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겜블의 규칙 (20)
빌어먹을.
단하는 이를 갈았다. 어음이 있는 곳은 고작해야 오미터 앞. 하지만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그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았다.
"멍청아! 아까 왜 안 챙겼어?"
"그랬으면 쇠구슬에 머리통 갈려나갔어."
괜히 화를 내는 단하에게 해무가 항변했다. 하긴, 해무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어음을 챙기려다가 머리통이 벌집이 되는 것보다는, 적어도 살아남는게 올바른 선택이니까.
납득한 단하는 어음이 떨어져있는 곳 너머의 반대편을 확인했다.
"저 놈들은?"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수호와 재이가 화단 뒤에 몸을 숨긴 채로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관계 없어. 돈만 찾으면 그걸로 내 일은 끝이야."
지금 이곳은 전장이나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 저들까지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한의 요원들을 억류하려면 적어도 주변을 가득 채운 병력들부터 제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페이 롱은 어찌저찌 처리한다고 해도, 카지노의 가드들은 답이 없었다. 수십명씩 떼로 몰려들며 무장한 자동화기를 난사하는 놈들 앞에서는 아무리 갑종살수라 하더라도 순식간에 다진 고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답은 하나 뿐이다.
"일단 어떻게든 챙겨들고 빠지자."
"형이 하게?"
뻔뻔하게 묻는 해무의 모습에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욕설을 한바가지 퍼부으려던 단하는 화를 삼켰다. 지금 이 상황은 감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냉정하게 답을 찾아야 한다.
"같이 하자. 엄호할 테니까 다녀와."
"내가 엄호하고 형이 다녀오는건?"
"총 있어?"
해무는 양 손을 들어보였다. 빈 손이었다.
"없네. 내가 가야겠네."
가드들은 마치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표적이라고 생각하는듯, 주변을 움직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총알을 난사하고 있었다. 해무와단하. 수호와 재이. 페이 롱과 을종 살수들. 그리고 아직까지도 도망치지 못한 멍청하고 불쌍한 민간인들을 향해서.
때문에 가드들의 총구는 이곳저곳으로분산되어 있었다. 해무와 단하에게 있어서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구 방아쇠를 당기는 가드들의 발포 타이밍을 재던 단하는, 총성 사이의 짧은 순간을 노려 신호했다.
"가!"
해무는 몸을 날렸다. 작은 몸이 바닥을 미끄러졌다. 몸에 도로가 유리 파편이 박히며 핏방울이 벗겨진 피부에 방울방울 맺혔다. 하지만 덕분에목표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줄일 수 있었다.
해무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포복으로 자세를 바꿨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서는 페이 롱이 여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가드들을 향해 산탄을 뿌려대고 있었다.
부디 가드들이 저 놈의 머리통에 구멍을 뚫어주기를 기도하며 해무는 낮은 자세로 목표물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해무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 옆으로 AK의 7.62mm 탄알이 박히며 불꽃이 튀었다. 해무를 노리고 날아오는 총알도 있었고, 의도치 않게 날아온 유탄도 있었다.
그리고 해무를 향해 총탄이 날아올 때마다, 등 뒤에서 단하가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고, 그 때마다 눈 앞의 가드들이 하나씩 풀썩풀썩 쓰러졌다.
해무는 쓸데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총알도. 그리고 뒤에서 자신을 엄호하고 있을 단하도.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전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눈 앞의 목표물에만 집중한 채움직였다.
걸어서라면 너무나도 짧은 거리인 5미터 였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마치 한강 너머처럼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새 좁혀져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닿을듯한 거리에 도착하자, 해무는 힘껏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손끝이아슬아슬하게 어음패에 닿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몸을 날렸고, 그와 뒤엉켜 해무는바닥을 굴렀다.
해무는 이를 악물고 상대를 밀쳐냈다. 하지만 상대는 해무의 발길질에 턱을 맞아가면서도 끈질기게 매달렸다. 얼굴을 힐끗 확인한 해무는 그의 정체를 확인했다. 상대는 을종살수. 아까 전까지 자신을 감시하던 자들 중 하나였다. 자신에게 어음을 넘기라고 협박했던 선임 을종은 아니었다. 그가데려온 두 명의 을종들 중 하나일 것이다.
뒤에서 엄호하던 단하는 얼굴을 찡그리며 다른 가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을종과 해무는 이미 뒤엉킨 후였다. 엄호 지원은 불가능하다. 놈은 해무에게 맡기고 다른 쪽을 처리하는게 맞다.
살수는 해무에 비해 가진 유일한 장점인 체중을 살려, 해무 위에 올라탔다. 살수의 주먹이 아래에 깔린 해무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해무는 상대를 밀쳐내려 했지만, 자신의 두 배 덩치만한 살수는 쉽게 포지션을 양보하지 않았다. 한번, 두번, 주먹이 내려칠 때마다 해무의 머리가 대리석 바닥을 내리찧었다.
해무의 초점이 희미해지며 목에도 차츰 힘이 빠져나갔다. 살수는 숨을 헐떡이며, 손바닥으로 해무의 머리를 부술 듯이 바닥에 대고눌렀다. 하지만 순간, 초점을 잃어가던 해무의 핏발선 눈이 번뜩 떠졌다. 그리고 찢어지는 비명이 이어졌다.
비명은 살수의 것이었다. 어느새 크리스탈 샹들리에 파편을 움켜쥔 해무는 그걸 살수의 팔뚝에 깊숙히 찔러넣은 채였다. 곧바로 해무는 재차 파편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얼굴이었다. 파편이 살수의 눈알을 꿰뚫고 깊숙히 박혔다. 살수가 경련하며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누군가의 총탄에 뒤통수를 맞고 풀썩 쓰러졌다. 찢어지는듯한 비명도 플러그가 뽑히듯이 끊겼다.
쓰러진 을종의 시체를 발로 차서 밀어낸 해무는 옷소매로 코피를 닦아내고 다시 목표를 확인했다.
"해무!"
뒤에서 단하가 소리쳤다. 해무는 고개를 들었다. 발코니 위, 한 가드가 어깨 위에 포를 들쳐멘 채 해무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이런ㅡ"
짧은 순간, 아무리 그래도 로켓 런쳐는 너무하잖아, 하는 맥빠진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길지 않았다. 가드가 방아쇠를 당기자, 곧이어 눈앞에서 뜨거운 폭발이 휘몰아쳤다.
ㅇ ㅇ ㅇ
나는 요원이다.
나는 대한민국 중앙정보부특무국 소속 요원이다.
그 시작은 불행이었다. 아버지는 정부 기관에서 일했고, 어느날 사고에 휘말려 죽었다. 어머니와 함께. 교통 사고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가 찾아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이름이 좋다, 라고.
그리고 진실을 말했다. 아버지는 정보기관 소속이었고, 중국과의 외교전을 수행 중 암살당한 거라고.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비록 남한이라는 반쪽짜리 나라가 되었지만, 아직 정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남아있다. 너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으며, 네게 주어진 이름 또한 그런 아버지의 의지가 담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너도 아버지의 뜻을 잇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나는 중앙정보부의 요원 후보생이 되었다. 열 다섯살 때부터 요원 양성을 위한훈련과 교육을 받고, 열여덟 살에 준요원으로 임명됐으며, 스무살 때 중앙정보부 특무국으로 배속받아 일했다.
그리고 수많은 암살과 첩보, 사보타주같은 작전 수행을 거쳐 정식 요원이 되었을 때 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수호하고 있던 것은 국가가 아니라 비대하고 기형적으로 성장한 권력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중앙정보부, 그 중에서도 특무국은 그 권력 행사의 선봉에 있었다. 조직의 유지를 위해 테러를 방치하고, 기밀 정보를 의도적으로 유출시켰으며,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정치인을실각시키고, 심지어는 직접 암살까지 했다. 전부 특무국 스스로의 보신을 위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수호는 명령을 따랐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자신이 할 줄 아는 일은 그것 뿐이었으니까.
중앙정보부의 실체를 알고 나서도 수호는 계속해서 목표를 납치하고, 요인을 암살하고, 정보를 탈취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언제나 생각했다. 자신이 죽인 목표가 국가의 적이 아니라 특무국의 적이고, 그중에는 진정으로 국가를 위하는 애국자도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언제까지나 건재할것만 같던 특무국의 체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그 어떤 조직도 중앙정보부 산하 조직을 견제할 수 없다. 견제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똑같은 중앙정보부 산하의 다른 조직들 뿐.
특무국은 중앙정보부 소속 부서중 가장 큰 무력, 요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 명의 요원이 전함을 침몰시킬 수 있고, 사령부의 참모진을 암살할 수 있었으며, 국회를 점거하고 대통령을 납치할 수 있었다. 그런 요원들이 서른 명이 넘었다.
그 인력을 특무국은 해외 작전에 쓰지 않았다. 대신 국내 정치에 개입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만 총력을 집중했다.
단독으로 보유한 막대한 무력은 같은 중앙정보부의 다른 부서들에게도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는 특무국에 대한 압박이라는 형태로 다가왔다. 대대적인 내부 감찰이 시작됐다. 회계. 작전. 인력 운영. 그 모든 것을 샅샅이 들춰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특무국이라 하더라도 이 압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
아니, 이제는 특무국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그 남자는 말했다.
타 부서들의 압박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해외 작전 수행이 필요하다고.
그 한 마디로 작전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형편없이 삐그덕거리는 절름발이 작전. CIA와의 어설픈 연계. 급조된 작전으로 상대하기에 부담없는 상대인 구룡성채.
그리고 나를 불러 말했다. 이 작전으로 우리 조직은 살아남을 거라고.
오직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그의 뜻이 무엇인지 나는 알았다.
그렇게 나는 작전에 자원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아버지도 이런식으로 희생된게 아닐까. 조직으로부터 희생을 강요받아 죽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제와서는 아무런 의미없는 질문이었다. 이미 작전은 굴러가기 시작했다. 국가의 체제와 정의를 수호한다는 가면을 쓴, 조직의 보신을 위해 이뤄지는, 마치 서커스같은 작전이.
그리고 그 결과는 이것이었다.
작전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었고, CIA와의 협력 체계는 실낱처럼 가늘었으며, 구룡성채는 예상과 달리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살수회의 살수들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결국 작전은 실패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가능성은 몸뚱아리라도 온전히 보존한 채 남한으로 탈출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 다음은?
작전에 실패하고 남한으로 돌아가도,그 뒤에 있는 것은 정보기관의 서슬퍼런 칼날 뿐이다.
돈을 탈취하는데 실패한 것은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다. 애초에 돈을위한 작전도 아니고, 진정으로 구룡성채를 견제하기 위한 작전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작전을 실패한 것은 문제가 된다. 지난 수년간 해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국내 정세에만 개입해온 특무국이 처음으로 벌인 해외 작전. 그것의 실패는 특무국의 책임이 될 것이고, 특무국은 그 희생자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어느날 자신은 특무국장의 호출을 받게 되고, 차를 몰다 운전 미숙으로 반대 차선을 넘어가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거대한 덤프 트럭에 깔려 납작하게 짓눌리게 될 지도 모른다.
마치 십 년 전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자신은 과연 어떡해야 할까. 그런 미래를 피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수호는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는 재이가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고, 맞은 편에서는 해무가 몸을 낮춘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며, 주변은 온통 총탄과 폭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그 뿐이 아니었다.
유탄.
로켓 런쳐가 발사한 유탄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해무를 향해 날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탄의 뾰족한 끝이 벽에 닿으며 내는, 틱, 하는 희미한 소리마저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폭발이 이어졌다.
이명이 울리고, 충격파로 벽이 무너지며 파편이 튀었다.
홀에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자 눈 앞에는 어음패가 뒹굴고 있었다. 칠백억의 어음. 그걸 감싸고 있는 깨진 유리 너머로 은발의 살수가 보였다.
안돼.
충격으로 반쯤 정신을 잃은 그녀의 입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벙끗거리는 입술은 이어진 일들 중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뜨거운 바람에 팔랑거리는 어음을 손가락으로 낚아챈 수호가 재이를 들쳐업고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