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겜블의 규칙 (14)
성채의 밤은 길다.
살수들은 밤을 지배한다.
살수회의 사람들이 흔히 입에 담는 말이었다. 하지만 살수회 5급 관리 타미르 술란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작 본인부터가 살수회에 소속된 관리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밤은 곧 긴장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해가 가라앉고 어둠이 성채의 빈민가를 뒤덮으면,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살수들의 그림자가 거리를 찾아올 때마다 누군가의 숨통이 끊어진다. 다음 날이 되면 모두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날의 하루를 맞이하지만 실은 모두가 알고있다. 어젯밤 또다른 누군가가 살수회의 손길에 모습을 감췄다는 사실을.
타미르 술란 또한 구룡성채의 길바닥 출신이었고, 그렇기에 칼날로 성채를 통치하는 구룡방의 방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도.
그렇기에 구룡방에 남모르게 반감을 품고 있는 그였지만, 얄궂게도 지금의 타미르 술란은 살수회에서 그 누구보다도 성실한 관리들 중 하나였고, 타미르가 움직일 때마다 살수들은 수많은 일감을 얻었다.
타미르 술란은 명실상부, 살수회의 베일 뒤에서 몸을 감춘 채 칼날을 움직이는 자인 것이다.
짙게 깔린 어둠을 헤치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상점가와 술집도 전부 문을 닫을 정도로 늦은 밤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가죽 신발이 콘크리트 바닥을 탁탁 긁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사위는 온통 어둠 속에 잠겨있었지만, 타미르 술란은 마치 길을 외기라도 한 것처럼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자, 두터운 철문이 막다른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군데군데녹이 슬어있는 낡은 문이었다.
수십년 동안 열린 적이 없었을 듯한 모습이었지만 타미르 술란은 물러서지 않고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고작 한 손으로 당기는 것 정도로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양손으로 문고리를 움켜쥐고 체중을 싫어 당겼다. 몸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기울었다. 얼굴이 찌푸려지며 단정한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제서야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쏟아져나오는 빛에 타미르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잠시 후 시야가 빛에 적응하자, 눈을 찌르는듯 했던 광채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대신 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음울하게 진동하는 창백한 형광등 불빛만이 남아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방이 있었다. 마치 수술실같은 모습이었다. 바닥과 벽에는 화장실처럼 새하얀 타일이 씌워져 있었고, 바닥에는 한가운데에 물이 빠지는 수챗구멍이 뚫려있었다. 한쪽에는 수술대같은 접이식 침대까지 놓여있었다.
그곳에서 타미르 술란은 기다렸다. 숨을 죽인 채 감각을 민감하게 곤두세우자, 어디선가에서또옥 또옥 하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이백 오십 번 가까이 세었을 때 쯤, 맞은편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새하얀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채였다. 도살장에서 흔히 쓰는 장비들이었다.
"갑종살수, 페이 롱."
타미르 술란이 엄숙히 말했다.
"살수회의 타미르 술란이 그대에게 회주의 명을 전하러 왔소."
"이런, 타미르. 우리 사이에 너무 거리 두지 말자고 안 했나? 살수와 담당 관리라면 조금 더 친근해질 필요가 있다고."
손에서 고무장갑을 쭈욱 하고 벗겨내며 페이 롱이 말했다. 그리고 벗겨낸 장갑을 바닥에 툭 내던지고는 이빨을 드러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친근해질 수 있을까...... 그래, 이건 어떤가?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는 거야. 나는 자네를 '애늙은이'라고 부르지. 그러니 자네도 불러줘. 내 별명을."
"......."
"내 별명은 자네도 알지? 어서 불러줘. '대머리' 라고."
"갑종살수 페이 롱. 살수회주의 명을 받드십시오"
침착하게 지령서를 건내는 타미르의 모습에 페이 롱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자신의 담당 관리는 언제나 너무 진지하고 점잔뺀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리고 페이 롱은 지령서를 받아드는 대신, 먼저 앞치마를 벗었다. 그러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드러났다.
몸뚱이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유난히 길게 뻗은 팔다리. 몸에는 털 하나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썹을 제외하고는 잔털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가 팽팽히 도드라진 근육과 핏줄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다리 사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음모 한 올 나지 않은 하복부, 그 아래에 커다란 성기가 마치 늘어진 고무 호스처럼 매달려 있었다.
과도할 정도의 노출에 타미르 술란은 불편한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담당 관리의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페이 롱은 그제서야 지령서를 받아들었다.
대나무 통의뚜껑을 열어, 곱게 말려 있는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성채유일 구룡방주의 권리를 위임받아 살수회를 지휘하는 살수회주 주원형이 명한다ㅡ 로 시작하는, 갑종 살수라면 지겹게 봤을 문서였다.
페이 롱은 그걸 구겨 등 뒤로 내던졌다. 그 모습에 타미르 술란이 아, 하고 손을 뻗은 채로 굳어섰다.
"뭐 어때서 그래. 어차피 결국 다 죽이라는 얘기일텐데, 굳이 볼 필요 없잖나?"
페이 롱의 말에 타미르는 기분이 상해 꾹 하고 입을 다물었다.
페이 롱의 시선은 지령서의 내용 대신에 딸려있는 자료들에 향해 있었다. 목표물들의 정보와 사진이 붙어있는 자료였다.
"흐음...... 남한의 요원?"
첫 페이지에는 수호와 재이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둘의 이력과 정보, 예상 동선 등도 함께.
"별것 없군. 그냥 시시껄렁한 사냥감들일 뿐이야. 이놈들은 그냥 죽여버리면 되고...... 이쪽은 CIA라고?"
"그렇습니다. 그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CIA를 건드린다는 것은 미국이 직접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미국이 직접 움직인다는 시나리오는 언제나 치명적인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핵미사일이 그러했고, B-2 폭격기가 그러했으며, 니미츠 항모의 동해 입항이라는 가능성 또한 그러했다.
미국은 건드려서는 안된다. 페이 롱도 그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사실 생긴것만 봐도 그다지 죽이는 재미는 없을 것 같으니 아무래도 좋아. 그런데ㅡ 마지막 사진은?"
페이 롱이 코가 닿을 정도로 사진을 가까이 바라보며 물었다.
고작해야 손바닥 만한 크기의 사진에 담겨있는 것은 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흑백사진이었음에도 소녀의 장발과 눈썹이 새하얗게 빛나는 은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소녀의 이름은 해무였다.
몰라볼 리가 없었다. 얼마 전의 살수회합에서 한 차례 시선을 교환했으니. 해무가 여자의 몸으로 변이했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스무 살. 갑종 살수. 예상 목표는 목표 1과 목표 2의 제거이며, 카지노에 체류할 것으로 예상됨......?"
"맞습니다."
타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말했다.
"그ㅡ 아니, 그녀의 행동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당 살수의 신체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고, 살수회 수뇌부는 그녀의 임무수행 능력에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둘째로, 월남(越南)이 우려됩니다. 구룡방 내 요직에 앉았던 인물들이 적국의 유혹으로 인해 중국, 혹은 남한으로 도망친한 전례가 없던 일은 아니니까요."
마약상 등과 같이 허가된 사람에 한해서는성채의 국경을 오가는 것이 가능했다. 일반적인 성채민들은 불가능하지만, 방의 고위직이나 살수들도 임무가 있을 경우 출입증을 받아 국경을 오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는 성채를 탈출해 중국이나 남한으로 떠나는 사람도 드물게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적어도 갑종살수가 월남한 적은 없었지만, 남한 정보기관의 요원을 상대하는 임무를 맡았다면 주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페이 롱은 입을 꾹 담은 채 으음, 하고 신음을 흘렸다.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에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결국 이쪽도 사냥감이라는 거로군?"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 만약 이 여린 살수가 임무수행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될 경우, 그녀가 완수하지 못한 업을 내가 대신 처리해야 할 수밖에. 하지만 만약 월남하려 한다면? 그녀를 포함한 모든 목표를제거해야 하는거고."
뼈마디가 툭툭 도드라진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페이 롱이 말했다.
"하지만ㅡ 상황이 1번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2번에 해당하는지의 판단은 결국 내가 내려야 하겠군?"
"......현장의 판단은 살수에게 일임합니다."
마지못해 타미르가 대답했다. 그 말이 담은 의미에, 페이 롱은 쿡쿡 하고 웃음을 흘렸다..
현장의 판단은 살수에게 일임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해무에 대한 생사여탈권. 그것이 결국 페이 롱의 손에 달렸다는 뜻이었다. 말로는 점잖고 공명정대한 척을 하지만, 결국 페이 롱과 살수회 사이에 공범 관계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들어. 행복해.아주 즐거운 임무야."
페이 롱이 흥분으로 몸을 떨며 말했다. 동공은 마치 가면처럼 바늘구멍 만하게 축소되어 있었고, 빼문 혀끝은 고무처럼 창백하게 물들었다. 그가 침을 흘리며 웃을 때마다 다리 사이에 축 늘어진 성기가 덜렁였다. 그리고 결국, 턱을 따라 길게 꼬리를 남기며 흘러내리는 묽은 침처럼, 그의 성기 끝에서도 마치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백탁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타미르 술란은 혐오를 담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종살수들. 그들은 모두 뛰어난 기재(奇材)들이었지만, 동시에 그만큼 미쳐있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기술을 극한까지 연마한 괴물들은, 그 힘을 얻은 대신에 정상적인 인간들이 당히 가져야할 상식의 일부가 거세되어 있었다.
"감사의 마음으로 자네에게 선물을 하나 줘야겠군."
어느새 촛점을 되찾은 페이 롱이 말했다. 사정을 마친 그의 발치에는 탁한 액체가 고여있었다.
그리고 페이 롱은 아까전 그가 나왔던, 안쪽의 또다른 방을 향해 걸었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묻은 정액이 찌걱거리며 타일 바닥에 묻어나 흰 발자국을 남겼다.
잠시 문 뒤로 모습이 사라졌던 페이 롱은, 다시 나타났을 때는 손에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방금 전 만든 물건이야. 따끈따끈한 신상품이지."
그것은 종이로 만든 작은 선물상자였다. 하지만 타미르는내용물을 확인하기도 전에 얼굴을 찌푸렸다.
"사양합니다. 부정한 것은 가까이 두지 않는게 제 주의입니다."
"이런, 마음이 부서지는 것 같군. 내 전담인 자네를 위해 애정을 담아서 만들었는데 말이야."
타미르의 단호한 거절에 페이 롱의 입꼬리가 추욱 늘어졌다. 하지만 타미르는 한층 더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만약 해무를 제거해야 할 경우에도, 보안은 필히 유지하여 주십시오. 살수회가 휘하의 갑종을 직접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은 절대 유출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타미르 술란은 페이 롱의 비밀장소를 떠났다.
혼자 남은 방에서 페이 롱은 콧노래를 부르며, 서류에 붙어있는 사진들을 하나하나떼어냈다. 수호, 재이, 그리고 제리 창이 찍혀있는 사진은 수술대 위에 내려놓고, 해무가 찍힌 마지막 사진을 벽에 붙였다. 그것을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확인하고는, 다시 앞치마와 장갑을 챙겨입었다.
아까 전 나왔던 문을 열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곳은 작업실이었다.
천장을 따라 길게 이어진 레일에는 S자 고리들이 잔뜩 걸려있었다. 그리고 작업실 한가운데 놓여있는 접이식 침상 위에는 한 소녀가 누워있었다.
완전한 나신의 소녀는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단정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다. 피부는 더이상 하얗게 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이마와 뺨도, 아직 덜 여문 젖가슴과 엉덩이도 그러했다.
잠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생각하던 페이 롱은 천장의 레일에서 고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소녀의 머리를 들어 젖힌 채, 고리로 뒤통수를 꾸욱 하고 가볍게 찔렀다. 그러자 쐐기와 같은 고리 끝이 손쉽게 소녀의 두개골을 깨부수고 크림처럼 부드러운 연수와 소뇌를 헤집었다.
고리가 튼튼하게 머리에 걸린 것을 확인한 페이 롱은 양 팔로 소녀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뒤통수에 튀어나와있는 반대쪽 고리를 레일에 걸었다.
천장에 매달린 소녀의 팔다리가 힘없이 추욱 늘어졌다. 다만 왼쪽 발목, 그 아래 있어야할 발이 없었을 뿐.
페이 롱은 타미르에게 선물하려던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발 하나가 담겨있었다. 작고, 매끈하고, 예쁜 발이었다. 그것을 꺼내 고리에 걸려있는 소녀의 왼발목에 가져갔다. 반쯤 마른 고기처럼 탄성을 잃은 그 단면이 서로 정확히 맞아들어갔다.
"이상하군."
턱을 긁적이며 페이 롱이 중얼거렸다.
"분명 잘 만들었는데, 왜 안받는거지......?"
그렇게 자신의 호의를 거절하는 전담 관리에 대해 생각하던 페이 롱은, 이내 고민을 접고 작업실 구석의 업소용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주인없는 창백한 발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작은 것도 있었고, 조금 큰 것도 있었다. 엄지 발가락이 긴 것도 있었고, 새끼 발가락이 가느다란 것도 있었다. 그 중 가장 잘 보이는 빈 자리에, 방금 잘라낸 소녀의 발을 조심스레 내려두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흡족한 기분으로 바라보며, 페이 롱은 생각했다.
내일은 이곳에 처음으로 갑종살수의 발을 추가하는 날이 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