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살수회합 (4)
단하는 당혹스런 기분으로 철창 앞에 섰다. 안쪽에서는 양손이 등 뒤로 결박된 해무가 구석 자리에 웅크린 채, 퀭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안소로부터 갑작스레 걸려온 연락을 통해 해무가 억류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게 오늘 아침. 그 얘기를 듣자마자 황급히 달려왔다. 분명 무슨 사고를 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하지만 설마 이런 취급을 받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해무의 몰골은 평소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뺨은 부어올랐고, 입술은 터져서 흐른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설령 임무 중에도 이렇게까지 초췌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해무였다. 공안들 따위에게 이렇게까지 얻어터질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아는 해무라면 이곳에 있는 공안들 모두가 달려들어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분명 숫자로 밀어붙였을 것이다. 그게 수준낮은 공안 놈들의 특기니까. 그리고 결박하고 나서도 폭행이 이어졌으리라.
순간 깊은 곳에서 차가운 분노가 일렁였다.
갑종 살수라면 절대로 이런 꼴을 당해서는 안 된다. 그 무슨 일이있더라도 길거리 잡배들과 뒤엉킨 방에 던져지는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살수.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은 천한 자들. 고용자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하인과 같은 존재들이며, 일회용으로 쓰고 버려지는 일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자신은, 그리고 해무는 다르다. 길거리에서 한번 쓰고 버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특권에 사로잡힌 의식 탓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갑종 살수라는 존재의 본질은 그저 암살을 위해 고용된 심부름꾼이 아니다. 살수들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자들. 그래서 적대했을 경우 구룡방을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는 자들. 그들에게 목줄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갑종이라는 직함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지금 방과 계약한 여덟 명의 갑종들은 단독으로 방을 무너뜨릴 만한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해무 또한 갑종이라는 이름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살수로서의 기본적인 능력이 뛰어남은 물론이고 일처리도 깔끔했다. 절대 공안 따위에게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그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분노를 품 안에 갈무리하며 단하는 턱짓했다.
"열어."
말은 짧았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옆에서 창백한 얼굴로 떨고 있던 공안이 황급히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빠져나오려는 다른 감금자들을 밀어내며 해무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거의 반 의식불명 상태였음에도 해무는 순순히 끌려나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향해 공안이 다가오자 다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손이 여전히 등뒤로 묶여있는 탓에 할 수 있는 것은 발을 마구 휘두르는 것 뿐이었다. 그 발에 얼굴을 맞은 공안이 씨근거렸다. 하지만 해무를 향해 손을 쓰지는 못했다. 매섭게 주먹을 휘두르던 어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뒤에서 자신을 죽일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단하 탓이었다.
공안은 생각했다. 어제 자신이 마음껏 화풀이를 했던 저 여자. 여전히 저 여자가 정말로 살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신분증을 훔친게 아니라 빌린 걸지도 몰랐다. 자신의 주인 되는 살수에게.
만약 저 계집이 뒤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살수의 정부(情婦) 라면?
그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저 계집의 미색만 봐도 고위 관료나 살수들이 탐을 낼 법했다.
그리고 그런 족속들은 분명 공안 따위가 자신의 정부에게 상처를 냈다는 사실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똑같이 구룡방 산하라지만, 살수회와 공안부는 명백히 별개의 조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상하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공안부 상급 관리 정도 된다면 갑종 살수와 서로 평대할 수 있겠지만, 자신같은 일개 공안은 바로 목이 달아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공안은 해무를 유치장에서 끌고나오긴 커녕, 어설픈 발길질 하나조차도 제대로 막지 못하고 연신 허둥거리고 잇었다.
"비켜."
보다못한 단하가 안으로 들어왔다. 해무는 계속해서 발길질을 이어갔다. 하지만 단하는 가볍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구둣발을 잡아챘고, 허우적거리는 해무의 어설픈 저항은 간단하게 제압되었다.
"해무."
"어.......?"
해무가 반쯤 감겨있던 눈을 떴다. 시야는 어지러웠고 형체는 식별이 어려웠다. 하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자신의 파트너의 목소리였다.
"형?"
"그래."
갑작스런단하의 등장에 잠시 말문이 막힌 해무는, 잠시 후에서야 긴장이 풀린 얼굴로 히죽 하고 웃었다.
"나 집에 갖다놔. 좀 잘께."
그리고 플러그가 뽑힌 듯이 풀썩 고개를 떨구었다. 잠이 든 건지 기절을 한건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단하는 고개를 돌려 다른 감금자들을 바라보았다. 어제부터 해무를 호시탐탐 노리던 부랑자들은 이제 단하로부터 슬금슬금 거리를 벌린 채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 모습에 뺨을 씰룩이던 단하는 해무를 어깨 위에 들쳐멨다.
그리고 부랑자들과 공안들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것을 느끼며 묵묵히 유치장을 떠났다.
ㅇ ㅇ ㅇ
해무는 자신의 침대 위에서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공안소에서 이곳까지의 여정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부터 여자를 품에 안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구룡성채의 기준으로도 꽤나 눈에 띄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대놓고 구경하지는않았다. 누가 봐도 살수인 단하의 모습 탓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해무를 구경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단하가 옆으로 지나갈 때마다 힐끗거리며 곁눈질을 했다.
거기에는 해무의 미색 뿐만 아니라, 살수 차림의 여자라는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역시 성별이 문제인가."
해무의 옷은 더러웠고 악취가 풍겼다. 몸과 얼굴에는 멍과 찢어진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미모를 가리기는 어려웠다. 도자기같은 뺨. 작은 입술. 오똑한 코. 거기에 은발과 은색 눈썹이 화룡점정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단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런 미모는 살수에게 있어서 득될 것 하나 없었다. 오히려 마이너스다.
옛날이었다면 이런 꼴을 당하는 대신 오히려 해무가 상대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과거와 비교해서 바뀐 것은 성별 뿐. 그러니 지금 사태도 여자가 되었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단하는 이리나의 경고를 떠올렸다.
'이 녀석의 삶은 앞으로 완전히 달라질꺼야. 그걸 명심하고 옆에 붙어있도록 해.'
명심하고 옆에 붙어있으라ㅡ.
하지만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가.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며 턱받이를 묶어주고 밥이라도 떠먹여줘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호위역이라도 맡아줘야 할까?
살수에게 호위받는 살수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당사자인 해무 또한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바락바락 악을 쓰며 거부하는 상황이지 않은가.
사실, 단하 자신도 내버려둬도 될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몸이 바뀌어도 살수는 살수다. 비록 근력이나 키를 포함한 기본적인 신체조건이 떨어졌을 지언정, 몸에 배인 기술은 여전히 살수의 것일 터다. 그러니 이리나의 생각만큼 걱정할 필요는 없다ㅡ 라고 생각했던게 어제까지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지금의 해무를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은 싹 가셨다.
나약한 여성의 몸. 그 안에 담긴 살수의 자아.
그런 상황 앞에서, 단하는 정말로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모르겠다.......'
단하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무의 방은 살풍경 그 자체였다. 처음 와본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렇게 느껴졌다. 콘크리트로 뒤덮힌 이 성채 중 살풍경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냐 싶다마는, 그래도 이 방은 한층 더 심했다.
콘크리트 벽, 콘크리트 바닥. 사람이 있다는 흔적은 오직 파이프 침대에 놓인 침구와 낡은 옷장. 그리고 반쯤 비워진 술병 뿐.
물론 단하라고 해서 엄청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의 집에는 찻잔과 다기가 있었고, 작은 응접 테이블과 의자도 있었고, 바닥에는 나름 카펫 비슷한 것도 깔아놓았다. 작은 차이였지만 방의 분위기에는 큰 차이를 가져오는 요소들이었다.
뭐, 방 주인이 만족한다면 아무래도 좋겠지.
그보다는 해무의 몸 상태가 문제일 것이다. 상처의 대부분은 까지고 멍 든 정도다. 하지만 더러운 옷을 입혀둔 채로 재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단하는 찢어지고 피범벅이 된 해무의 자켓의 단추를 풀었다. 단하 만큼은 아니더라도 뛰어난 품질의 고급 자켓이었다. 아마 상급 관리들의 관복을 제외한다면 이만큼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살수 중에서도 많지 않으리라.
그리고 조심스레 자켓을 벗기자, 해무의 몸이 드러났다. 가늘어진 몸의 선만 봐도 한눈에 여자라는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해무의 몸이 꽤 가볍다는걸 느꼈다. 들쳐업고 공안소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전혀 힘들지 않았다. 시장구역 공안소와 이곳 거주구 까지는 꽤 되는 거리였다. 그 거리를 사람을 업고 이동하는건 꽤 힘든 일일 텐데도 숨 한번 가쁘지 않았다.
이 역시 신체에 일어난 변화 탓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해무의 옷을 벗기던 단하의 손이 멈칫했다.
헐렁한 셔츠. 며칠 전 까지만 해도 해무의 몸에 딱 맞았던 셔츠였다. 하지만 지금은 포대자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컸다. 또한 역시 지저분했고, 피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한차례 심호흡을 한 단하는 해무의 셔츠를 벗겼다. 단추를 하나하나 풀고 앞섶을 벌리자 새하얀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크지는 않았다. 전형적인 슬렌더 체형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형태는 훌륭했다. 셔츠 위에서도 그 모양이 언뜻언뜻 드러날 정도였으니.
단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해무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벨트 버클을 풀었다. 바지를 반쯤 내리자 드로즈가 눈에 들어왔다. 몸에 달라붙는 남성용 드로즈. 분명 해무가 원래 입던 속옷일 것이었다.
하지만 드로즈가 만들어내는 윤곽은 확연히 달랐다. 잘록한 허리, 튀어나온 골반과 그 아래 부풀어오른 엉덩이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단하는 이를 갈았다. 이쯤 되자 자신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해무는 여자 속옷 따위는 입지 않았다. 팬티도, 그리고 브래지어도. 자신이 여자라는걸 거부하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그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단하 또한 자신이 여자가 된다 하더라도 쉽사리 여자 속옷을 입지는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여자 속옷을 입지않는다고 해서 여자의 몸이 남자처럼 보일리는 만무했다.
반라가 된 소녀의 몸을 보자 쌓였던 성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이 소녀가 얼마전까지만해도 남자였던 자신의 파트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몸은 지금까지 단하가 창관에서 안았던 웬만한 여자들 보다도 훨씬 여성스러웠다. 어떤 남자라도 이런 몸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단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여체의 허리를 지나 천천히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움찔하며 입에서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단하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미쳤나."
단하는 고개를 저었다. 이놈은 해무다. 자신의 파트너인 그 멍청이다. 성적으로 생각할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향해 말하며 해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작은 입술 사이로 새근새근 거리는 숨소리가 다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곳에 자신의 파트너와 같은 모습은 없었다. 흰 눈썹과 머리카락이 닮았을 뿐. 눈 앞에 있는 것은 완전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손이 떨려왔다. 숨이 가빠왔다. 어느새 자신의 다리 사이는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견뎌냈다. 성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모른체 하면 그만이다.
무시하자. 눈 앞의 녀석도, 자신의 욕구도. 전부 무시하는거다. 그렇게만 하면 전혀 문제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단하는 해무의 바지를 마저 벗겼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드로즈 또한 오줌으로 더러워져 있었고, 그마저도 결국 자신이 벗겨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씨발......."
거친 일과 달리 욕설을 입에 담는 것을 자제하는 단하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인내심이 많이 필요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