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화 〉겜블의 규칙 (16) (31/82)



〈 31화 〉겜블의 규칙 (16)

음악이 멈췄다. 동시에 퍼레이드의 행진도 멈췄다.


황금 가마에서 미끄러지듯이 내려온 세브린은 소매를 툭툭 털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말소리를 꺼내지 않았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럽던 카지노는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침묵에 잠겨있었다.


"뭐, 왜?"

사람들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하며 세브린이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옆에서  찐 얼굴로 굳어서 있던 남자의 품에, 들고있던 칩 한더미를 쏟아부었다.만원짜리 제일 싸구려 칩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수백만원은 족히 될 양이었다.

갑작스런 충격에서 회복하기 시작한 군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세브린은 미쳤다. 그런 말이 과거에도 공공연히 오가고는 했지만, 오늘의 그녀는 한층 더 미친  같은 모습이었다.


해무는 인파를 지나 성큼성큼 그녀의 곁으로 다갔다.


"빌어먹을, 대체 무슨 짓거리야."

자신들을 주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해무는 숨을 억누른  세브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악문 어금니가 분노로 으스러질 정도였다.


세브린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겜블에서 사냥감을 낚기 위해서라면 조용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적어도 이렇게 과시하듯이 등장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세브린은 조용히 은신하며 움직이기는 커녕,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퍼레이드까지 동반한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의행동이었다.

그러나 세브린은 대수롭지 않은듯 말했다.


"문제 있어? 내가 너의 계획을 망친 것 같지는 않은데."


"망친것 같지 않다고? 카지노에서 쫒겨난다면 더이상 그런 말은 못하겠지. 지금도 블랙리스트에 들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황당한 짓거리를 벌였으니, 쫒겨나는건 시간 문제겠군."

"걱정 말라고, 전부 괜찮으니까. 이게 다 널 위해서거든"


해무의 말에 세브린이 답했다. 그리고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재이 일행이 자리한 게임 테이블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 없는 동안 신나게 벌어댄 모양이지? 대충 보니 한 육칠백억 되겠어."

재이의 앞에 쌓인 칩 더미들은 오늘 아침보다 더 불어나 있었다. 육백억 정도라는 세브린의 추측은  정확했다. 오백억을 들고 게임을 시작해서, 두시간 동안 육백억이 넘는 돈으로 불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실적에 관계없이, 훼방꾼인 세브린이 등장한 것이 기분 좋을리가 없었다. 수호는 떫은 표정으로 세브린을 바라보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세브린에게 칼침을 꽂아넣을 듯한 기세였다. 카지노 안에서 칼질을 한다는게 어떤 사태를 일으키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너무 기분나빠하지 말라고. 좋은 일을 하러왔는데 미움받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거든."

세브린이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린채, 음흉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명심해, 겜블러 친구들.  너희들에게 기회야. 현실적인 위험이지만 동시에 말그대로 천금같은 기회지. 만약 내 칩만 싹쓸이 할 수 있다면, 당신들은 그걸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있잖아?"


실제로, 세브린의 말은 수호 일행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세브린을 쓰러뜨리고 그녀의 돈을 독차지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가능성이 일어나지 못하는 데에도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해무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세브린의 옷깃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세브린은 자신보다 해무에게 멱살을 잡힌 채, 어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끌려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당장 말해."


세브린을 벽에 밀친 해무가 억누른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세브린은 모르겠다는듯, 자기보다 머리 반 개는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해무를 내려다보며 눈을 끔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한층  분노가 솟아오른 해무가 소리쳤다.


"너도 이미 알고 있을텐데? 니가 뭐라고 떠들건 저놈들의 전략은 변하지 않아."


해무의 말은 사실이었다. 재이의 전략. 그것이 무엇인지, 해무도, 세브린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기대 수익은 클 지언정, 세브린과의 승부는 결과가 불확실하다. 많은 돈을 딸 수도 있지만, 동시에 많은 돈을 잃을 수도 있는 상대. 말 그대로 하이리스크-하이리턴 겜블이었다.

때문에 현재 재이의 전략은 하나였다. 세브린과의 격전은 무조건 피하고, 차라리 속도는 느리더라도 다른 겜블러들과 게임을 하면서 천천히 돈을 불려나가는 것.

물론 그런 전략을 따라 행동한다면 느린 속도로 인해 천억 달성이 물건너간다는건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손에 든 돈만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해무의 임무 달성 평가에 있어서 상당한 손해를 끼칠 것이다. 남한의 요원들이 천억을 달성하는 것을 저지한다 하더라도, 칠백억이라는 손해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저들은 계속해서 너를 피해다닐 거다. 그리고 설령 목표를 달성 못하더라도 칠팔백의 돈을 확보한  탈출하겠지. 그건 내게 있어서 절대 성공이 아니야! 지금 네 행동은 내 임무를 망치는 길이다!"

"틀렸어."


소리치는 해무를 향해 세브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알아? 협상도 겜블의 일종이라는거."


"대체  무슨 개소리를ㅡ"

"간단한 이야기야. 누군가와 협상을 할 때, 너는 상대가 네 요청을 어디까지 받아들일지 모르지. 그 상한선을 가늠해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제안을 건내고, 그걸 성사시키는게 바로 협상이야. 겜블과 큰 차이가 없지.  그래?"


반쯤 힘이 풀린 해무의 주먹을 옷깃에서 털어내며 세브린이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묘수가 있지.협상 상대를  골라야 한다는 것 말이야. 지금 우리의 적이라고  수 있는 저들과 협상하는건 하책. 멍청이나  짓이야. 나는 멍청하지 않아. 저들과는 협상하지 않지."


"그렇다면?"

"내가 협상하는 상대는 달라. 바로 이 판을 지배하는 사람이지."


세브린이 접은 부채로 게임 테이블을 툭툭 찌르며 말했다.


"쓰러뜨려야 하는 상대보다 강한 자와 협상해서, 목표를 간단하게 취한다. 아주 쉽지?"


얼굴에 미소를  세브린을 바라보며 해무는 입을 다물었다. 해무도 알고 있었다. 세브린의 이야기는 당연한 일반론이었다. 하지만 현실과는  격차가 있었다.


그래, 말은 쉽다.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려면 절대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판을 지배하는 자와 협상한다고?

미친놈들이나 할 짓이다.

지금 이 구룡성채에서 판을 지배하는 자라고 부를만한 자들을 꼽아보자면, 모두 극히 드문 존재들.

살수회주,

공안청장,

구룡방주.


그리고 어쩌면, 이 카지노의 주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정체를 드러낸 적은 없지만, 카지노의 주인 또한 구룡방의 관리들 중 하나일 거라고 모두가 추측하고 있었다. 성채 안의 검은 돈을 움직이는, 돈세탁꾼 역할을 맡은 존재라고 말이다.


그 모두가 이 도시의 가장 꼭대기에 거하는 자들이었다.

그들과 협상을 한다는건  죽음을 뜻한다. 괴물은 벌레와 협상하지 않는다. 그저 귀찮은 존재를 손으로 눌러 죽일 뿐.

그러니 세브린이 말하는 '협상' 또한 절대 쉬운 길이 아니다. 미친놈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해무의 굳은 얼굴에서 그런 생각을읽은 모양인지, 세브린은 씩 하고 웃으며 재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만약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라면 당신들이 계속해서 도망다닐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제안을 준비했어. 당신들이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말이야."

쭉 뻗은 세브린의 손가락은 정확히 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부터 속으로 분노를 갈무리하던 수호가 한걸음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재이는 그의 팔을 잡아 멈춰세웠다. 그리고 세브린의 시선을 마주한 물었다.


"무슨 제안입니까."


"듣기 전에, 이왕이면 좀 내게 감사하면 안되겠니?  제안을 준비하기 위해서 여기 사장과 독대까지 해야했거든.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하지만, 내가  조건이 카지노에 도움이 된다면 그도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

"우리가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의 제안을 요청한 적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당신이 우리에게 제안을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해야 할 텐데요."


재이가 건조한 목소리로 답하자, 세브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 좋아. 내 제안은 간단해 너희들이 만 원을 걸 때 나는 삼만 원을 걸지."

간결한 대답. 하지만  말의 효과는 컸다. 그녀의 제안을 들은 재이 일행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머릿속으로는 맹렬히 생각을 굴리는 채였다.

"너희들이 만원을 레이즈 했을 경우, 내가 콜을 하기 위해서는 삼만원을 걸어야 하는 거다. 반대로 내가 삼만원을 레이즈 할 경우, 너희들은 콜을 하기 위해 만원만 걸면 되는 거지."


헛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극단적인 핸디캡이다. 자신보다 현저하게 기량이 떨어지는 겜블러를 상대할 때라면 가능하겠지만, 재이의 실력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세브린과 팽팽한 접점을 벌일 정도였다.

동률의 실력을 지닌 플레이어들. 그들에게 이 룰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세브린이 재이의 세 배나 되는 판돈을 갖고 있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세브린의 판돈은 재이의 세 베는 커녕 오백억 정도다. 재이의 육백 오십억에 미치지 못하는건 물론이고, 그마저도 해무와 나누어서 참가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세브린은 긴장은 커녕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만약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나는 상관 없어. 내가 3대 1 게임을 오픈한다면 여기 있는 다른 큰 손들은 전부 나한테 달라붙을 테니까. 너희들은 뜯어먹을 플레이어 하나남지 않겠지."

"믿기지 않는군."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있던 제리 창이 입을 열었다.

"네 의사는 그렇다 쳐도, 딜러가 그런 조건으로 플레이는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나? 그들은 카지노의 룰을 따른다. 하잘것없는  제안을 따르는게 아니야."

세브린을 하잘것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제리 창의 말은 일부 사실이었다.

겜블의 룰은 카지노가 정한다. 플레이어들 사이의 협의로 정해지는게 아니었다. 설령 플레이어들이 협의하에 룰을 변경해도, 딜러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부 무의미했다.


때문에, 아무리 세브린이 지금처럼 핸디캡 룰을 제안하며 재이와의 겜블을 유도해도, 이 카지노 안에서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당연한 사실에 사람들이 숨을 죽인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뒤쪽에서 분주한 하이힐 발걸음 소리가 또각또각 울려왔다. 짙은 자주색 양장 차림의 여자가 2층 계단에서 내려와 세브린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카지노의 메신저였다.

또각똑각 하이힐 소리와 함께 사람들 사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온 메신저는, 세브린의 귓가에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고,  내용을 듣는 세브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리고 메신저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를 떠나고 나서야, 세브린은 입을 열었다.


"협상 결과가 확정됐군. 카지노의 주인은 받아들였다."

장난기 없는 엄숙한 선언. 그 모습에 자리의 모두가 실감했다.


세브린의 룰이 관철되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카지노의 주인을 만나 협상하고, 자신이 원하는 룰을 적용하는걸 성사시킨 것이다.


"자, 결정을 내려."


세브린이 가늘게 뜬 눈으로 웃으며 재이를 향해 말했다.


"나는 겜블을 준비했다. 너희들은 내 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가?"

치명적이며,


동시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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