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살수회합 (6)
"잘 맞네."
새 양복을 몸에 걸친 해무가 말했다.
살벌한 협박 덕분인지, 재단사는 고작 3일만에 정장 한 벌을 만들어냈다. 원래대로였다면 적어도 일주일은 족히 걸렸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었다.
"아니, 이거 너무 잘 맞는데?"
옷맵시를 찬찬히 살펴본 해무가 당황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옷은 아주 잘 맞았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성격처럼, 재단사는 옷도 한 치의 실수 없이 만들었다. 어깨부터 소매까지, 목깃부터 밑단까지 몸에 완벽하게 맞아들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가슴과 허리, 그리고 골반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해무가 원했던 것은 남성용 정장이었다. 예전에 입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에 크기만 적당히 맞춘 옷 말이다.
하지만 받은 옷의 치수는 너무나 완벽했고, 때문에 남성용 정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몸매가 지닌 유려한 곡선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조금 과장에서 말하자면, 창관의 기녀들에게 납품할 옷이라고 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망할 영감탱이. 죽여버릴까."
순간 속에서 살의가 피어올랐다. 생각해보면 그 영감탱이가 치수를 잴 때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대체 어떤 미친 재단사가 남성 양복을 엉덩이와 가슴을 강조하는 형태로 만든단 말인가.
분명 영감탱이는 변태가 틀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반품할 수도 없고......."
해무는 투덜거렸다. 만듬새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이제와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당장 양복이 필요했다.
살수회합.
살수회 관리들과 갑종살수가 모이는 자리가 오늘이다. 그런 자리에 헐렁헐렁한 옛날 정장 차림으로 갈 수는 없었다.
결국 남아있는 선택지는 이 옷을 입는 것 뿐이었다.
물론 옷만 문제인건 아니었다. 생일날 단하에게 선물받았던 시계도 너무 컸다. 때문에 시곗줄을 몇 칸이나 줄여야 했다.
그나마 구두가 멀쩡한게 다행이었다. 옷을 주문하러 갔던 날, 재단사가 뾰족하고 힐이 달린 여성용 구두를 추천하길래 그걸로 뒤통수를 내려쳐줬다. 덕분에 제대로 된 남성용 구두를 받아낼 수 있었다.
환복을 마친 해무는 거울을 보았다.
비춰지는 것은 여전히 여자의 모습. 기껏 새로 맞춘 양복도 반쯤은 여자 옷 같았다.
하지만 어찌저찌 구색을 맞춰놓고 보니 그나마 살수같은 모습이 풍겼다. 백 퍼센트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 사실에 조금이나마 안도하며 해무는 심호흡을 했다.
회합에 참석할 시간이다.
ㅇ ㅇ ㅇ
회합 장소는 상업 구역 빌딩 60층의 중식당이었다. 60층이라 하면 이 구룡성채 전체를 통틀어서도 매우 높은 층. 구룡방의 상급 관리들이나 올 법한 고급 식당이었다.
그 장소로 향하는 해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오는 길에서 만나 함께 걷던 단하도 말을 걸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있어서였다.
지금 해무가 회합에 참석하는건,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구룡방과 다른 살수들에게 공표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에이시스인지 뭔지 하는 지랄맞은 병. 그것 때문에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니 불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 폭로하는 셈이니까.
어차피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다. 구룡성채는 좁다. 소문도 빠르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구룡방 관리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일을 하다가 다른 살수들을 마주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렇게 되다 보면 소문이 퍼지는 것은 금방이다.
즐겁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스스로 사실을 밝히러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게 누군가에게 폭로당하는 것보다는 모양새가 그나마 나을 것이다.
그리고 둘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여의도가 남한에서 분리되어 고립된 이후, 좁은 땅에 난립한 구룡성채의 빌딩 대부분은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구식 공법이었다. 하지만 개중의 몇몇은 과거 남한이 당시의 최신 공법을 사용하여 지은 것들이었고,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채 아직까지 쓰이고 있었다.
지금 살수회합이 열리는 빌딩 또한 과거 남한이 지은 건물이었다. 강철 뼈대를 유리판으로 감싼 커튼월 빌딩. 한때는 유리궁전같은 화려한 모습이었겠지만, 지금은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탓에 흙먼지로 지저분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하지만 고작 십층 이십층 짜리 콘크리트 빌딩에 비해 훨씬 높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덕분에 지금처럼 고급 식당가나 구룡방 회의장으로 이용되는 것이었다.
60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해무와 단하는 등 뒤에 펼쳐진 어두운 도시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손바닥 만한 크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고작 한 뼘 거리에 남한과 중국의 도시가 있었다.
그 모습은 각각 달랐다. 하지만 과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셋 모두 혼돈의 도시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바로 눈 앞에 식당이 있었다. 그 옆에서는 문지기 하나가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병(丙)급 살수. 갑종인 해무와 단하에 비해 두 단계는 더 낮은 월급쟁이 살수였다. 말이 살수지 사실상 잔심부름꾼에 불과했다.
단하는 그에게 신분증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문지기는 손에 들고 있는 초대 손님 목록과 대조하여 단하의 얼굴을 확인했다.
물론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미 문지기는 모든 갑종 참석자들의 얼굴을 전부 외우고 있었다.
애초에 전 성채를 통틀어 일곱명 뿐인 존재였다. 오조가 죽은 지금은 여섯명. 굳이 리스트를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얼굴을 외울 수 있을 만한 숫자인 것이다.
나아가, 갑종이라 하면 살수들에게 있어서 가장 꼭대기에 선 존재들이다.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다. 때문에 평소에도 얼굴을 알고 있는게 당연했다. 굳이 회합의 문지기 역할을 맏게 되었다고 해서 새로 외울 필요조차 없었다.
다만 굳이 확인하는 것은, 그만큼 회합이 중요한 자리라는 의미이리라.
그리고 신분을 확인받은 단하는 해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지기가 멈춰세웠다.
"들어가시는 분들은 모두 신분을 확인해야 합니다."
문지기의 말은 명백히 해무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데려온 사람이야. 같이 안으로 들어가겠어."
단하가 말했지만 문지기는 고개를 저었다.
"허가된 인원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신분을 보증하지. 그래도 안 되나?"
그 말에 문지기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알기로 단하는 이런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살수회에는 제멋대로인 온갖 미친놈들이 모여있는 곳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단하는 나름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문지기는 여자를 힐끗 확인했다. 윤기가 흐르는 은발. 치켜올라간 눈.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지만 미색은 출중했다.
그런 건가.
문지기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창관이 넘쳐나는 구룡성채였으나이곳에서 자신만의 여자를 얻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와 공간의 양극화, 그리고 거친 주변환경 탓에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 한 몸 건사하는 것 조차 버거웠다. 때문에 여자를 얻은 남자들이 이를 과시하는건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하급 살수에게 마치 신 같은 위치인 갑종 살수조차 이러한 욕망에 휘둘린다는 사실을 확인한 문지기는 입가에 슬쩍 비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단하 님. 갑종 살수가 모이는 자립니다. 새 첩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일하는 자리에선 자제해 주시지요."
문지기는 불쾌해할단하의 얼굴을 생각하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고작해야 하급 살수인 자신이 조롱했으니 분명 분노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자신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회합에 첩을 데려오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합법적으로 고위 관리나 갑종 살수를 조롱할 수 있는 것이 나름 쏠쏠한 즐거움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막상 단하의 얼굴을 확인한 문지기는 예상 밖의 모습에 당황했다.
단하의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은 분노나 불쾌함이 아니었다. 긴장감이었다. 시선은 오히려 여자의 눈치를 보고 있는 채였다.
그 사실에 문지기는 한층 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갑종 살수가 한낱 여자 따위의 기색을 살핀다고?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의혹을 끊어낸 것은 해무의 반응이었다.
"됐어. 집어쳐."
해무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그리고 품 안에서 지갑을 꺼내 펼쳤다. 안에는 살수면허가 꽃혀 있었다.
"야, 보이냐?"
해무가 문지기를 향해 신분증을 들이밀며 말했다.
"보이냐고. 보이면 대답을 해, 이새끼야."
"어...... 예?"
문지기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인지 대꾸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러한 문지기를 향해 해무는 총을 꺼내들고 이어서 말했다.
"여기내 이름 있어. 해무라고 써 있는거 보이지?"
"예, 예."
"그리고 옆에 사진도 보이지?"
"예......그런데 얼굴이ㅡ"
"사진을 좀 옛날에 찍었거든. 그래서 조금 달라 보일수도 있어."
말도 안되는 억지였다. 실소(失笑)를 흘렸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해무의 말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진과 실제 모습은 조금 달라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물론 비슷하기는 했다. 하지만 애초에 성별 부터가 달랐다. 헷갈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살수회합은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들여보내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해무는 만만히 막아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설마 사진이 좀 다른게 맘에 안 들어? 그럼 니가 어쩔껀데."
총구가 문지기의 이마를 향했다.
"내 성격 알지? 뒈지기 싫으면 열어."
문지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이 계집이 정말 해무라면 자신은 죽을 수도 있었다. 그의 까칠한 성격은 유명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들어보내도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 눈 앞에서 당장이라도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려는 저 사람은 분명 계집이었다. 그런 모습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저 얼굴이 조금 바뀌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믿고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문지기에게 구원의손길, 혹은 나름의 핑계거리를 제공해준 것은 단하였다.
"이봐, 문지기."
단하가 말했다.
"면허를 확인했지. 거기다 내 보증도 더하겠어. 안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모두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
단하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문지기로서는 더이상 막아설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 제안할 때 어서 일을 떠넘겨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문지기는 황급히 문을 열어 둘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너 다음에 걸리면 죽는다.
해무는 마지막까지 그런 의미를 담은 시선으로 문지기를 노려보았다. 마지막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리고 둘이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혼자 남은 문지기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망할 갑종 새끼들....."
언제나 제멋대로인 갑종들을 향해, 그들 눈 앞에서는 절데로 하지 못할 욕설을 혼잣말로중얼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