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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화 〉겜블의 규칙 (12) (27/82)



〈 27화 〉겜블의 규칙 (12)

수호는 차가운  공기를 폐 속 깊숙히 들이마셨다.


성채의 밤거리ㅡ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밤 복도'는 서울의 풍경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 미묘한 차이가 폐쇄적인  섬을 한층 더 이질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좁은 복도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들은 낡은 네온사인 간판과 등불, 그리고 호객꾼들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고, 취객들의 고함과,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 그리고 하수구의 악취와 술 냄새가 뒤엉켜서 하나의 혼돈을 이루고 있었다.

 사이를 걸으며 수호는 생각했다.


아까  있었던 삐걱거림ㅡ제리 창과 재이, 그리고 자신 사이에 있었던ㅡ은 명백한 증거였다. 계획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


배가 침몰하는데도 전조가 있는 법이다. 하물며 극도로 정교하게 설계된 작전의 경우에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작전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표층에서만 느껴지는 진동이 아니다. 깊은 심부에서부터 흔들리는 격렬한 진동이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세브린이라는 정체불명의 여자가 예상치 못하게 겜블에 난입한 탓일까?


틀렸다.


그녀가 겜블에 참여할 때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을 기억한다. 그건 분명 이질적이었다. 두려움과 복수심, 경외감이 뒤섞인 반응. 그 와중에 사람들이 드래곤 레이디라 수군거리는걸 들었다.


드레곤 레이디.


그게 뭘 뜻하는 건지는 모른다. 일종의 코드네임인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건, 그 여자와 시선을 마주쳤을 때 느꼈다는 것이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녀는 악어다. 시커먼  속에 숨어있는 악어.

악어는 강을 지나는 원숭이를 집어삼킨다. 그것이 악어가 원숭이를 증오해서는 아니다. 원숭이가 죽음에 이르는 업(業, Karma)를 쌓아서도 아니다.

그저, 악어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짐승을 집어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악어의 본질이었으니까.

세브린 또한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한량같은 모습과 행동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냄새를 풍기며 접객원들과 노닥거리는 그 모습은 명백히 위장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사냥감을 끌어들이는 방식이리라. 카지노라는 자신의 영역 속에 발을 들이민 짐승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테이블 맞은 편에 앉혀놓고, 겜블이라는 진흙탕으로 한걸음 한걸음 빨아들여서, 결국 그 최후에는 상대방의 칩과 돈, 그리고 그 육신마저도 남기지 않고 전부 집어삼키는 것.

그것이 그녀의 사냥 방식이라는걸 수호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녀의 이빨에걸려든 사냥감이 바로 자신들이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과연 세브린이 작전 실패의 이유일까?

그렇지 않다. 카지노에 악어를 풀어놓은 자는 따로 있다.

해무.


그녀가 이 판에 세브린을끼워넣은 진범이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목을 향해 칼날을 드리우는 살수였다.


세브린에게는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동기. 자신들을 방해할 동기가 없다.


하지만 살수회 소속인 해무라면 동기는 확실하다.

구룡방의 체제 유지.


그것을 위해서 해무는 잠들어있던 세브린을 깨워서 끌어들이고, 또 자신들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ㅡ 그마저도 궁극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는 더욱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특무국」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 산하의 부서이자, 스무 명에 달하는 요원과  명의 준요원을 포함한 사상 최대 비대칭전력을 보유한 남한의 무력집행기관이자, 도청과 해킹을 포함한 불법적인 행위로 온갖 정보를 수집해 유력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을 포함한 사회 전반을 조종하고 통제하는 조직.


기형적일 정도로 비대해진 권력을 쥐고 흔들며 어둠 속에서 국가를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그 조직이 자신과 재이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권력이 클수록 그 안에서 뒤얽힌 이해관계도 복잡해진다. 그리고 그 관계는 작전 계획과 현장에 파견되는 요원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굳이 미국과 함께 성채 내에서 작전을 수행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그 작전이 굳이 지금과 같은 불안정안 형태로 이뤄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지 수호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중앙정보부 내에서 벌어지는 암투에 휘말려, 급조된 작전을 책임지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는 것 뿐.

그 점에서 알 있듯, 애초에 태생부터 실패할 여지가 넘쳐나는 작전이었다. 특무국은 자신을 성채로 보냈을 뿐, 국장은 실제 작전의 수행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만약 정말 관심이 있었다면 더 많은 자원과 인력을 투입했을 것이다. 고작 두세명을 보내는 대신에.


하지만 그들은, 특무국은 자신과 재이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지금 당장 쓰러져서, 이유도 모른 채 연락이 두절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느새 수호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술집으로 향했다. 복도 한쪽에 내놓은 등불이 은은하게 입구를 밝히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얼굴에 수염을 기른 점주가 앞치마 차림으로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바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청소를 멈추고 기다리던 털보 점장은 수호가 주문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투덜대며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수호는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생각했다.


대체 나는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걸까. 술을 먹을 생각은 없었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다. 하루동안 오백억 원을 확보해야 한다. 성채에서 지내는 시간 중 가장 중요한 날이 되리란 사실에는 한점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이렇게 술집에 앉아있었다.

뭐,  술을 마셔야만 하는건 아닐 것이다. 물을 마셔도 되고, 오렌지 주스를 마셔도 상관 없다. 다만, 그저 기분만이라도 술집에 있는 것처럼 내고 싶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변호하며 수호는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재이. 재이에게는 책임감을 느꼈다. 열여섯살짜리 소년. 물론 그저 어리다는 이유로 동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 특무국에 들어왔다. 당당히 자신을 특무국 소속의 관료라고ㅡ보안 규정을 어기는 상황이 아니라면ㅡ소개할 자격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그는 임무에 자원하지 않았다. 이건 자살 특공대나 다름없는 임무였다. 누구도 지원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재이가 자신과 함께 성채로 넘어온 것은, 그가 자신의 동행 요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극도로 위험하며, 성공 가능성도 낮고, 본부의 지원도 전무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렇기에 만약 재이가 죽게된다면, 그 책임은 오롯이 자신에게 있었다.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재이만큼은 살아남아야 한다. 제리 창은....... 모르겠다. CIA 놈 따위. 차라리 뒈져버리라지.

그리고 미국이 미사일을 날리고, 여의도는 불바다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여의도도, 서울도, 평양도. 전부 불바다로.

그리고 생각에 잠기었던 눈을 뜨고 인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 옆에는 어느새 은발의 소녀가 앉아서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ㅇ ㅇ  ㅇ






은발의 소녀가 옆에 앉아있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에는 리볼버 한 정이 들려있었다.


검은색 총구가 둔중한 빛을 반사하며 수호를 겨누었다. 그 끝을 잠시 바라보고, 이어서 총을 들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수호는 한 차례 눈가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주방을 바라보았다.


 모습에 해무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수호를 겨누고 있는 손에는 미동 하나조차 없었다.


"나는 한잔 할 건데. 당신도인가?"

주방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수호가 물었다. 하지만 해무의 다문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수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별로 마실 기분이 아닌가? 그럼 맘대로 해. 대신 이번엔 당신이 사는 걸로 하지. 어제는 내가 샀으니까. 그리고...... 돈도 많이 벌었을테니."


그리고 수호는 점장을 불러 데킬라를 주문했다. 에라두라 아네호 한병. 그러자 턱수염을 기른 험상궂은 인상의 점장이 그를 노려보며 빨갛게 달아오른 턱을 푸들푸들 떨었다. 그딴건 없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그럼 있는걸 아무거나 달라고 하자, 잠시 후 직사각형의 녹색 병 하나와 자그마한 잔 두 개가 앞에 놓였다.


수호는 앞에 놓인 북경고량주 병을 잠시 응시했다. 원래대로라면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병을 열어 엄지손가락 만한 잔에 술을 따랐다. 고량주 특유의 파인애플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룡성채에서는 길바닥에서 술을 잘못 마시면 눈이 먼다는 얘기가 있다. 흔히 있는 괴담이다. 다만 성채에서는 그것이 그저 괴담으로 뿐나지 않을 뿐. 그리고 대부분의 성채민들은 눈이 머는 것 따위의 사소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두 잔에 술이 가득 담겼다. 하나는 자신의 앞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해무의 앞에 두었다. 옆에서는 여전히 해무가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였다.  모습에 수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겁이라도 먹어야 하나?"


"글쎄. 필요에 따라서는."


해무의 나지막한 대답. 그 말에 수호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지워내고 해무에게 말했다.


"당신이 방아쇠를 당기면 나는 틀림없이 죽겠지. 그럼 작전은 실패하겠고, 재이와 제리 창은 오백억을 들고 이곳을 탈출할 거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바는 아닐 텐데."


"그래서, 어차피 못 죽일테니 지금 나보고 총을 치우라는건가?"


수호는 대답 대신 손을 내저으며 잔을 들었다. 아무래도 좋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라고 해무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수호는 그대로 잔을 기울여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불태우며 위장으로 넘어갔다. 60도짜리 독주다. 순간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맛이 지독했다. 하지만 기침을 하는 추태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궁금하군."


알콜의 찌릿한 감각을 삼켜넘기며 수호는 다시 잔을 채웠다.


"어차피 나를 죽일 수 없다는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말야."

 질문에 무심코 답하려던 해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저 녀석과 담소를 나누려고 온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이곳까지 놈을 쫒아 온 것은 업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굳이 저 놈의 사소하고 개인적인 의문에 답해줄 이유도 없다.

하지만 변덕은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법이었다.

"이유라..... 그래, 있지. 앞뒤 가리지 못하고 자신의 임무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너와 다르게, 내게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잠시 입 속에서 말을 고른 후에 해무가 말했다.


"너는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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