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겜블의 규칙 (2)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해무와 세 마약상은 그대로 굳어섰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시 노크 소리가 똑똑 하고 울렸다.
해무와 마약상들 사이에 시선이 오갔다. 유일하게 총을 들고 있지 않은 조장이 자리에서 한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문의 칸막이를 열었다.
아까 전 해무가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문답이 조장과 방문자 사이에 오갔다.
문이 열리자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둘 모두 비쩍 말랐지만, 눈빛만은 흉흉했다.
해무와 마약상은 어느새 총을 숨기고 태연한 모습으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매자를 맞는 호스트의 모습으로.
동시에 해무는 그들의 얼굴을 주시했다. 머릿속으로는 살수회로부터 받은 지령서 속의 사진들과대조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목표로 지정된 사람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을 곳이다. 마약상들과도 수면 아래서 대치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방문자들과도싸워야 했다면 상황은 매우 복잡했을 것이다.
"뭘 사러 왔나."
조장이 물었다.
"코카인."
"돈은?"
"물건이 먼저다."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짧은 신경전이 오갔다. 거래에 있어서 일상적으로 따라오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일상적이라는 것이 그저 형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순간에서 사소한 틀어짐이라도 발생한다면, 정말로 살육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조장이 턱짓을 하자 그의 부하가 가방을 열어 물건을 보여주었다. 구매자는 품 안에서 빨대를 꺼내 랩으로 싸인 봉투를 찔렀다. 그리고 뽑아서 안에 든 가루를 맛봤다.
이상은 없을 것이다. 구룡방에서 제조한 최상품이니.
그걸 증명하듯, 맛을 본 남자는 자신의 동행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물건은 이상 없나 보군. 그런데...... 저 계집은 뭐지?"
방문자의손가락은 해무를 가리키고 있었다.
또 시비냐.
해무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저 빌어먹을 새끼들은 길거리에서 여자를 보면 시비를 걸지 못해서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분노한건 마약상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약을 거래하는 과정에서는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저 거래가 취소되는 것 부터, 최악의 경우 총격전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저 빌어먹을 계집년때문에 거래가 엎어지게 생겼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마약을 거래하는 자리에 쓸데없이 여자가 끼어들어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거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네놈들은 약을 사러 왔나, 아니면 여자를 사러 왔나? 쓸데없는 것에 신경쓰지 말고 필요한 물건이나 빨리 사고 꺼져라."
조장이 초조한 기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기분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저 년의 머리통에 총을 쏴 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아쇠를 당길 때가 아니다. 구매자를 달래서 빨리 거래를 마무리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눈에 거슬려. 약을 사고 파는데 왜 쓸모없는 여자가 있는 거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로군."
"꿍꿍이 같은 소리. 그냥 보기 좋으라고 세워뒀을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대신 잽싸게 총을 꺼내드는 소리만이 울렸다.
방문자들의 총은 마약상들에게,
마약상들의 총은 해무에게,
그리고 해무의 총은 방문자들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직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이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봐, 약쟁이들."
교착 상태의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해무 쪽이었다. 해무는 손을 들어 공격 의사가 없음을 표하며 총을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는 싸울 생각 없으니 쓸데없이 힘 빼지 말자고. 내가 있어서 불편한건 알겠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 해야겠어."
"넌 뭐지."
"구룡방 감찰국 소속 6급 감찰관리 이현이다. 네놈들도 물건 사는 놈들이라면 알겠지. 저 새끼들이 그냥 길거리에 널린 약팔이들이 아니라는걸."
해무가 지갑 안의 신분증을 보이며 말했다. 자세히 보면 그 신분증이 관리의 것이 아니라 살수의 것이라는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총구를 겨눈 상황에서 신분증을 자세히 살필 여유는 없었다. 설령 그것이 살수 신분증이라는걸 알았어도 놈들은 뭐라 대꾸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찰 업무를 위해 살수로 신분을 위장한 것이라고 대답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이 놈들은 우리 구룡방에서 생산한 약을 판다. 때문에 우리 감찰국으로서는 놈들을 감시할 의무가 있지. 그래서 나같은 계집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해무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어가고 있었다.
"뭐, 네놈들이 나를 계집년이라 부르는건 상관없어. 나는 그딴건 신경 안 쓰거든. 그런데 내가 좆같은건 뭔지 알아? 우리 구룡방이 온갖 고생을 해서 만들어낸 약을 빼돌리는 개새끼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공급량과 수입액은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해. 숫자는 중요하지.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해. 그래서 우리가 그 씨발같은 회계사들에게도 임금을 지불하는 거야. 그런데 이 숫자가안 맞다? 결론은 하나지. 쥐새끼들이 물건을 빼돌리고 있어.
그래서, 이제 입장을 한번 바꿔놓고 생각해 보지. 네놈들이 물건을 파는 입장이라고 생각해봐. 물건을 1킬로그램 만들어서 팔았어. 이걸 만들기 위해 좆나 고생을 했지. 그리고 돈은 삼십억이 들어와야 해. 이십 구 억도, 이십 팔 억도 아닌, 정확히 삼십억 원이 말이야.
그런데 금고를 확인해 봤더니 들어온 돈은 고작 이십 칠 억 뿐이다, 그러면네놈들은 열이 안 받겠나?
열이 안 받을 것 같냐고!"
버럭 하고 소리치는 해무의 목소리가 방 안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마약상들도, 그리고 방문자들도. 묵묵히 해무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겠다.
"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내가 이렇게 여기에 와서 있는 거다ㅡ 이말이야. 나도 너희들도 기분 나쁘겠지만 어쩌겠어. 서로 각자 양보하며 사는거지. 안그래? 그러니까 살거면 사고, 내가 맘에 안들면 꺼져."
해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조장의 뺨을 따라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알고 있다. 해무의 말이 거짓이라는걸. 만약 거짓이 들통난다면 그때는 정말 총격전이 벌어지는 것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계집년이 주둥아리가 험하군."
방문자가 총을 내렸다. 이어 마약상들도 총을 거두었다.
그리고 지퍼가 열린 가방 하나가 툭 하고 바닥을 굴렀다. 안에는 오만원짜리 돈다발이 가득 차 있었다.
"대금이다. 세어봐라."
조장의 부하들이 가방을 주워들고 돈다발 하나를 꺼내 지폐 계수기에 넣었다. 한 묶음에 백 장. 오백만원 이었다.
이 돈다발이 전부 육십 개. 전부 삼십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삼십억 원을 전부 체크하는데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르륵 하고 지폐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총 금액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둘은 가방을 교환했다. 돈이 든 가방과 약이 든 가방을.
물건을 받아든 방문자는 리더와 해무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뒷걸음질로 방을 떠났다. 천천히, 한 걸음 씩.
그리고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거래가 끝났다.
동시에, 방에 남은 네 명이 다시 일제히 총을 들었다.
"이 빌어먹을 살수년."
거래는 끝났지만 해무와 마약상들 사이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년 때문에 거래가 터질 뻔 했다. 뒈지기 싫으면 당장 꺼져라."
"꺼지라고? 나는 갈 생각 없어. 그런데 이제 슬슬 총 꺼내드는 것도 지겹지 않냐?"
해무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내가 말했지. 니네들을 방해할 생각 따윈 없다고. 이건 방의 일이다. 중요한 일이야. 내가 여기서 물러나는건, 방의 권위가 훼손되는 거나 마찬가지다."
조장의 총구가 떨렸다.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이 들썩였다.
그리고 잠시 후, 처음 총을 꺼내들었을 때처럼 벼락같이 총을 거둬 다시 품 안에 넣었다.
"명심해라 살수. 만약 또다시 거래를 방해하면 죽여버리겠다."
그제서야 해무도 총을 거두었다. 그리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해무의 셔츠도 긴장으로 흐른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마약상과의 협상. 온몸을 녹초로 만들 정도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첫 거래가 끝났다. 그리고 해무는 앞으로의 일정을 고민했다.
과연 이 낚시질로 남한의 요원들을 찾아내려면 얼마나 많은 거래를 반복해야 할까.
ㅇ ㅇ ㅇ
당연한 일이지만, 마약상들과 해무의 관계는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다.
살수회 산하의 갑종살수. 그리고 전매청과 커넥션이 있는 마약 판매조직. 각자의 소속부터가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관계였다. 게다가 안 그래도 불편한 사이에 더하여,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것이 기름을 부었다.
결국 해무와 마약상들은 한 방에 함께 있었지만, 동시에 서로를 개 닭 보는 분위기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것은 해무가 거래에 참관하기 시작한 둘째 날에도 그러했고, 삼일 째 되는 오늘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저께 5회. 어제 7회.그리고 오늘 오전 2회.
지금까지 해무가 거래에 배석한 것이 총 열 네 번. 그 열 네번 동안 방문자들은 돈을 지불하고, 약을 받고, 방을 떠났다. 그 사이에 오간 금액으로 따져도 사백 억에 가까운 돈이었다.
그리고 해무는 조금씩 초조해져갔다.
잠복한지 3일째인데 아직 남한 측 요원들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뭔가 근본적인 오판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단순히 목표물들이 낚시바늘을 피해간 것일 수도 있다. 구룡방 전매청은 많은 하부조직을 보유하고 있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건의 거래가 일어난다. 만나지 못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해무의 직감은 지금처럼 기다리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놈들을 찾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했다.
마약상들은 방한쪽의 좁은 책상에 모여앉아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해무는 빨대로 병에 든 두유를 마시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란 약물을 본적이 있나?"
해무가 물었다. 순간 자신도 당황했다. 스스로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자연스레 나온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입을 떠난 소리였다. 이제와서 입을 다물 수는 없었다. 해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앰플 형태의 파란 액체. 용량은 약 20ml. 흡수 방식은 주사. 내용물은 바이러스로 추측됨."
"모른다."
"B지구에 약을 유통한 경험은?"
"네게 말해줄 이유는 없다."
"물건을 팔다보면 B지구를 통해 들어오는 손님들도 있을 텐데?"
"오늘따라 말이 많군."
젓가락을 내려놓은 조장이 말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열심히 식사를 하던 세 명의 시선은 모두 해무를 향해 있었다.
조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해무는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반쯤은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은 해무의 의도대로였다.
"얘기 했을텐데. 나는 살수회 소속이라고. 네놈들은 협조할 의무가 있어.
"네게 취조당하는 것에 동의한 적은 없다."
짧은 순간 해무는 고민했다. 자신의 직감에 따르면 지금은 결정을 내려야 할때였다. 그리고 살수가 지켜야 할 미덕에 따라 빠른 결정을 내렸다.
"취조당하는게 불쾌한가? 미안하군. 하지만 물어볼게 아직 많이 남았거든. 네놈들의 상부조직이 어딘지. 전매청과의 연결고리는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현재'공장'의 위치는 어디인지."
적막이 흘렀다. 조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해무가 한 말은 조직에 관한 모든 비밀을 털어놓으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었다.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 요구. 그 요구에가장 먼저 반응한건 조장이었다.
총성이 방 안을 울렸다. 하지만 빗나갔다. 해무는 침착하게 총을 꺼내들었다. 방아쇠를 당기자 조장의 어깻죽지에서 피가 튀었다.
조장의 부하들의 반응은 한박자 느렸고, 이제서야 도시락을 내던지고 총을 꺼내들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를 향해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357 매그넘. 이전까지 쓰던 .44 매그넘에 비하면 폭발력은 약했다. 하지만 사람의 머리통을 꿰뚫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첫 번째 부하가 쓰러졌다.뒤이어 찰나의 순간을 두고 두 번째 부하가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쓰러진 조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미친년, 뒈지고 싶은거냐."
피가 흐르는 어깨를움켜쥔 조장이 말했다.
"아무리 네년이 살수라 하더라도, 이 사태는 전매청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전매청과 살수회의 관리들이 결정할 일이지."
해무의 건조한 대답에 조장이 입을 다물었다.
설령 전매청이 이 일에 분노한다 하더라도 뒤끝은 없을 것이다. 놈들은 표면적으로 일개 마약상에 불과했다. 설령 조장이 해무의 존재에 대해 윗선에 보고했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해무로서는 그저 임무 수행중에 필요한 일을 했을 뿐이다.
"알겠으면 질문에나 대답해. 네놈들의 상부 조직. 전매청과의 연결고리. 그리고 공장의 위치."
"......우리는 상부조직이 없다. 전매청과 직접 연결되어있다."
"공장의 위치는?"
"모른다."
해무가 조장의 어깨를 밟았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공장의 위치는?"
해무가 재차 물었다. 숨을 헐떡이던 조장이 입을 열었다.
"기타구역 외곽의 8동 건물 1층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떡해야 하지?"
"나도 모른다. 직접 가본적은 없다. 물건은 약속한 장소에서 전달받았을 뿐이다."
조장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거짓은 아닐 것이다. 조장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차 있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머리가 터져 죽는 것을 보았다. 원하는 것은 그저 살아남는 것일 뿐.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비밀이라도 말할 수 있었다.
"알겠다. 믿고 가 보지."
그리고 해무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과 함께 조장이 풀썩 하고 쓰러졌다.
이제 목적지는 명확했다. 해무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기타구역 8동 1층.
마약을 찍어내는 공장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