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겜블의 규칙 (15)
드물게 일찍 잠에서 깼다.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오자 어둠에 잠겨있는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새벽 어스름이 깔려있는 시간. 언제나와 같은 구룡성채의 모습이었다.
입에서 뿜어져나온 입김이 차가운 새벽녁 공기와 뒤섞이며 회오리를 만들었고, 잠시 후 허공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해무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테이블에는 식어버린 커피와, 언제 피웠는지 모를 담배 꽁초 몇 개가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리볼버 한 정과 총알들,십자가 목걸이, 빈 술병들이 쓰러져 뒹굴고 있었다.
담배 연기를 폐 속 깊은 곳까지 빨아들인 해무는 총을 들었다. 그리고 비어있는 실린더에 총알을 채워넣었다. 하나하나, 천천히.
그 작업이 끝나자 다시 총을 내려놓고는 남은 담배를 마저 피웠다. 좁은 땅에는 빌딩들이 가득가득 들어차 있었다. 콘크리트 빌딩과, 반쯤 무너져 철제 골조가 앙상히 드러난 폐허들, 군데군데 유리창에 금이 간 커튼월 빌딩들. 해무는 그 풍경을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빌딩들이 그리는 스카이라인 운곽 너머로 희미한 먼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다 타버린 담배는 필터만 남아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납작하게 만든 필터를 머그컵에 던져넣은 해무는 방으로 돌아왔다. 바깥과 마찬가지로 방 안 또한 싸늘했다.
해무는 바닥에 널부러진 바지를 주워들어 다리를 끼워넣고, 벨트를 채우고, 셔츠의 칼라를 세워 새카만 넥타이를 맸다. 그리고 그 위에 자켓을 걸치고, 완전히 장전된 리볼버를 안주머니에 찔러넣고, 목에 건 십자가 목걸이에 입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검은 가죽 구두를 신고는, 뚜벅뚜벅 발소리만을 남긴 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났다.
주인이 떠나고 텅 빈방이 한층 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ㅇ ㅇ ㅇ
아침 식사를 생략한 해무는 곧바로 여의 맨션으로 향했다. 카지노의 개점 시각은 오후 한시. 현재 일곱시였으니 아직 여섯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수호 일행에게는 오늘이 구룡성채에서 체류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분명 게임을 끝마치는대로 성채를 탈출할 것이다. 때문에 놈들은 도주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채로 맨션에서 체크아웃을 할 것이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된다. 놈들의 선택지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일 가능성도 있었다. 때문에 해무는 이른 시간부터 놈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의맨션이 있는 삼거리의 맞은편 빌딩. 그 삼층에 위치한 카페의 창가에 앉아 진한 밀크티를 마시며 해무는 목표를 주시했다. 모퉁이의 빌딩은 여의맨션의 로비를 감시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해무는 신문을 펼쳐들었다. 싸구려 품질의 종이에 인쇄된 내용은 전부 쓰레기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제대로 된 신문도 아니다. 구룡방의 선전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으니. 접경 지역에서 벌어진 남한과의 마찰에서 우위를 점했다거나, 구룡방의 체제에 도전하는 세력에 참수형을 내렸다는 식의 내용들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신문을 대충 훑어본 해무가 반쯤 식은 밀크티 잔을 비우고,담배를 두 대 더 피우고, 점원이 재떨이를 한 차례 교환해 줄 때 까지도 수호 패거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설마 놈들이 뒷문으로 빠져나간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무가 떠올렸을 때 쯤, 맨션의 문이 열렸다.
해무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단하가 선물해준 시계는 아홉시 사십오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호를 포함한 셋의 손에는 가방이 들려 있었다. 전부 그들이 가져온 짐들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리 창이 든 가방은 유난히 컸다. 가방을 들고다니는 모양새로 보건데 꽤나 묵직한 것 같았다. 분명 카지노에서 교환한 현금이 들어있을 것이다.
설마 놈들이 그 사이에 돈을 송금했을까 우려했으나, 다행이 그런 일은 없었다. 구룡성채와 외부 사이의 금융 네트워크는 신뢰할 수 없다. 또한 오늘의 마지막 겜블을 위한 판돈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해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점원에게 밀크티 값을 지불하고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10시 10분, 상업구역 내 식당가.]
수호 일행은 작은 빵집으로 들어갔다. 다들 입맛이 없어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렇겠지. 해무도 공감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작전은 어떤 형태로든 오늘 중으로 결판이 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가하게 입 안으로 밥이나 밀어넣을 기분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재이는 얼굴로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흑당 시럽을 잔뜩 뿌린 커피를 꾸역꾸역 마셨다. 혈당 쇼크가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양이었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두뇌는 당분을 많이 소모하는 법이다. 오늘의 마지막 겜블을 위해 저 소년이 해야할 계산량을 고려한다면, 저 정도의 당분은 필요할 것이다.
[10시 35분, 거주구역 뒷골목]
억지로 식사를 마친 수호 일행은 거주구역으로 향했다. 외지인들은 올 일이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들은 거주구역 외곽을 지나서 강변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지켜보건데, 놈들이 지금 걷는 길은 탈출 루트일 것이다. 실제로 성채의 남쪽 외곽 도로는 검문소를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카지노에서 천억원을 성공적으로 따내고 도망치기에는 최적의 루트였다.
단순하고 확실한 계획.
그것이 놈들의 루트를 확인한 해무의 감상이었다. 쓸데없이 복잡한 계획은 스스로를 수렁으로 빠뜨리는 지름길이다. 요원이라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놈들이 그런 짓거리를 할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구룡방으로서는 손가락 하나도 대기 어려운 CIA까지 대동하고 있었으니.
[12시 59분, 카지노]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이곳에 당도했다. 카지노의 정문. 이틀 전에는 그저 황금 용이 휘감긴 화려한 문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지옥의 문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로 크고 가파르게 보였다.
양쪽에서 문지기들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가운데 틈으로 성채의 온갖 환락과 재화, 피와 죽음을 품은 광채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수호와 재이와 제리 창은 그 광채를 향해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ㅇ ㅇ ㅇ
해무는 바에 기대어 무대를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는 브라스 밴드가 오케스트라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오늘이 이 임무의 마지막 날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화려한 공연이었다. 이 카지노의 모든 것이 서방 세계의 호화스러움을 모사하는 어설픈 모조품이라는 사실도 순간 잊을 정도였다.
하지만 공연에 취해있는 것은 자신의 임무가 아니었다. 해무는 인파 속에서 자신이 고용한 겜블러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시선을 움직였다. 하지만 세브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개점한지 삼십분 만에 손님이 가득 찼지만, 만약 세브린이 있었다면 그 틈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해무가 지닌 살수로서의 능력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세브린의 모습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쉽게 눈에 띌 정도로 큰 존재감을 지닌 탓도 있었다.
하지만 진작 만났어야 할, 구룡성채 최악의 겜블러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해무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싱어가 노래를 마치자, 이어서 트럼펫이 솔로를 시작했다. 얼굴을 때리는 것처럼 쨍쨍한 소리가 홀을 채웠다. 이것도 결국 겜블러들의 눈과귀를 홀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해무는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음악적 혼란에 말려들지 않으려 애쓰며 세브린을 기다렸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옆에서 턱시도차림의 수호가 해무와 마찬가지로 바에 기댄 채 공연을 구경하고 있었다.
자신을 발견하고 얼굴 표정을 구기는 해무를 향해, 수호가 입을 움직여 무어라 말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수십개의 관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파도에 휩쓸려 전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수호가 해무의 뺨을 향해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하지만 다시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딱딱한 총구가 해무의 자켓 아래서 수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 감촉에 잠시 멈춰선 수호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듯 해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아침부터 바빠보이더군. 우리를 쫒아다니느라."
오늘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해무의 미행에 대한 얘기였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들켰다는 사실에도 해무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추적은 그저 수호의 행동을 시야에 두기 위함이었을 뿐, 애초에 몸을 숨려는 목적은 없었다.
바텐더가 크리스탈 플루트에 샴페인을 가득 따라 건넸다. 수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잔을 받아들었다.
"이제는 대낮부터 거리낌없이 술을 마시는군. 한창 일할 시간 아닌가?"
"어쩔 수 없어. 스트레스성 알콜 중독이 재발했거든."
그렇게 말하는 수호의 말투에는 심각함이라고는 한치도 보이지 않았다.
"일하면서 술 좀 마신다고 특별히 문제되는건 아니잖나? 특별히 내가 잘못된 것도 아니야. 원래 우리쪽 요원들은 전부 정신병 한두개 쯤은 달고 다니기 마련이거든."
그렇게 말하고 샴페인을 마시려던 수호는 잠시 멈칫하며, 방금 얘기는 비밀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단숨에 잔을 비웠다.
"임무는 포기했나?"
"포기하지 않았어. 하지만 상관없겠지. 내가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잔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해무는 의문을 느꼈으나 질문을 삼켰다. 수호. 남한 중앙정보부의 요원이라는 저 남자의 태도는 그저께와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수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지금 당장 요원이 없다 해도, 천부적인 두뇌를 타고난 저 소년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해무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세브린이 없는 카지노에서, 재이는 말 그대로 게임을 휩쓸고 있었다. 수많은 도박사들이 재이가 손에 쥐고 있는 오백억원 어치의 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그러한 시도는 전부 재이의 판돈을 불려주는 것으로 끝나고 있었다.
해무는 초조했다. 세브린이 나타나기 전까지, 재이는 계속해서 카지노의 칩을 빨아들일 것이다. 그 상황이 계속된다면 현재의 오륙백억이 하루만에 천억이 될 가능성도 0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 혼자서 싸울 수도 없었다. 아무리 살수라 하더라도 저 소년과 겜블로 맞붙었다가는 무사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이미 한 차례 경험한 후였다.
그렇게 초조함을 억누르며 세브린을 기다리고 있자니, 어느새 첫 번째 공연이 끝났다.
"아쉽군. 댄스 타임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오케스트라가 해산하는 것을 보며 수호가 말했다. 그리고 해무는 그 말에 빈정거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혼자 춰라. 저기 분수대에서. 사람들이 좋아하겠군."
"혼자서는 싫지만, 당신이랑 함께라면 분수를 맞고 몸을 적시는 것도 괜찮겠군."
"사양하지. 여자가 필요하면 딴데 가봐라."
해무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쪽에서는 카지노의 접객원들이 칵테일을 서빙하기 위해 모여있었었다. 허벅지와 허리를 드러낸 치파오 바니걸들은 오늘도 한껏 섹스어필로 손님들의 눈길을 홀리고 있었다.
"저런 스타일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접객원의 엉덩이를 힐끗 훑어본 수호가 말했다. 그런 수호의 말을 무시한 채, 해무는 팔짱을 끼고 재이의 겜블을 계속해서 주시했다. 어느새 재이의 칩은 오백 팔십억을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겜블을 향한 해무의 집중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바로 옆에 붙어서 계속 헛소리를 지껄이는 수호 탓이었다.
"사실 저 옷차림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봐. 치파오인데 동시에 레오타드, 거기에다 망사 스타킹과 토끼귀 머리띠라니. 여기 카지노 주인장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상당한 고학력자인건 틀림없군."
제발 좀 닥치라고 말하고싶었지만 해무는 꾹 참았다. 개소리가 임계점에 달하면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주겠다고 속으로 맹세하면서.
"하지만 역시 너무 과한 부분도 있군. 조금 더 단정한게 좋지 않았을까? 저 정도로 과도한 섹스어필은 여성을 상품처럼만드는 경향이 있거든. 나는 그런건 딱히 선호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수호는 어느새 한참 전에 비운 샴페인잔 대신 마티니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수호는 술잔을 기울여 칵테일로 잠시 목을 축였다. 눈 앞에는 은발의 소녀가 자신의 헛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어금니를 꽉 악문 채 필사적으로 게임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호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입어준다면 사양하지는 않겠어."
"나는 살수지만ㅡ"
해무가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인내심은 많지 않아. 성격도 다혈질에 가까운 편이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개짓거리를 계속했다간 겜블이고 뭐고 관계없이 전부 뒈지는 수가 있다는 뜻이야. 이제 이해했으면 그 아가리를 닥치고 술이나 쳐부어."
해무의 험악한 말에 수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 지시를 따랐다. 손에 들고 있던 잔을 기울여 단숨에 칵테일을 마셨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친구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소매로 입가를 닦아내며 빈 잔을 접객원에게 건낸 수호가 말했다. 친구라는 말은, 당연히 세브린을 뜻했다.
당연히 해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브린은 아직까지도 카지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지금 해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재이의 게임을 구경하기만 하는 것도 전부 세브린이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없었다.
이제는 선택해야 할 때다. 세브린을 찾아나서거나, 아니면 재이와의 겜블에 뛰어들거나.
그 갈림길에서 하나를 택해야 할 순간이라고 해무가 결정했을 때, 저 멀리서 홀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나팔 소리가 퍼졌다.
"빌어먹을, 또 뭐야?"
해무가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한층 더 귀청을 찢을 듯한 음악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퍼레이드 행렬이었다. 작은 공원을 조성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이 카지노 홀. 그 반대쪽 끝에서부터 시작된 퍼레이드가 해무가 있는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오세요, 카지노에. 무한한 꿈과 즐거움이 있는 곳. ♪]
탑 햇을 쓰고 지팡이를 든 치파오 바니걸들이 빙글빙글 돌며 노래했다. 거의 이십 센치는 될 법한 하이힐을 신고 어떻게 그렇게 현란하게 춤출 수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어제는 빈털터리 였어도, 오늘의 당신은 벼락부자. 모두 당신을 위한 거에요. ♪]
그리고 그 행렬의 한가운데, 황금 마차의 꼭대기에서는 누군가가 환호성을 지르며 사람들을 향해 칩을 뿌리고 있었다.
붉은색 벨벳 치파오 차림의 여자. 그 여자의 정체를 눈치챈 해무의 입이 벌어졌다.
"......세브린?"
세브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