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겜블의 규칙 (21) (36/82)



〈 36화 〉겜블의 규칙 (21)

해무의 시선은 눈앞의 크리스탈 더미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샹들리에에 깔려 죽은 딜러의 손.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그 손에는 어음패가 들려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발 먼저 움직인 수호가 낚아채어 도망친 후였다.

폭발이 만든 충격으로 인해 잠시 멎었던 총성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총탄에 해무의 은빛 머리카락  가닥이 잘려 허공에 휘날렸다.


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당기는 손에 해무는 휘청하며 엄폐물 뒤로 털썩 쓰러졌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단하가 가드들을 향해 응사하고 있었다. 짧은 망설임 끝에 해무는 입을 열었다.

"뺏겼어."

"봤어. 타이밍  같군."


단하가  속에 들어온 흙먼지를 뱉어내며 말했다.

수호는 이미 홀을 탈출한 후였다. 심지어 바로 쫒을 수도 없었다. 충격에서 벗어난 가드들이 다시 총을 난사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홀은 다시 전장(戰場)이 되었고, 그 안에서 도망갈 틈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설령 지금 바로 탈출한다 하더라도 이미 상당히 거리가 벌어진 상태다. 따라잡을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다.

"어쩔 거야?"

"찾아야지."


해무의 대답은 간결했고, 동시에 무거웠다.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다른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국경 검문소의 공안들에게 연락해서 출국을 막아달라고 요청할  있을 것이다.


을종이나 페이 롱이 놈들을 잡기를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해무에게는 업의 실패를 의미했다. 그것도 가장 치욕스러운 형태의 실패. 갑종으로서의 자기증명을 위해서는 오직 자신의 손으로 어음을 되찾아 살수회에 바쳐야 한다.


"절대 이대로 보낼  없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음 속에서 해무는 조용히 읊조렸다.


"놈들을 전부 죽여서라도 되찾아야 해."

단하는 입을 다문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업을 맡은 해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의 대부분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손에 든 카드를 셈하는 것이었다. 물론 겜블 또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살수의 본업은 아니다. 살수의 일은 따로 있다.

쫒는다.

그리고 죽인다.


살수의 가장 기본적인 일.


지금까지는 한발짝 거리를 둬왔던 그 일들을, 이제 할 때가 되었다.




ㅇ  ㅇ  ㅇ






수호는 달렸다. 예상대로 카지노 홀 뒤쪽에는 계단실이 있었다. 쉽게 눈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진 문이었지만, 분위기를 살피며 미리 탈출 루트를 예측한 덕에 찾아낼 수 있었다.

물론 40층에서 일층까지 내려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층 가량을 내려왔을 때 쯤,재이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어깨 위에 재이를 들쳐업은 수호는 계속해서 계단 아래를 향해 달렸다.

"내가 져서 전부 망쳤어요."


어깨 위의 재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메마른 소리에 수호는 죄책감을 느꼈다.


"걱정 마, 재이. 우리는 나갈거다."

"그렇게 둘까요? 분명 추격자가 붙을거에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재이."


차 오르는 숨을 억누르며 수호가 말했다.

"분명히 말했어.우린 전부 나갈거다."

그 말에 재이는 꺼내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수호도 알고 있었다. 결코 지금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몸은 만전의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고,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다. 손에 들린 것은 피에 젖어 구겨진 칠백억짜리 어음 한장 뿐.

분명 추격은 붙을 것이다. 카지노 가드들이 쫒아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의 수비 영역은 카지노 한정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놈들과 연계되어 있는 공안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살수들도 쫒아올지 모른다.


그리고 분명 해무는 자신을 쫒을 것이다.


눈 앞에서 자신에게 어음을뺏겼으니.

그녀에게 미안함 따위를 느끼지는 않았다. 애초에 서로간에 지킬 의리가 있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가 각자의 임무를 위해 싸울 뿐. 만약 반대 입장이었더라도, 그녀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음을 탈취했을 것이다.

때문에 수호는 해무에게 미안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아니,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는 없어.

수호는 해무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녀에 관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은 재이다. 자신이 신경써야  유일한 사람이다.


설령 내가 죽어도, 너는 무조건 나가게 하겠어.


그래, 그게 자신의 임무다. 주변으로 다가오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며, 재이가 겜블에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요원인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그리고 설령 겜블이 패배로 끝났다 하더라도 호위 임무는 끝나지 않는다. 재이는 자신의 특무관이다. 절대로 이곳에서 죽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고작 열여섯짜리 소년을 이 회색 도시에서 죽어서 이름없이 버려지게 둘 수는 없다.


어느덧 3층에 도착하자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끝났다. 앞에는 문이 있었다. 빌딩의 로비 홀로 통하는 문이었다.


재이를 내려놓은 수호는 숨을 죽이고 문에 뺨을 붙였다. 그리고 귀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계속해서 집중하자 이내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바람소리에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안정된 상태는 아니었다.

째깍거리는 손목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은 아홉시 반. 아직 국경 검문소가 닫히기 까지는 삼십분의 여유가 있었다.


 너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대리석 바닥을 딛는 구둣발 소리였다.


놈들이 저 밖에 있다.


수호는 한층 더 숨을 죽였다. 발걸음 소리는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기다렸다. 발걸음 소리가 문 앞을 지났다.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간다.

 순간, 수호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금 전 문 앞을 지나친 살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마치 거미에게 잡혀 굴 아래로 끌려들어오는 먹이처럼, 살수 하나가 문 안쪽으로 끌려들어왔다. 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수호는 팔로 목을 감아 졸랐다.

살수가  하는 숨을 토하며 난동을 부렸다. 하지만 수호의 팔에서 풀려날 수는 없었다. 살수가 사지를 휘두르며 한층  강하게 몸부림을 쳤다. 수호도 이를 악문 채 한층 더 강하게 목을 조였다. 수호의 목과 팔뚝을 따라 검붉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살수의 팔다리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제멋대로 덜그럭 거리더니, 이내 그 움직임마저 잦아들고 완전히 축 늘어졌다. 그러고 나서도 수호는 일  가량을 계속해서 목을 조른 후에야 팔을 풀었다.


살수는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베레타가 한 정. 그리고 그의 품을 뒤져서 탄창 두 개를 더 찾아냈다.

슬라이드를 당겨서 권총이 이상없이 작동하는걸 확인한 수호는 한 차례 숨을 골랐다. 그리고 들고있던 어음을 재이에게 내밀었다.

"받아, 재이. 지금부터는 네가 갖고 있어."

"이걸 가져가봤자 쓸모 없어요. 알잖아요?"

재이의 말대로였다. 작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금, 혹은 금과 같은 현금성 자산을 반출해야 했다. 하지만 수호의 돈에 들려있는 것은 구룡성채 카지노의 인장이 찍힌 어음이었다. 성채를 벗어나면 한 푼의 가치도 없는 휴지조각. 이걸 가져가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다. 반출해봤자 성채는 어음을 부도처리 하면 그만이다. 물론 그마저도 추격을 뿌리치고 무사히 탈출했을 때의 얘기였다.

"그래도 변명거린 될 수 있겠지. 원래 이건 CIA 놈들의 일이었어."

수호의 말에 재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임무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어음은 충분히 핑계거리가 될 수 있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따낸 어음을 현금성 자산으로 바꿔 반출하는 것은 제리 창의 일이었다. 때문에 어음만 있다면, CIA 놈들의 협조가 미비한 탓에 작전이 실패했다는 변명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어음마저도 없다면 작전은 완전한 실패 판정을 받고, 자신과 재이는 실패의책임을 물어 소리소문없이 암살당하게  것이다.


"하지만 수호가 갖고 나가면 되잖아요."

"너는 어음을 챙겨. 나는 널 데리고 나갈게."

수호가 눈높이를 맞춰 재이의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럼 문제 없지?"

재이는 망설임 끝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호가 건네는 어음을 받아 품 안에 넣었다.


"좋아. 그럼 이제 로비 홀로 나갈 건데, 분명 놈들이  있을 거야.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시키는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돼. 할 수 있지?"

"알겠어요."


재이의 확답을 받은 수호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둠이 깔린 거대한 로비 홀을 향해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었다.



ㅇ  ㅇ 





천장의 일부가 우지끈 하고 무너지며 또다른 샹들리에 하나가 추락했다. 와장창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튀자, 가드 하나가 얼굴을 가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갑종들이 도망고  카지노 홀에는 적막한 공기가 흘렀다. 끝없이 이어질  같던 총격전도 사그라들고, 지금은 매캐한 화약 연기만이 맴돌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난간이나 책상이 우지끈 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갑종과 요원들이 도망쳤지만 가드는 그들을 쫒지 않았다. 대신 엉망이 된 홀을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흩어진 칩들을 수거하는데 집중했다.

용캐 아직도 죽지 않은 민간인들 몇몇이 구석에서 웅크린채 벌벌 떨고 있었고, 이내 가드의 발길질에 채여 쫒겨나갔다.

계속해서 홀을 순찰하던 가드들은 기둥 옆에서  명의 남자를 발견했다. 을종살수들이었다.


말 대신 총구부터 먼저 들이대는 가드를 향해, 선임 을종살수는 손을 들어 싸울 생각이 없음을 표했다. 그리고는 천천히품 안의 신분증을 꺼내보였다.


을종살수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확인한 가드는 턱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당장 여길 떠나라는 뜻이었다.


꽤나 관대한 처분이었다. 카지노 안이라는 공간으로 한정한다면, 아무리 살수라 해도 가드들의 지시를 함부로 거부할 수 없었다. 가드들 또한 얼마든지 살수들 억류할 수 있지만,그것은 가드들에게 있어서도 귀찮은 일이었다.

살수들도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는 대신 순순히 그들의 지시를 따랐다.

정문을 통해카지노를 걸어나오는 선임살수의 모습은 사뭇 여유로웠다. 갑종과 요원들이 어음을 차지하기위해 흙밭에서 뒹구는 모습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물론 그런 행동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 탓이었다.

"밖에 세워둔 놈들은?"


"이상 없습니다. 전부 목표를 따라 움직이는 중입니다."


계획대로였다. 밖에서 대기중인 살수들은 전부 서른 명 가량. 요원들을 추격하고 갑종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인력을 끌고왔다. 그 정도의 숫자라면 무리없이 남한 요원들을 제거하고 어음을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선임살수는 4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문이 닫히려는 순간,  사이로 검은 총열이 끼어들어왔다.

왼쪽에 서 있던 살수가 얼굴을 찌푸리며 문 틈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음이 울렸다.


살수의 머리가 산산조각이 되어 엘리베이터 안에 흩어졌다.

"안녕하신가...... 우리 을종 나으리들."


문이 열리자 산탄총을 든 페이 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임살수는 떨리는 손으로 눈가에 붙은 살조각을 떼어냈다. 검지손가락 끝에는 털이 한줄로 가지런히 박혀있는 얇은 살가죽이 달라붙어 있었다. 방금  머리가 터져나간 살수의눈꺼풀이었다.

선임살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페이 롱은 히죽 하고 웃어보이며 말했다.

"공교롭게도 우린 같은 목표를 노리고 있는 하군."


둔중한 빛을 반사하는 산탄총은 방금  한 살수의 머리통을 날린 이후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선임살수와 그 오른쪽의 또다른 을종살수도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그런 둘을 향해 페이 롱이 계속해서 말했다.

"거래를 하나 제안하지. 너희 을종들...... 분명 사냥감들을 추격하고 있겠지? 놈들의 위치를 내게 알려 줘. 남한 놈들, 어음, 그리고 반편이처럼 어줍잖은 갑종 놈들까지."


"댓가는?"


페이 롱은 대답 대신 남은 오른쪽 살수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또다시 폭발이 울렸다.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의 폭음에 선임살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머리 위로 비산한 핏덩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살수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목숨 뿐이니, 내가 그 저울에 다시 올릴 것 또한 자네의 목숨 뿐이겠지."

패닉으로 뺨이 울퉁불퉁 경련하는 선임살수를 향해, 페이 롱이 입술을 벌려 촘촘한 이빨을 드러내며 물었다.


"자, 거래를 받아들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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