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겜블의 규칙 (11) (26/82)



〈 26화 〉겜블의 규칙 (11)

15분간의 인터미션이 끝나고, 딜러가 다시 게임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해무는 터진 입술을 닦아내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수호와의 짧은 싸움으로 몸은 급격히 피로해졌다. 하지만 휴식을 취할 여유는 없었다. 다음 게임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게임 위해 테이블로 향하던 해무의 뺨이 일그러졌다. 블랙잭 테이블. 그곳에 수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재이와 제리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세브린마저도.


해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블랙잭이 아닌 다른 어느 게임 테이블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떠난건가.

하지만 곧바로 해무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놈들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한 번의 겜블이라도  참여해야 하는 상황. 스스로 그 기회를 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브린에게 패배해서 목표 금액을 달성하는게 미뤄진 지금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놈들은 절대 이 카지노를 떠나지 못한다.

침착하게 속으로 숨을 고르며 해무는 테이블 사이를 걸었다. 카지노의 손님들은 해무와 남한 요원들, 그리고 세브린이 물밑에서 벌이는작전은 꿈에도 모른  사치와 환락, 그리고 도박의 스릴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셋의 모습을 찾을  있었다.

라운지 코너, 그 한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만든 인공 연못. 가장자리에는 인조 야자수가 심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3단짜리 분수가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너머에서 따가운 시선이 날아와 꽃혔다. 수호와 재이, 그리고 제리였다.

제리 창이 험학한 얼굴을 해무를 향해 고정한 채, 허리를 숙여 재이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무표정한 재이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모습을 바라보며해무는 생각했다.


놈들에게 자신의 정체가 발각됐다.

어쩔  없는 일이었다. 세브린의 갑작스런 참가, 그로인한 패배로 수호의 신경은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호와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살수라는 정체가 드러나는  또한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하지만 정체가 밝혀졌다고 해서 동요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부터 계속 정체를 숨길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다. 오히려 놈들을 주시하는 살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놈들을 압박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정체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돈을 뜯어내는 것이다. 정체가 탄로난다고 해서 그 목표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놈들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을 때,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세브린이 말을 걸었다.


"자, 어때? 이제  실력을 좀 믿겠어?"


어느새 세브린은 흥청망청 술에 취해 있었다. 한 손으로는 마가리타 잔을, 다른 한 손으로는 치파오 바니걸의 허리를 휘감은 채였다.


"사실 나도 꽤 오랜만에 하는거라 속으로는 걱정을  했거든? 그래서 계획을 세웠지. 만약 지고 돈을 다 잃어버리면 그대로 도망가겠다고 말야. 그래서 카지노 뒷문으로 가는 길도 체크해 뒀어. 사람들은 여기 출입구가정문 하나밖에 없는줄 알지만 사실은 뒷문도 있거든."


숨도 쉬지 않고 세브린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근데 생각하다보니까 네가 살수인걸 깜빡했더라고. 어차피 도망가봤자 금방 잡힐  같더란 말이지.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그냥 게임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대충 했단 말야? 그런데 하다보니 이게 뭐야, 정말 이겨버렸잖아? 결론은, 지금 너무 기분이 좋다는거야. 그러니까 너도 같이 파티나 즐기자고. 칵테일 한잔?"


"말도 안되는 소리."


바를 향해 손짓으로 술을 주문하려는 세브린을 향해 해무가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그저 게임 한판 이기는걸로 끝나는게 아니다. 놈들이 반출하려는 돈을 전부 뜯어내는게 우리 목적이야."


"거  귀찮네......."

부채를 꺼내 흔들며 세브린은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제는 힘들껄? 저 녀석들. 분명 앞으로는 나를 피해다닐거야."

그녀의 말에 해무는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이 정도로? 놈들과의 게임은 고작해야 두 번 남짓. 놈들의 손실금도 전부 합쳐봐야 일이백억 정도 수준이었다. 겨우 그걸로 놈들이 도망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틀렸어. 저들로서는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거든. 나와 다시 싸와서 이길  있을지는 모르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게임을 조금 덜 하더라도 차라리 나를 피해서 확실한 수익을 올리는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야."

세브린이 씨익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상황은 세브린의 말대로 흘러갔다. 해무는 재이와의 게임을 다시 잡기 위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테이블들 사이를 돌았다. 하지만 놈들 또한 멈추지 않았다. 게임을 하는 것 보다는 해무와 세브린을 피하는게 우선인 모습이었다.

결국 그날 내내, 카지노가 문을 닫을 때 까지도 해무와 세브린은 게임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내일을 기약하며, 어두워진 카지노를 떠날  밖에는 없었다.





ㅇ  ㅇ ㅇ





벽에 부딛힌 머그컵이 쨍그랑, 하는 소리를 내며 산산히 부서졌다. 컵을 던진 장본인인 제리 창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채로 소리쳤다.

"완전 망쳤군!"


여의맨션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제리 창은 내내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그리고 그 화는 방에 도착해서도 가라앉지 않았다.


기분이 틀어진 것은 제리 뿐만이 아니었다. 수호 또한 가라앉은 얼굴로 내내 침묵을 지켰다.


재이의 경우는 한층 더 심했다.  또한 말은 없었지만, 아직까지도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호는 알고 있었다.

게임의 결과는 오직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모습이었다. 분명 재이의 마음속은 패배로 인한 중압감과 죄책감으로 범벅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만 해."

수호가 말했다.


"재이는 충분히 할 만큼 했어. 이번 상대는 예상 외였을 뿐."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네놈들은 이게 지금 장난으로 보여!"

제리 창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구룡성채에 대한 미합중국의 정책이 이 작전에 달렸어! 성채에 대한 구룡방 놈들의 통치력 약화, 그리고 마약 수출 활동에 대한 억지력, 그 뿐만 아니라 한반도 내 한국-중국-구룡방 3국 체제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개입 여부까지. 그런데도 네놈들은 작전중에 정신줄을 놓고, 웬 정신나간 여자한테까지 겜블을 지더군. 제정신인가?"

흥분해서 이야기를 마구 쏟아붓는 제리 창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보내며, 수호는 머릿속으로 아까전의 상황을 차분히 분석했다.

세브린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그녀는 예상 외의 존재였다.

원래대로라면 성채 카지노에서 재이 수준의 연산력을 지닌 겜블러를 마주치는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만큼 재이의 수준은 일반적인 프로 겜블러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세브린을 만나고 말았다.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가능성을 뚫고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그런 상황이 현실에 벌어지게 된 이유는 명확했다.

"심지어는 뭐? 살수??"


한층  핏대를 올린 목소리로 제리가 말했다.


"놈들은 구룡방 최고비대칭전력이야. 놈들은 요원이 아니라 살수란 말이다! 그 놈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우린 전부 죽는다는 뜻이야!"

고함 소리가  안을 울렸다. 이후 이어진 침묵 속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호를 노려보는 제리.


제리를 노려보는 수호.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굳어있는 재이.


 사람이 어깨를 짓누르는 침묵 속에서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네놈은 아니겠지."

수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전부 죽는다고? 너는 아니야. 내가 죽고, 재이가 죽어도, 네놈 만큼은 죽지 않을거야. 그리고 그건 네가 양키새끼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겠지."

억누른 목소리로 천천히 읇조리며, 수호는 제리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아, 백 퍼센트 양키는 아니로군. 반은 중국놈이니까. 하지만 어쨌건 너는 살아남을 거야. 놈들은 네가 CIA 소속이라는걸 어떻게든 알아냈을테고, 그렇다면 네놈의 손끝 하나 건들지 않을 테니까."

수호가 한 걸음을 나아갈 때마다 제리도 한 걸음을 물러났다.

"하지만 우리는 달라. 남한은 네놈들처럼 핵미사일이 있는것도 아니고, 항공모함이 있는것도 아니거든. 놈들은 우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그리고 그게 우리가 절실한 이유야. 그저 뒷짐  채 상황을 방관하는 너희 CIA 놈들보다 절실해야만 하는 이유 말이다."


어느새 제리 창의 등은 벽에 닿아있었다. 그런 제리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맞대며 수호가 말했다.


"제리. 괜히 억지로 화난 척 하지 마. 이 작전이 실패해도 너희들이 잃는건 하나 없잖아?"


"......."

제리는 입을 열지 못했다. 수호의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CIA는  작전에 돈 한푼 대지 않았다. 그들이 한거라고는 그저 제리 창을 보낸 것 뿐. 그것도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선택된 것이었다.

반면, 우리들은 모든걸 잃게 되겠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수호는 잠시 후 정정했다. 모든걸 잃는건 중앙정보부가 아니다. 자신이다. 자신의 경력과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걸 잃는 것이다. 거기에 재이의 목숨은 덤이었다.

그리고 수호는 지금의 상황에 다다르게 만든 원인을 떠올렸다.

갑종살수 해무.

그녀가 지금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어째서 여자가 살수, 그것도 갑종살수라는 직함을 달게 되었는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갑종살수의 일원이라는 사실은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실력은 자신과 대등할 정도였으니.

그리고 살수들이 얼마나 끈질기고 위험한 놈들인지는 자신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제리의 말대로, 이 구룡성채에서 놈들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은 아니다. 분명 작전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아. 작전은 예정대로 진행될거야."

"지금 상황에서 계속 하겠다고? 진심인가?"


"작전이 일부 틀어진건 사실이야. 하지만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어. 충분히 진행상의 오차 범위 안에 있다고 판단한다."


그렇게 말하며 수호는 재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재이?"

재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는 제리 창이 머리를 감싸쥔 채 이를 갈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무임승차자다. 제리 창이라는 인물의 존재의의는 그저 무사히 돈을 반출하기 위한 CIA 요원이라는 것 뿐이다. 그것만 제대로 할  있다면 신경쓸 것 없다.


수호는 재이를 데리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맞은편 방의 문을 체크했다. 누가 들어온 흔적은 없는지. 혹은 침입을 시도했던 흔적은 없는지.

이상은 없었다. 열쇠로 낡은 잠금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재이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수호."


"왜."


소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수호가 고개를 들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뭐가."


"상황이 다시 원래 계획대로 돌아올 수 있을지. 그리고ㅡ"


"그리고 네가 겜블을 다시 할  있을지 모르겠다, 그 말이지?"


재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것 없어."

수호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너는 이길 거야. 내가 고른 최고의겜블러니까."


"하지만......."

"그리고 설령 잘 안풀리더라도 괜찮아. 만약 네가 머리로 해결 못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나와  총이 해결할 테니까."


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에 대해서는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는 강하다. 이 성채 안의 그 누구보다도 강할 것이다. 그리고 설령 자신이 성채의 가장 깊숙한 곳 까지 끌려가더라도 수호는 자신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걱정 말고 쉬어. 내일은 가장 힘든 날이 될 거야. 머리 쓸 일도 많아지겠지."

그리고 재이가 기분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수호는 잘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