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겜블의 규칙 (18)
게임은 잠시 인터미션에 들어가 있었다. 수호는 사람들이 자리를 뜬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무의 칩은 그가 앉아있던 자리 앞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하지만 배팅했던 칩은 전 게임의 승자인 재이에게 전부 고스란히 넘어가 있었다. 그가 배팅했던 칩의 금액을 고려한다면 꽤나 큰 손해였지만, 마침 바로 인터미션이 이어진 탓에 게임에서 밴을 당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미안하게 됐군."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해무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얼굴색이 눈에 띄게 창백한 탓에 그 빈정거림은 별 효과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할 생각인가?"
"무슨 뜻인지?"
수호의 질문에 해무가 되물었다.
"겜블 얘기다.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는군."
"그건 내가 결정해. 네놈이 신경 쓸바가 아니야."
그렇게 대답한 해무가 수호를 밀치고 테이블로 향했다. 하지만 수호는 해무가 떠나게 놔두지않았다. 해무의 손목을 낚아채 멈춰세우며 말했다.
"맞는 말이야. 그리고 내 제안에 대한 대답도 당신이 결정하는 거고. 기억하고 있나?"
순간 수호의 턱에 주먹을 날리려던 해무는 멈춰섰다. 물론 기억하고 있다. 월남. 자신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치자는 제안. 아직 그 제안에 답하지 않았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탓에 무시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진지하게 고민하는 탓에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였을까.
이유에 뭐가 됐건간에, 해무는 아직 답하지 않은 상태였다.
"내 제안은아직도 유효해. 오늘 이 겜블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수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렇다고 잡힌 손목을 풀어내지도 않은 채 해무는 생각했다.
성채 밖에서의 삶? 자신에게 그런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남한에서의 삶은 상상해 본적도 없었다. 자신과 자신의 이부형제를 포함한 핏줄은 이 성채와 끊어질 수 없는 질긴 연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저 남자는 주제도 모르고 자신에게 허울좋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었다.
굳은 얼굴로 말없이 서있는 해무를 향해 수호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당신을 본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더군. 당신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다고."
그래, 사실이다.
해무는 알지 못했다.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당연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심지어 자신이 여자의 몸이라는 사실 조차도 몰랐다. 그저 갑작스런 하혈(下血)에 자신의 의식이 자리잡은 이 몸뚱아리가 여자라는 사실을 벼락처럼 자각할 수 있었을 뿐.
"이쩌면 그건 이 도시 탓인지도 모르지. 이 빌어먹을 성채에서는 누구라도 미쳐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진지하게 고민해 봐.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어."
해무와 수호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 때,
"그 손 놔."
해무의 손목을 잡은 채 그녀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는 수호의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울려퍼졌다.
단하였다.
ㅇ ㅇ ㅇ
수호는 침착했다.
뒤통수에 닿는 단단하고 서늘한 감촉. 모를리 없었다. 총구의 감촉이었다.
"여기는 무기 반입이 금지된걸로 아는데."
"외지인인가? 멍청한 소릴 지껄이는군. 성채에는 수많은 규칙이 있지. 그리고 갑종살수는 그딴거 신경 안 써."
또 갑종인가.
적게 잡아도 남한 중앙정보부 요원 수준의 무력을 지닌 존재들. 그들이 이좁은 공간에 둘이나 있는 것이다.
"뭐야?"
갑작스레 등장한 상대의 모습에 해무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했다. 명백히 수호의 등 뒤에 선 채 총구를 겨누고 있는 남자, 단하를 향한 것이었다.
"형이 여기엔 왜?"
"문제가 생겼어."
"나도 그래. 형은 뭔데?"
해무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단하는 총구를 고정한 채 턱짓으로 수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내 목표."
그것으로 단하는확실하게 이해했다. 해무가 현재 수행중인 업. 그 목표인 남한의 요원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해줘서 고맙군. 첨언하자면 내 목표는 당신이야."
두 갑종살수 사이에 낀 수호가 말했다. 그런 수호의 모습을 보며 단하는 생각했다.
죽일까?
간단하다. 방아쇠만 당기면 된다. 하지만 유예했다. 해무가 이번에 맡은 업은 암살이 아니다. 남한의 요원들을 막고 그들의 돈을 되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섯불리 죽여서는 안된다.
"네 자리로 돌아가라 요원. 살수의 일에 끼어들지 마라."
"끼어든건 당신아닌가, 살수? 먼저 대화중이었던건 내 쪽이야."
단하를 향해 천천히 돌아서며 수호가 말했다.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차갑고 냉담한 시선. 그 아래에는 언제라도 상대를 죽일 수 있는 폭력을 품고 있었다.
[인터미션 종료 5분 전. 참가자들은 테이블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게임의 재개가 머지 않았음을 알리는 딜러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해무는 초조한 얼굴로 시계를 확인했다.
"둘다 꺼져. 나는 할 일이 있어."
"제안은ㅡ" "문제가ㅡ"
둘의 말소리가 뒤섞이며, 멈칫한 단하와 수호의 시선이 교차했다.
먼저 움직인건 수호 쪽이었다. 찰나의 순간 빠르게 내어진 수호의 손이 단하의 베레타 총열을 잡아 천장을 향해 비틀었다. 단하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대신 총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그 빈 주먹을 수호의 옆구리를 향해 내질렀다.
큭 하고 숨을 토해내는 수호의 손에서 떨어진 총이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수호도 절대 느리지 않았다. 곧바로 수호의 주먹이 단하의 턱으로 향했다.
하지만 단하는 그 공격을 막지 않았다. 대신, 해무의 뒤통수를 움켜쥐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쇄도하던 수호의 주먹이 해무의 뒤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갑작스런 대치. 그 짧은 순간, 해무의 귓가를 향해 입을 옯겼다.
"갑종이 올거다."
작은 소근거림. 그 말에 해무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널 노리고 있어. 살수회도 여길 주시하고 있고. 이건 절대 보통 사태가 아니야."
갑종과 살수회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 단하가 전한 그 내용에 해무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이며 카지노 안을 훑었다.
바에 앉아서 해무가 겜블을 하던 테이블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남자가 한명.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겜블을 하는 척 하면서 테이블을 감시 하는 한명.
그리고 테이블 가장 가까운 곳에 붙어서있는 남자가 한명.
갑종은 아니다. 살수회 직족의 을종살수들이다. 모두 해무를 감시하기 위한 인력들이었다. 살수회 직속인 만큼 한걸음 더 발빠르게 움직여 도착해 있는 것이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공포 탓이 아니었다. 분노 때문이었다.
살수회가 자신을 감시하는 이유는 하나 뿐이다. 자신이 실패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업에 패하여 남한의 요원들에게 유린당하고, 막대한 돈을 잃어버릴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판단을 내린 이유 중 큰 이유가, 바로 여자가 된 이 몸뚱아리에 있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겨버릴 듯한 분노. 하지만 해무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감정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다른 갑종까지 자신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냉철한 상황 판단이 그 어느때 보다도 중요했다.
"갑종은 누구지?"
고작해야 여덟 뿐인 갑종들. 그 중에 자신을 노리는게 과연 누구일까. 하지만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저 현재 배정된 업이 없는 살수일 것이라고 예상하는게 전부였다.
"분명 형도 쉬는 중이지."
해무의 말 뜻을 이해한 단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개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형은 모범 살수잖아? 회주의 말이라면 발에 땀 나게 뛰어다니는 충신이지."
"나는 널 위해서 왔어!"
열이 오른 단하가 소리쳤다. 어느새 단하는 해무의 셔츠 깃을 움켜쥔 채, 코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 정도로 해."
단하의 앞을 가로막은 수호가 말했다.
"너만 할 얘기가 있는게 아니다. 떠들만큼 떠들었으면 이제 나도 좀 얘기를 하고 싶은데?"
"미친 놈, 감히 성채 안에서 살수에게ㅡ"
[인터미션 종료 1분 전. 참가자들은 테이블에 앉아 주십시오.]
서로를 죽일듯이 쏘아보는 둘의 사이로 마지막 안내가 울려퍼졌다. 그 내용에 해무는 수호와 단하를 밀쳐내며 말했다.
"전부 꺼져. 나는 내 일을 할 테니까."
두 남자를등 뒤에 남겨둔 채, 해무는 마지막 겜블이 이뤄질 테이블을 향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십, 구, 팔, 칠, 육.....]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들으며 해무는 생각했다.
그래, 나는 내 일이 있다. 살수 놈들도, 그 뒤에 있을 회주도, 그리고 단하 형도 알 바 아니다. 여자가 되버린 자신의 몸뚱이도 알 바 아니다. 자신에겐 임무가 있었다. 행해야 할 업이 있었다.
"그래. 나는 할 일이 있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1초를 남기고 자리에 앉은 해무의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나온 칩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 참가비 더미 안으로 섞여 들어갔다.
테이블을 향해 지긋이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딜러가 턱을 들며 말했다.
"마지막 게임을 시작합니다."
마지막 게임의 시작이다.
ㅇ ㅇ ㅇ
성채의 국경에 자리한 검문소가 열려있는 것은 밤 열시 까지. 이곳 카지노에서라면 늦어도 아홉시에는 출발해야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성채를 떠날 수 있다.
그렇기에 수호 일행이 할 수 있는 게임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다. 만약 이 이상 늦어진다면 그들은 무단으로 높은 철조망을 넘어 도망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검문소의 공안들과 충돌할 것이다.
성채에서 도망치면서 공안들의 추격까지 받는 것은 그들이 가장 원치 않는 일일 것이다.
아직까지 테이블에 남아있는 겜블러는 셋 뿐이었다. 세브린, 해무, 재이.
그들을 제외한 다른 겜블러들은 어느새 자신의 돈을 모두 잃고,혹은 패배를 감지하고 손을 털고 떠난 후였다. 마지막 게임이 되어서야 무대의 진짜 주인공들만이 남은 것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 게임이 끝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셋 중에서 먼저 칩을 전부 잃은 것은 해무였다. 애초부터 세브린에 비해 적은 판돈으로 시작한 그였다. 게다가 세브린과 재이에 비하면 겜블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문제 없겠어?"
구경꾼들에게 섞인 채 다른 살수들을 주시하던 단하가 자리에서 일어난 해무를 향해 물었다.
해무는 대답 대신에 수호의 모습을 찾았다. 수호는 그늘진 얼굴로 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몰랐다. 이 게임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재이의 얼굴은 눈에 띄게 고통스러웠고, 세브린과 마주친 내내 그들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칩을 잃고 있었다. 마치 벌어진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짐승처럼.
그야말로 가장 눈에 띄는 패색(敗色)이었다.
과연 수호가 자신들의 실패를 처음 직감한 것이 언제였을까.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 카지노로 향할 때부터? 아니면 카지노에서 처음 해무를 마주쳤을 때부터? 혹은......그들이 처음 이 작전에 배정됐을 떄부터?
해무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종말의 목격자로서,
재이는 자신의 패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세브린이 있었다.
유리구슬 같은 눈. 가면처럼 미동조차 하지않는 얼굴.
그 모습을 응시하던 재이는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칩을 전부 밀어넣었다. 오늘 아침 육백억으로 시작했던 칩은 깎이고 깎여서 사백 억 뿐이었다. 설령 지금의 마지막 싸움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 금액은 팔백 억. 목표치에 달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세브린도 그에 맞춰 자신의 칩 더미에서 천이백 억을 그러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배팅을 마무리합니다. 각자 자신의 패를 보여 주십시오."
테이블 가운데에 모인 칩이 정확히 천육백 억 원이라는걸 확인한 딜러가 말했다.
재이는 패를 열었다.
그의 마지막 패는 노 페어. 하트Q 였다.
세브린도 자신의 패를 열었다.
그녀의 패 또한 노 페어. 스페이드 에이스였다.
"스페이드 에이스의 승리입니다."
딜러의 말은 선고(宣告)와 같았다.
괴괴한 침묵이 테이블을 감쌌다. 모든 것이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 했다.
패자는 오열하지 않았고, 승자도 환호하지 않았다.
그렇게 게임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