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겜블의 규칙 (13)
"내가 위험이라고?"
수호는 자신도 모르게 해무의 말을 되내었다. 자신을 위험이라 칭하는 그 표현. 죽이지 못할걸 알면서도 왜 쫒아왔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뜬금없는 것이었다.
그런 수호를 향해 해무가 말을 이었다.
"남한은 현재 구룡방이 마주한 국가들 중 가장 현실적인 맞수지. 그렇지 않은가?"
현실적인 맞수라 하기에 남한과 구룡방은 체급 차이가 컸다. 당장 땅 면적만 해도 수만 배는 차이가 날 것이다. 하지만 남한과 구룡방이 서로에게 가장 큰 적대감을 갖고 있는 관계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구룡방은 중국과 나름의 협력 체계를 갖고 있다. 마냥 적대국이 아니지. 미국이나 러시아같은 초강대국과는 대립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하지만 남한은 중국도, 미국도, 러시아도 아니야. 유일하게 구룡방이 싸워볼 만한 상대인 셈이지."
나지막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해무가 말했다.
"그런 남한 정부가 구룡성채 안으로 자신들의 요원을 잠입시켰다? 당연히 최우선 위험 요소다. 네놈이 위험 그 자체라는 말도 전혀 과장이 아니지. 그렇기에 내가 너를 쫒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위험은 관리되어야 하니까."
"위험은 관리되어야 한다......."
잠시 굳은 채 해무의 말을 따라하던 수호의 표정이 점점 무너졌다. 천천히 입가를 따라 웃음이 새어나왔고, 큭큭거리던 웃음은 이윽고 광소(狂笑)로 변했다. 그가 웃는 동안에도 해무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아, 미안하군. 살수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서."
간신히 웃음을 가라앉힌 수호가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하지만 재차 기침 섞인 웃음이 터져나왔고, 냅킨을 잔뜩 뽑아 입을 막고 몇 차례 기침을 콜록거린 후에야 수호는 간신히 터져나오는 웃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잔을 다시 채우고, 술병이 빈 것을 확인하자 새로 주문을 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남한을 위험이라고말했지. 하지만 우리 관점에서는ㅡ 아니, 남한 정부의 관점에서는 너희들야말로 위험이야. 그렇지 않은가? 구룡성채. 구룡방. 여의도. 썩어버린 섬. 마약과 검은 돈과 범죄를 배양하는 쓰레기통. 위치부터가 이 반도 한가운데 들어찬 암세포 같은 모양새지."
"남한은 정의롭고 구룡방은 썩었다는 얘기인가? 낡은 논리를 신봉하는군."
해무의 얼굴에 경멸이 떠올랐다.
"틈만나면 네놈들은 성채를 지도에서 지워버려야 할 장소처럼 얘기하지. 나도 성채를 변호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네놈들이 말하는 남한이 사실은 얼마나 썩어있는지도 알고 있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 국민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라는 번드르르한 소리만 지껄이지만, 네놈들도 한 꺼풀만 벗겨내면 온갖 더러운 범죄와 위정자들의 오만함, 부정으로 얼룩져 있잖나? 구룡방과 차이가 한가지 있다면, 구룡방은 그 썩어문들어진 살이 겉으로 들어나있다는 점 뿐이다."
"잘 아는군. 남한 출신인가?"
또다시 단숨에 술잔을 비워낸 수호가 말했다. 하지만 해무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성채민들 중에는 남한에서 도망쳐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남한 요원에게 자신의 출신을 밝힐 필요는 없으리라.
수호도 딱히 해무의 지적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당장 자신의 소속인 중앙정보부와 특무국 부터가 권력 싸움으로 썩어있지 않은가.
뭐, 아무래도 좋다. 그보다 중요한건 지금 술기운이 꽤나 강하게 올라오는 것 같다는 거다. 몇 잔 안마신 것 같은데. 역시 구룡성채의 술은 독하단 말이지. 만약 이러다가 내일 일어났는데 눈이 멀어있다면 어떡하지?
"돈을 두고 돌아가."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는 수호를 향해 해무가 말했다.
"작전은 실패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목숨만은 건질 수 있다."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네놈들의 여권 기록을 확인했다. 내일이 정식 체류의 마지막 날짜더군. 적어도 그때까지라면 네놈의 목숨을 취하지는 않겠어. 유예 기간이라고 생각해라."
"......."
"물론 네놈이 원한다면 그 이후에도 더 머무를 수 있겠지. 말하자면, 불법 체류인 셈이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살수들 뿐만 아니라 공안까지 네놈들을 쫒게 될 텐데, 감당할 수 있겠나? 당연히 카지노에서 게임을 하는건 꿈도 못 꿀 거다."
"네 말은ㅡ 나와 재이의 목숨을 보장하겠다는 뜻인가?"
"너희들이 하기에 따라 달렸지. 하지만 만약 작전을 강행하겠다면 너희는 살아돌아갈 수 없다. CIA 놈은 몰라도, 너와 다른 한 놈은 모두 살수와 공안들의 추격 끝에 죽겠지. 그걸 원치 않는다면 얌전히 돈을 놓고 떠나라. 이게 내 마지막 통보다."
최후 통첩.
양손으로 피로한 눈가를 꾹꾹 눌러 마사지하며, 수호는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녀는 살수다. 사람을 죽이는게 본업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과 재이를 살려주겠다고 했다.
분명 이 제안은 비공식적인 내용임에 틀림없었다. 만약 이 제안이 탄로난다면, 그녀가 속한 살수회에서는 큰 문책거리가 될 터였다. 그녀로서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건내는 제안인 셈이다.
그리고 이 제안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위험성을 갖고 있었다. 적과의 거래 하에 작전을 실패시키고 목숨을 건지는 것. 요원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입술을 깨문 채 눈앞의 술병을 노려보며 수호는 고민했다. 그리고 갑작스레 피곤이 밀려왔다.
어쩌다 이렇게 되버렸는지 모르겠다. 자신은 그저 잠깐 산책을 하러 나왔을 뿐이다. 그 빌어먹을 CIA 놈의 개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더러워졌고, 여의맨션인지 하는 그 지저분한 숙소에서도 있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방을 나와 길을 걸었고, 그러다 눈에 띈 술집에 들어와서 앉은 건데ㅡ 어느새 자신은 구룡방의 갑종살수를 옆에 둔 채, 밝혀지면 서로에게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밀담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함께 술잔까지 기울이면서.
아니, 생각해보니 저 여자는 아까부터 한 잔도 안 마셨다.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은 나 뿐이니,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는 표현은 틀렸을지도.
그리고 수호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차가운 시선의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끄러운 은발은 술집의 싸구려 조명을 반다 한층 더 반짝거렸고, 그녀의 입술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냥 아름다울 뿐인 그녀의 겉모습과 다르게 그녀는 자신을 찢어죽일만한 힘을 갖고 있었고, 그 사실이 그녀를 한층 더 매혹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또다시 수호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제안 때문은 아니었다. 눈앞의 광경이 비현실적인 탓이었다.
술에 취한 요원. 총을 겨눈 살수.
원래대로라면 전장(戰場) 외에서는 만날 수없는 둘이, 어떻게 된 인연인지 한 자리에 앉아 고작 삼십 센티의거리를 두고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아깝군."
반쯤 풀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수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뭐?"
해무가 눈썹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모습에 순간 정신을 차린 수호의 초점이 잠시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상당히 취해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 해무, 그리고 다른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당신 얘기다. 갑종살수들. 베일에 싸인 존재나 마찬가지지. 하지만 얘기는 많이 들었어. 구룡방살수회의 정예들이라고."
특무국은 정보기관이다. 당연히 구룡성채 안의 정보들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수집해왔다. 그 중에는 살수회와 갑종살수들에 대한 정보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살수들에 대해서는 고평가를 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한 줌 크기의 여의도에서 얻을 수 있는 인재 풀. 그중에서 뛰어난 사람을 선발한다 해도, 남한의 정예 요원들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는 수준일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전에 투입되기 전에 첩보국으로부터 구룡방에 관한 모든 정보들을 전달받았지. 너희들을 우리 요원들이랑 비슷한 존재들이라고 가르치더군. 윗대가리들이 시키는 명령을 따르고, 필요에 따라 사람을 죽이고...... 그런 일 말이다. 결국 개같은 심부름꾼 신세지. 너도 알겠지만."
아니다. 틀렸다.
요원과 살수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나는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인다. 엄밀히 말하면 살수회와는 계약 관계인 것이다. 너희들 요원처럼 무조건적으로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반박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해무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수호를 향한 경계를 계속해서 유지했다.
물론 수호는 이미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놈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자신의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하지만 그런 사실은 아무래도 좋은 듯, 수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실제로 갑종살수를 만나본건 당신이 처음이야. 그리고ㅡ 솔직히 말하지. 놀랐다. 작전을 세우는데 일대일 상황에서의 열세는 고려하지 않았어. 위험은 오직 공안 집단을 상대할 경우만 생각했지.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멍청했군. 적지에 돌입할땐 가능한 모든 위험을 고려했어야지."
"......그래, 내가 멍청했지."
빈정거리는 해무의 말에 수호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당신의 실력이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선 수준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해. 이 좁은 땅에 당신같은 갑종들이 몇 명이나 돌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질리는군."
"그걸 지금이라도 알았다면 당장 나갔어야지."
감정이라고는 한 조각도 실리지 않은 해무의 말에 수호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잔을 채우며 물었다.
"성채에서의 삶은 맘에 드나?"
"......뭐?"
예상치 못한 수호의 질문. 그 질문에 해무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성채 안에서의 삶이 어떤지는 알고 있다. 특히, 여자로서는 살아가기 힘든 곳이지. 그런 곳에서 당신이 살수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어왔는지는 짐작할 수 없다만....... 어쨌든 당신은 평범한 존재가 아니야. 그런 당신이 이 좁은 성채 안에 묶인 채 살수로서 살아가고 있다니, 누가 봐도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해무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체 왜 여기에 남아있는거지? 네 능력이라면 충분히 탈출해서 남한으로 올 수 있을텐데."
"지금 나를 회유하는 건가?"
"그래."
수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격해진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만약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임무를 완수하고 탈출하면서 당신도 함께 월남할 수 있도록 말이야. 당연히 신분도 내가 보증해 주겠어. 정보부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ㅡ"
"헛소리는 그만둬."
해무는 비웃었다. 저 놈은 지금 자신이 누굴 상대하는지 모르고 있다. 전부 인형같은 소녀로 변해버린 자신의 겉모습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에 든 것은 엄연히 구룡방의 살수다. 얄팍한 회유 따위로 자신을 움직을 수는 없다. 절대로.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수호는 격해지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거짓말이 아니야. 나는 진심이다. 새 신분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걸로 모든 문제가 전부 해결되는건 아니겠지.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문제도 있겠고.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어디까지나 당신이 원할 경우의 이야기지만ㅡ"
횡설수설하는 수호의 모습을 보며 해무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눈빛을 보면 알수 있다ㅡ같은 멍청한 소리가 아니다.
알콜은 자제력을 약화시키고 속마음을 털어놓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물론 자백제 만큼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공안들이 임시 자백제로 쓸 정도였으니 그 효과 자체는 틀림 없었다.
그리고 이제 말문이 막힌건 해무 쪽이었다.
수호는 단순히 월남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한 정보부의 요원이고, 갑종 살수 못지 않게 강하며, 임무를 받고 성채로 잠입해 그 목표를 달성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저 남자는ㅡ
자신을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된 해무는, 자신이 저 자에게 한낱 여자로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목구멍 안으로 화를 삼켜넘기고 조용히 말했다.
"취했군. 이대로라면 살수가 아니라 길거리의 불량배 하나도 상대 못 할 거다. 이만 돌아가라."
그 말에 수호는 쏟아내던 말을 멈췄다. 소녀는 조용한 분노가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고 붉은 입술. 그리고 헤이즐넛 색으로 반짝이는 눈. 마치 사람을 끌어들이는듯한 그 시선에, 수호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 사실을 깨달은 소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입술과 입술이 닿기 직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점멸했다.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카운터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 의자와 뒤엉킨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미친 놈."
자리에서 일어난 해무가 분노로 숨을 들썩이며 말했다.
"사리분별을 못 하는 요원이라면 죽을 때가 다 된거지.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길거리 어디서 뒈져버리겠군."
수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런 소란에 점주가 황급히 주방 밖으로 뛰어나왔다. 얼굴을 쓸어내리자 손에 피가 묻어나왔다. 어느새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를 냅킨에 닦아낸 수호는 점장에게 괜찮다는듯 손을 흔들었다.
"대답이 격렬하시군.싫다면 말로 해도 되는데."
"세상에는 쳐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놈들이 있다는걸 아니까."
해무의 대답에 수호는 쿡쿡 하고 웃었다.
"하긴 그렇지. 당신 말이 맞아. 시간은 늦었고, 나는 취했군. 이만 먼저 일어나지. 내일 카지노에서 보자고."
카지노에서.
그 말에 해무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카지노에서 보지. 하지만 설령 네놈들이 천억원을 모으는걸 성공하더라도, 목숨을 온전히 유지하는건 별개의 일일거다. 성채의 밤은 어둡고 길다는걸 알아뒀으면 좋겠군."
"명심하지."
비틀거리며 품 안에서 지폐를 몇장 꺼내 카운터 위에 내려놓은 수호는 해무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점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구룡성채의 인파 속으로 천천히 섞여들어가는 모습을 해무는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 대화하는 내내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던 그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술이 위장을 뜨겁게 불태웠다.
독한 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