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겜블의 규칙 (8)
카지노의 개점은 오후 한시. 해무가 도착한 것은 두시 쯤이었다.
수호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해무가 카지노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확인한 수호가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척을 했다.
해무는 무시하고 교환소로 직행했다. 손에는 검은색 가방이 들려 있었다. 살수회에서 받은 지원금이었다. 원래는 50억을 요청했지만 실제로 내준 것은 30억 뿐이었다.
"전부 칩으로 교환해줘."
그렇게말하며 가방을 통째로 내밀었다. 접객원이 안에 담긴 현금을 차곡차곡 꺼내 지폐 계수기에 담는 모습을 바라보며 해무는 생각했다.
남한의 요원들. 놈들을 이기는건 불가능하다.
살수는 멍청해서는 안된다. 빠른 반응속도, 동체시력, 날카로운 감과 결정력. 전부 중요한 요소였다.
임무 중에 받아들이는 정보를 처리하기 위한 두뇌 또한 뛰어나야 한다. 그저 피지컬만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당연히 해무 또한 살수로서의 조건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머리 싸움에 특화된 상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놈들은 이 작전을 위해 엄선된 자들이다. 자신도 겜블에는 어느정도 재능이 있지만, 놈들의 브레인인 재이는 또 한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이쪽에서도 뛰어난 겜블러가 필요하다.
하지만 과연 누가 있을까.
살수회의 관리들?
글쎄. 물론 관리들도 성채에서 특별히 머리 잘 돌아가는 놈들 중에서 엄선된 자들이다. 하지만 협조가 되지 않았다. 놈들도 바쁠 뿐더러, 해무는 자신의 담당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다른 관리들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ㅡ 공안쪽 관리들?
자연스레 해무의 머릿속에서는 하나뿐인 형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연.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는 다른, 자신과 똑같은 외모의 동생.
하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해연이라니, 말도안되는 소리다.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관계다. 애초에 이쪽에서도 도움을 청할 생각따윈 없었다. 놈의 도움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게 낫다.
"여기 칩입니다. 전부 삼십억 원 어치입니다."
접수원이 내미는 가방을받아들며 해무는 생각했다. 어쩌면 다른 선택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겜블에 뛰어난 자. 그리고 살수회와 이해관계가 없는 자. 경우에 따라 자신에게도 협력할 수 있는자.
그리고 아마도, 이 카지노 안에서 가장 베일에 싸여 있는 존재.
세브린.
드래곤 레이디 세브린이 있었다.
ㅇ ㅇ ㅇ
해무는 바에 앉았다.
옆에서는 술에 취한 여자가 혀 꼬인 목소리로 접객원을 향해떠들며 추근대고 있었다. 은은한 광택이 이는 새틴 치파오 차림에, 어깨 위에는 여우털로 만든 숄을 걸치고, 한 손에는 검은색 쥘부채를, 다른 한 손에는 가늘고 긴 담뱃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였다.
"뭘 드릴까요. 오늘도 김렛?"
어느새 나타난 바텐더의 말에 해무는 손을 내저었다. 아직 한창 일을 할 때다. 술을 마시기에는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러자 잠시후 눈앞에 버진 쿠바 리브레가 놓였다.
"서비스에요. 오늘은 많이 따길 바래요."
바텐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야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해무는 콜라를 받아들었다. 그때까지도 옆에 앉은 여자는 계속해서 접객원에게 추근대고 있었다.
"드래곤 레이디."
해무가 나지막히 말했다.
"드래곤 레이디 세브린. 맞나?"
여자가 멈칫하며 굳어섰다. 연신 수다스럽게 떠들어대던 그녀의 입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옆에서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추근거림을 받아내던 접객원도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자리를 떴다.
"이런, 거의 다 잡은 물고기였는데."
여자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해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스타일이었는데 어이없이 놓쳐버렸어. 고작해야피냄새 풍기는 살수 하나 때문에 말야. 대체 어떻게 보상할 생각이야?"
"......나에 대해 알고 있나?"
"아니, 몰라."
세브린이 말했다.
"뭐, 어떤 살수가 얼마 전에 이상한 병에 걸려서 여자가 됐다는 소문은 들었지. 에이시스라던가? 어쩌다 그런 병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됐어. 그 몸으로 살수 일을 계속하기 쉽지 않을 텐데. 뭐,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앞으로살면서 마주칠 일이 있을까 싶은 상대의 이야기지만."
"......그렇군."
그리고 해무는 콜라를 한 모금 삼켰다. 타는 목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바텐더가 그러던데. 당신 실력이 뛰어나다고."
"물론. 음주가무는 내가 전문이지. 주량이 좀 되거든. 하루종일 여기서 고주망태가 되어있는데도 아직 간이 쌩쌩하다고. 머리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마 나도 모르는 새 뇌혈관 몇군데가 쪼그라들었을지도 모르지. 별 상관 없지만. 원하면 당신도 한잔 해. 얼마든지 살께."
"술이 아니라 겜블 얘기다."
상대방의 술기운 섞인,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에 짓눌릴 듯한 기분으로 해무가 말했다.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상대는 그저 만취한 여자로 보이지만, 그것이 그녀의 본모습은 아닐 것이다.
드래곤 레이디 세브린. 카지노의 괴수. 겜블 하나만으로 구룡성채의 카지노를 털어먹은 여자.
어설픈 실력으로 구룡성채를 엿먹이는건 불가능하다. 분명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남한의 요원들 이상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교섭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긴장감으로 머릿속을 다잡으며 해무는 본론을 꺼냈다.
"당신에게 겜블을 의뢰하고 싶은데. 이곳 카지노 안의 누굴 상대해 줬으면 좋겠군. 기간은 지금부터 내일까지. 겜블 종목은 미정. 목표는 상대방의 모든 칩을 따내는 것."
세브린은 해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담뱃대에서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옆으로 지나가는 또다른 치파오 바니걸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녀 또한 세브린의 그런 모습이 익숙한듯 손으로 슬쩍 밀쳐내고는 게임 테이블을 향해 술을 서빙했다.
해무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세브린은 앞에 놓인 술을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한참동안 천천히 얼음을 씹어삼킨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얼굴은 무감정했다.
"목적이 돈이 아니라 상대방의 몰락이라. 의아스럽군. 보통 타인의 파멸을 원하는 자는 결국 본인이 파멸에 이르기 마련이지. 그걸 모를 사람도 아닐 텐데."
"그건 네가 신경 쓸 바 아니야."
"아니, 충분히 신경 써야 할 요소지. 복잡한 일에 휘말리다 보면 어느새 내 목숨까지 위협받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더라고."
그렇게 말한 세브린은 빈 술잔을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따.
"설마 중국이나 남한의 요원들이 카지노를 털겠다고 찾아오기라도 했나? 멍청이들이 아니고서야 그럴리가 없겠지. 어지간한 실력과 계획이 따라주지 않는 이상, 겜블을 위해 성채 안으로 기어들어오는건 바보같은 짓거리니까. 아, 어쩌면 정말 찾아왔을 수도 있겠군. 놈들이 멍청하다는걸 잠시 깜빡했어. 하지만 왜굳이 겜블로 상대하려는 심산일까? 한국 놈들이건 중국 놈들이건 갑종 살수들이 다 죽여버리면 그만인데.실력이 비등하더라도 여긴 결국 성채 안. 살수회가 유리한건 당연한 일이잖나. 내가 생각하지 못한 요소가 있을까? 설마, 미국 놈들까지 같이 기어들어왔을라고."
해무는 침을삼켰다.
세브린은 숨조차 쉬지 않은 채 두서없는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쏟아내는 말은 정확히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종잡을 수 없는 상대였다.
정신차리자.
상대는 드래곤 레이디다. 아무에게나 붙는 이름이 아니다. 살수과 같은 무력은 없을지언정, 그럼에도 그녀는 위험한 존재였다.
겜블에 능하다는 것은 카지노의 보드 위에서만 그렇다는 뜻이 아니리라. 모든 면에서의 전략, 추리, 그리고 판단과 결정에도 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말에 정신을 홀리지 않으려 애쓰며 해무는 입을 열었다.
"이쪽에서 자금으로 20억을 대지. 딴 돈은 전부 네가 가져도 상관 없다. 대신 놈들의 돈을 전부 털어내면 돼."
"흥미 없어. 돈은 넘치거든. 설령 떨어져도 다시 와서 따면 그만이야."
세브린이 품 안의 부채를 펼쳐 흔들며 말했다.
예상대로의 대답이다. 그녀가 돈이 많다는건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카지노를 털어먹은 돈과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해무는 그녀에게 제시할 다른 미끼가 있었다.
"돈이 많아봤자 죽으면 아무 쓸모 없지. 죽음이 두렵지 않나?"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를 죽이겠다고?"
"그럴리가."
해무가 말했다.
"너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이 카지노는 물론이고, 구룡방이나 다른 조직들도. 여자 주제에 남자들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자신을 깔아내려보는 꼴이 맘에 안드는 모양이더군."
"그래서?"
"살수회의 공식적인 보호를 제공하지. 네게도 필요한 일일 거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담뱃대를 폐 끝까지 깊게 빨아들인 세브린은 잠시후 짙은 연기를 뿜어내고는 말했다.
"흥미로워."
팔꿈치까지 오는 새틴 장갑을 낀 손가락 끝이 해무의 턱을 치켜올렸다.
"남자의 정신을 담은 여자의 몸이라. 게다가 이토록 매혹적이라니."
손끝은 해무의 목덜미, 어깨를 지나 허리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 손이 자신의 몸을 스칠 때마다 해무의 몸이 움찔거렸다.
"카지노건, 구룡방이건,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무래도 좋아. 나는 그저 하루하루의 쾌락만 좆을 뿐이거든. 죽음도 내게는 그다지 큰 공포가 아니야. 그보다는 개인적인 쾌락에 흥미가 많지. 술도, 도박도. 그리고 당연히 섹스도."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낸 세브린이 이어서 말했다.
"당연히 남자와도 여자와도 잠자리를가진 경험이 있어. 전부 즐거웠지. 하지만 아직까지 남자의 자아를 지닌 여자와 자본적은 없군. 분명, 나름의 즐거움이 있을 것 같은데."
해무는 얼굴을 찌푸렸다.
세브린의 제안. 자신과의 잠자리를 조건으로 걸겠다는 뜻이었다.
그 내용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자신의 몸은 여자일지언정, 정신만큼은은 남자다. 당연히 여자의 동침 요구를 거리낄 이유가 없다.
하지만한 가지가 마음속에 껄끄럽게 남아있었다.
자신의 몸이 댓가로 팔린다는 것. 그 사실이 은근한 불쾌감으로 남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스멀거리고 있었다.
"싫다면 거절해도 좋아. 좀 아쉽긴 하지만 세상에는 다른 자극적인 즐거움도 많거든. 돈만 많다면야 얼마든지 즐길 수 있지."
세브린이 샴페인 잔을 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길 수 있나?"
어느새 해무의 손은 그녀의 팔을 잡아 멈춰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세브린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나를 드래곤 레이디라고 부른다며?"
그렇다. 드래곤 레이디 세브린.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웃기지도 않은 별명이지만, 그래. 그 이름이 결과를 증명할 거라고 해 두지."
용이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