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살수회합 (7)
식당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치파오 차림의 여성 접객원이 둘을 맞이했다.
접객원이 건네는 검은색 베일을 얼굴에 뒤집어 쓴 해무와 단하는 촉각을 곤두세운 채 복도를 걸었다. 커다란 고급 중식당 안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손님의 흔적도 없었다. 오직 앞에서 둘을 안내하는 접객원의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만이 들려왔다. 살수회에서 이 공간을 통째로 대여한 것이 분명했다.
안내를 따라 들어선 복도 가장 안쪽의 방 중앙에는커다란 원탁이 놓여있었다. 이미 누군가가 먼저 도착해 있는 채였다. 살수회합의 전통에 따라, 그 또한 얼굴에 검은색 베일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얇은 베일 너머로 희미하게 얼굴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갑종살수 페이 롱. 그는 언제나와 같이 화려한 자주색 정장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베일 위로 드러난 매끈한 대머리,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길쭉한 몸과 팔다리는 마치 거미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눈을 감은 채 앉아있던 페이 롱은, 자신의 맞은 편에 앉는 둘의 모습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왼쪽에 앉은 검은 머리의 소년은 단하. 일을 하면서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원래 갑종에 대한 소문은 호사가들의 주 메뉴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소문은 갑종 본인들의 귀에도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소문에 따르면 다른 갑종인 해무와 비공식적인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단하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처음 보는 상대였다. 아니, 상대는 심지어 살수조차 아니었다. 페이 롱이 그렇게 짐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단하가 대동한 상대는 소녀였으니까.
그 사실에 의문이 솟았다. 구룡방은 금녀(禁女)의 영역. 특히나 살수의 경우는 더 그러했다. 그럼에도 저 소녀는 양복을 입고 이 자리에 참석했다. 마치 자신이 살수라도 되는 것처럼.
대체 저 계집의 정체는 뭐지.
페이 롱은 소녀의 얼굴을 꿰뚫을 기세로 바라보았다. 분명 기억 한 켠에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뭘 봐, 대머리 새끼야."
소녀가 사나운 얼굴로 말했다. 그 말에 페이 롱은 기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것을 깨달았다.
조금 변했지만 날카로운 목소리.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못 볼 수 없는 은발과 흰 눈썹.
그 진짜 주인이 누군지 모를리가 없었다. 저 소녀가 단하 못지않게 소문을 날리고 다니는 젊은 갑종, 해무라는 사실을.
그 결론에 도달한 페이 롱은 입을 찢어질듯이 벌리며 히죽 하고 웃었다.
해무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기분나쁜 놈.
페이 롱. 저 자식은 처음 봤을 때부터 불쾌했다.
나이는 자신보다 한참 많을 것이다. 삼십대 중반 쯤 됐을까. 소문으로는 예전에 중국에서 요원 일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본인이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을 테니 출처는 불분명했다. 그냥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 놈이 소름끼치고 불쾌하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갑종 놈들도 짜증나는건 마찬가지였지만 저 놈은 특히 그랬다. 일단 쌍판부터가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쾌한 이유는 저 놈이 표적들의 발목을 잘라 모은다는 소문 때문이리라.
그런 소문이 진짜일리는 없겠지만.
잠시 후, 나머지 인원들도 차례차례 도착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갑종 살수들이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보기 드문 얼굴도 있었다. 하지만 서로 아는척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개인적인 교우를 다지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해무와 단하 사이의 관계를 제외하면 갑종 살수들은 경쟁 관계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인 경우도 있었다.
만약 관리들의 감독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서로 싸우고 죽여 방을 피범벅으로 만들어 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마 살수들이 최소한의 규칙이라도 지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해무와 단하를 포함해서 전부 여섯 명 뿐이었다. 원탁을 따라 놓여있는 여덟 개의 의자 중 여전히 공석인 것은 세 개.
공석들 중 하나는 오조의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죽었고, 아직 후임은 정해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자리는 여전히 공석인 채였다.
다른 하나는 가장 살수회에서 오래된 살수의 자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성채 안에 없었다. 중국으로 파견을 나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상석은 구룡방의 1급 관리이자, 살수회의 총괄이며, 이 회합의 주재자인 살수회주(殺手會主)의 자리였다.
여섯 명의 갑종살수는 침묵을 지킨 채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 이 곳은 구룡성채에서 가장 강한 전력(戰力)의 밀도를 지닌 자리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얼마 뒤, 살수회주가 호위 살수들과 관리들을 대동한 채 안으로 들어섰다.
살수회주 주원형.
금실로 수놓은 뱀이 그려진 붉은색 관복 차림. 검은 베일 뒤의 얼굴에는 쥐 같은 수염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표범의 것이었다.
자리를 한번 둘러본 회주가 상석에 앉았다. 이어서 접객원들이 다기(茶器)를 대령해, 회주와 다른 참석자들 앞에 차를 따랐다.
방 안을 향긋한 차 냄새가 가득 채웠다. 하지만 분위기가 풀어지는 일은 없었다. 관리들과 살수들의 얼굴은 마치 여기가 북극 한가운데라도 되는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살수회합을 시작하지."
회주가 개회를 선언했다. 접객원들은 이미 아까전에 물러나고, 방 안에는 관리와 살수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회주는 다시한번참석자들을 하나하나 눈여겨 확인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이 방에 있는 것은 전부 남자 뿐이어야 했다. 당연한 일이다. 살수가 될 수 있는 것도, 관리가 될 수 있는 것도 오직 남자 뿐.
하지만 이곳에 단 한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향해 표범같은 눈을 부라리며 회주가 입을 열었다.
"우리 살수회의 일원이 아닌 것 같은 자가 하나 있군."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회주가 이어 말했다.
"어찌 그대는 여기에 앉아있는가? 계집아이를 통과시킨 걸 보니 필시 문지기가 일을 허투루 한 탓이로다."
"아니. 문지기는 잘못한 것 없어."
팽팽한 긴장속에서 해무가조용히 말했다.
"나는 해무. 살수회 갑종살수 해무다. 여기 있는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이곳에 앉을 정당한 권리가 있다."
이어진 살수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누군가는 짐작했던 사람도 있었고,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흥미를 갖고 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전혀 관심 없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속내와 관계없이, 순간 분위기에 잔잔한 충격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성별이 정해진다. 남자 혹은 여자로.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자신이 그 섭리를 거스른 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여자이지만 한때는 자신이 남자였으며 또한 살수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 충격과 긴장 속에서 회주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인 즉, 계집의 몸이 되었다는 뜻인가?"
"그래. 일하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성별이 바뀌었지."
"에이시스 말이로군."
회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회주도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병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살수회주라는 직함을 맡은 자로서, 주원형은 성채 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 사고와 비밀스런 일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 중 하나였다. 에이시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알겠다. 회합은 예정대로 진행하지."
충격에 물들었던 분위기가 한 차례 씻겨나가고 나서야 회합이 원래대로 시작되었다.
각 살수들을 향한 회주의 의례적인 인사 이후, 예정되었던 안건들이 화제로 올랐다.
주요 안건은 지난 일년간 수행한 업에 대해서였다. 각 살수들이 명을 받아 행한 업의 종합 보고를 올렸다.
그렇다고 살수들이 직접 자신의 일을 정리해서 보고하는 것은 아니었다. 각자에게 붙어있는 담당 관리들이 정리해서 회주에게 보고하고, 살수들은 배석만 하는 형태였다.
그에 대해 회주는 담담한 총평을 하나씩 남겼다.
그리고 얼마 뒤, 해무의 차례가 되었다. 담당 관리가 앞으로 나와 해무가 지난 일년간 수행한 업을 회주에게 고했다.
그리고 해무는 기다렸다. 유일하게 실패한 자신의 임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를.
오조로부터 승계한 업. 그것을 위해 B지구까지 넘어갔다. 하지만 임무 중 실신으로 결국 업을 완수하는데 실패했다.
담당 관리는 일주일 내로 업이 완수되지 않는다면 제사를 지내겠다고 말했다. 설령 제사 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실패에 합당한 처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담당 관리의 보고가 거의 마무리 될 때 까지도 임무 실패에 대한 이야기는 나올 기색이 없었다.
"잠깐 내가 얘기하지."
참다 못한 해무는 결국 보고 중의 자연스런 공백을 틈타 입을 열었다.
"담당 관리는 알겠지만, 나는 오조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업을 승계했어. 하지만 나도 실패했지. 이에 대한 처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회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손짓했다. 그러자 보고를 올리던 담당 관리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가 내용을 전부 전달받은 회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업의 실패에 관한 책임은 불문(不問)한다."
"뭐......?"
예상치 못한 답변에 해무의 입이 벌어졌다.
"살수회에서 하달하는 모든 업은 구룡성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우리 구룡방이 이곳 성채에 자리잡은 것을 고려할 때 당연한 바, 성채의 경계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우리와 무관(無關)."
"하지만ㅡ"
"더이상 묻지 말라."
회주는 반론을 허가하지 않았다.
"처분 받기를 원한다면 정식으로 상고(上告)하라. 이 외의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 말에 해무도 더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보고가 끝나자 평가 및 계약 연장에 관한 사전 논의로 넘어갔다. 1년간의 계약 갱신으로 이루어지는 갑종계약에 대한 논의였다. 계약 마감이 한 달 정도 남았으니 지금 시점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해무의 귀에는 그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업의 실패에 대한 처분을 면한다?
자신이 알기로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업의 완수에 있어서 살수회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기준을 갖고 있었다. 실패에 대해 부과되는 처벌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신은 처분을 면제받았다.
대체 어째서?
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고민에 빠진 해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회합이 끝나있었다.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폐회를 알린 살수회주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 다음으로 관리들이 떠나고, 뒤이어 살수들이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나 방을 떠났다.
"이것 참 흥미롭군."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페이 롱이 말했다.
"에이시스라고 했나? 멀쩡한 남자를 여자로 바꿔놓는다니, 그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 뭐가 있겠나."
신경을 긁는 끈적끈적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단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봐, 롱. 남 걱정할 시간 있으면 니 대머리나 챙겨."
순간 롱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짧은 순간 뿐이었다. 롱은 언제나처럼 얼굴에 만들어진 가짜 미소를 다시 띄우고는 대답했다.
"걱정해줘서 고맙군. 하지만 그보다는 저기 멍하니 앉아있는 저 '여자 살수'의 갑종계약 연장 여부를 더 걱정해야 하지 않겠나? 내 생각에는 꽤나 재미있는 결과가 벌어질 것 같은데."
"당장 꺼지지 않으면 머리통을 박살내 버리겠어."
"아, 그러고보니 단하 자네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로군. 만약 저 아가씨가 정말로 연장을 실패해도 자네가 첩으로 들이면ㅡ"
곧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커다란 청나라 도자기가 날아갔다. 간단하게 고개만 돌려 피했지만 도자기는 벽에 부딪혀 와장창 깨졌다.
그리고 롱은 마지막으로 한번 히죽 하고 웃어보이고 방을 떠났다.
원탁에 남아있는 것은 해무와 단하 둘 뿐이었다.
자리에 앉아 고개를 떨군 해무는 치욕감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회합 내내 롱을 제외한 나머지 갑종들은 자신을 향해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외적으로는 아무런 감정 표시가 없었을지언정, 속으로 생각하는 내용은 페이 롱이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경멸과 조롱ㅡ 여자가 되고, 임무를 실패했으며, 갑종 계약 연장까지 불투명한 상황에 처했다.
그 사실이 해무는 치욕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한참동안 텅 빈 방에 침묵한 채 앉아있었다. 단하가 자신을 잡아 일으킬 때까지.
단하에게 이끌려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청나라 도자기의 잔해가 발 밑에서 바삭바삭 부서졌다.
참석하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 기분 더러운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