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겜블의 규칙 (19)
"끝났군."
제리 창이 말했다.
"돈을 따면 어떻게 갖고 나갈지 고민했었는데, 필요없는 걱정이었군. 나는 이만 먼저 떠나지. 밖에서 만날 수 있길 기도하겠네."
그렇게 말한 제리 창은 곧바로 몸을 돌려 카지노를 떠났다.
수호는 아까 전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얼굴 표정에는 한 치의 요동도 없었다. 마치 패배를 예측하고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재이는 그렇지 못했다. 소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해무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각자 달랐지만, 남한의 두 요원은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 굳어있었다. 모든 것을 자들의 모습이었다.
살수와 요원. 불리는 이름은 달랐으나 본질은 같다. 임무를 수행하면 살아남는다. 실패하면 끝난다. 커리어, 그리고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이. 만약 그들이 남한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따로 비율을 정한 적은 없지? 반반으로 나누도록 하지."
세브린이 말했다. 그녀는 요원들의 패배에 아무런 흥미가 없는 듯, 부채를 흔들며 눈 앞의 총 천육백억원 어치 칩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무는 잠시 망설이다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움직임은 신속했다. 세브린이 딜러에게 지시하자, 딜러는 곧바로 칩을 금액별로 분류해서 차곡차곡 쌓았다. 근처에서 대기하던 카지노 직원들 몇 명이 그 일을 거들었다.
칩으로 된 탑을 하나 쌓을 때마다 검은 가방 안으로 옮겨졌다. 가방 한두개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할 것이다. 자그마치 천 육백억 원 어치였으니. 확인이 끝나면 딜러는 칩을 어음으로 교환해서 나눌 것이다. 세브린의 명의로 반, 자신의 명의로 반.
그리고 그 동안 해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해무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게임이 한창 진행되는 도중에는 아무도 판을 뒤엎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쪽이던 결과가 승패가 기울고 결과가 확정되면, 그 순간부터 겜블러는 짐승이 된다.
그리고 모든걸 잃은 짐승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해질 수 있다.
해무는 수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과연 심장이 뛰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 그 위에 서린 무감정한 표정.
해무는 직감했다.
위험하다.
짐승은 사냥감을 위해 도약하기 전에 가장 크게 웅크린다. 심장 박동조차 억누른 채로. 그것은 지금수호가 보여주는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무는 단하에게 눈짓했다. 단하도 알고 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놈을 제압할 수 있을까? 모든걸 잃고 미쳐 날뛸 요원을?
하지만 차오르던 긴장감은 누군가의 인사에 맥없이 풀려버렸다.
"수고가 많았군, 갑종살수 해무."
팽팽한 긴장감을 어그러뜨린 것은 을종 살수들이었다. 아까 전 까지 자신을 감시하던살수들, 그 중에서도 가장 배분이 높아 보이는 남자가 턱수염을 긁적이며 해무를 마주한 채 서 있었다. 해무는 그들의 면면을힐끔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을종 살수들과 일일히 말을 섞고 있을 틈 따위는 없었다.
"당신의 업은 무사히 완료된 것으로 보고하겠소. 어음은 내게 넘겨주시오. 우리가 살수회에 직접 공납해 줄 테니."
"꺼져."
을종이 지껄이는 헛소리를 더이상 받아들이지 못한 해무의 대답은 간결했다.
"네깟 놈들이 끼어들 판이 아니야. 내 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억지부리지 마시오.겜블은 끝났소."
"내 업은 살수회에 직접 돈을 넘기는 것 까지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끝난게 아니야."
"......우리가 회주의 명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텐데?"
"나 또한 마찬가지. 마지막까지 업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네놈과 내 업이 상충하는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해무가 차가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시시비비를 한번 가려보겠나?"
남자는 침을 삼켰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작은 소녀. 그녀의 시선에 떨림이라고는 없었다.
선임 을종살수로서, 남자는 자신의 격이 갑종에 결코 낮지 않다고 생각했다. 반면 상대는 여자의 몸으로 영락한 갑종. 게다가 지금은 자신의 부하들까지 합쳐서 전부 셋. 충분히 해 볼만한싸움이어야 했지만ㅡ
우선은 판단을 보류했다. 아직 자리에 남한 요원이 남아있었다. 심지어 다른 갑종인 단하까지 있다. 그가 해무와 우호관계라는 사실은 대외적으로도 충분히 알려져 있었다.
"네놈들이 할 줄 아는 거라곤 고작 남의 먹잇감을 가로채는 것 뿐. 그렇기에 네놈들이 을종인거다."
차갑게 이어지는 해무의 말에는 모멸적인 내용까지 섞여있었다. 하지만 을종들은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그들을 마주하며 해무는 생각했다. 머릿속은 겜블을 할 때보다도 더욱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까 전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을 때 이상으로 지금 상황은 복잡했다. 엮여있는 플레이어들은 자신과 단하. 을종 셋. 수호. 거기에 언제 이곳에 나타날지 모르는 세 번째 갑종까지.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최선의 선택지는 하나. 가능한 빨리 돈을 챙겨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확인이 끝났습니다."
테이블 위에 쌓여있던 칩을 전부 세어 상자에 담은 딜러가 말했다.
"총 천육백억원 어치의 칩을 확인했습니다. 여기, 본 카지노에서 보증하는 어음입니다. 수수료를 제하고 각각 칠백억 원 짜리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딜러의 양손에는 상패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금박으로 장식된 나무 프레임 안에는 투명한 유리판이 두 겹 끼워져 있었고, 그 유리판 사이에 어음이 들어있었다. 지폐 크기의 종이에는 칠백억이라는 숫자와, 그 가치를 구룡성채의 카지노가 보증함을 알리는 인장이 찍혀져 있었다.
어음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해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따. 그리고 그 패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푸르스름한 유리판 너머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틈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해무의 눈에 새겨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해무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머리.......?"
어음패 사이로 시선이 마주친 페이 롱이 씩 웃으며 샷건의 방아쇠를 당겼다.
쾅, 하는 폭음이 거대한 카지노 홀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테이블 위 천장에 이어진 사슬이 끊어지며, 수백 키로 짜리 샹들리에가 추락했다.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크리스탈이 산산히 부숴지며, 조금 전까지 칩을 정리하던 딜러의 머리를 수직으로 꿰뚫었다. 피와 뇌수가이리저리 튀었다. 테이블에 둘러서 있던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해무는 분수옆의 인어 조각상 뒤로 몸을 날렸다. 단하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빌어먹을. 여기 총없이 들어온 갑종은 나 뿐인 것 같군."
"그걸 이제 알았어?"
해무의 투덜거림에 단하가 빈정거렸다. 조금 전까지 겜블을 하던 테이블은 피와 비명으로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살수와 요원들은 빠르게 피한 탓에 마구잡이로 이어지는 산탄 사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여자들의 하이힐이 뒤엉키며 부러지고, 남자들의 구두가 대리석 위의 피칠갑에 미끄러졌다. 사람들이 피를 뿌리며 살덩이가 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우왕좌왕거리며 우르르 도망쳤다.
해무는 심호흡을 했다. 지금의 상황은 자신의 계획-차질없이 업을 완수하기 위한 계획-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의 반 이상은 페이 롱이 차지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해무는 총성이 울리는 쪽을 향해 소리쳤다.
"페이 롱, 이 대머리 새끼야! 뭐하는 짓거리냐? 이건 내 업이다!"
그러자, 마구 이어지던 샷건의 폭음이 잠시 멈추었다. 해무는 조각상 너머로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동시에,
"이런 씨발!"
곧바로 폭음과 함께 산탄 쇄도했다. 해무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황급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은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끊어져 허공에 날렸다.
"형, 하나 더 없어?"
조각상 위로 손을 내밀고 페이 롱을 향해 응사하는 단하에게 해무가 물었다.
"총이 남아도냐? 너도 갖고 왔어야지."
"갑종 신분증을 맡기라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거라고."
"목숨도 그렇지. 그마저도 총 없으면 죽은 셈이야."
"알려줘서 고맙네."
그렇게 투덜거리며, 해무는 지금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을생각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작 떠올린건 자신을 쫒는 갑종이 대머리ㅡ 페이 롱이라는걸 확인했다는 것 뿐이었다.
"그걸 안다고 별 도움이 되는건 아니지만......."
페이 롱은 갑종 살수이지만, 그보다는 미친 변태 새끼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 미친 변태 새끼가 자신을 쫒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뭔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제일 도움 안되는게 너야."
자동권총의 탄창을 갈아끼우며 단하가 말했다. 머리 위로는 계속해서 산탄이 빗발치고 있었다. 그 때, 폭음을 뚫고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해애애애애무우우우우우ㅡ!!!!"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확인한 해무는 황당함에 말을 잃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그 위에서는 세브린이 해맑은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자신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할일 다 했다고! 당신도 내게 줄게 남은거, 알고 있지?"
한 손에는 어느새 자신 몫의 칠백억 어음을 끼워든 채였다.
"약속 꼭 지켜!"
그렇게 말한 세브린은 계단을 우르르 내려오는 무장 가드들 사이를 거슬러 올라가, 2층 관리자 구역 너머로 몸을 숨겼다.
"뭘 줘?"
"몰라도 돼."
질문하는 단하를 향해 해무는 썩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보다 중요한게 있었다. 안그래도 엉망진창인 지금 상황에 카지노의 가드들이 더해졌다는 것이다. 페이 롱의 산탄 위에, 가드들이 난사하는 소총의 폭음이 더해졌다.
이 업의 마지막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을종살수들이나 수호, 혹은 페이 롱이 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지금 가장 위협적인 것은 끝없이 몰려드는 카지노 가드들이었다. 검은 양복 차림에 손에는 AK-47을 든, 준군사조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놈들 말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드럼식 탄창을 장비한 놈들도 있었다.
"형, 일단 도망치자. 여기서 뭉개고 있다간 갑종이고 뭐고 뒈지기 딱 좋다고."
"그게 쉬우면 이러고 있겠냐?"
단하가 빈 탄창을 교환하며 말했다. 머리 위로 날아오는 총알은 대리석 조각상을 계속해서 깎아내고 있었다. 총알이 조각상에 부딛힐 때마다 날카로운 돌조각 파편이 튀었다.
해무는 홀의 구조를 살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유일한 출입구인 정문. 그곳에는 이미 무장한 가드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저게 유일한 출입구는 아닐 것이다.
해무는 생각했다. 세브린의 퍼레이드. 그 미친 퍼레이드가 어디에서 왔을까. 홀의 북서쪽이다. 그쪽에 분명 통로가 있을 것이다. 방향을 확인한 해무는 연신 방아쇠를 당기고있는 단하의 귓가에 소리쳤다.
"형, 보여? 저쪽 방향에ㅡ"
해무의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쾅 하는소리와 함께 분수대가 산산조각나며 물이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비산하는 물방울 뒤에서 엉금엉금 기어, 해무와 단하는 건너편 엄폐물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다시 응사를 이어가던 단하는 이내 총알이 다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서, 어떡하자고?"
엄폐물 뒤에서 아까보다 더 몸을 잔뜩 웅크린 단하가 물었다. 이미 주변의 조각상들은 수십 수백발의 총탄 때문에 반 이상이 깎여나갔고, 이제 해무와 단하의 몸을 더이상 엄폐하는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칠백억 들고 여기서 탈출."
"어딨는데."
그리고 잠시 후 목표물을 확인한 단하는 이를 갈았다.
약 5미터 앞, 거대한 샹들리에로 초토화가 된 테이블. 수많은 불꽃과 총탄이 오가는 현장 한 가운데. 샹들리에에 깔려 피떡이 된 딜러의 손 끝에 칠백억 짜리 어음패가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