/82)



〈 10화 〉살수회합 (2)

해무는눈을 떴다. 몸이 이상할 정도로 개운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잠에 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또 꿈을 꿨나.'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에서 깨는 순간, 머릿속에 남아있던 꿈의 기억은 마치 휘발성의 물질처럼 날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꿈을 꾸었다는 사실 자체는 희미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악몽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것 같았다. 마치 엄마에 관한 기억과 같은. 고작 20년의 삶 중에서 좋은 시절이야 찰나에 불과했었지만 말이다.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 의자에 단하가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은 서로를 향하고 있었고, 잠시동안 목적없는 침묵이 흘렀다.

창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해무 쪽이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지?"


"......하루 꼬박."


그렇게 대답하는 단하의 시선은 어제의 모습과는 달랐다.


"진정제를 맞고,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난동을 부리고, 또 진정제를 맞고...... 세 번을 그랬어."


"세 번."


단하의 말을 되내이면서 해무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세 번이라니. 이런 몸뚱이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군.

"풀어."

해무가 손목을 내밀며 말했다. 단하는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해무의  손목에 감겨있는 압박 붕대를 잘랐다.


"이제 납득은 한거야? 내가 해무라는걸?"

"조금은."

"한번 설명해봐."


"자세한건 나도  몰라."


그리고단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이리나에게들었던 내용이었다.

"에이시스(ASIS)"


"뭐?"

"에이시스. 급성 성호르몬 분비이상 증후군(ASIS, Acute Sex-Hormone Inappropriate-Secretion Syndrome)이래."


"병이야?"

"그래. 성호르몬의 분비에 장애를 일으켜 급속도로 성별의 전환을 일으키는 질병. 한마디로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병이라고 하더군."

"처음 듣는데."


"나도오늘 처음 들었어. 그럴만 하겠더군. 십만 명에 한  꼴로 걸리는 병이래. 드문 편이지."

십만 명 중 한 명 꼴이라. 그렇다면 총 인구 백오십만에 달하는 구룡성채에 적어도  다섯명의 환자가 있다는 뜻이다. 자신을 포함해서.

"발병 원인은 밝혀진 바 없어. 그저 체내 호르몬을 활성화하는 뇌하수체와 생식기관의 이상 작동이라고 추측할 뿐이야."

"말도 안돼. 이건 분명  파란 주사 때문이라고. 어떤 놈이 이 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알고 약을 만들었다는 뜻이잖아."


"나도 알아. 그래서 이리나도 확실해게 답하기 어려운 거야."

그렇게 대답하며 단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해무의 여동생 비슷한걸 찾아냈다ㅡ 라고 생각했을 때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데 해무가 정말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대로 머리가 터질  같았다.

어쨌건 눈 앞의 여자애가 하는 말은 일관성이 있었다. 어떤 주사를 맞았고, 그 이후로 컨디션이 안 좋았고, 기절을 했다 깨어나니 이 꼴이더라.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찌됐건, 지금의 증상이 에이시스라는건 거의 확실하대. 그래서결론은ㅡ"


단하가 말꼬리를 흐렸고, 대신 해무가 말을 마무리 지었다.


"여자가 됐다, 이말이군."

그런 셈이지, 라고 중얼거리며 단하는 끄덕였다.

"빌어먹을."

해무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안에는 소녀가 있었다.

홍안의 소녀.


나이는 열일곱 쯤 되어보일까. 작은 얼굴. 작은 입술. 커다란 눈. 유난히 속눈썹이 길게 느껴졌다.

머리카락과 눈썹은 여전히 하얀  그대로였다. 그 모습을 보고 든 생각은 하나였다.


엄마를 닮았잖아.

당연한 일이다. 엄마의 아들이니 엄마를 닮은게 정상이다. 지금 와서는 아들이 아니라 딸 비슷한게 되어버렸으니 한층 더 닮아보이는 것이었지만.

하지만 기분이 묘했다. 마치 거울 속에서   만에 엄마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기에 해무는 거울을 밀어냈다.

"그럼 형은 정말 받아들인거야? 지금 형이 보고 있는 내가 해무라는걸?"

"당혹스럽긴 하지만 어쩌겠어. 아직 의문이 남아있고, 상식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 단하는 잠시 고민 후에 물었다.

"문제 하나 내지. 내가 며칠 전,  스무살 생일에 준 선물이 뭔지 기억해?"

"시계. 비싼거더라."


"그럼 내 스무살 생일에 니가 준 선물은?"


"아무것도."


단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없네. 일단은 니가 해무라는걸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하지만 너는 받아들일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이야?"

"여자로 변한 지금의  모습이 해무  자신이라는걸 받아들일 수 있냐고"


해무는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에는 아직 이 현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느낌이 배어있었다.

물론 해무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쩔건가? 어찌됐건 여자의 몸이 된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인데.

그리고 둘이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이리나가 들어왔다.


마켓에 다녀온 모양인지, 품에 들린 종이봉투에는 식료품과 생필품들이 담겨 있었다. 이리나는 해무와 단하를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녁식사?"

단하는 이리나가 건네는 바게트 샌드위치를 받아들었다. 해무에게도 마찬가지로 건넸지만 해무는 고개를 저었다.

샌드위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이리나는 대신에 다른 물건을 꺼내 해무에게 건넸다. 그것을 무심코 받아든 해무는 물건을 확인하고 멍한 얼굴로 이리나를 바라보았다.

생리대였다.

뭐지? 이걸 왜 내게 주는 거지?

순간 혼란에 빠진 해무를 향해 이리나가 말했다.

"네 꺼. 앞으로 필요할 거야."

해무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해무는 이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뺨에 멍 자국이 남아있었다. 며칠 전, 자신이 낸 상처였다. 그녀를 강제로 범했을 때 냈던 상처.

입맛이 썼다.


"단하한테 얘기는 들었어. 내가 여자가 됐다더군."


생리대를 옆에 내려두며 해무가 말했다. 이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을 본 물건들을 정리했다.


"정확히는 여자가 되어가는 중이야."


"이걸로 끝이 아니라고?"

"육체적으로 가장 큰 특징, 예를 들면 성기와 같은 부분은 이미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여자가 될 거야."

 꼴로도 부족해서 더 여자가 된다니. 해무가 넌더리를 냈다. 애초에 지금보다  여자가 된다는게 무슨 뜻인지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리나는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일단 키가 줄어들거야. 목소리도 점점 가늘어질테고. 가슴이  커지겠지. 근육량도 줄어들거야.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정신. 그 대목에서 해무는 신음을 흘렸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육체 뿐만이 아니라 정신 또한 마찬가지로. 그 사실은 구룡성채라는 환경 속에서 한층 더 극명히 드러난다.


사람을 죽이는 것.  노동이 세상 어느 곳 보다도 큰 가치를 지니는 장소에서, 여자는 가치가 없었다.

여자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곳은 창관과 요리점 정도일 뿐이다. 이리나와같은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변화가 얼마나 걸리지?"


"사람에 따라 달라. 확실하게 얘기할 수는 없어. 하지만ㅡ"


잠시 고민하던 이리나가 말했다.

"두달, 혹은 세달 정도."

"두달 혹은 세달이라......."


해무는 고민했다. 애매한 시간이었다. 딱히  사이에  할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두세달의 기간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잘 모르겠는데."


해무의 말에 이리나는 그럼 그렇지, 하고 중얼거렸다.


"두세달이라는건, 세 차례의 생리를 겪는 기간을 뜻하는 거야. 네가 세 차례의 생리를 겪을 때 까지 점점 여자에 가까워진다는 거지."


"그럼, 세 번 하고 나면?"

"완전한 여자가 되는 거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좋아. 그래. 세달. 알겠어."

해무가 초조한듯 자신의 입술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지금 여자고, 그리고 앞으로 가랑이 사이에서 피를 세번 싸지르고  뒤에는 창녀가 된다.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군."

해무의 말에 이리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해무는 그런건 신경쓰지 않은 채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야? 단하 형의 말이 맞다면 이건 병이란 말이지. 그리고 내 생각에, 이게 병이라면 분명 치료법이 있을 거야."


"해무, 무슨소리 하고싶은지는 알겠는데ㅡ"

"닥쳐!"

대화에 끼어든 단하를 향해 해무가 소리쳤다.


"이건 병이고, 치료법이 있어. 분명 그럴거야."


한음절 한음절을 또박또박 말하는 해무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말하는  같았다.


"이리나, 너는 원인을 모른다고 했지. 하지만 이 성채 안의 어떤 놈들은이미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갖고있어. 그리고 그 정도의 병원체를 만들 수 있을 정도라면, 분명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을 거야."


충분히 해  법한 생각이었다.

"아니면 다시 이 병을 걸릴 수도 있겠지. 여자인 상태로 병에 걸리는 거야. 그러면 다시 남자로 돌아올 수 있을 테고."

"내가 알기로 그럴 수는 없어. 여자가 에이시스에 감염된 사례는 지금까지 없어."

단호한 이리나의 대답에 해무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남자를 여자로 바꾸지만 여자는 남자로 바꾸지는 못한다고? 이래서야 마치 남자를 엿먹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병 같잖아.

하지만 절망으로 빠져드는 해무를 향해 이리나가 한 줄기 희망이 깃든 이야기를 전했다.


"하지만 치료한다는게 전혀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야. 이미 몇번의 시도가 있었으니까."

"어떻게 치료했는데?"


"치료했다고 얘기한적 없어. 시도가 있었다고 했지."

그렇게 말하며 이리나는 과거 에이시스의 치료를 시도한 사례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래봤자 완전한 성별 전환의 기간을 늦추거나, 혹은 완전한 남성성의 상실을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정도의 결과였지만.


하지만 그런 사례가 있다면 병을 치료할  있을 거라는 기대도 충분히 품을 수 있었다.

"다만, 아까 말한 세 번의 생리를 겪은 이후라면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는 불가능 할 거야."


"알겠어.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명확하네."

이리나의 설명을 전부 들은 해무가 말했다.


"놈들을 추적할거야. 나한테 약을 주사한  빌어먹을 놈들을. 그들이 치료법이 있겠지. 만약 없다면 네가 만들어. 바이러스를 가져다 줄 테니까."


"나는 힘들겠지만...... 단서가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

이리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단하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해무, 너는 아직 잘 모르고 있어. 이 구룡성채에서 여자가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어떤 의미인데?"

해무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단하는 멈칫했다. 이곳에는 더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에 이리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딱히  말 없어. 여긴 구룡성채잖아? 남자나 여자나, 살아가기에  같은 곳이지."

하지만 그 설명 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당장 그녀의 빰에 난 상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당장 자신부터가 그녀를 학대해오지 않았는가.


그 사실을 떠올리고 입을  다문 해무에게 단하가 말했다.


"너는 아직 자신을 남성일때의 해무라고 생각하고 있지. 하지만 앞으로 그런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거야."

"그렇다면?"

날선 목소리로 해무가 되물었다.


"앞으로는 옛날처럼  수 없다. 그럼 나보고 살수 일을 때려치기라도 하라는거야? 그리고 형이나 다른 누구 뒤에 숨은 채로 살라고?"

"......어쩌면, 그게 올바른 답일 수도 있지."


"좆 까."

해무는 손등에 꽂혀있는 링거 바늘을 잡아뽑았다.


"나보고 형한테 보호받으면서 살라고? 차라리 뒈져버리겠어."


그리고 자켓을 챙겨들고 진료실 밖으로 나서는 해무의 뒷모습을 단하와 이리나는 어찌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ㅇ  ㅇ  ㅇ







"해무!"

뒤를 따라나온 단하가 해무를 불렀다. 하지만 해무는 단하의 부름을 무시한 채 성큼성큼 걸었다.

단하가 어깨를 잡아챘다. 그제서야 해무는 멈춰섰다.

"나를 해무라 믿는 수밖에 없다고? 개소리!"


단하의 손을 뿌리치며 해무가 말했다.

"형은 벌써 나를 나로 못 보고 있어. 나를 보호해야 한다고? 도와줘야 한다고?"

"그런 뜻이 아닌거 알잖아."


"나, 해무는 형 따위의 도움은 필요 없어. 총알이 날아오고 피가 튀는 전장에서도 나는 살아왔어. 그런 곳에서라면 형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런 길바닥에서조차 내가 자기 몸뚱아리 하나 지키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해무는 숨쉴 틈도 없이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런데 형은 고작해야 하루만에 지금 내 여자같은 겉모습만을 보고 나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지. 정말 형은 나를 나로보고 있어?"


"......."

단하는 대꾸하지 못했다. 해무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은 지금 해무를 해무로 보고 있지 못했다. 해무의 정신이 들어간 소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억울했다. 자신은 혼란스러웠다. 당사자인 해무 본인만큼 혼란스럽겠냐마는,그래도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파트너가 갑작스레 여자가 되버린 상황이다. 혼란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설령 형과 이리나가 한 말이 사실이더라도, 그 누구도 나를 돌볼 수 없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해무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없이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보여줄 것이다.


자신이 이 구룡성채에서 여자의 몸으로 살아남는 방식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