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겜블의 규칙 (24)
한 명의 요원과 한 명의 살수가 골목을 따라 달렸다.
앞서 달리는 수호의 손에는 해무의 전화가 들려있었다. 재이가 갖고있는 전화의 위치를 알려주는 GPS 위치추적 프로그램이 화면에 띄워진 채였다.
신호를 따라 달리며 수호는 위화감을 느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재이의 위치는 비상 집결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분명 뭔가 문제가 생겼고,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한 탓에 집결지로 숨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화면에 표시되는 좌표는 재이가 어딘가로 이동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집결지로 대피한 재이가 자신과 합류하지도 않고 단독으로 움직일리가 없었다. 그러한 의문은 표시를 따라 움직일 때마다 점점 더 깊어졌다.
천장에 매달려 축 늘어진 전선과 배관들, 기름때인지 구정물인지 모를 액체로 검게 얼룩진 콘크리트 바닥. 그리고 녹이 슬다 못해 삭아버린 철조망들. 눈 앞에 나타나는 풍경 하나하나가 전부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그 위험한 구룡성채 안에서도 슬럼이라고 부를 만한 곳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수호는생각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탈출과는 반대로 점점 더 성채의 어둡고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그리고 재이를 가리키는 표시가 멈춰선 곳에 도착했을 때, 그러한 의심은 거의 확신이 되었다.
눈 앞에 문이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두터운 문이.
문이라는 것은 본디 열리기 위한 것이었으나,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달랐다.무언가를 통과시키는 것 보다는 막아서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문이었다.
수호는 고개를 돌려 해무를 바라보았다. 해무의 표정 또한 수호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눈에 띄게 이질적인 공간. 재이가 이 곳을 스스로 찾아왔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화면의 좌표는 여전히 이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호는 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탄창을 뽑아 확인했다. 남은 총알은 한 발 뿐.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해무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천천히 문을 밀었다.
수호가 열기에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문은 무거웠다. 손잡이를 쥐고 미는 수호의 팔을 따라 힘줄이 뿔뚝 솟아올랐다. 그제서야 두꺼운 문이 조금씩 움직였고, 마침내 터엉 하는 소리를 내며 완전히 열렸다.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이 날카롭게 눈을 찔렀다. 마치 수술대의 조명같은 불빛이었다.
뚜벅.
바닥에 깔린 낡은 타일 위로 내딛은구두가 묵직한 발소리를 냈다.
안은 서늘했다.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막힌 방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고, 천장의 덕트에서는 안개처럼 흰 공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방이 통째로 냉장고처럼 만들어진 듯 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수호와 해무의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왔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테인리스 선반과 호스가연결된 수도꼭지, 배수구가 안에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더 안쪽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수호는 두 번째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이번에는 비교적 가볍게 열렸다. 그 안에 드러난 방은 이전보다 한결 더 컸다. 푸르스름한 조명은 한층 더 창백했으며, 공기 또한 한층 더 차가웠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천장의 레일. 그 레일을 따라 고깃덩어리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구룡성채의 정육점은 다 이런식인가?"
해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호가 대답을 기대하며 질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누가 봐도 천장에 걸린 것은 평범한 고기가 아니었다. 깔끔하게 가죽이 벗겨져 손질된 몸통. 거기에 달려있는 팔과 다리. 손목과 발목 아래가 절단되어 있는 탓에 손과 발의 모양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적어도 소나 돼지의 것이 아니라는건 확실했다.
인간.
매달려있는 고깃덩어리들은 인간의 시체였다.
해무와 수호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침착하게 안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뒤,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재이."
수호가 조용히 재이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호는 조용히 무릎을 꿇으며 재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몽롱하게 취한 듯한 눈, 가느다란 호흡. 의식은 없었다. 케타민 계열 마취제를 흡입한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그 뒤에서 출구 쪽을 경계하며 해무는 생각했다. 지금 이 공간은 출구가 하나 뿐이다. 이대로 저 문이 잠겨서 갇히게 된다면 탈출할 방법은 없다. 마치 올가미나 마찬가지인 장소였다. 저 소년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모르지만, 일단 데리고 이곳을 한시라도 빨리 탈출해야 한다.
그렇게 판단한 해무가 수호를 재촉하려는 순간, 예상 밖의 움직임은 뒤가 아닌 앞에서 나타났다.
마치 열차에 치인듯한 충격. 건장한 수호의 몸뚱이가 마치 수수깡처럼 맥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조금 전까지 수호가 있던 자리에는, 굉음을 내며 천장의 레일을 따라 끌려온 고깃덩어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코앞에서 수호가 뭉개지는 모습을 목격한 해무의 숨이 턱 막혔다.
굉음의 잔향이 잦아들고 냉동고 안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해무는 거친 숨소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천장의 형광등이 부르르 떨리며 깜빡였다. 줄줄이 매달린 고깃덩어리들 사이 어딘가, 그곳에 적이 있었다.
수호가 들고있던 베레타가 한쪽에 떨어져 있었다. 과연 주울 틈이 있을까.
아니다. 한순간 시선을 돌리는 것 만으로도 적은 자신을 습격할 수 있다. 절대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런 결정은 큰 의미가 없었다.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형광등.그 짧은 암전(暗轉)을 틈타 나타난 상대의 공격에 해무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전라(全裸)의 페이 롱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고기 망치를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ㅇ ㅇ ㅇ
푸르스름한 불빛이 눈 앞에서 번지듯이 흘러내렸다. 마치 희미한 막이 싸인 듯한 시야. 해무는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머리가 욱씬거렸다.
잠시 후, 빛번짐이 천천히 잦아들며 사물의 윤곽이 눈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형광등. 도축되어 레일에 매달린 시체들. 의자에 결박된 자신의 팔다리. 그리고 한쪽에 매달린 시체들 사이로 수호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호의 몸은 묶여있지 않았다. 대신 도축용 칼이 그의 왼손을 뚫고 지나, 천장에 매달린 채로 차갑게 얼어있는 시체의 허벅지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해무보다 조금 먼저 정신을 차린 수호는 반대쪽 손으로 칼자루를 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고깃덩어리에 꽂힌 칼날은 쉽게 뽑히지 않았고, 이내 포기한 수호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해무에게 물었다.
"당신은 괜찮은가?"
"......그다지."
"이제야 우리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생겼군."
수호가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내뱉는 농담에 힘은 없었고, 전혀 재미있지도 않았다.
해무는 자신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찢어진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뺨을 따라 흘러내리다 반쯤 말라붙어있었다. 몸은 의자에 단단히 묶여있는 채였다. 뒤로 묶인 팔을 움직여 보았지만 풀려날 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다행인 점은 수호처럼 꼬치 신세가 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해무는 계속해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그럴 때마다 밧줄에 쓸린 손목에서 피가 송글송글 배어나왔다. 해무는 계속해서 밧줄을 풀어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며 물었다.
"놈은 어딨지?"
"모른다. 나도 방금 깨어났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해무는 생각했다. 페이 롱. 그 개자식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까지나 이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놈이 돌아오기 전에 탈출해야 한다.
밧줄을 풀어낼 방법을 찾던 해무는 자신의 목에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있는 것을 깨달았다. 해무는 고개를 숙여 입술로 목걸이 줄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홱 하고 젖혔다.
턱 위로 넘겨진 목걸이가 포물선을 그리며 등 뒤로 떨어졌고, 차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정확히 손 위로 떨어졌다.
텅, 하는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해무는 굳은 얼굴로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이어서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줄톱으로 무언가를 잘라내는 소리였다. 그리고는 수도꼭지를 돌리는 소리와, 쏴아 하고 물줄기가 뿌려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놈이 저 밖에 있다. 아까 전 지나왔던, 타일로 도배된 그 방에.
놈에게 들키지 않도록, 해무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맞춰 조심스레 십자가 펜던트를 움직였다. 날카로운 모서리를 대고 움직일 때마다 밧줄이 조금씩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무가 완전히 밧줄을 끊어내기도 전에, 페이 롱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큰 키를 고려해도 기형적으로 길다란 팔다리. 알몸 위에는 고무 앞치마를 걸쳤고, 한 손에는 검은색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해무는 딱딱하게 굳은 채로 정면의 페이 롱을 마주했다.
해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 페이 롱은 그대로 해무를 지나쳤다. 그리고 방 뒤쪽의 커다란 압축 탱크에 달린 밸브를 돌렸다. 그러자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흘러나오던 차가운 공기가 한층 더 세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페이 롱이 다시 돌아와 해무의 앞에 설 때까지도, 이 방에 있는 셋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페이 롱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해무가 신고 있는 구두의 끈을 부욱 하고 풀러냈다. 이어서 구두를 벗겨내고는, 양말도 발끝부터 쭈욱 벗겨냈다.
그러자 해무의 새하얀 맨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페이 롱의 입꼬리가 떨려왔다.
"갑종살수였던 자의 발..... 좋군."
자신은 지금도 갑종살수라고 대꾸하려던 해무는 다시 말을 삼켰다. 페이 롱이 옆에 내려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발.
잘린 발이었다.
자신의 맨발 양 옆에 가지런히 놓인 두 개의 발은, 마치 어린아이가 잠시 벗어둔 신발 같았다.
해무는 두근거리며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발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방금 전, 페이 롱이 조심스런 톱질로 잘라낸 발의 주인. 그것은 아까 전까지 이 방에 함께 있었던 사람, 하지만 지금은 없는 사람일 수 밖에 없었다.
페이 롱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수호의 손에 박힌 길쭉한 도축용 칼과 달리 과도처럼 작고 날카로운 칼이었다. 그것을 마치 메스처럼 손에 쥐어든 페이 롱은, 해무의 발에 잘린 발을 대고 그 높이를 쟀다. 그리고 정확히 똑같은 높이를 따라 해무의 발목에 칼날을 대었다.
날카로운 통각에 해무의 몸이 움찔했다. 피부 한 장을 얇게 베어내는 상처. 발목을 따라 둥그렇게 이어진 상처를 따라 피가 배어나왔다.
"야."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누구 발이냐."
하지만 페이 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해무의 마저 남은 발에 잘라낼 선을 표시하는데 열중했다.
"그거 누구 발이냐고 이새끼야!!!"
이성을 잃은 고함이 냉동고 안에 왕왕 메아리쳤다.
해무의 발에서 칼을 뗀 페이 롱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옆의 선반 위에 놓여있던 고기 망치를 들고 수호에게 향했다. 잠시 후, 망치를 휘두르는 소리와, 윽 하는 신음 소리가 몇 차례 이어지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다시 돌아온 페이 롱은 해무의 발목에 절개선을 내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옆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망치에는 붉은 살점과 검은 머리카락이 엉겨붙어 있었다.
"이건 규정 위반이다. 지금 네놈이 하는 짓거리가 내 업을 침범하고 있다는걸알고 있나?"
해무가 자신의 발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페이 롱을 향해 말했다.
"게다가 갑종끼리 위해를 가하는건 살수회의 규정 위반이다. 당장 이걸 풀어."
하지만 여전히 페이 롱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몸을 숙여 해무의 발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페이 롱이 해무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페이 롱의 두툼한 입술이, 거칠거칠한 혀가, 해무의 발등을 지나 뒤꿈치로, 이내 발바닥으로, 그리고 발가락 사이까지 게걸스럽게 훑고 지나갔다.
끈적거리는 혀가 발 구석구석을 헤집는 느낌에 해무는 이를 악물었다.
한참 후에야 해무의 발에서 입을 뗀 페이 롱이 열기 띈 숨을 헐떡였다. 인간의 숨소리 보다는 황소나 곰의 것처럼 들리는 숨소리였다. 그리고 이어서 유일하게 몸에 걸치고 있던 고무 앞치마를 벗었다.
기형적으로 커다란 성기가모습을 드러냈다. 두피와 마찬가지로 음모 하나 나지 않은 고간. 그곳에서 길게 돋아난 그의 성기는 마치 창백한 고무 호스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해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수음이 시작됐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도드라진 커다란 손이 성기를 우악스럽게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이따금 자신의 발 사이에 코를 박고 마치 콧속 깊숙히 냄새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생기를 잃은 고무처럼 질긴 성기의 거죽이 자신의 발에 문질러지는 촉감이 느껴졌고, 조금씩 열기가 차오르며 그 끄트머리에서 미끈미끈한 액체가 조금씩 흘러나와 발을 적셨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고, 성기를 쥐고 흔드는 손의 움직임도 점점 더 다급해져갔다.
그리고 절정에 달하는 순간, 발 위에 미지근한 액체가 기세 좋게 뿌려졌다.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묵직하고 뿌려진 형태가 느껴질 정도로 짙은 액체. 그 액체가 해무의 발등을 따라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아래에서 올라와 콧속을 가득 채우는 비릿한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해무는 심호흡을 하며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몸에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는, 그저 자신을 향한 배설 행위. 하지만 그것은 다른 그 어떤 육체적 폭력보다도 해무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저 개자식의 매끈한 두피 아래서 꿈틀거리는 혈관도, 발목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뒤섞여 분홍색이 된 정액도, 전부 역겹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역겨운 것은, 비릿한 악취를 맡을 때마다 자신의 아랫배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움찔거리는 감각이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패닉의 전조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해무는 발에 뿌려진 백탁액을 털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발을 꼼지락거릴 때마다 짙은 정액은 발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며 한층 더 끈적하게 엉켜들었다. 해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잇몸에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무는 것 뿐이었다.
냉동고 구석에서 큭큭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페이 롱은 고개를 들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는 얼굴을 피로 물들인 수호가 억누른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야...... 나한테도 그거 해 주면 안 되냐?"
수호가 느릿느릿,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남자 치고 발이 이쁜 편이거든. 어때?"
페이 롱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그가 관심있는 대상은 오직 해무 뿐이었다. 페이 롱이 해무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바깥쪽 방을 향해 발을 성큼 옮길 때마다, 해무가 묶여있는 의자가 함께 끌려오며 쇳소리를 냈다.
끌려가는 해무의 시선이 짧은 순간 수호의 시선과 교차했다.
수호는 더이상 웃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페이 롱이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투둑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비슷하게 투둑, 투둑 하고 뼈와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가 몇 차례 이어지다 멈췄다.
페이 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는 수호가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칼에 꿰뚫려 고깃덩어리에 박혀있던 그의 왼손은 이제 반으로 길게 찢어져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얼굴은 푸른 형광등 불빛 아래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페이 롱은 움켜쥔 해무의 머리채를 놓았다. 해무가 의자와 뒤엉켜 바닥에 내던져졌다.
수호와 페이 롱. 말 없는 짧은 대치 사이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에 투둑투둑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먼저 움직인건 수호 쪽이었다. 눈에 띄게 느린, 그저 적을 향한 전진. 하지만 주먹은 느리지 않았다.
묵직한 주먹이 페이 롱의 아랫배에 직격했다. 하지만 페이 롱은 허리조차 굽히지 않고 그대로 다리를 휘둘렀다.
커다란 발에 걷어차인 수호가 바닥을 둘렀다. 눈 앞에는 아까 전 떨어뜨렸던 베레타가 있었다. 하지만 손에 쥐지는 못했다. 어느새 다가와서 발로 총을 밀어낸 페이 롱이 다시한번 수호를 걷어찼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수호는 이번에는 고기 망치를 쥐어들고 페이 롱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호가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마치 칼날을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페이 롱의 뼈를 부수지는 못했다.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던 망치는 페이 롱의 카운터에 막혀 허무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망치보다 단단한 페이 롱의 주먹이 수호의 명치를 직격했다. 수호의 가슴팍 한가운데서 우둑 하고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점을 잃은 수호의 눈이 허공을 향했고, 몸을 휘청이며 주저앉았다.
페이 롱은 자신의 앞에 무릎꿇은 수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을 향해 내리찍었다.
콰직.
그걸로 끝이었다.
바닥에 축 늘어진 수호에게 더이상 저항의 가능성은 없었다. 상대가 전원이 뽑히듯 완전히 의식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페이 롱은, 바닥에 쓰러진 해무의 머리채를 쥐어 의자째 일으켰다.
그 순간, 페이 롱이 처음으로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해무의 목에 걸려있던 십자가 펜던트. 그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페이 롱의 목덜미를 꿰뚫고 있었다.
피가 힘차게 튀었다. 해무는 십자가를 움켜쥔 손을 놓지 않고 더욱 깊숙히 쑤셔넣었다. 고작 5센치 남짓한 크기의 십자가였지만 상처는 결코얕지 않았다.
한쪽 무릎이 풀썩 꺾이며 페이 롱이 주저앉았다. 심장 박동이 뛸 때마다 상처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아나왔다. 하지만 해무는 공격을 이어가지 못했다. 페이 롱이 괴성을지르며 긴 팔을 휘둘렀고, 고작 그것만으로도 해무는 버티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해무를 밀어낸 페이 롱이 손으로 목덜미를 감싼 채 거리를 벌렸다. 상처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이 짐승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다. 얼굴의 혈관이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악문 페이 롱이 상처를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그러자 마치 펌프처럼 뿜어져 나오던 피가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페이 롱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신음이 점점 낮고 음산한 웃음소리로 변해갔다. 무력한 사냥감들을 눈 앞에 둔 짐승이 흘리는 웃음이었다.
해무는 페이 롱을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저 빌어먹을 놈은 뒈질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면 수호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고, 자신 또한 그렇게 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얌전히 잡아먹힐 생각은 없었다. 해무는 바닥에 떨어진 고기 망치를 힘겹게 쥐어들었다. 그리고 힘껏 내던졌다.
망치가 회전하며 정확히 페이 롱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페이 롱은 한발짝 움직여 고깃덩어리 뒤에 숨는 것으로 간단히 망치를 피해냈다.
빗나간 망치가 퍽 하고냉각 탱크에 꽂혔다. 찢어진 틈으로 새하얀 압축 가스가 새어나왔다.
고깃덩어리 뒤로 몸을 숨긴 페이 롱의 모습이 찌그러진 냉각 탱크에 반사됐다. 이를 보이며 느릿느릿하게 웃는 그의 얼굴 또한 찌그러진 탱크의 모양대로 일그러진 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해무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때부터 네놈은 역겨웠어."
바닥에 떨어져있던 것은 망치 뿐만이 아니었다. 해무의 손에는 어느새 아까 수호가 떨어뜨렸던 베레타가 들려 있었다.
페이 롱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뒈져."
해무가 찌그러진 고압 탱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핑, 하는 맥없는 소리와 함께 압축된 가스가 순식간에 팽창했다. 그리고 불꽃없는 폭발이 이어졌다. 건물이 무너지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진동과 함께 냉각 탱크가 산산조각나며 마치 수류탄처럼 사방으로 파편을 뿌렸고, 그 파편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낸 페이 롱의 몸뚱아리도 육편이 되어 휘날렸다.
그것이 충격파에 휩쓸려 날아가는 해무의 머릿속에 남은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