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살수회합 (5)
아침부터 심각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고민에 빠져있던 해무는 입을 열었다.
"자궁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장장 삼십분 가량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저께 주점에서 있었던 소란으로 끌려간 공안소. 그곳에서 공안들에게 처참하게 얻어터졌다. 그 정도 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주먹으로 아랫배를 맞고 경험한 격통은 난생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고통에 익숙한 살수가 실신할 정도의 폭력. 그렇다면 분명 여성화가 진행되며 생긴 변화로 인한 고통일 것이 분명했다.
해무는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몸은 나신이었다. 자신이 입고있던 더러워진 양복은 뒤엉킨 채 방 한구석에 버려져 있었다. 무의식중에 자신이 벗었거나, 아니면 단하가 벗겼을 것이다.
욕실 한 가운데 서자 거울에 벌거벗은 자신의 몸이 비쳤다.
작아진 키. 좁아진 어깨. 살수로서 단련된 몸을 잃고 새로 얻은 여성의 몸이었다.
뭐 하나 줄어들지 않은게 없었다.
일단 대충 봐도 키가 심하게 줄었다. 적게 잡아도 5센치 넘게. 당연히 어깨도 줄었고 손이나 발도 작아졌다.
"유일하게 커진건 가슴 뿐이네."
해무는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쥐었다. 나름 작은 손을 가득 채우는 아담한 크기의 가슴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손을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잘록한 허리에 비해 눈에 띄게 튀어나온 골반. 배에는 군살 하나 없었지만 아랫배에는 희미하게 살집이 올라와 있었다.
그곳을 조심스레 꾸욱 하고 눌렀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숨이 헉 하고 흘러나왔다. 주먹으로 맞았을 때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지만, 욱씬거리는 압박감에 순간 몸이 움찔할 정도였다.
이거 맞네.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해무는 생각했다.
위치를 봤을 때 분명 자궁이 있는 곳이었다. 어제의 고통의 원인이 자궁에 가해진 충격 탓이라는걸 검증한 셈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확인했다는 기쁨은 없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애새끼처럼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는 치욕감만 있을 뿐이었다. 또한 자신의 뱃속에 아기를 품기 위한 자궁이 생겼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치욕스러웠다.
그리고 해무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아악! 모르겠다!"
해무는 짜증을 토해내며 대충 몸을 씻었다. 더러운 피부를 씻어내니 그래도 한층 기분이 상쾌해졌다. 물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무거웠다. 양 손으로 짜내자 물이 거의 한바가지만큼 바닥에 후두둑 쏟아졌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나와 옷걸이 앞에 섰다. 걸려있는 옷은 한 종류 뿐이었다. 검은색 양복과 검은색셔츠. 일을 할 때와 평상시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입어왔던 옷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입을 수 없었다. 지금의 몸에는 전부 너무 컸다.
"젠장...... 일단은 바지 밑단을 대충 접으면 될 것 같은데."
거울을 보며 고심하고 있을 때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단하일 것이다.
해무는 벌컥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문 뒤에 서 있는 것은 단하였다. 자신을 바라보며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채였다.
"야. 너."
"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말하는 단하의 모습에 해무는 고개를 갸웃했다.
"옷."
"옷?"
그제서야 자신이 드로즈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상태라는걸 깨달았다. 팬티는 허리에 달라붙어 엉덩이와 허벅지, 그리고 비부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당연히 상반신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였고, 가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해무는 움찔했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스쳐지나갔다.
가려야 하나?
지금까지는이런 차림으로 단하를 만나는 것이 전혀 문제될게 없었다. 하지만 더이상은 남자의 몸이 아니다.
그렇다고 화들짝 놀라 몸을 가린다는 선택을 하기에는 거부감이 있었다. 남자한테 몸 좀 보였다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가리는건 계집애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그리고 계집애들 같은 짓거리를 한다는건, 마치 자신이 진짜 여자가 된 것을 받아들이는 행동 같았다.
결국 잠시 굳어서서 고민하던 해무는 결론을 내리고 한층 더 허리와 가슴을 펴며 말했다.
"옷이 뭐?"
해무의 당당한 모습에 단하의 얼굴이 한층 더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야, 너 머리가 어떻게 됐어? 가슴 다 보인다고."
"괜찮아. 남자끼리 뭐 어때?"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해무의 억지, 고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골치아프네 진짜.
하지만 사각 팬티만 걸친 채당당하게 가슴을 펴는 해무의 모습을 보며, 단하는 내심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해무의 옷을 벗기면서 자신이 성욕을 느꼈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사각 팬티를 걸치고뻔뻔하게 구는 모습을 보니 성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해무의 모습에도 색기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어설픈 촌극을보는 기분에 어이없는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 이게 정상이야. 저 녀석은 해무라고.
그렇게 속으로 내심 안도하며 단하는 말했다.
"알겠으니까 뭐라도 챙겨 입어. 그런 꼴로 밖을 돌아다닐 셈이야?"
결국 커다란 정장을 대충 몸에 걸치고 해무는 단하와 함께 집을 나섰다.
ㅇ ㅇ ㅇ
옷은 중요하다.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다. 옷은 동시에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살수는 양복을 입는다.
양복이란게 특별할 것 없는 옷이지만, 막상 성채에서 입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청바지에 면티 같은 일상복을 주로 입는다. 거들먹거리는 관리들은 중국식 관복을 입는다. 결국 양복을 입는건 살수들 뿐이었다.
때문에 성채 안에 양복점이 적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숫자도 적으면서 동시에 살수같은 특별한 손님만 상대한다는 점 때문에, 양복점의 재단사들 또한 콧대가 높아졌다는 점이었다.
"여자 옷 같은건 안 만드네. 시장에나 가보게."
그것이 해무를 마주한 재단사의 입에서 나온 첫 말이었다. 그 말 한마디 만으로도 해무의 얼굴은 불그락 푸그락 거리고 있었다.
한마디 만으로도 터지기 직전이군.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단하는 재단사에게 물었다.
"왜지? 여자던 남자던 돈만 내면 만들어 줄 수 있을텐데."
"여자가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야."
단하는 재단사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성채에서 양복은 아무나 입을수 없는 옷. 그러니 하물며 여자 따위에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사과하고 물러날 생각은 아니었다.
"재단사. 주문을 거절하는건 당신의 자유다. 하지만 그럴 경우 구룡방 살수회가 자네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
단하의 말에 크게 벌어진 재단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도, 이쪽도 구룡방의 살수. 그것으로는 옷을 주문하기 위한 자격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건가?"
무언가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듯, 재단사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뭔지는 짐작이 갔다. 여자는 살수가 될 수 없다는, 요즘 며칠간 수도 없이 들었던 말 일 것이다.
대신에 재단사는 물었다.
"어떤 옷이 필요하오?"
"블랙 수트. 투 버튼. 노치드 라펠. 더블 벤트."
해무의 주문은 간결했다.
"그리고 타이랑 셔츠, 벨트, 구두도."
"벨트랑 구두는 가죽점으로가셔야 하오."
"구해다 줘. 수수료는 지불하지."
재단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업대에서 줄자를 집어들었다.
"체촌(體寸) 하겠소."
전신거울 앞에 선 해무는 양 팔을 들었다. 재단사가 해무의 키와 목 둘레, 어깨 폭, 팔 길이를 쟀다. 그리고 가슴둘레를 재고, 다음으로 허리 둘레를 재려 할 때ㅡ
움찔.
화들짝 놀란 해무가 재단사를 밀쳐냈다.
"해무?"
단하가 의아함을 담아 해무를 불렀다. 체촌을 하던 재단사도 눈을 끔뻑이며 분위기를 살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잠시 굳어있던 해무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팔을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재단사도 그제서야 체촌을 이어갔다.
재단사가 허리를 재려하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방어 자세를 취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상대는 늙은 재단사였다. 평범한 노인에 불과했다. 비록 여성의 몸이지만 그래도 살수로서의 기술을 지닌 해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존재였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그렇게 위험 신호를 느꼈을까.
그리고 잠시 후 해무는 이유를 깨달았다.
자신의 허리를 향해 손을 가져오는 재단사의 모습. 그 모습에서 그저께 자신을 폭행하던 공안의 주먹이 곂쳐보였다.자신의 아랫배를, 자궁을 때리던 그 주먹이.
"젠장......."
말하자면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분노가 솟아올랐다.
오 년 넘게 살수 일을 해왔다. 그러면서 총을 맞은 적도 있고, 칼에 찔린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겁을 먹고 움찔거리며 몸을 웅크렸던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고작 몇 대 맞은 것 갖고 트라우마라니.
기분이 더러웠다.
ㅇ ㅇ ㅇ
"총도 새로 하나 구해야 할 거야."
양복점에서 나온 단하가 말했다.
"총?총은 왜?"
해무가 품에서자신의 총을 꺼내보이며 물었다. 작은 손에 들린 커다란 리볼버. 스미스 앤 웨슨의 M29였다. 살수가 된 이후로 줄곳 애용해온 총이었다.
하지만 단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안돼."
"무슨 개소리야. 그걸 왜 형이 결정해."
예상대로 해무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해무가 쓰는 무기에 대해서 단하가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럴 권리도 없었고.
하지만 가끔씩은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단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일단 따라와 봐."
잠시 후 둘이 도착한 곳은 총포상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좁은 카운터 뒤에서 점장이 엽총을 닦고 있었다.
단하는 해무를 데리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안쪽에는 좁게나마 사격을 할 수 있는 사로가 갖추어져 있었다. 표적지까지는 고작 5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번 쏴바."
단하의 말에 해무는 총을 꺼내들고 익숙한 자세로 방아세를 당겼다.
폭음이 지하실을 가득 메웠다. 단하는 뒤늦게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해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표적지를 가져와 내밀었다. 한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뚤려 있었다.
"봐, 문제 없지?"
"문제가 없다고?"
단하가 되물었다. 그 말투에 해무는 짜증이 솟았다.
"뭐가 불만인데? 내 총에 트집잡을 거리가 뭐가 있다고."
"총은 문제가 없어. 문제는 너한테 있지."
"억지 부리지 마."
해무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단하는 고민했다.
알고도 모르는척 하는걸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걸까.
어느 쪽이든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단하는 다시 한번 쏴보라고 지시했고, 해무는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표적지를 걸고, 5미터 거리를 벌린 후, 방아쇠를 당겼다.
또다시 폭음과 함께 표적지에 구멍이 뚤렸다.
"멈춰."
단하는 표적지를 가지러 가려는 해무를 멈춰세웠다.
"네 자세 봐."
단하가 턱짓하며 말했다.
"쏘고 나서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 있잖아.너도 느꼈지?"
단하의 말대로였다. 안그래도 반동이 강한 44구경 매그넘이었다. 남자의 몸이었을때도 완전히 버텨내는건 쉽지 않았다. 당연히 여자의 몸인 지금으로서는 반동을 흡수하기는 커녕, 쏘고 난 후의 충격으로 자세가 비틀어져 있었다.
지금처럼 단발 사격 시에는 별 상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발 사격이라면? 그리고 그보다 더 가혹한 조건인 실전에서라면?
말할 것도 없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애초에 이 동네에서 44매그넘을 쓴다는게 말도 안되는 짓거리야. 대체 그 무식하고 쓸모없는걸 왜 써? 코끼리라도 잡냐?"
해무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억지로 반동을 견뎌낸 팔이 후들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애초에 처음 총을 꺼내들 때부터 그 무게가 눈에 띄게 느껴지고 있었다.
사실, 애초부터 살수가 쓰기에 무리가 있는 총이었다.
살수라면 당연히 작아서 은닉이 쉽고, 장탄수가 많은 자동 권총이 잘 맞았다. 단하가 사용하고 있는 시그-사우어 처럼.
"너도 이제 자동권총으로 바꿔."
"난 그런거 안 믿어."
해무가 질색을 했다. 그가 자동권총 대신 리볼버를 선호하는데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자동 권총이라니, 그딴걸 쓰면 분명 총알 걸려서 죽게 될 걸?"
확실히 총알이 걸릴 위험이 있는 자동 권총에 비해, 리볼버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더 높은 신뢰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 리볼버의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자동권총 썼던 나도 아직 살아있는데?"
"형도 곧 죽을 거야."
"......."
해무의 억지에 단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결국 최소한의 타협이라는 노선을 택했다.
"어쨌든 총을 바꾸기는 해야돼. 리볼버라도 좋으니까 좀 작은걸로 바꾸라고."
해무는 투덜거리며 다른 총을 골랐다.지금 총에 비해서 좀 작은 거라면 .357 매그넘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그럼 M19."
"그건 없네."
뒤에서 둘을 지켜보던 점장이 말했다.
"대신 이런건 어떤가."
킴버의 자그마한 리볼버. 단하가 보기에도 3인치 짜리 총열의 자그마한 총은 모욕적이었다.
"미쳤어? 그딴걸 쓰게?"
날선 해무의 반응에 점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맞서 짜증내는 대신 말없이 다른 물건을 보여주었다.
스텀 루거
"찌질해 보여서 싫어."
타우러스
"나보고남미 총을 쓰라고? 차라리 자살한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총을 보여주었으나, 해무는 계속해서 거절했다.
"대충 아무거나 쓰지?"
"좆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저런 개떡같은 총은 안 쓸 거야."
단하의 권유에도 해무는 굽힐 생각이 없었다. 까다로움을 넘어서 꼰대질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을 정도의 뻣뻣한 취향에 점장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조금있으면 머리에서 스팀이라도 뿜어져나갈 기세였다.
그리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서랍 안에서 리볼버 한 정을 꺼냈다.
콜트 파이슨. 4인치 배럴.
해무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그 총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이상 다른 총을 찾아봐야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저게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이리라.
해무는 새 총을 집어들었다. 나쁘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취향인 스미스 앤 웨슨이 아니라는 사실이 거슬렸을 뿐.
"젠장, 여자가 됐다고 총까지 바꿔야 한다니."
여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씩 주변의 무언가가 변해가고 있었다. 분노하거나 절망하기에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신경을 긁는 사소한 부분에서.
뭐 어쩌겠어.
될 대로 되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