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창관의 성모 (3)
덜그덕 거리는 의자 소리, 찻잔에 스푼이 부딛히는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오전의 찻집 '구룡다원' 은 늦은 아침과 이른 점심식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그 한쪽,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은 해무는 눈을 끔뻑이며 하품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단하가 물었다.
"너 무슨 일 있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해무는 움찔하며 정신을 차리고는 손등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딱히."
"한숨도 못 잔거 같은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대답한 해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집까지 여자들을 끼고 왔지만, 자신만 만족하지 못해 밤새도록 자위를 하다가 밤을 샜다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덕분에 잠은 잠대로 설치고, 제대로 자위도 못 했다. 심지어 다음날 아침에 확인해보니 다리 사이가 희미하게 피로 젖어있었다. 지난주에 시작된 생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탓이었다.
이전까지는 생리라는게 그저 오줌싸듯이 피를 한번 흘려버리면 끝나는 것인줄 알았다. 이렇게 며칠동안 이어지는 것인줄은 몰랐다. 때문에 지금도 다리 사이에는둘둘 만 붕대를 넣은 채였고, 그랬음에도 흘러나온 피가 허벅지를 적시는게 아닐까 계속해서 신경쓰였다.
짜증나는 일이었다.
눈앞의 커피가 남아있는 잠기운과 해소되지 못한 성욕을 날릴 수 있길 바라며, 해무는 작은 컵에 담긴 연유를 한가득 쏟아부었다.
"......너가 그렇게 단걸 좋아하는 줄 몰랐네."
"안 좋아해. 잠 깨려고 먹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해무는 스푼으로 커피를 저었다. 새카맣던 커피가 연유와 섞여 탁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것을 후루룩 들이킨 해무는, 지나칠 정도로 달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잔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서 아침 겸 점심으로 소고기를 채워넣은 크레이프를 입에 밀어넣은 단하는, 몇 차례 씹어서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어찌됐건 다행이야."
"뭐가?"
"네 업 말이야. 알게모르게 실망한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야. 분명 네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나봐."
단하의 말대로, 이번 해무의 업에는 많은 시선들이 몰려있었다.
해무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여자가 되고 나서도 갑종살수 직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여자의 몸으로 살수 행세를 하는 것을 경멸하는 놈들 -다른 갑종들이나 관리들- 도 있었다. 해무가 갑종살수 계약연장에 실패해, 그 빈자리를 대신 채우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을종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해무는 이번의 업을 끝냈다.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애매했지만, 어쨌거나 남한과 미국의 요원들이 성채에 잠입해 카지노의 자금을 반출하려던 계획을 막아낸 것은 해무의 성과였다.
"왜, 누가나에 대해 뭐라고 떠들고 다니기라도 해?"
"주변에서 들려오니까. 관리들도 그렇고. 너는 못 들었어?"
"난 관리들이랑 안 친해. 내 담당 관리랑도."
"자랑이다."
그렇게 해무를 향해 핀잔한 단하는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고생이 많았지. 그리고 운도 좋았어. 이대로라면 분명 언젠가는 위험해 빠질 때가 올 거야."
단하의 말에 해무는 대꾸하지 못한 채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빠졌다. 분명 운이 좋은 부분도 있었다. 남한의 요원들은 CIA와 삐걱거리는 관계였고, 그들의 조직 또한 문제가 있었던 탓에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심지어 페이 롱과의 싸움에서는 거의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순전히 운으로 이긴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네가 약해진건 사실이야. 이걸 받아들여야 해.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마저 약해진다면 돌이킬 수 없을 거야.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으려면 냉철한 감각을 유지해야만 해."
그렇게 운을뗀 단하는 자신의 동료 살수이자, 한 살 어린 동생이나 마찬가지인 해무에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너 요즘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리고 있다. 그건 살수에게 치명적인 단점이다. 임무는 물론이고 치료제를 찾는데에도 도움될게 없다. 치료제 찾는데도 방해가 될 거다.
그런 잔소리가 장장 오 분 동안 이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에 해무는 켁켁 하고목이 졸리는 시늉을 하며 눈을 뒤집었다. 진지한 기색이 전혀 없는 모습이었지만, 단하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요점은 이거야. 흥분하지 말고니가 가진 살수로서의 무기를 제대로 활용하도록 해."
"이거?"
그렇게 말하며 해무가 총을 꺼내보였다. 단하는 한심하다는 얼굴로해무를 바라보았다.
"네 이성, 침착함, 냉철함 같은거 말이야."
해무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하지만 형도 입장 바꿔 생각해봐. 옛날이라면 내 얼굴도 똑바로 못 쳐다보던 놈들이 나한테 시비를 거는데 화가 안 나고 참을 수 있을거같아?"
"뭐...... 불쾌한 일이긴 하지."
"그렇다니까. 원래 누구라도 갑자기 말도 안되는 상황에 던져지면 당황하는 법이야. 날 봐. 이 꼴이 됐다고. 형이 나처럼 됐다면 분명 똑같았을 거라고."
단하는 상상했다. 만약 여자가 된게 해무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확실히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지금까지 살수로서 기능해온 몸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있어서 당장 목숨의 존속이 흔들리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단하를 향해 해무가 이어서 말했다.
"처음 여자가 됐는데좀 당황할 수도 있지. 굳이 몸이 이렇게 바뀌는 일이 아니더라도, 원래 처음이라는게 다 그런 법이잖아? 당황하고, 실수하고, 부끄럽게 만들지. 형도 마찬가지 였을거 아냐. 첫경험 때 어땠어? 분명 어버버하다가 일을 망쳐버렸겠지."
"아닌데? 난 처음부터 잘 했어. 더불어서, 그때 잤던 여자도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고."
"뭔소리야. 나는 사람 죽이는거 말한건데?"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군."
또다시 낄낄거리는 해무를 향해 단하가 툴툴거렸다.
"그래서, 약을 찾는건 어떻게 됐어?"
"아, 그거."
앞치마를 한 여급이 옆을 지나가다 해무와 단하의 잔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여급이 리필해준 커피를 다시 받아들며 해무가 말했다.
"확실한건, 약을 들여온건 마약상 놈들이 아니라는 거야."
지난 업에서 해무는 마약상들과 그들의 공장을 급습했었다. 놈들은 전매청 산하의 조직이었고, 구룡방으로 들어오는 약을 전부 취급하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푸른색 앰플에 대해서 물었을 때, 놈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에이시스 앰플을 들여온게 아니라는것은 사실인 듯 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둘 중 하나였다. 에이시스 앰플이 구룡방의 관리하에 있는 물건이 아니거나, 혹은 전매청과는 전혀 다른 부서에서 관리하는 물건이거나.
"그럼 누군데?"
"몰라. 하지만 마약상 놈들은 아니야."
"뭐야, 결국 아는게 없다는 얘기잖아."
단하가 실망한 기색을 내보이며 말했다.
"내가 도와주려고 해도 무슨 껀덕지가 있어야 도와주지. 약을 찾을 만한 실마리라도 없어?"
"있지."
그리고 잠시동안 입 속에서 말을 고른 끝에 해무가 조심스레 답했다.
"해연."
"뭐?
"녀석이 물건을 갖고 있을거야."
자신이 약을 주사 당했던 장소. 실험실인지 창고인지 알 수 없는 공간에 가득차 있던 에이시스 앰플은, 다시 방문했을 때에는 전부 치워져 있었다. 대신 그곳에서 마주했던 것은 해무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공안청이 물건을 압수했을 거라고 생각하는게 타당하다. 놈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냥 물건을 가져간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공안은 에이시스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운이 좋다면 놈들로부터 치료제, 혹은 치료제에 관한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해무의 추측을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한 끝에 단하가 입을 열었다.
"해연이라...... 그 녀석이 개입된 일이라면 물건이 있는 곳은 공안청 본부겠네."
"가볼래?"
"못 들어갈껄."
공안청과 살수회는 서로를 없애지 못해 안달이 난 관계다. 현장에서도, 구룡방 내 정치적 구도에서도 수시로 마찰을 일으켜왔다. 그런 상황에서, 공안청의 간부인 해연이 살수인 해무와 단하에게 공안청 본부를 방문하는걸 허락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리고 해무 또한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누구 허락받고 다니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지."
"설마, 몰래 들어가자는건 아니겠지?"
"그게 원래 우리가 하는 일이잖아."
"미쳤어? 공안청 본관에 잠입하자고? 절대안돼!"
해무의 말에 단하가 질겁을 하며 소리쳤다.
"공안청 본부를어떻게 잠입하게? 거긴 경계가 보통이 아니야."
"공안들을 한 스무명 정도 죽여보면 어때? 열받은 놈들이 범인을 잡으러 나오느라 본부는 허술해질거야."
"미친놈."
단하가 입가를 닦아낸 티슈를 구겨 집어던지며 말했다.
"이건 단순한 일이 아니야. 공안 놈들이랑 부딪히는 것도 문제지만, 만약 걸리면 회주가 죽일거야."
"나는 그 영감탱이 안 무서워."
아니, 무서워해야 할 거야, 하고 말하며 단하는 마저 남은 크레이프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여튼, 수고해. 나 먼저 갈게. 담당 관리 만나러 가야 해."
서두르는 단하의 모습에 해무가 얼굴을 찌푸렸다.
"또 일이야?"
"응. 그거 말고 담당 볼 일이 뭐가 있겠냐. 아마 당분간 바쁠거야."
"그럼 나 약 찾는건 안 도와주고?"
충격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해무가 물었다. 하지만 단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개떡같은 소리 하네. 요즘 나만 고생 중인거 알지? 이제 더는 사양이야. 니가 나 도와주기 전 까지는 나도 안 도와줄 거라고."
"쪼잔하게 굴긴. 내가 뭘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자지라도 빨아줘?"
"꺼져."
자신의 말에 손가락을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내미는 단하를 보며 해무는 낄낄거렸다.
그렇게 늦은 아침식사를 마친 단하는 해무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찻집을 떠났다. 해무도 남은 연유를 전부 커피잔에 붓고는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머리가 아플 정도의 단맛에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와 같은 오전이었다.
ㅇ ㅇ ㅇ
"왜 이렇게 늦었어?"
낡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리나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짜고짜 날아온 질책에 해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멈춰섰다.
"알잖아? 바빴어."
"보나마나 술독에 빠져 여자들이랑 뒹굴고 다녔겠지."
"아니야."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후에 이어서 말했다.
"술독에 빠져 여자들이랑 뒹구느라 바빴지. 생각해보니까 네 말이 맞네."
태연한 얼굴로 답하는 해무의 모습에 이리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리고 반쯤 벌어진 입에서 말을 뱉어내려다, 이내 포기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살수와 말싸움을 해봤자 득 될 것은 없었다.
해무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리나의 진료실은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린넨 시트가 덮힌 침대와 테이블, 작은 의자, 그리고 찬장에 들어있는 약과 진료용 도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기 중에 감도는 희미한 약품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익숙한 공간의, 익숙한 냄새였다.
"그래서, 몸은 어때?"
"별거 없어. 키는 줄었고, 다리 사이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지. 둘 중에 어느게 더 슬픈지는 모르겠군."
해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리나는 체온계를 꺼내 해무의 체온을 쟀다.
"초경을 시작한게 사흘 전이라고 했지?"
".......그래."
대답한 해무는 헛웃음을 흘렸다. 한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군가가 자기보고 한달에 한번씩 다리 사이에서 피를 흘리냐고 물어봤다면 그자식의 가랑이를 칼로 난도질해 버렸을 것이다. 그런 자신이, 지금은 생리 날짜를 묻는 이리나의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하는 신세였다.
"주기는 이상이 없어 보이네. 여성화된 이후로 거의 한 달 만이니까."
"시곗바늘이 움직이는걸 언제나 느끼고 있지. 이제 데드라인 까지 두 달 조금 안되게 남았나?"
데드라인. 에이시스 치료제가 더이상 작용하지않는, 세 번째 생리 날을 말하는 것이었다. 비록 최근 며칠간을 막 업을 끝낸 참이라는 핑계로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입에 올리자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한번 체감했다.
"사람에 따라 여성화가 진행되는 속도가 다르니 확실하게 언제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
해무의 질문에 이리나가 답했다.
"이번에는 생리 일정이 잘 맞았지만, 진행 속도에 따라서 다음 생리가늦어질 수도 있고 빨라질 수도 있지. 중요한 점은, 네가 그걸 통제할 수는 없다는 거야. 지금 할 수 있는건 진행 경과가 빠른지 늦은지 대충이나마 가늠해보는 것 뿐. 언제 갑자기 여성화가 빨라져도 이상하지 않아."
"진행 속도는 어떻게 확인하는데?"
"보통호르몬 농도를 측정해. 에스트라디올 혈청검사가 일반적이지만 여기에는 측정 키트가 없어. 에스트로겐 부하검사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에스트로겐-프로게스테론 제제를 복용해야 하는데ㅡ"
"설명은 고맙지만, 내가 이해할 수가 없는 얘기들이군.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해무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요점만 말해."
"첫 번째 방법은 장비가 없고, 두 번째 방법을 쓰면 오히려 강제로 생리를 일으켜. 네가 생각이 있다면, 검사를 한답시고 생리 날짜를 앞당기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겠지."
"결국 둘다 못 쓴다는 얘기로군. 다른 방법은?"
"일단은 할 수 있는걸 먼저 할게. 옷 좀 벗어봐."
해무는 이리나의 지시대로 자켓을 벗고, 구두를 벗은 다음, 침대위에 누웠다. 그리고 셔츠를 걷어올렸다.
이리나는 초음파 검사용 젤을 짜내 해무의 아랫배에 발랐다. 차가운 젤이 피부에 닿는 느낌에 해무의 몸이 움찔했다. 이리나가 탐지기를 들어 해무의 아랫배를 꾸욱 하고 누르자, 옆의 모니터에 노이즈가 낀 이미지가 표시됐다. 잠시 후, 탐지기를 이곳저곳 움직여가며 검사를 마친 이리나는 티슈를 몇 장 뽑아 해무에게 건넸다.
"끝났지?
젤을 닦아낸 해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리나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아직. 벗어."
뜬금없는 요구에 해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 방에 있는 것이 여전히 이리나와 자신 뿐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고는 되물었다.
"뭘?"
"바지 벗으라고."
해무는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었다. 그러자 드러난 남성용 브리프의 모습에 이리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도 벗어."
"잠깐. 대체 얼마나 좋은 서비스를 해 주려고 그래?"
해무의 지저분한 농담에 이리나가 죽일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싫다면 그만 둬. 나도 이렇게 남의 다리 사이 구경하는걸 좋아서 하는 줄 알아?"
"나라면 좋아했을거 같은데."
"시끄럽고, 시키는 대로 해."
해무는 순순히 이리나의 지시를 따랐다. 비부를 가리고 있는 속옷을 단숨에 벗어던지자, 다리 사이에서 둘둘 만 붕대가 툭 하고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잠시 굳어서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리나가 물었다.
"저건 뭐야?"
"지혈대. 너희들은 생리대라고 부르더군."
해무의 말에 이리나가 얼굴을 감싸쥐었다.
"내가 저번에 생리대 한 묶음 주지 않았었나?"
"그랬던거 같기도 한데, 나는 그런거 안 써. 남자는 그런거 쓰는거 아니거든."
"붕대를 속옷 안에 넣고 다니는건 괜찮고?"
필요에 따라서는, 하고 해무가 말했다. 이리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리나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해무는 하반신을 완전히 노출한 채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이리나는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손에 라텍스 장갑을 낀 다음, 이어서 의료용 마스크를 걸쳤다. 그리고 해무의 시선은 이리나가 어느새 오른손에 집어든 은색 기구를 향해 있었다.
"그건 뭐지?"
"쿠스코 질경. 여자의 질과 자궁 경부를검사할 때 쓰는 거야."
"이름이 맘에 안 들어. 근데 뭘 할때 쓴다고?"
"질과 자궁경부의 상태를 검사할 때 쓴다고."
잠시 침묵이 오갔다. 그리고 이어질 상황을 머릿속으로 충분히 생각한 해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ㅡ 저걸 내 몸 안에 집어넣을 거라는 뜻이야?"
"맞아."
"안 들어갈 것 같은데."
"걱정 마. 들어가게 해 줄게."
"하지만,너무 큰 것 같은데."
해무의 계속된 질문에 검사가 지연되자, 이리나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날카롭게 말했다.
"너는 살수지만 나는 의사야. 사람을 죽이는게 아니라 살리는 일 관련이라면, 쓸데없이 입 놀리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벌컥 화를 내는 이리나의 모습에,해무는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없었다.
자신의 다리 사이를 향해 다가오는 기구를 바라보며 해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얼굴은 조금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받으러 온 검사는, 예상보다 험난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