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겜블의 규칙 (9) (24/82)



〈 24화 〉겜블의 규칙 (9)

세브린이 바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은 카지노 안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가져왔다.

가볍게 갬블을 즐기기 위해 놀러온 사람들은 그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화려한 스타일을 보고 흥미와 음흉함을 담은 시선을 끈적하게 보내는 남자들이 몇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카지노에 눌러앉은 전문 겜블러들의 반응은 달랐다.

세브린이 최근 수 개월 동안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게임 테이블 근처에는 얼씬도 않은 채 칵테일 바에서 접객원들과 노닥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언제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다시 카지노를 휘저어 놓을지 모르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하는 잠룡(潛龍). 그것이 지금까지 그녀의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지금,  잠룡이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브린이다.


세브린이 다가온다.


용이 움직인다.

불안한 시선이 겜블러들 사이를 오갔다. 모두가 숨죽인 채 그녀의 자그마한 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에도 이목을 집중했다.

하지만 세브린은 그런 모습에 한 줌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이곳의 진정한 주인공이라도 되는  마냥, 당당하게 게임 테이블들 사이를 걸었다.


바카라 테이블을 지났다.

룰렛 테이블도 지났다.


그리고 블랙잭 테이블도 지난 그녀가 멈춰선 곳은 포커 테이블. 제이가 있는 곳이었다.

"흐응..... 텍사스 홀덤?"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영 내키지 않는다는 투였다.


하지만 발걸음을 무르지는 않았다. 세브린은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한 손에는 담뱃대를, 다른  손에는 샴페인 플루트를 쥔 채였다.


해무도 그녀를 따라 옆 자리에 앉았다. 비록 세브린에게 게임의 일부를 맡겼지만, 그렇다고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기만 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세브린이유명한겜블러라는 사실 뿐. 그녀의 실제 실력이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당연히 백 퍼센트 신뢰하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임무의 향방을 그녀에게 거는 것이야말로 가장 멍청한 도박이리라. 살수는 신뢰하지않는 상대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ㅡ 총알 대신 카드와 칩이 오가는 전장(戰場)에서도 자신은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해낼 있었다.

해무는 자리에 앉은 플레이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주시했다. 마침 건너편에 앉아있는 플레이어는 재이. 그리고 그 뒤에는 수호와 제리 창이 서 있었다.

수호의 시선은 해무에게 박혀있었다. 찌푸린 얼굴. 불쾌함과 의문이 담긴 표정이었다. 해무는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무시하며 테이블 뒤의 딜러를 향해 물었다.

"참가비는?"


"먼저 앉아계셨던 참가자들의 동의로, 참가비 일천만원에 시작되는 게임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참가비 천만원? 재밌겠네."


세브린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해무의 가방에서 한 무더기의 칩을 꺼내 자신의앞에 쌓아올렸다. 그리고  중에서, 천만원 짜리 칩을 꺼내 앞으로 굴렸다.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데굴데굴 구른 칩은 딜러의 앞에서 한 차례 둥글게 돌더니 그대로 톡 하고 넘어졌다.


"참가비 확인했습니다."

딜러가 히죽 웃으며 칩을 집어들었다.

그런 세브린의 모습을 재이가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재이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는건 해무였다.


재이는 세브린을 모른다.

해무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앉아있는 텍사스 홀덤 테이블, 이 곳의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세브린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구룡성채의 다른 그 누구보다도 무자비하고 위험한 겜블러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직 재이만이 모른다.


재이는 아직 세브린과 게임을 해본적이 없다. 그녀의 실력이 어느정도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저 분위기를 통해 그녀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짐작할 뿐이리라.

물론 재이의 목표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다른 겜블러들은 모두 쓰러뜨려야  상대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 이기고 돈을 따낸다. 그리고 쓰러뜨려야 할 '다른 사람들' 에는 물론 세브린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진 한가운데로 침입한 남한의 요원들에게 있어서, 세브린이라는 예상치 못한 비수는 큰 위협이었다. 순식간에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날카로운 단검같은 존재. 명백히 그들은 아슬아슬한 난간 위에 서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의지는 가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단순히 의지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뛰어난 능력이 수반된 의지력은 능히 운명과 미래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재이는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재이를, 과연 세브린이 이길 수 있을까?


한쪽은 남한 정보기관에서 파견한 해결사. 한쪽은 성채에서 한때 이름을 날렸던 드래곤 레이디.


둘 누가 우세할지는 해무도 알지 못했다. 어차피 지금 고민해봐야 무의미하다. 곧있으면 자신은 그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꺼림칙한 기분이 남아있었다. 세브린의 제안. 게임에서 승리하면 댓가로 해무의 몸을 취하겠다는 거래. 자신을 한낱 창녀 취급하는 그 말에, 마치 목에 오물이 걸려있는듯한 굴욕감이 감정을 흐트려놓고 있었다.

그런 해무의 기분에 관계없이 게임은 시작되었다.

딜러가 패를 돌렸다. 각자 두 장씩. 참가자는 재이와 세브린, 해무를 포함해서 총 여섯 명.

참가자가 각자의 손에 일곱 장의 패를 쥐는 클래식 포커와 달리,텍사스 홀덤은 손에 두 장씩을 쥐고 바닥의 다섯장을 공유하는 게임이다. 당연히 그 승부는 사소한 차이로 결정될  밖에 없었다.

해무는 앞에 놓인카드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참가자들은 모두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해무는 양 손으로 감싸쥔 패를 확인했다. 클럽 9 한장과 스페이드  한장. 특별할 것 없는 패였다.


"베팅을 시작하겠습니다."


딜러의 선언과 함께 베팅이 시작됐다. 순서는 재이부터, 세 명의 겜블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무와 세브린이었다.

재이는신중하게  두 개를 내밀었다.

"레이즈. 기본 이천만원입니다."

다른 모두가 무난하게 콜을 불렀다. 가운데 쌓인 칩은 전부 1억 2천만원.

모두의 액션이 끝나자 딜러가 공유 카드  장을 오픈했다.

다이아몬드 3, 스페이드 7, 다이아몬드 9. 해무의 카드로 9 페어를 만들수 있는 조합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해무는 재이와 세브린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재이는 새로운 상대인 세브린을 파악하기 위해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반면 세브린의 태도는 느긋했다. 아까 전, 바에 앉아서 술을 마실 때와 하등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게임 도중에도 간간이 샴페인으로 목을 축이고 있을 정도였다.

"네 번째 카드 오픈. 그리고 두 번째 베팅입니다."

딜러가 카드를 한장 더 뒤집으며 선언했다. 이번에 나온 카드는 클럽 3. 바닥으로 페어가 만들어졌다. 이제 해무의 패는 투 페어.


그리고 또다시 베팅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재이는 레이즈. 4천만원어치칩을 더미에서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두번째 플레이어는 폴드. 세번째와 네번째는 콜을 불렀다.

해무는 자신의 차례에 패를 다시한번 확인했다. 9와 3으로 만든  페어. 나쁘지 않다.


"콜."


그리고 해무도 칩을 꺼내 테이블 가운데의 더미에 얹었다. 다음은 세브린의 차례. 하지만 세브린은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카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지막 참가자분. 액션을 결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 그래그래~"


딜러의 요청에 마지못해 성의없이 대답한 세브린은 카드를 바닥에 덮었다.

"접을래. 폴드."

"폴드 확인했습니다."

딜러가 세브린의 카드를 회수했다.


해무는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 카드에 집중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전혀 평온하지 못했다.세브린이 게임을 접었다. 그것도 어이없을 정도로 태평한 모습으로.


물론 겜블을 하다보면 당연히 포기해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해무가 동요하는 사이에 딜러가 마지막 카드를 오픈했다. 각자의 베팅 찬스가 지나가고 어느새 오픈만이 남았다. 바닥에 깔려있는 다섯장의 카드는 각각 다이아몬드 3, 스페이드 7, 다이아몬드 9, 클럽 3, 스페이드 퀸.

"그러면, 모든 카드를 오픈합니다."

딜러의 말에 마지막까지 따라온 네 명의 참가자들이  안의 패를 공개했다.

해무의 패는 아까와 같은 투 페어.

다른 겜블러들은 각각 바닥의  페어와 7, 3으로 만든 투 페어. 아직까지는 해무가 우위였다. 남은 것은 재이 뿐.


그리고 재이가 패를 뒤집었다.


드러난 카드는 각각 하트 3과 클로버 킹.


"트리플 확인했습니다. 첫 번째 참가자 분의 승리입니다."

테이블 한가운데 쌓인 칩더미가 전부 재이의 앞으로 돌아왔다.

'동요하지 말자.'


해무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겜블은 단판 승부가 아니다. 정밀한 확률 계산을 바탕으로 반복해가며 승률을 올리는게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가다듬은 마음으로 시작한 번째 게임이 흘러가는 양상도 첫 번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일 먼저 세브린이 죽고, 그다음으로 다른 참가자들이 따라서 카드를 접었다. 마지막까지 접전 끝에 해무는 아무런 패도 만들어내지 못했고, 에이스를 낸 재이가 판을 가져갔다.


세 번째, 네 번째 게임도 비슷하게 굴러갔다. 재이의 날카로운 수읽기와 거침없는 베팅이 해무는 손쓸 틈 없이 칩을 잃어갔다.

다섯 번째 판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뒀지만 재이가 일찍 접은 판이었다. 벌어들인건 고작해야 일억원. 잃은 돈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판에서도 세브린은 첫 번째 베팅 찬스에서 패를 폴드했다.


"게임이  안풀리나 보네요?"

고작해야 다섯 번의 게임으로 눈앞에 백억원 가까운 칩을 쌓아둔 재이가 처음으로 세브린을 향해 말을 걸었다. 뒤에서 멈칫하는 수호의 모습으로 보건데, 재이가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은 분명 처음 있는 일 같았다.

"패를 던지는게 잘 안풀려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해? 그건 이곳에서 돈을 버는것에 혈안이 된 잡배들이나 하는 생각인데 말이야."


샴페인을 한 모금 삼킨 세브린이 말했다.

"패를 던지는것도 게임을 즐기는 방법중 하나지. 카지노는 돈을 버는 곳이 아니란다, 꼬마 신사."


그 모습을 보며 해무는 긴장했다.

세브린의 말. 일견 패배자의 날선 핑계처럼 보이지만, 명백한 도발이었다.


저들이 돈을 따기 위해 혈안이 된 잡배들이라고?

아니, 틀렸다. 저들은  이상이다.


놈들은 남한의 요원. 만약 목표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응당 피를 뿌릴 각오가 되어있는 야수들이었다.

과연 용이 야수들을 잠재울  있을까.

해무는 세브린에게 얼마나 기대를 걸어야 할지 속으로 재며 게임을 속행했다.


어느새 여섯번째 게임, 그 마지막 베팅 찬스.  바닥에 깔려있는 패는 각각 스페이드 3, 하트 4, 하트 5, 다이아몬드 잭, 클럽 퀸. 충분히 스트레이트를 기대해볼 수 있는 조합이었다.

마지막까지 따라온 참가자는 재이와 해무, 그리고 세브린 뿐.


해무는 자신의 패를 확인했다.  장의 카드는 각각 스페이드 잭과 하트 잭. 트리플의 완성이었다.


해무는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입을 열었다.


"레이즈, 삼십억."

그 금액에 순간 참가자들의 숨이 멈췄다. 그리고 멈칫한 것은 딜러도 마찬가지였다.

"참가자분, 지금 갖고계신 칩은 오억원 뿐입니다. 나머지 이십오억원 어치는 어떻게 충당하실 생각이신가요?"

"지금 당장 결제하지."


그렇게 얘기하며 해무는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하지만 딜러는 곤란한 얼굴이었다.


"베팅은 갖고계신 칩의 한도 내에서 가능합니다. 게임 도중에 칩을 추가로 구매해서 베팅하는건 원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다른 참가자들이 동의한다면?"


그렇게 말하며 해무는 아직까지 카드를 쥐고있는 두 명의 참가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브린과 재이.

"난 좋아."

세브린이 흔쾌히 말했다.


"나도 남은 칩이 십억원 밖에 없으니, 이십억원 어치만  줘."


그렇게 말하며 세브린도 품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재이 뿐.

재이는 동요하지 않은 채 자신의 손 안에들린 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무의 뺨을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과연 따라올까. 아니면 접을까. 만약 따라온다면, 블러핑일까. 아니면 정말 끗발이 좋은 것일까.

그리고 재이가 입을 열었다.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목소리. 하지만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 또한 30억짜리 마지막 베팅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모든 참가자분이 동의하셨으므로 예외적인 베팅을 인정하겠습니다."

딜러가 카드 리더기를 꺼내 결제했다. 해무의 카드로 20억, 세브린의 카드로 10억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참가자의 앞에 새 칩이 쌓였고 곧바로 그 더미를 모두 테이블 한가운데로 밀어넣었다.

"베팅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카드를 오픈합니다."

딜러의 지시에 해무가 카드를 뒤집었다. 만들어진 패는 트리플. J 트리플이었다.

다음으로 재이가 카드를 오픈했다. 각각 스페이드 6과 다이아몬드 7.

"두번째 참가자분, 7 스트레이트입니다. 현재까지 우위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브린 뿐이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카드는 뒷면이 위를 향하고 있었다. 천칭을 들고있는 천사와 악마가 그려진 카드.

세브린이 카드를 뒤집었다.

첫번째 장. 스페이드 2.

그리고 두번째 장. 스페이드 에이스.


스페이드 에이스 - 스페이드 2 - 스페이드 3 - 하트 4 - 하트5 의 완성.

 스트레이트였다.

"백 스트레이트, 마지막 참가자분의 승리입니다."

딜러의 선언과 함께, 테이블 한가운데쌓인  오십억 원 어치의 칩이 세브린의 앞에 놓였다.


도자기처럼 매끄럽던 재이의 뺨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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