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겜블의 규칙 (22)
총성이 로비 홀 안에 메아리쳤다.
대리석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수호는 곂쳐 울리는 총성의 숫자를 헤아렸다. 이미 몇명을 쓰러뜨린 후였지만 살수들의 공격은 끝이 없었다.
남은 적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스무명 정도. 놈들이 특무국의 준요원 혹은 전투원 수준이라고 가정한다면, 상대하는게 아예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은 수호의 편이 아니었다.
현재 시각은 아홉시 사십분. 그리고 검문소의 출입이 통제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20분 남짓. 저들을 전부 상대하면서 맞추기에는 촉박한 일정이었다.
수호는 고개를 숙였다. 품 안에서는 재이가 몸을 떨고 있었다. 전장의 피와 총성이 불러일으키는 패닉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재이는 현장직조차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채, 구룡성채 한가운데 억지로 던져진 것이다. 지금같은 상황에서 패닉에 빠지는게 당연했다.
"재이."
이를 악물고머리를 감싼 채 떨고있는 재이의 귓가에 수호가 말했다.
"일정이 좀 꼬였어. 따라붙은 놈들은 많은데 시간이 부족해."
재이가 창백한 얼굴을 들어 수호를 바라보았다. 수호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미안한데, 너 먼저 가 있어야겠어."
재이가 고개를저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목소리가 표정으로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하지만 수호는 더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놈들은 전부 여기에 있어. 밖은 괜찮을 거야. 내가 엄호하면 충분히 나갈 수 있어."
"하지만 그 다음은요?"
"검문소까지는 멀지 않아. 전력으로 오 분이면 갈 수 있어."
"안돼요, 수호. 저는ㅡ"
재이의 말꼬리가 우는 소리와 뒤섞여 흐려졌다. 한층 더 크게 몰려온 패닉에 과호흡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다.
수호의 시선이 떨렸다. 과연 자신이 이래도 되는 걸까. 이 어린 소년을 혼자 보내도 되는 것일까? 스스로의 결정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막다른 길이다. 재이를 옆에 데리고 있는다고 해서 다른 활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해야 재이라도 내보낼 수 있다.
"가 있어. 나도 금방 갈 테니까."
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더이상의 반론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서.
재이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여기서 우는 소리를 해봤자 시간을 지연시킬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때마다 수호 또한 점점 더 위험해질 뿐이라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과호흡을 가라앉히며 재이는 말했다.
"알겠어요."
"좋아. 내가 신호하면 달려. 뒤쪽, 다섯시 방향 출구야."
둘의 뒤쪽에는 유리문으로 되어있는 출구가 있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살수들은 이마에 구멍이 뚤린 채 축 늘어져 있는 채였다.
기둥 뒤에서 몸을 숨긴 채 총성을 세던 수호는, 살수들의 공격이 잠시 주춤해진 틈을 타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놈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한번 검지손가락에 힘을 넣을 때마다 베레타가 메마른 총성을 울리며 탄피를 토해냈다. 한발, 한발, 그리고 또 한발. 이내 탄창이 전부 비워지고 약실이 텅 빈 채 철컥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가!"
수호의 신호와 함께, 재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구를 향해 달렸다.
"막아! 저새끼 막아!"
재이가 달리는 모습을 발견한 선임 을종살수가 소리쳤다. 하지만 이내 탄창을 갈아끼운 수호의 엄호가 다시 이어졌다.
선임살수는 이를 갈며 기둘 뒤로 몸을 숨겼다. 대리석 기둥에 총알이 박히는 진동이 뒤통수 너머로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지금 남한 요원은 자신의 일행을 먼저 탈출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어음도 넘겨줬을 가능성이 높다.
이대로라면 어음이 성채 밖으로 빠져나간다. 절대로 도망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십 명이나 되는 살수들은 도대체 쓸모가 없었다. 고작해야 요원 하나에게 야금야금 숫자가 줄어들며 밀리고 있었다.
결국 재이가 빌딩을 빠져나가는걸 뜬 눈으로 목격한 선임살수는 옆에 있던 살수의 멱살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당장 인원 더 충원해. 몇 명이던 좋으니까 전부!"
선임살수는 사람을 더 준비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을종살수 삼십 명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요원들을 추가로 투입시키는건 분명히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요원들을 놓치게 된다면? 그리고 어음을 잃게 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작전에 끼어든 자신에게 일부 책임이 물릴 것이다.그리고 그 때는 단순히 후회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문책을 당하게 될 것이 틀림 없었다.
선임 을종살수인 그에게 있어살수회의 문책이란 곧 직함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탈출하게 둬서는 안 된다. 설령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해도 인원을 더 충원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선임살수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살수들을 더 불러모은다고 해서 남한 요원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선임살수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잠시 바라보았다.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할까? 그런 고민이 머릿속을 오가고 있었지만, 결국 선임살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놈을 놓쳤소."
잠시 후 연결된 전화 너머의 상대방을 향해 선임살수가 말했다.
"정확히는, 요원 놈은 우리와 대치하고 있으나 일행을 놓쳐버렸소. 그가 어음을 갖고있을 가능성도 있고."
[.......]
선임살수의 설명해도 전화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선임살수는 초조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신이 놈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오. 이건 당신에겐 기회라고 생각해도 좋겠지. 그렇지 않소?"
선임살수는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었고, 이내 덜컥 하고 끊기며 텅 빈 통화음만이 울려왔다.
"빌어먹을!"
선임살수가 내던진 전화기가 바닥을 굴렀다.
ㅇ ㅇ ㅇ
[기회라고 생각해도 좋겠지. 그렇지 않소?]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페이 롱은 무표정한 얼굴로 통화를 끊었다. 선임 을종살수. 놈의 말은 뻔한 거짓말로 가득차 있었다. 실수로 놓친 목표를, 마치 자신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것 마냥 포장하는 거짓말.
무가치한 놈들.
페이 롱은 속으로 을종살수들을 향한 경멸과 비웃음을 마음껏 퍼부었다. 살수회에 목숨을 바쳐 충성하며,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구더기처럼 몸을 비틀어대는 놈들.
하지만 인간의 격이란 태생부터 정해지는 것이다. 놈들이 아무리 구룡방과 살수회에 충성하며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해도, 놈들은 근본적으로 절대 갑종살수가 될 수 없다. 고작해야 관리자급 살수에 그칠 뿐이다. 태생부터 남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서있는 갑종과, 고작해야 잔심부름이나 하는 월급쟁이 살수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는 것이다.
뭐, 놈들을 애초부터 믿지 않고 검문소 쪽으로 직행한 자신도 그다지 좋은 인간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입꼬리에 슬며시 웃음을 띄운 페이 롱은, 고개를 들자 눈 앞에 남자가 여전히 서 있다는 것을 재차 깨닫고는 호들갑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런, 우리 한창 이야기 중이었지? 미안하군. 쓸데없는 전화였어."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대신 굳은 시선으로 페이 롱을 바라보았다.
제리 창. CIA 소속의 요원. 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남한으로 향하는 검문소를 목전에 둔 장소에서, 구룡방의 살수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이 상황이.
제리 창은 남한요원들의 실패에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은 기대를 갖던 상대가 실패했을 때 갖는 감정이다. 애초에 놈들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일에 차출된 자신의 모습이 짜증스러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제리 창은 짜증이 아니라 초조함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역할이 적진 속의 인계철선이라는 사실을 제리 창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공격은 미국의 개입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구룡방의 파국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기에 구룡방은 자신을 절대로 건드릴 수 없으며, 성채 안에서도 자신은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은 지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한 살수에 의해 의심받고 있었다.
"이런, 너무 겁먹지 말게. 내가 설마 자네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가?"
"네놈은 나를 절대로 못 건드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네는 뭘 그렇게 무서워 하는거지?"
그렇게 말하는 페이 롱의 얼굴은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 앞에서 무력하게 떨고 있는 초식동물을 바라볼 때 차오르는 종류의 희열이.
제리 창은 페이 롱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가 자신을 무해한 초식동물, 그저 갖고 놀 수 있는 쥐새끼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통 그런 감정을 느끼는건 자신 쪽이었다. 자신은 CIA의 요원이었으니.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초식동물, 사냥감이 된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은 응당 굴욕적이어야 했으나, 제리 창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두려움으로 마비된 두뇌는 굴욕감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성채의 그 어떤 자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하지만 눈앞의 살수에게는 이성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얼굴 위에 이성의 거죽을 덮어썼을 뿐, 뻥 뚤린 동공 너머의 암흑 속에는 짐승같은 혼돈과 탐욕만이 뒤엉켜 있었다.
마치 야만과 비이성을 그려낸듯한 남자가 입술을움직여 이야기했다.
"내가 자네를 건드리는게,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할 빌미를 주는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저 이야기를 나눈 뿐이라면 상관없지 않은가? 내 집에서 말이지. 나는 자네를 초대하고, 차도 대접할거야. 그러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겠지."
"개소리. 나는 지금 당장 이 엿 같은 곳에서 나갈ㅡ."
철컥, 하며 산탄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제리 창의 이야기를 끊었다. 제리 창은 자신도 모르게 한발짝 물러섰다. 그에 맞춰 페이 롱이 앞으로 한발짝 다가왔고, 제리 창이 다시 한발짝 더 물러섰다.
"그만!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왜, 아플까봐 무서운가? 걱정하지 말라고. 이거 맞고 아프다는 사람 한 명도 없었어."
"......내게 뭘 원하지?"
그렇게 묻는 제리 창의 턱은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자네도 알 거야. 내가 자네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걸. 내가 원하는건 소년이지. 그...... 발이 예쁠 것 같은 소년 말이야."
발이 예쁠 것 같은 소년. 분명 재이를 뜻하는 것이리라.
"그 아이가 발이 예쁘다면 좋겠지. 어음을 갖고 있더라도 좋겠고. 어음을 가진 데다가 발까지 예쁘다면...... 그 이상 가는 행복은 내게 없을 게야."
"그가 어디있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연락할 수는 있겠지. 그리고 물어볼 수도 있겠고."
그렇게 말하며 페이 롱이 제리 창의 주머니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제리 창은 망설였다.
"재이의 위치를 알려주면, 나를 보내줄 건가?"
"물론이지. 자네는 자유야."
"만약 내가 배신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유출된다면......"
"그러니까 확실한 정보를 넘겨줘야겠지? 그럴수록 남한 요원들이 영원히 침묵할 가능성이 높아질테고, 자신들 사이에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게 될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네놈은ㅡ"
"내가 자네의 배신을 떠들어댈까봐 걱정되는가? 어째서지?당신이 이렇게 훌륭한 조력자인데 말이야. 우리는 친구 아닌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제리 창의 헐떡이는 숨소리만이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결정을 내린 제리 창은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재이. 제리 창이다. 위치는?"
[지금 이동 중이에요.]
전화 너머에서는 재이가 숨이 턱까지 차오른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고 있었다.
"......그런가. 지금 나는 검문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기 중이다. 나와 함께 나가면 되겠군."
[정확히 어디죠?]
"검문소 북쪽. 바로 전 블록이다."
[알겠어요. 바로 갈께요.]
통화가 끊겼다.
제리 창은 페이 롱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이제 미소는 없었다. 실제로는 아주 짧을 터인 그와의 시선 교환이 제리 창에게는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페이 롱은 아무런 대답 없이 등을 돌렸다. 그가 더이상 자신에게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리 창은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몇 번을 휘청이고는, 그대로 검문소를 향해 달려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