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화 〉겜블의 규칙 (3) (18/82)



〈 18화 〉겜블의 규칙 (3)
해무는 텅 빈 복도를 걸었다. 중정식의 건물한가운데를 통해 들어온 느지막한 오후의 햇볕이 발치를 비추고 있었다.

높은 인구밀도 탓에 언제나 소음으로 가득찬 곳이 구룡성채였지만 지금 이곳은 달랐다. 주변에 사람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마치 버려진 폐허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뜻하는 사실은 명확했다. 이곳이 성채 중에서도 매우 외곽이라는 것. 그리고 동시에, 거주민들이 이주하는 것을 꺼릴 정도로 위험한 곳이라는 뜻이었다.


공장은 지하실에 있다고 했지.

해무는 마약상들의 조장으로부터 알아낸 사실들을 다시한번 떠올렸다.

마약 공장은 여느 섬유 공장이나 가죽 공장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단속을 당할 위험이 높다. 그래서 유사시에 바로 자리를 뜰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때문에 설비들의 패키징이 잘 되어있어야 한다. 화학 약품들과, 가열 도구들과, 배기 시설들이 모듈화 되어 효율적으로 관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매청은 자신들의 공장을 그렇게 관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공장의 근무자들은 그걸 '이동식 주방' 이라고 불렀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공장에서 마약을 찍어내는데 필요한 설비들은 주방과 큰 차이가 없었고, 단속을 피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마다 간편하게 짐을 싸서 옮길 수 있었다. 그래서 위치가 유출되도 큰 타격이 없었다. 옮기면 그만이니까.

이것은 해무처럼 공장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짜증스런 일이었다. 위치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찾아내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장소의 위치를 비교적 간단하게 알아낸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해무는 조장이 말한 장소에 도착해 멈춰섰다.


눈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몇 개의 기둥이 서 있는 텅 빈 공간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해무는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전매청 산하의 공장이 이렇게 열린 공간에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분명 이곳 어딘가에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우연히 접근한 사람은 그냥 지나쳐 버리겠지만, 공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사람이라면 발견할 수 있는 통로가.


그렇다면ㅡ 바닥인가.


해무는 주변을 경계하며 무릎을 꿇었다. 차갑고 우둘투둘한 콘크리트 바닥의 감촉이 느껴졌다. 위로는 모래 알갱이들이 굴러다녔다.

빌딩의 중정과 필로티 기둥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차례 휘몰아쳤다.

해무는 손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쓸었다.


먼지와 고운 모래가 희미하게 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손으로 더듬자 녹슨 손잡이를 찾을 수 있었다. 해무는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힘차게 들어올렸다.


무게는 상당했다. 경첩도 녹슬어서 더더욱 열기가 쉽지 않았다. 근력이 약한 여자의 몸이라는 점도 한몫 했다.

해무는 이를 악문  힘을 집중했다. 그러자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기압 차이로 인해 열린 틈으로 바람이 후욱 하고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젖혀진 문이 바닥을 때렸다.


해무는 숨을 헐떡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 그 안은 깊은 어둠이었다.


희미한 계단의 윤곽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되는 깊이인지, 얼마나 넓은지 조차도 가늠할 없었다.


그저 웅웅거리며 울리는 바람 소리로, 아래에 넓은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마치 거대한 거대한 지하 공동(空洞)같은 넓은 공간이.

해무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마치 자신을 집어삼키려 일렁이는 듯한 깊은 어둠을 노려보았다.

이 아래에 위험한 것이 있다.

살수로서의 직감이 말했다.


하지만 살수회의 지령을 완수하기 위해 이어진 길은 아래로 내려가는 것 하나 뿐이었다. 또한, 남측 요원들이 구룡방의 마약 공급 루트를 타격하기 원한다면 찾아오게 될 곳도 여기 뿐이었다.

결국 거부권은 없는 셈이었다. 해무는 천천히, 깊은 어둠을 향해 한발짝 내딛었다.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깊지는 않았다. 계단은 고작해야 2층 정도 높이였다. 그 뒤로 앞을 향해 긴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해무는 느리지만 꾸준히 계속해서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복도를 빠져나오자,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이 천장을 따라 매달려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십 개나 되는 해무의 그림자가 벽에 일렁였다.


들어온건가? 이렇게 쉽게?


해무는 쉽사리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전매청의 공장이 이렇게 쉽게 출입을 허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해무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오십 미터 쯤을 이동하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장 입구를 지키는 가드들이었다. 그 희미한 모습이 시야 가장자리에 들어오자 마자 해무는 잽싸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빌어먹을.

숨기 직전 마지막으로 망막에 새겨진 장면은 AK로 중무장한 가드들의 모습이었다. 고작 두명 뿐이었지만 화력의 차이는 컸다. 자동화기로 무장한 가드들이 지닌 화력은, 고작 리볼버 한  뿐인 해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저들을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화력에서 열세라 하더라도, 목표의 숨통을 끊는데 최적화된 살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해무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고작 무장한 가드 둘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침입해있을 가능성이 높은 남한의 요원을 찾아내서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고작 가드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소란을 피워봤자, 궁극적인 목표에서는 멀어질 뿐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해무는 몸을 숨긴 채 기다렸다. 기다리다 보면 조용히 잠입할 수 있는 틈이 생길 것이다.

얼마나 숨죽이고 있었을까. 끼익거리는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기둥 뒤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의 형체가 점점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하얀색 전신 방호복과 방독면을 쓴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동식 주방의 '요리사'들 중 하나였다.

수레 안에는 쓰레기와 잡동사니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분명 약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폐기물이리라.

해무는 그가 지나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요리사가 자신을 지나치자 조용히 뒤를 따랐다.

지하 공간 구석에 도착한 요리사는 수레를 기울여 안에 담긴 쓰레기를 쏟아냈다. 그리고 다시 공장으로 복귀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해무는 그대로 요리사의 목을 비틀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방호복 차림의 요리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였다.


해무는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그의 옷을 벗겼다. 흰색 방호복과 신발, 장갑, 그리고 방독면까지 모두. 그것들을 전부 양복 위에 껴입자, 찜통 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도로 불평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방독면까지 마저 걸친 해무는 시체를 기둥 뒤에 숨기고 수레의 손잡이를 잡아들었다.


공장으로 향하자, 아까 전 보았던 가드 둘이 여전히 AK를 든 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해무는 그 사이로 수레를 밀고 들어갔다. 다행이 방독면을 벗겨 얼굴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쉰 해무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안쪽을 향해 수레를 밀었다. 그러자 잠시 후, '이동식 주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텐트 혹은 임시 막사 같았다. 두껍고 반투명한 비닐 텐트 안에서는 노란색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안에서는 해무처럼 전신 방호복을 입고 방독면을 쓴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구는 약품들이 당긴 통을 옮기고, 누구는 쿠킹 테이블 위에 쌓인 하얀 가루들을 나누고 포장하고 있었다.


해무는 적당한 곳에 수레를 내던지고 안쪽을 탐색했다. 다행이 요리사들은 바빠서 자신의 일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덕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제조실과 포장, 보관실을 샅샅히 확인했다.

모든 구역이 이상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제조실에서는 약이 끊임없이 합성 건조중에 있었고, 보관실에서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비닐 랩으로 쌓인 약들이 차곡차곡 싸여가고 있었다.


그 말인 즉, 아직 남한 측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과연 여기서 얼마나 기다려야 놈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해무는 고민했다.하지만 그 고민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예고없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들켰나?


그게 해무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생각이었다.


하지만 놈들의 보안망에 걸릴만한 요소는 없었다. 아까 전 처리한 요리사도 쓰레기 더미 안 깊숙히 숨겨두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들킬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누군가 다른 침입자가 있다.

자신의 일에 매진하던 요리사들이 우르르 공장 밖을 향해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가드들이 방호복을 뒤집어쓴 해무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해무는 떠날 수 없었다. 자신 외에 이곳에 침입할 사람. 그건 분명 남한 측 요원임에 틀림 없었다.

놈을 찾아야 한다.

해무는 주변에 가드들이 없는 것을 확인 하고 방호복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문을 나서려는 순간, 누군가와 마주쳤다. 양복 차림의 남자였다.


해무와 남자, 둘다 서로를 목격하고 뻣뻣하게 굳어섰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 뿐이었다.

남자의 발차기가 해무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해무는 잽싸게 양팔을 교차에 방어했다. 묵직한 충격이 몸을 강타했다.


공격은 막았지만 완전히 흡수하지는 못했다. 해무의 몸이 붕 떠서 쿠킹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재차 남자의 주먹이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해무는 고개를 돌려 피했고, 빗나간 주먹이 테이블을 때렸다.


테이블이 우지직 하고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해무는 바닥을 굴렀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요리도구들과 트레이, 재료들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리를 휘둘러 남자의 무릎을 찼다. 그러자 그도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


해무와 남자가 뒤엉킨  엎치락 뒤치락 하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어느새 위쪽 포지션을 차지한 남자는 해무의 목을 움켜쥐고 체중을 실어 눌렀다. 숨이 막힌 해무의 얼굴이 검붉게 물들었다.

해무는 온 힘을 실어 남자의 팔꿈치를 꺾었다. 체중을 지탱하던 지지대를 잃은 남자의 몸이 기우뚱했다.


순간 몸이 자유를 되찾았다. 해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닥에 쏟아진 비닐 랩 묶음들. 그중 한 덩어리를 잽싸게 집어들고 놈의 입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남자의 목젖을 푹 하고 찔렀다.


남자가 컥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동시에  안에서 비닐 랩이 터지며  가루가 뿜어져 나왔다.


해무는 남자의 배를 발로 차 쓰러뜨리고, 반대로 이번에는 자신이 위에 올라타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남자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쓰러진 그가 쿨럭일 때마다 흰 가루들이 해무의 손가락 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한번은 크게.  다음은 작게. 그 다음은  작게. 그리고는 이내 조용해졌다.


해무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남자 얼굴은 분칠을 한 것처럼 흰 가루로 뒤덮혀 있었다.


그제서야 해무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했다. 수호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진에서 본 남측 요원들 중 한명이었다.

놈들이 공장을 노릴 거라는 해무의 예측이 적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적중이 아니었다. 지금  곳에 침입한 것은 이 한명 뿐. 그마저도 요원인 수호가 아니라, 수호의 부하들 중 한 명 뿐이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공장을 노리고 있었다면 성채에 들어온 인원 전부가 이곳에 잠입했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리더인 수호가 잠입하거나.

하지만 이런 의문을 해결할 여유는 없었다. 짧은 싸움이었지만 요란한 소음을 냈다. 가드들이 곧 찾아올 것이다.

빠져나가야 한다. 지금 당장.


그렇게 생각한 해무는, 이제 시체가 된 남한 요원의 옷깃을 잡고 일으켰다. 그리고 어깨에 들쳐멘  이동했다.

멀리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입구로 탈출은 불가능하다. 다른 통로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해무는 시체를 끌고 안쪽으로 향했다. 아까 처음에 마주쳤던 요리사가 버린 것은 전부 고형 폐기물 뿐이었다. 하지만 약을 만드는 공정에는 액체 폐기물도 분명 나올 터. 그걸 처리하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해무는 그 통로를 찾아냈다. 아래쪽으로 뚤려있는 커다란 원형 파이프. 딱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였다.


 통로를 통해 탈출하려는 순간, 폐기물 처리실의 비닐 문 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따라잡혔다.

해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AK-47에서 발사된 7.62mm 탄이 몸을 때리는 둔중한 타격이 느껴졌다. 그리고 해무는 생각할 틈도 없이, 폐수 배출용 통로를 향해 몸을던졌다.


철푸덕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이 온몸을 덮쳤다. 격통이 뼈를 타고 흘렀다.


해무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지하에 고인 오수에서 악취가 풍겨왔다. 하수구의 악취에 화공약품의 쏘는 듯한 냄새가 섞여있었다.

해무는 남자의 시체를 질질 끌고 물가로 나왔다. 그리고 털썩 쓰러졌다.

숨을 헐떡일 때마다 가슴팍이 오르락 내리락 하기를 반복했다. 잠시 후 호흡이 잦아들자 해무는 시체의 자켓 단추를 풀었다.

가드들이  총알은 전부 시체의 몸에 박혀 있었다. 흘러나온 피가 흰 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해무는 시체의  안을 뒤졌다.


나온 것은 지갑. 가짜 신분증. 현금 몇 장.


특이할 것은 없었다. 그러던 와중, 주머니에서나온 무언가가 해무의 시선을 끌었다.


칩......?

구룡성채에 잠입한 적국의 요원이 지니고 있기에는 이질적인 물건.

카지노에서 사용하는, 백만원짜리 검은색 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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