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겜블의 규칙 (6) (21/82)



〈 21화 〉겜블의 규칙 (6)

수호는 맞은편의 테이블 빈 자리에 앉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흰 눈썹에  머리칼을 가진, 인형같은 외모를 지닌 소녀. 나이는 열일곱 정도 되었을까. 누가 보더라도 혹할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보니 성격은 더러울 것 같았지만.

한가지 웃기는 건, 정장 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 이 도시에서 여자들은 서비스를 위한 목적의 옷을 입었다. 식당 점원의 앞치마, 혹은 창관에서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옷들 말이다. 당장 이곳 카지노에서 접객원와 딜러들이 입은  부터가 그랬다. 가슴과 허벅지, 엉덩이를 대놓고 드러낸 옷차림이었으니.


하지만 정장을 입은 여자는 저 소녀가 처음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성채 안에서 나름 권력자 행세를 하는 집안의 아가씨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난 귀족가 자제분이라 해도 이 판에 낀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집안 출신이건간에 관계없이, 게임으로 재이와 승부해서 이기지는 못할 테니까.


동시에 흥미로워졌다. 저 까칠해보이는 아가씨가 게임에서 지고 나서 보여줄 모습이.

화를 낼까? 아니면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히며 도망칠까?

그녀가 보여줄 모습을 기대하며 수호는 테이블 위를 향해 관심을 집중했다.

어디 한번 실력좀 보자고.









ㅇ ㅇ    ㅇ





"칩이 없으면 참가하실 수 없습니다. 먼저 칩을 구매하셔야 합니다."


새로 자리에앉은 해무를 향해 딜러가 말했다.

해무는 양 옆을 확인했다. 먼저 앉아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앞에 산더미같은 칩들을 쌓아두고 있었다. 앞이  비어있는 것은 해무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칩은 교환소에서 구합니다만, 각 게임 테이블에서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해무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딜러에게 건넸다.

"얼마나 드릴까요?"


"전 판이 얼마짜리였지?"


"인당 평균 5억원 입니다."

"그럼 5억원."


딜러는 게임 테이블 밑에서 리더기를 꺼내 카드를 긁었다. 그러자 리더기가 흰 종이를 토해냈다. 5억원짜리 결제 영수증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교환소에서 접객원에 자신의 눈앞에 검은색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안에는 5억원어치 칩이 가득 담겨있었다.

해무는  안에서 하얀색 칩을 하나 쥐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안에서 굴리며, 자신의 맞은 편에 있는 사람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소년과, 그 뒤에  있는  남자였다. 셋 모두 아까 전부터 해무가 주의깊게 관찰하던 상대들이었다.

 번째로는 수호. 아까부터 한결같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테이블과 참가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남한에서 파견한 요원.


남한의 중앙안보부 소속 요원이라 하면, 구룡방 살수회의 갑종살수 못지 않은 수준의 인재들.  앞의 수호 또한 갑종살수 수준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주의해야 할 상대였다.

 번째로는 테이블에 앉아있는 소년. 왜소한 체격, 가느다란 뺨. 힘을 쓰는 타입은 아니다. 지령서의 내용이 맞다면 '재이'라는 이름일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불명이지만 그 또한 수호와 마찬가지로 남한정보기관 소속이라는건 분명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이 작전의 핵심일 것이다. 뛰어난 완급 조절과 블러핑을 이용해서 전업 겜블러들을 털어먹었다. 카지노에서 구룡성채의 돈을 뜯어내겠다는 계획도 분명 재이라는 존재를 상정했기에 추진할 수 있는 계획일 것이다.

그렇게 둘의 모습을 머릿속에 새겨넣은 해무는 마지막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동양계 남성. 하지만 한국인이나 일본인은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인인가. 아까 전 수호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또한 남한의 작전에 포함된 멤버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살수회의 지령서에도 그와 같은 존재는 언급된 바 없었다. 그렇다면 현재 구룡성채에서 그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셈이었다.

그리고 해무는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주머니 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해무는 시선을 고정한 채 전화를 받았다.


[갑종살수 해무, 대체 무슨짓이냐! 살수회의 공금을 5억원 씩이나ㅡ]


전담 관리의 목소리였다. 해무는 대답 대신 뚝 하고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문자를 보냈다.

[제목 : 신원 확인 요망]


[남한 정보기관 소속으로 확인된 수호,재이 외 중국계로 보이는 1인.]

사진 한 장도 첨부해 두었다. 아까 전 게임을 관찰하면서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재이, 그리고 그 뒤에서 수호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 세 명의 인물이 전부 한 컷 안에 담겨있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게임 테이블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참가비를 주시기 바랍니다."


딜러의 요청에 참가자들이 백만원짜리 칩을 내밀었다. 하지만 해무는 참가비를 지불하는 대신, 생각에 빠져있었다.


과연 자신이 게임으로 놈들을 막을 수 있을까?

그리고 답은 명백했다.

불가능.

이 작전을 위해, 남한은 게임에서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는 패를 동원했다. 재이라는 소년 말이다. 재이의 능력은 오직 연산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고, 자신의 실력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설령 이길 수 없다 하더라도, 자신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가야만 한다.

앞으로의 싸움을 위해.

그렇게 생각하며, 해무는 참가자들  마지막으로 백만원짜리 칩을 테이블 앞으로 내밀었다.






ㅇ     






해무가 5억을 전부 잃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

삼십 분  까지만 해도 5억원어치 칩이 쌓여있던 테이블은 지금은  비어있었다.

해무의 수준은 다른 참가자들과 비등한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해무의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전업 겜블러였으며, 해무는 살수였으니까.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그것은 해무가 재이를 절대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보통의 전업 겜블러 수준으로는 재이를 이길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전 판에서 드러났다. 겜블러들이 재이를 쓰러뜨리기 위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달려들었지만, 결국 마지막에 돈을 따가는 것은 재이였다.


그러니 자신이 이기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휴식이 있겠습니다. 게임은 십오분 뒤에 재개됩니다."

딜러의 안내와 함께 블랙잭 테이블이 인터미션에 들어갔다.

해무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에게는 15분짜리 휴식일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아니다. 돈을  써버렸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더이상의 게임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해무는 쓸데없이 테이블 사이를 서성거리는 대신에 곧바로 바 테이블로 향했다.


"주문은?"

 앞에 앉은 해무를 아까 전의 바텐더가 다시 맞았다.

"김렛. 드라이하게."

알콜이 잔뜩 들어간 칵테일이었다. 상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오늘은 더이상 게임을 할 수 없다.


주문을 받은 바텐더는 진과 라임, 그리고 각설탕을 바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차갑게 식혀둔 셰이커에 각설탕을 넣어 머들러로 부수고, 차가운 얼음을 채우고, 라임즙과 드라이 진을 정확히 계량해서 부었다.


짧고 강한 셰이킹. 이어서 역시 차갑게 식혀둔 글라스에 칵테일을 따랐다. 뿌옇게 셰이킹된 김렛이 잔을 채웠다. 그리고 완성된 칵테일이 해무의 앞에 놓였다.


"팁은 없어. 다 잃었거든."


잔을 받아들며 해무가 말했다. 바텐더는 알고 있다는 듯 피식 하고 웃어보였다.


칵테일을 한모금 삼켰다. 찌르는 듯한 산미가 혀를 타넘고 목 안으로 흘러내려갔다. 게임에 패배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맛이었다.

"나도같은 걸로 한잔."


어느새 옆에  있던 남자가 술을 주문했다. 수호였다.

바텐더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수호가 입을 열었다.

"운이 안 좋았군."

해무는 무시했다. 바텐더가 셰이킹을 하며 칵테일을 만드는 소리가  사이를 채웠다.

"아니면 질 걸 알면서도 끼어든 건가?"

재차 자신을 향한 질문에 해무는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속셈이지. 설마 눈치챘나?


뭐, 어찌돼도 상관없다. 자신은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 무시하면 그만이다.

수호는 관찰하는듯한 눈으로 해무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해무는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된 이후로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을 수십, 수백 번 경험했다. 얼굴부터 몸을 지나 다리까지 훑는 끈적한 시선들. 정신은 남자인 자신마저도 소름이 돋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수호의 시선은 달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상대방을 파악하고 분석하기 위한 것. 정보기관에 있는 사람이 갖고 있는 눈이었다.


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잠시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던 해무는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지금  놀리려는 거야? 그까짓 푼돈, 잃어도 아무렇지 않아."

시선은 수호를 쏘아보는 채였다. 그리고 기분은 최악이었다.

지금 자신은 제멋대로에 콧대높은 귀족 집안 여자애 흉내를 내고 있었다. 아무리 남한 정보기관에게 정체가 발각되는걸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스스로 여자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자니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렛 한잔, 나왔습니다."

바텐더가 수호의 앞에 잔을 내밀었다. 말없이 해무를 응시하던 수호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잔을 받아들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많이 잃었으니 그건 내가 사지. 아까 그쪽이랑 게임한 사람, 내 친구거든."

상대를 꿰뚫는듯한 날카로운 눈빛은 사그러든 채였다.


해무는울렁이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일단은 의심을 거둔 모양이었다. 좋은 일이었다.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는건 피할 수록 좋으니까.

하지만 그 뒤를 이은 감정은 치욕스러움이었다.


남한의 요원도 속아넘어갔다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이 한낱 여자애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누가 봐도 자신은 여자의 모습이다. 그것도 꽤나 반반한여자의 모습. 그러니  녀석이 속아넘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엉망진창인 기분 속에서 해무는 한 차례 더 쏘아붙였다.

"한가하게 술이나 사고 있을 여유가 있나? 당신 친구는 게임 때문에 바쁜 모양인데."


"그저 놀러 왔을 뿐이야. 그런데 게임보다는 술이 마시고 싶어져서."

"그렇겠지."


해무의 까칠한 대답에도 수호는 묵묵히 술을 마셨다.

"나는 주환. 그쪽 이름을 듣고 싶은데."


잔을 반쯤 비운 수호가 문득 생각난듯 말했다. 가짜 이름이었다. 당연히 해무도 가짜 이름으로 대응했다.


"상아. 이상아."


"잘 어울리는 이름이로군."


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남은 김렛을 한번에  안으로 털어넣었다.

잠시 후, 인터미션이 끝나고 게임이 재개된다는 딜러의 안내가 들려왔다.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은 해무 쪽이었다. 게임 테이블이 아닌, 카지노 출입구 쪽이었다.


"벌써 떠나는 건가?"

"그쪽처럼 도박 중독자는 아닌지라."

수호는 부정하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일도 오는데. 그쪽은?"


"글쎄. 어쩌면."

그렇게 애매한 대답을 남기고 해무는 바를 나섰다. 수호도 블랙잭 테이블을 향해 돌아갔다.

카지노를 떠나며 해무는 머릿속으로는 지금까지 지켜본 놈들의 게임을 복기했다.  추세대로라면 놈들이 정말 천억원 이상을 따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막아야 한다.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금전적인 지원, 그리고 최소한 재이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수준의 겜블러가 필요했다.


그걸 위해 할 일은  하나였다.

살수회를 찾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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