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화 〉겜블의 규칙 (17) (32/82)



〈 32화 〉겜블의 규칙 (17)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손에 패를 들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전부 여덟 명. 그 중에는 차분하게 자신의 패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연신 눈을 굴리며 상대방을 탐색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재이는 세브린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한탕에 큰 돈을 딸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세브린의 제안은 유혹적이었으며, 동시에 다른 겜블러들까지 모두 빨아들인다는 점에서 외통수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 세브린이라는건 명백했다. 적어도 재이를 테이블 앞에 앉힌 것만으로도 세브린은 승리를 거둔 셈이다.


그 외 나머지 겜블러들은 전부 조연에 불과했다. 그들이 이 자리에 참여한 이유는 명백했다. 세브린이 제안한 3대 1이라는 교환비, 그리고 '그' 세브린을 쓰러뜨릴 기회라는 공명심에 사로잡힌 이들이었다.

젠장, 완전 꼬였군.


당장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테이블. 그 자리의 한 켠을 차지한 해무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머릿속에는  가지 생각으로 가득  있었다.


하나는 세브린의 정체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 알고있던 것은, 그녀가 드래곤 레이디라는 이명(異名)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겜블러라는 사실이었다. 카지노를 털어먹고 한때 출입제한까지 당할 정도의 겜블러 말이다.


하지만 오늘 보여준 모습으로 그 생각을 수정했다. 카지노의 주인과 일대일로 협상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절대 평범한 겜블러가 아니었다.

어쩌면그녀는ㅡ


아니,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그녀의 정체를 파헤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최우선순위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겜블의 행방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겜블의 행방을 가늠하는 것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세브린이 제시한 미끼는 효과적이었다.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세브린을 피해왔던 재이를 판에 강제로 앉혔으니.


문제는, 너무나도 효과적이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재이 외의 다른 겜블러들까지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것은 흔히 말하는 '변수'를 늘리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판이 복잡해질수록 예상치 못한 결과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것은 지금 이 테이블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다른 변수가 없었더라면 결과는 비교적 예측 가능했을 것이다.

이상적인 조건이라면, 겜블은 누가 더 뛰어난 연산력과 결정력을 갖고 있는지로 승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결과를 고려한다면 세브린과 재이 사이에는 미세한 격차가 있었다. 세브린의 우위라는 격차 말이다.

둘 사이의 격차는 마치 바늘구멍처럼 미세했지만 세브린은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때문에 자신이 지닌 약간의 우위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재이를 갉아먹을  있었고, 이를 통해 겜블에서 승리해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많은 플레이어가 끼어든 판에서 자신의 우위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누가 이길지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한일이었다. 그리고  복잡성 탓에, 재이가 세브린에게 승리할 가능성도 유의미하게 올라간 것이었다.

결국 모두가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같은 겜블에낚인 채 혼돈 속으로 끌려가고 있는 셈이었다.

"풀하우스의 승리입니다."


딜러가 선언했다. 이번 판은 재이의 것이었다. 테이블 한가운데 쌓여있는 칩은  팔십억. 팔십억 원 어치의 칩 더미가 재이의 앞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가 원래 갖고 있던 판돈에 비하면 크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의 겜블러가 파산했다.


해무의 옆에 앉아있던 노인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또한실력있는 겜블러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판에서 살아남기에는 부족했다.

 뿐만이 아니다. 지금의 패배는 그의 삶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잃은 노인이 살아가기에 구룡성채는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른 겜블러들도 다시한번 실감했다.  겜블에서 진다면 그것은 자신의 미래를 크게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고. 그 정도로 이 판에 앉은 사람들은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제 자리에 남은 것은 전부 일곱 명. 모두가 말없이 참가비를 냈고, 딜러가 카드를 돌리며 다음 게임이 시작됐다.

포커페이스에 능숙한 겜블러들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에서 숨길 수 없는 긴장과 초조함이 배어나왔다. 쉼없이 흔들리는 시선에서, 피부를 따라 흘러내리는 땀방울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에서.

그러나 암흑과 같은 게임의 향방 속에서도 희미한 실마리와 빛줄기를 통해 더듬더듬 길을 찾아내는 자는 있기 마련이었다.


세브린.


재이.


수호는 뒤에서 그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일곱 명의 플레이어와 열 개의 덱. 총 520장의 카드가 만들어내는 혼돈의 전장에서 유일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력이니 경험이니 하는 것들 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초인(超人)


오직 태생적으로 뛰어난 두뇌를 지니고, 동시에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정신력까지 지닌 초인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둘은 의심할 여지 없이 초인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는 초인의 뒤를 따라가는 것만 해도 이를 악물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테이블을 채우고 앉은, 그저 조금 뛰어날 뿐인 겜블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 고통으로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한 채 필사적으로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수호는 힐끗 해무를 바라보았다. 해무 또한 다른 겜블러들과 마찬가지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 몇몇 겜블러들이 리타이어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게 대단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던 게임에서 해무가 마지막으로 배팅을 끝내자, 모든 참가자가 각자의 카드를 뒤집어 패를 보였다.

"스트레이트의 승리입니다."

스페이드Q  포함한 스트레이트. 해무의 패였다. 세브린과 재이가 양분하고 있는 판에서 거둔 첫 승리였다.


딜러는 가운데 쌓인 칩을 쓸어 해무의 앞으로 옮겼다. 하지만 계속해서 져온 탓에 오히려 갖고있는 칩의 총액은 시작할 때보다 줄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에서는 또다시 한 명이 패를 접었다. 노 타이 양복 차림의 남자. 그의 앞에는 단  개의 칩도 남아있지 않았다. 판돈을 전부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아까전의 노인과는 달랐다.


쿠당탕, 하는 소리를 내며 의자가 바닥을 굴렀다.


"사기꾼 새끼들! 이건 전부 사기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부들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던 남자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겜블을 구경하던 사람들  몇몇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잔뜩 독이 오른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옆에서 술잔을 서빙하던 바니걸 접객원의 팔을 잡아 끌었다. 실버 트레이가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접객원은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우악스런 손길에 끌려갔다.


남자는 눈을 희번득거리며, 팔로 접객원의 목을 졸랐다. 어느새 손에는 품에 숨겨두었던 날카로온 송곳을 쥐어든 채였다. 카지노 입구에서 이뤄지는 금속 탐색기를 이용한 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소재의 송곳이었다.

"너!"

마디가  개 부족한 검지손가락이 세브린을 가리켰다.


"네가 헛소리를 지껄일 떄부터 이상했어. 네가 카지노와 협상을 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지. 이건 전부 함정이야. 이 게임은 무효다!"

사람들이 숨을 삼키며 물러섰다. 하지만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겜블러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테이블을 움켜쥔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반면 세브린과 해무, 그리고 재이 일행은 아까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에 앉은 채, 고개만 돌려 무표정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 당장 칩을 돌려놓지 못해?"


"바보같은 짓거리 그만둬."


악을 쓰는 남자를 향해 해무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분노로 이성을 잃은 상대에게는 아무런 소용이없었다. 입가에 거품을 흘리며 남자가 말했다.


"내 협박이 장난같아? 사람 하나 못 죽일 것 같냐고! 그럼 어디 한번 보여주지."

남자가 송곳으로 접객원의 귀를 꿰뚫었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마구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흘러나온 피가 이리저리 튀었다.

하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여자의 귀를 꿰뚫은 송곳을 억센 손으로 쥐고 비틀자, 새하얀 귀가 뿌리부터 천천히 뜯겨나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한층 더 높은 비명을 지르며 마구 악을 썼지만, 잠시 후, 귀는 결국 완전히 뺨에서 뜯겨져 나왔다.

"이래도 내가 못 죽일 것 같나?"

귀가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핏발 선 눈으로 딜러와 플레이어들을 노려보았다. 여자는 몸을  늘어뜨린 째 이따금 몸을 들썩이며 흐느낄 뿐이었다.

"뭐하고 있어? 당장  칩을 옮겨. 전부 현금으로 바꾸고, 내가 빠져나갈 수 있게ㅡ"


푸슛 하는 맥없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풀썩 쓰러져 바닥을 굴렀다. 접객원도 축 늘어진 채로 함께 쓰러졌다.


괴괴한 침묵이 홀을 감쌌다.

방금 전까지 핏발선 눈으로 악을 쓰며 소리치던남자는, 지금은 바닥에 쓰러져 팔다리를 이리저리 늘어뜨린 채로 완전히 침묵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저격에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자, 곧이어 나타한 양복 차림의 가드들이 시체를 끌고 사라졌다. 바닥 위에 핏자국이 길게 남았다. 귀가 뜯겨나간 접객원도 뺨을 움켜쥔 채 스태프 룸으로 향하는  너머로 몸을 감췄다.

"남은 참가자는 여섯. 참가비를 지불해 주십시오."


굳어선 사람들과 침묵 사이로 무감정한 딜러의 말이 울려퍼졌다. 그제서야 겜블러들은 정신을 차리고 테이블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또다시 사람들이 참가비를 내고 딜러가 패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인 두 장의 카드를 집어들려던 해무는 의도치 않게 움찔하며 멈춰섰다.


그런 해무의 모습을 옆에 앉은 세브린은 힐끗 바라보았다. 창백한 채 딱딱하게 굳은 얼굴. 잔뜩 일그러진 눈썹.

자신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해무는 천천히 숨을 삼켰다.


자신의 몸에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오한과 통증. 며칠 전부터 계속되던 증상이었다. 지금까지는 줄곳 무시해왔다. 단순한 컨디션 이상이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지금 이순간, 증상은 더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고통이 되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다리 사이. 그곳에서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없던 이질감이 느껴졌다. 속옷이, 바지가, 끈적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오줌의 감촉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끈적하게 젖어들고 엉겨붙는 감촉.

 불쾌한 느낌과 고통에 심호흡을 하던 해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세브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군."

해무는 입을  다문 채로 자신 앞의 카드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카드는 쥐어들지 못한 채였다.

"처음인가?"

"뭐?'


세브린의 말에 해무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하지만 세브린은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간단하게 조언했다.


"어쨌건 이번 게임은 무리겠군. 접어라."

말도 안되는 소리다. 임무가 한창 진행중이다. 게임을 접는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해무는 세브린의 말을 따랐다.


"잠시 실례하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해무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손이 떨렸다. 숨이 가빠오고 시야가 점점 좁아들었다. 복도에  있던 누군가를 밀치고 여자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칸막이 안에서 쾅 하고 문을 닫은 해무는 헐떡이는 숨을 필사적으로 진정시켰다. 손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번이나 미끄러진 후에야 간신히 벨트를 풀었고, 바지를 내렸다.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해무는 떨리는 손으로 허벅지 안쪽을 천천히 쓸었다. 끈적한 액체가 손에 묻어나왔다. 어두운 화장실 조명 불빛 아래 비춰진 손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살수에게 물 만큼이나 익숙한 액체, 피.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온 피가 해무의 손에 덕덕지 묻어있었다.

그 손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던 해무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지고, 잠시  분노로 이성을 잃은 해무가 마구 악을 쓰며 화장실 칸막이를 발로 찼다.

쾅, 하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화장실 안에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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