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창관의 성모 (5)
[상점구역, 4동 3층]
구룡성채 상점가의 모습 자체는 홍등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어느 가게는 식료품이, 어느 가게는 생활용품이, 그리고 어느 가게는 옷이 안쪽을 채우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으레 성채 안의 건물들이 전부 비슷비슷한 콘크리트 건물들 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좁은 복도가 사람들로 붐비는 광경에 해무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렇게 사람이 많고 시야가 좁은 곳은 암살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지만, 동시에 암살을 당하기도 쉬운 장소다.
하지만 그를 따라온 메이린과 수아는 뭐가 좋은지 경쾌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둘 모두 과거 해무가 동침한 경험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메이린은 중국 출신. 나이는 자신보다 한살쯤 어린걸로 기억한다. 키는 조금 작고 가슴이 큰 편. 성격은 경쾌한 편으로, 그녀와의 잠자리는 만족스러웠다.
수아는 해무와 마찬가지로 구룡성채 태생. 나이는 자신과 동갑일 것이다. 키는 메이린보다 조금 컸고 감정표현을 많이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녀 역시 만족스러운 상대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녀들을 범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눈 앞에서 두 여자의 허벅지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해무는 뒤를 따라 걸었다.
"이제 슬슬 놀러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이런 모습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는걸?"
가장 먼저 앞서 걷던 메이린이 빙글 몸을 돌려 해무를 향해 말했다.
"맞아. 그렇지만 나는 좀 아쉬워."
옆에서 걷던 수아가 이어서 말했다.
뜬금없는 둘의 말에 해무는 눈썹을 찌푸렸다.
"뭐가 아쉽다는건데."
"여자가 됐다는건 더이상 해무가 손님으로 찾아올 일이 없다는 얘기잖아."
"그치그치? 나도 아쉬워. 해무같은 손님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인데."
메이린과 수아가 입을 모아 말했다. 여자가 되었으니 창관에 손님으로서 찾아올 일이 없을 거란 뜻이었다.
"왜 안돼? 찾아가면 되지."
"와준다면야 상관은 없지만ㅡ 뭐 하려고?"
"침대에 같이 앉아서 뜨개질을 하려는 것도 아니잖아."
그 말에 해무가 표정을 구겼다.
"괜찮아. 할 수 있어."
"하고싶은 마음이 들기는 해?"
그리고 해무는 둘의 가슴을 번갈아 힐끗 확인했다.
장을 보러 외출을 나온 둘은 창관에서 입는 코스튬과는 다른 평상복 차림이었다. 펑퍼짐한 원피스와 블라우스는 몸의 윤곽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무는 그 아래 감춰진 둘의 몸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의 몸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아도 이전만큼 범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퍼즐이 맞춰지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과거에는 둘의 모습으로 얼마든지 욕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해결하지 못한 성욕이 아랫배에서 들끓고는 있었지만, 이유는 몰라도 지금 당장 저 둘을 범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었다.
"좀 있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언제?"
"곧. 약을 찾으면."
해무의 말에 메이린이 흐응~ 하고 콧웃음을 흘렸다. 은근히 불쾌한 기분이었다.
"뭐, 그렇다고 치자. 일단은 장보기부터."
그렇게 말하며 수아가 향한 곳은 약국이었다.
흰색 바탕 위에 녹색 십자가가 그려진 간판은 군데군데 깨지고 낡아서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메이린이 문을 두드리자 작은 쪽창이 열리며 쭈글쭈글한 얼굴의 노파가 고개를 내밀었다.
메이린과 수아의 모습을 확인한 노파가 다시 쪽창을 닫고, 이어서 몇 차례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 다음으로 입구를 막고있던 접이식 쇠창살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가 좀먹은 냄새가 약품 냄새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이리저리 뒤틀린 나무 선반에는 알약과 연고, 붕대 따위의 물건이 아무런 규칙없이 마구 뒤섞여 늘어서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 진열된 물건의 규칙성을 알고 있는 것은, 녹슨 쇠창살 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노파뿐일 것이다.
하지만 메이린과 수아는 이곳에 많이 와 봤는지, 살 것들을 곧바로 찾아내 바구니에 착착 담았다. 진통제와 해열제, 소독약같은 일반상비약, 그리고 여성청결제와 생리대도 몇 묶음을 담았다.
"이건 해무 꺼야. 우리가 사줄게"
"응, 우리가 사주는거야."
그렇게 말하며 생리대를 한묶음 더 챙기는 둘의모습에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해무는 이내 대꾸하기를 포기했다. 바구니에 한가득 담긴 생리대를 바라보며, 해무는 자신의 속옷에도 저게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두 여자는 해무의 그러한 반응을 무시한 채 또다른 물건을 내밀었다.
"이건 그 다음으로 꼭 필요한거."
"뭐야 그건."
해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서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다. 수아가 눈앞에 들이민 물건은 그에게도 익숙한 물건이었으니.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정사각형 종이상자.
콘돔이었다.
"해무, 아무 남자의 아이나 임신하면 안돼."
"맞아. 자기 안전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구."
자신을 향해 이구동성으로 피임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둘의 모습을 보며 해무는 기가막히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미쳤어?"
"뭐가?"
소리치는 해무를 향해 수아가 새침한 얼굴로 대꾸했다. 해무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재차 소리쳤다.
"내가 왜 임신을 해?"
"콘돔 없이 섹스하면 임신할 수도 있어."
"맞아. 해무는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도 몰라?"
옆에서 메이린이 맞장구를 쳤다. 그 모습에 해무는 한층 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까 말하는거잖아. 내가 왜 남자랑 하냐고. 나는 남자랑 섹스 안 해."
"앞날은 모르는거지."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 나한테 맞기 싫으면."
"안 무서운걸~"
"맞아. 고추 없는 사람이 협박해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은걸?"
"적당히 해. 고추는 없지만 총이 있어."
해무의 협박에도 메이린과 수아는 주눅들지 않고 계속해서 해무를 놀려댔다. 해무는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쓸데없는 소리에 대꾸해봤자 자신만 피곤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해무는 둘의 이야기를 무시했다.
"하지만ㅡ 남자랑 섹스 안 할꺼면 욕구는 어떻게 해결할 거야?"
수아의 질문에 해무는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안그래도 이미 그 문제는 겪고 있었다. 여자의 몸이 되고 나서도 다른 여자들과 동침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만족감을 얻지는 못했다. 때문에 계속해서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와 동침할 생각도 없었다. 여자의 몸이 되었을지언정,자신의 정신은 여전히 남자였으니까.
"......니가 상관할 바 아니야."
약국에서의 쇼핑을 마치고 그 다음으로 찾아온 곳은 옷가게였다.
구룡성채 상점가의 여느 가게가 그렇듯이, 옷가게에서는종이박스 안에 아무렇게나 물건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메이린과 수아는 보물찾기를 하듯 마음에 드는 옷을 탐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품 안에는 색색의 속옷들과 원피스, 치마와 블라우스가 가득 들려있었다.
"이 치파오 어때?"
"주황색? 너무 튀는거 아니야?"
둘은 옷을 거울에 비춰가며 한참을 얘기했다. 붉은색은 창관의 조명 아래서 별로 안 이쁘다느니, 옆 트임이 너무 짧아서 다리를 벌리기에 불편하다느니, 그런 것들이 마치 아주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진지하게 토론까지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해무는 생각했다. 과연 이러한 여자들 사이에 에이시스 환자가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을까?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자신이 찾아낼 수 있을까?
저들은 즐거운 듯이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창관에서의 삶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성기를 입으로 빨고, 밑에 깔린 채 다리를 벌리는 것이 그녀들의 일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일을 하다보면 금세 피폐해진다. 하물며 평범한 여자들조차 그러한데, 한때는 남자였을 에이시스 환자의 경우라면 더이상 말할 것도 없으리라. 남자의 정신으로 다른 남자들에게 범해지는 것은 그만큼 견딜 수 없는 일이니까.
당장 스스로에게 창관에서 일할 수 있겠냐고 물어봐도 대답은 같았다. 창관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계속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살수인 자신도 그런 선택을 내릴 정도다. 다른 에이시스 환자들은 전부 죽거나 미쳐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창관에서 환자들을 찾는 것은 무의미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던 해무는, 메이린과 수아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왜."
해무의 질문에도 둘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해무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B겠지?"
"그치만 더 커질 수도 있잖아?"
그렇게 자기들끼리 소근대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해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네 속옷."
수아가 말했다.
"보나마나 속옷같은거엔 신경도 안 쓰고 있지?"
"그러면 안돼. 여자는 속옷이 중요하다구."
메이린과 수아가 입을 모아 말했다. 계속되는 둘의 공세에 해무는 진저리를 쳤다.
"속옷은 내가 알아서 입고 다녀. 남 상관 말고 니들꺼나 신경써."
하지만 이미 결심한 둘은 해무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메이린과 수아는 해무의 손목을 잡아끌어 탈의실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좁은 박스 안에 갇힌 해무의 앞을 가로막고, 옷을 벗기기 위해 넥타이를 끌러내렸다.
하지만 둘의 힘으로 해무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한 손으로 각각의 뒤통수를 움켜쥔 해무가 둘을 간단하게 제압해 밀어내자, 메이린과 수아는 탈의실 벽에 뺨을 눌린 채 입을 뻐끔거렸다.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니네꺼나 사."
하지만 해무의 말에도 둘은포기하지 않았다.
"순순히 입지 않으면 안 갈꺼야."
"그래. 여기서 해가 질 때까지 한번 실랑이를 해 볼까? 누가 이기나 해 볼래?"
전투적인 그 모습에 말문이 막힌 해무는 황당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는거야?
하지만 둘에게도 믿을 구석은 있었다.
"만약 이대로 우릴 버리고 가면 마담이 좋아하지 않을걸?"
그 말에는 해무도 멈칫할 수 밖에는 없었다. 애초에 해무가 둘의 쇼핑에 따라온 것은 자신이 마담에게 어려운 요청을 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둘을 내팽개치고 돌아갔다가는 마담이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설령 마담에게 한 부탁이 아니더라도, 위험한 상점가 한가운데에 둘만을 남겨놓고 떠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굳센 의지로 눈을 빛내는 둘.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해무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끝내."
해무의 허락이 떨어지자 메이린과 수아는 신난 얼굴로 해무의 옷을 벗겼다. 넥타이를 풀러내고, 셔츠 단추를 풀고, 바지의 벨트를 풀었다. 해무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켓부터 하나씩 옷을 벗겨내자 해무의 나신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둘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세상에......"
드러난 해무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어깨와 가슴, 배와 다리, 그리고 등까지. 온몸 구석구석에 흉터가 없는 곳이 없었다. 원래는 희고 매끈했을 피부 위에 새겨진 흉터는, 베이고 찔린 상처, 심지어는 총상의 흔적까지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해무와 몸을 섞은 경험이 있는 둘은, 그의 몸이 살수 일을 하며 얻은 상처투성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였을 때와 달리, 여자의 몸에 이 정도로 많은 흉터가 있는걸 보는 것은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어색한 침묵이 탈의실 안을 채웠다. 하지만 해무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은 살수다. 이 정도의 흉터는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해무가 입을 열어 말하려는 순간,
"아ㅡ 팬티!"
메이린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의 손가락은 해무의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남성용 브리프를 가리키고 있었다. 당연히 브라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설마 지금까지 이러고 다닌거야?"
"안돼안돼, 이러면 안돼!"
둘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리고는 바구니에 가득 쌓아둔 속옷 더미에서 한 세트를 꺼내 내밀었다.
"우선은 이거!"
메이린이 건네는 속옷은 무난한 스타일의 흰색 팬티와 브래지어였다. 해무는 그것을 받아들고 약간의 망설임 끝에 팬티에 다리를 넣었다. 브라의 후크를 채우는 것은 수아가 도와주었다.
"어때?"
"허전해."
처음으로 여자 속옷을 입은 해무의 감상은 간결했다. 그 말에 메이린이 실망한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하지만 해무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엉덩이가 허전한걸 허전하다고 표현할 수 밖에는 없지 않은가.
"다음은 이거."
이번에는 수아가 다른 속옷을 건넸다. 이번에는 붉은색 슬립 란제리였다. 하늘하늘한 프릴이 달린 스타일이었다. 이번에도 해무는 둘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거 이쁜데?"
"응. 잘 어울려."
메이린과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해무는 동의하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여자 속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은 마치 우스꽝스러운 광대처럼 보였다.
"대체 이건 무슨 쓸모야?"
흐느적거리는 프릴을 가리키며 해무가 물었다.
"다 쓸모가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한 메이린은 심사숙고 끝에 다른 속옷을 집어들었다.
"그럼 이번엔 이거!"
다음으로 메이린이 건네는 속옷을 해무는 기계적으로 받아들고 갈아입었다. 하지만 그것을 입고 난 순간, 해무는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는걸 깨달았다.
검은색 코르셋 브라와 팬티, 그리고 가터벨트와 스타킹. 코르셋은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그 아래로 나온 끈이 망사 스타킹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른 것은 구성 뿐만이 아니었다.
브라와 팬티에는 벌어진 틈이 있었다. 그리고 그 벌어진 틈 사이로는 자신의 핑크빛 유두와 음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해무는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발짝 물러섰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채였다.
"아...... 미안. 화났어?"
해무의 표정을 본 메이린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수아도 당황한 채였다. 이런 속옷을 입힌 것은 자신들도 지나쳤다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아니야."
해무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 그 모습은 이전까지의 자신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코르셋은 몸을 감싸며 허리를 한층 더 잘록하게 만들었고,골반과 엉덩이의 라인을 강조했다. 망사 스타킹 아래로는 새하얀 허벅지가 그대로 비쳤다. 그리고 드러난 유두와 음부는 어느 남자라도 이성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야말로 온전히 남성을 기쁘게 하기 위한 차림. 여느 창부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정말 괜찮아?"
재차 묻는 메이린을 향해 해무는 신경쓰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제서야 메이린과 수아도 걱정스런 기분을 지워내고는 다시 자신들이 살 옷을 골라냈다.
란제리를 벗은 해무는 다시 정장을 챙겨입었다. 그제서야 살수로서의 모습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창부의 옷차림을 한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재잘재잘 떠드는 메이린과 수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해무는 쓴 입맛을 다셨다.
그녀들의 쇼핑은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급격히 정신이 피로해지는 것을 느끼며, 해무는 이 쇼핑에 생각없이 따라온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ㅇ ㅇ ㅇ
창관으로 돌아가는 길.
해무의 얼굴은 피로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여자들과의 쇼핑은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약국과 옷가게로 시작한 쇼핑은 식료품점과 잡화점, 찻집과 화장품점까지 거치고 나서야 간신히 끝이 났다.
그 과정에서 해무는 끊임없이 시달렸다. 차라리 살수회의 업을 하는게 훨씬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재밌었어~"
"정말. 해무랑 같이 오니까 더 그런거같아."
"여자가 돼서 좋은점이 있네! 앞으로도 같이 가자."
붉은 노을이 비치는 거리를 걸으며, 메이린과 수아는 피곤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이야기를 재잘대고 있었다.
해무는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이들과 상점가를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둘 사이에서 지친 발걸음을 옮기는 해무의 양손에는 쇼핑백과 봉투가 가득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메이린과 수아도 마찬가지였다.
무겁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상점가에서 산 것들 뿐이었으니.
해무는 자신이 들겠다고 했지만 둘은 극구 반대했다. 여자끼리 나눠들자는 얘기였다.
여자끼리라니.
딱히 악의가 있어서 한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해무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올랐다. 설령 오늘 하루동안 여자 속옷을 입고, 강제로 생리대와 콘돔까지 손에 쥐어졌어도, 자신은 엄연히 남자였으니까.
"참, 아까 산 생리대랑 콘돔은 꼭 챙겨가. 알지?"
"여성청결제도. 그거 꼭 필요한 거라구."
재차 이야기하는 메이린과 수아를 향해 해무는 고개를 떨구었다.
"알았어, 알았어. 가져갈테니까 그만좀ㅡ"
그렇게 이야기하는 해무의 옆, 난간 너머로 사람의 형체가 떨어졌다.
퍼석, 하는 소리가 맥없이 울려퍼졌다. 메이린과 수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해무는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쪽을 확인했다.
홍등가로 쓰이는 낡은 아파트의 중정. 빨랫줄이 이리저리 가로지른 허공 아래.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팔다리가 이곳저곳을 향해 제멋대로 꺾여 있는 채였다. 머리 아래에서 흘러나온 붉고 끈적한 피가 서서히콘크리트 바닥을 따라 퍼졌다.
해무는 고개를 돌렸다. 위쪽, 몇 층 위에서 누군가가 해무처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후드 아래 반쯤 가려진 얼굴, 제멋대로 자란 수염, 그리고 빛나는 눈.
찰나의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리는 곧바로 쑥 하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가슴이 사악, 하고 차갑게 식어들었다. 그리고 해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짐을 내팽개치고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