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창관의 성모 (4)
린넨 커튼 너머에서 해무는 벗어뒀던 옷을 챙겨입었다. 옆에서는 이리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진료 차트를 작성하고 있었다.
"몸에는 이상 없어. 여성으로서는 아주 건강한 상태야. 임신도 가능해."
"기쁜 소식이군."
해무가 빈정거렸다.
이상이 없다. 그 말은 곧 여성화 예정대로 진행 중이라는 뜻이었다. 말하는 것처럼 기쁜 일은 아니었다.
해무의 손이 무심코 자신의 아랫배로 향했다. 몸 안에는 여전히 이물감이 남아있었다. 조금 전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던 검사도구가 남긴 느낌이었다.
자신의 몸 안에 그런 것이 들어온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 압박감에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였다. 고통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당혹감이 컸다. 아직도 이마와 뺨에는 검사를 받으며 흘렸던 진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채였다.
"이제 좀 당신에게 미안해 지는군. 내 물건이 당신 몸 안에 들어갈 때도 이런 기분이었나?"
해무가 농담을 던졌으나 이리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해무는, 마지막으로 자켓을 걸치고는 커튼을 열어젖혔다. 이리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차트에 적고 있었다.
"주의사항이 있어. 우선 생리대를 제대로 쓸 것."
"고려해 보도록 하지."
"또 하나. 진행 속도를 앞당기고 싶지 않다면, 여성호르몬 투약을 피하도록 해."
"그것 참 고마운 조언이로군. 혹시나 실수로라도 여성호르몬을 먹지 않도록 조심하지."
해무가 이죽거리며 답했다.
그것으로 진료가 끝났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이제부터는 치료제를 찾는데 집중해야 할 때다.
문제는, 에이시스에 대해 아는게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에이시스라는 병의 존재 자체는 알려져 있었지만 그 출처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자연 발생한 것인지, 누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질병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아무런 후유증 없이 남자를 여자로 바꿔버리는 편리주의적인 병이 자연발생 했을리가 없다, 그러니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발병률은 십만 명에 한 명 꼴이라고 했다.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찾는게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적어도 이 성채 안에만 발병자가 열다섯 명은 있다는 뜻이군."
"확률상으로 본다면."
이리나가 동의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될거라고 해무는 생각했다. 십만 명에 한 명 꼴이라는 발병률은 자연 발병을 기준으로 한 수치일 것이다.
하지만 해무는 알고 있었다. 구룡성채 안으로 에이시스 바이러스를 담은 앰플이 반입됐다는 것을. 만약 그것이 누군가가 병을 의도적으로 퍼뜨리기 위한 것이라면, 실제로는 한참 더 많은 환자가 있을 것이다.
"다른 환자들은 어떻게 됐지?"
"나도 몰라. 성채 안에서 에이시스 환자를 진료한 건 네가 처음이야."
이리나가 말했다.
"하지만 추측은 해 볼 수 있지. 만약 보통의 남자들이 갑자기 여자가 된다면, 구룡성채에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을 거야."
"원래부터 여자였던 사람들보다도 더 어렵겠지."
"맞아.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연고도 없고 특별한 능력도 없는 여자가 이 바닥에서 흘러갈만한 곳은 매우 한정돼있어."
성채에서 직업도 소속도 갖지 못한 여자들은 아주 쉽게 범죄의 희생양이 된다. 여성의 인신매매는 흔한 일이며, 드물게 도살당하기도 한다.
개중에는 성채 밖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또한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경우 결국 구룡방에 노예로 팔려 접대부로 일하거나, 아니면 창관으로 가는 것이다.
"창관."
해무는 그 말을 입 안에서 되뇌었다.
구룡성채의 창관은 거대하다. 75만명이나 되는 남자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마리 없이 구룡성채 전체를 뒤지는 것에 비하면 창관을 탐색하는 것은 꽤나 현실성 있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한참 동안을 생각에 빠져있는 해무에게 이리나가 물었다.
"다른 힘든 점은 없어?"
"힘든거라...... 있지."
그렇게 말하며 해무는 이리나의 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끈적한 손길은 이리나의 허리를 지나 엉덩이를 타고 내려갔고, 이윽고 치마를 걷어 그 안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리나는 매몰차게 해무의 손을 쳐냈고, 갈 곳을 잃은 해무의 손은 허공을 헤매었다.
해무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리나는 해무의 시선을 피하며 차트를 정리했다.
어색한 침묵이 진료실을 채웠다.
"여자랑 몸을 섞는 취미는 없어."
이리나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러니까...... 빨리 치료하고 와."
해무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다. 자신은 지금 남자가 아니다. 옛날과는 달리, 이젠 마음대로 그녀를 범할 수 조차 없는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참담함이 가슴 속을 채웠다.
해무는 몸을 일으켰다. 진료실을 나서는 해무의 등을 향해 이리나가 소리쳤다.
"다음번에는 늦지 말고 찾아와. 그리고 생리대도 쓰고."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해무는 이리나의 진료실을 떠났다.
ㅇ ㅇ ㅇ
"이게 해무......?"
창관 야화. 자신의 단골 가게 입구 앞에서, 해무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여자들은 해무가 마치 희귀한 동물이라도 되는듯 이곳저곳을 만져댔다. 뺨을 쭈욱쭈욱하고 잡아당기는 손길에 해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해무 맞네. 눈썹 좀 봐."
"하지만 이게 말이 돼?"
"여동생 아니야?"
여자들의 반응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해무가 여자의 몸이 되고 나서 야화를 방문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당연히 그녀들 또한 여자가 된 해무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할 만큼 했으면 치워."
해무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여자들의 손을 밀쳐냈다. 성격 더러운거 봐, 해무가 분명하다니까, 하는 속닥거림이 뒤쪽에서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해무는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그가 만나야 하는 사람은 그녀들이 아니었다.
"마담은?"
"안쪽에."
해무는 여자들 중 하나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창관 복도의 막다른 끝, 그 옆에 문 하나가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 과일향이 섞인 달짝지근한 냄새였다.
보라색 연기 뒤에서는, 두 여자가 탁자 위에서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소파에 앉은 마담은 담배를 피우며 매출 전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셋의 시선이 해무를 향했다. 아무런 허락도 없이 자신의 방 안에 들어온 소녀의 모습에, 마담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하지만 이내 힐끗 얼굴을 확인하고는, 주판을 들고 있는 여자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둘은 곧바로 방을 떠났다.
방에는 해무와 마담, 둘만이 남았다.
"하고있는 차림을 보니 새로 들어온 아가씨는 아닌 것 같고ㅡ"
담뱃대 끝에 쌓인 재를 털어내며 마담이 말했다.
"넌 누구지?"
"해무."
"내가 알고있는 해무랑은 다르군."
"그렇게 됐어."
해무의 대답에 마담이 히죽 하고 웃었다.
"그렇게 됐어, 라는 말의 어떤 부분이 성별이 바뀐 모습을 설명해 주는지 모르겠는걸."
"굳이 그게 필요해? 그냥 같은 사람이 맞다는 것만 알아둬."
자신의 몸에 일어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스로조차도 이 병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마담은 해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해무의 은빛 머리칼과 눈썹, 입술을 지나 어깨와 무릎, 발목까지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한번 담배 연기를 깊숙히 빨아들였다가 내뱉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원래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보니까 정말 탐나는군. 살수일은 어때. 아직 하고 있어?"
"당연하지."
"아쉽네. 짤렸으면 우리 가게에서 고용했을텐데."
"그딴 소리는 집어 치워."
해무가 짜증을 냈다. 그 모습을 보며 마담은 쿡쿡 하고 웃음을 흘렸다.
"헌데ㅡ 구직 활동이 아니라면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무슨 볼일이지? 창관에서 오후 두시면 아직 한창 일을 준비할 때야."
"찾는게 있어."
해무가 잠시 뜸을 들인 끝에 말했다.
"나랑 비슷한 사람."
"갑자기 찾아와서 당혹스러운 요청을 하는군."
자신과 비슷한 사람. 그것이 남자에서 여자로 변한 사람을 뜻한다는 사실을 마담은 곧바로 눈치챘다. 자세한 사연은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좋은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찾아달라는게 아니야. 창관 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만해줘."
"우리 뿐만 아니라 다른 창관들 까지도 말인가?"
"그래. 당신은 창관주 모임의 수장이잖아?당신이라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해무의 말에 마담은 침묵했다.
마담이 창관주 모임의 수장인 것은 사실이었다. 구룡성채 상업구역 창관동. 그곳에 위치한 수많은 창관의 주인들은 생존을 위해 모임을 만들었다. 동종업계 종사자들 간의 협동 조직인 셈이었다. 보통은 공안의 검문 일정을 공유하거나, 여자들이 부족할때 서로 빌려주는 것 따위의 일을 주로 했다.
그리고 그 모임의 수장인 야화의 마담이라면 충분히 해무의 요청을 전달할만한 위치는 됐다.
하지만 마담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창관주들은 누가 자신의 가게를 들쑤시고 다니는걸 싫어해. 창관에는 사연 있는 사람들이 많아. 범죄자들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과거와 신분을 숨긴 사람들도 많아."
"알고 있어. 그리고 그게 내가 창관을 확인하고 싶은 이유야. 분명 나처럼 갑작스레 여자가 된 사람이라면, 성채 안을 멀쩡히 돌아다니긴 힘들겠지."
"그런 놈들이 굴러들어올 곳은 창관 뿐이라는 말이로군. 일리 있는 소리야."
그리고 고민 끝에 대답을 정정했다.
"한번 얘기는 해 보지."
밖으로 나오자 문에 귀를 대고 엿듣고 있던 아가씨들이 황급히 물러섰다.
"오늘 장사는 때려칠 셈들이냐."
마담이 호통을 쳤다. 그제서야 야화의 들꽃들은 허둥지둥 도망쳤다. 마담은 그 뒷모습을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몸만 컸지, 다들 머릿속은 어린애들이야."
범죄나 다른 사정으로 뒤늦게 창관으로 오는 여자들도 있었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이 곳에서 살아온 여자들이었다. 성채 밖의 삶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 창관 밖에도 나갈 일이 많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고작해야 이 홍등가가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인 셈이었다. 그러니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어린애같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논의 결과가 나오기까진 시간이 걸릴꺼다. 이따 저녁에 다시 찾아와."
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지금 당장이라도 창관 안을 탐색하고 싶었지만, 반나절 정도라면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아, 그때까지 우리 애들이 장을 봐야 하는데 같이 좀 다녀와 줬으면 좋겠군."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뜬금없는 마담의 요구에 해무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지금 나보고 심부름꾼 노릇을 하라고?"
"어차피 저녁때까지 할 일도 없잖나."
마담의 말에 해무가 얼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자신은 살수다. 고작해야 아가씨들의 장보기시중에 쓸 시간 따위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등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힐끗 고개를 돌리자, 도망쳤던 여자들이 모퉁이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이야기를 엿듣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해무는 고민 끝에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뭘 하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