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창관의 성모 (6)
해무는 달렸다. 계단 통로를 뛰어 올라가자 저 멀리서 괴한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에 놀란 여자들 몇몇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무슨 일이 있나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달리던 해무가 코앞을 스치고 지나치자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해무는 곧바로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목표는 아슬아슬하게 코너를 돌아 모습을 감췄다. 빗나간 총알이 낡은 화분을 터뜨렸다.
다시 뒤를 쫓아 달리며 해무는 생각했다. 놈은 위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주 경로는 제한적이다. 기껏해야 옥상. 그곳에서 다른 동으로 넘어가는 것 정도가 유일한 경로였다.
해무의 예상대로 목표는 옥상으로 향했다.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중정을 가로질러 건너뛰려는 모습이었다.
머리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해무는 건너편을 향해 뛰는 괴한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해무의 손이 괴한의 발목을 쥐어챘다. 그리고 둘은 그대로 중정 한가운데를 향해 추락했다.
떨어지던 몸이 전깃줄에 걸렸다. 굵직한 전깃줄이 가슴을 치는 충격에 해무는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한 손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둘을 매단 전깃줄은 크게 처지더니,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다. 전기와 불꽃이 튀었다.
다시 둘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겹겹이 연결된 빨랫줄과 전깃줄에 몸이 걸렸고, 그럴 때마다 이리저리 몸이 휘청였다. 그리고 몇 개나 되는 줄을 끊어먹은 후에야 해무는 털썩 하고 중정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입술 사이로 컥 하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고통에 몸을 웅크릴 틈은 없었다. 상대는 어느새 몸을 일으켜 저 멀리 달리고 있었다. 해무는 몸에 이리저리 엉켜든 줄들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바닥에 내던지고는 다시 목표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무가 창관 건물의 입구를 빠져나왔을 때, 괴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리저리 복잡하게 갈라진 골목길의 텅 빈 모습만이 눈 앞에 있을 뿐이었다.
ㅇ ㅇ ㅇ
창관의 여자들은 겁먹은 얼굴로 숨어서 고개만 내민 채 흉흉한 분위기를 살폈다. 대낮부터 일어난 사고에 거리 전체가 술렁거렸고, 평소에는 그저 거리를 어슬렁거릴 뿐이던 고용 경호원들은 굳은 얼굴을 한 채로 의미없이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공안들은 범인의 모습은 커녕 터럭 끝 조차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범인은 이미 한참 전에 도망치고 피해자의 시체가 완전히 싸늘하게 식어버린 후였다.
출입금지 테이프가 덕지덕지 발라진 창관 거리의 중정 입구. 그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해무는 공안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장을 더 살펴보려던 해무는 공안들의 제지에 쫓겨났다. 고압적인 공안들의 태도에 해무는 불쾌했지만 대응하지는 않았다. 괜히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이미 공안들이 도착하기 전에 충분히 현장을 살펴봤기도 했고.
"언제나 그렇지."
마담이 담뱃대로 연기를 빨아들이며 말했다.
"공안은 언제나 늦어. 그들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거든. 구룡방의 체제를 유지하는데만 관심이 있지."
그녀의 말대로, 공안들의 모습에서 수사의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무감정한 얼굴로 길을 막아선 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사건의 해결보다는 조직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는 것에초점을 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꽤나 많이 몰려왔군."
"그야 자신들의 재산이니까. 구룡방의 고위층은 성채 안의 여자들을 전부 자기 소유라고 생각해. 그리고 여자의 죽음은 손실인 셈이고."
그 말대로였다. 힘의 논리가 통용되는 성채 안에서 여자들은 계급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자들이었다. 강한 남성은 여자를 취하고, 약한 남성은 여자를 잃는다. 그리고 여자들은 강한 남성의 소유물로 전락했다. 심지어 창관의 여자들은 공공 소비재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해무는 마담의 모습을 힐끗 확인했다. 살인 사건이 있었음에도 그녀의 모습은 침착했다. 마치 이번과 같은 일들이 언제라도 충분히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최근 들어서도 이런 일이 있었나?"
"처음 있는 일은 아니야. 언제나 그래왔지."
창관에서는 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손님이 창녀를 폭행하고 협박하거나, 혹은 관계중 과도하게 변태적인 요구를 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드물게는 살인 사건도 일어난다.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돈 때문에 시비가 붙는 경우도 있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내오지 않는다며 난동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골치아픈 것은 치정 문제였다.
인구 150만의 구룡성채에서 여자의 숫자는 반을 차지했다. 당연히 나머지 반은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자신만의 여자를 갖고 있는 남자는 많지 않았다. 때문에 대부분의 남자들은 창관에서 돈을 주고 여자를 샀다.
꾸준히 창관을 드나들다 보면 선호하는 여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자신을 지명해주는 단골에게 웃음을 팔며 몸을 제공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자들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여자의 웃음에 쉽게 홀려버리고 만다. 단순히 몸을 품기 위한 관계가 연심으로 발전하면, 남자는 집착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도 전 재산을 긁어모아 돈을 내며 여자를 지명하고, 심지어는 밤낮으로 몰래 뒤를 밟거나 하는것이다.
하지만 창관의 여자들은 이에 응하지 않는다. 애초에 감정을 품은 상대조차 아니었으니.
때문에 어느 순간 배신당했다고 느낀남자들은 함께 죽겠다고 난동을 부린다. 그런 경우 대부분은 어설픈 칼부림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드물게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었다.
"우리는 남자들에게서비스를 제공하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룻밤의 일.절대로 연심이라던가 봉사정신 때문이 아니야. 하지만 개중에는 사리 판단이 안 되는 손님들도 찾아오기 마련이지."
"피곤하겠군."
"그래. 피곤한 일이야.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일이 늘어나고 있어.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날지도 몰라."
그렇게 말한 마담은 턱짓으로 복도를 가리켰다.
"저 경호원들도 덩치만 컸지 쓸모가 없어."
복도를 채우고 있는 겁먹은 여자들 사이에서는, 머리 하나는 위로 튀어나올 정도로덩치 큰 몇몇 남자들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저것들이 도움이 되나?"
"숫자라도 많이 있다면 모르지.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창관주들이 각출하여 낸 돈으로도 몇 명 고용하는게 한계야."
해무가 보기에도 저 경호원들은 마담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덩치는 컸지만 딱 그정도 뿐.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겁을 먹고 물러서겠지만, 눈이 뒤집혀 칼부림을 각오하고 찾아온 이들에게는 그저 눈앞을 막아서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공안은 이 사건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마담이 말했다.
"이것도 그저 흔한 사고들 중 하나로 취급하겠지."
"당신의 생각은? 이번 건도 치정살인이라고 생각하나?"
해무의 질문에 마담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나는 그저 창관주일 뿐이야. 치정살인일 수도 있겠고, 아님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 혹은 정말로 우연한 추락사고일 수도 있겠고."
물론 마지막 가능성은 전무했다. 개점 전의 창관에서 일어난 실족사, 그 근처를 지나가던 정체불명의 남자가 갑종살수의 추격을 뿌리칠 정도로 잽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우연으로 치부할 상황은 아닌 것이다.
범인을 놓친 해무는 공안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시체를 살펴보았다.
시체에 특이한 점은 없었다. 다리 사이도 확인했으나 외관상으로는 마찰로 인한 상처나 충혈도 없었고, 남성의 체액이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적어도 가까운 시간 내 정사를 가진 흔적은 없었다.
물론 치정살인이라 하더라도 꼭 정사를 치른 흔적이 남아있는 법은 아니다. 하지만 해무는 이번 일이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해무를 향해 마담이 입을 열었다.
"창관모임에서 논의한 결과를 전하지. 불가."
해무의 창관 수색을 거부한다는 답변이었다. 대답을 들은 해무의 눈썹이 꿈틀했다.
"실망스럽군."
"나로서도 창관주들의 공통된 의견을 뒤집는건 어려워."
"그렇다면 나도 강제로 창관을 들쑤시는 수밖에."
"너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협조는 기대하지 않는게 좋아. 게다가 이런 일이 있었으니 창관주들은 더 민감하게 반응할 거야."
마담의 말대로였다. 안그래도 살인 사건으로 날카로워진 창관주들이 해무에게 호의적일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해무가 원하는대로 창관 거리를 이잡듯이 뒤져 에이시스 환자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있어."
마담이 담뱃대에 쌓인 재를 털어내며 말했다.
"외부인을 들일 수는 없지만, 내부인이라면 가능하지."
"그 말 뜻은?"
"네가 홍등가의 경호원이 되어준다면, 당당히 창관을 돌아다닐 수 있을거다."
"나를?"
해무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쓸모가 없을텐데."
창관 거리는 컸다. 피와 폭력, 범죄와 욕망의 도시인 구룡성채에서 가장 큰 환락가였다. 당연히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고, 하룻밤에 일어나는 사건은 사소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수십 건은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해무가 갑종 살수라 하더라도, 혼자서 이 거리 전체를 경호할 수는 없었다.
물론 해무는 여전히 강했다. 여자가 된 지금도 창관주들이 고용한 어중간한 수준의 경호원들은 간단하게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창관주들에게 필요한건 거리를 순찰하고, 여자들을 보호하고, 위험한 손님들을 제압할 수 있는 인력이다. 그저 강한 경호원 한 명이 필요한게 아닌 것이다.
"물론 네게 이 거리 전체를 지켜달라고 요청하는건 아니야."
그렇게 말한 마담은 잠시 입 속으로 말을 고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해무. 네가 이 범인을 잡아줬으면 해."
"지금 내게 사건의 해결을 의뢰하는건가?"
"그런 셈이지."
갑종살수들이 외부의 의뢰를 받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살수회와의 계약관계에 있는 그들은, 업을 수행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다른 의뢰를 개인적으로 맡아서 하는 경우가 종종있었다. 당연히살수회와의 이해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하지만 해무는 지금의 의뢰가탐탁지 않았다.
"나는 비싸."
당연히 갑종살수의 몸값은 비싸다. 성채 안에서 최고 수준에 달할 것이다. 때문에 갑종살수의 의뢰주는 큰 돈을 만지는 상단주들이 대부분이었다. 적어도 창관에서 고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이다.
하물며 그런 인력을 요인 암살도 아니고 거리의 치안을 위해 쓴다는건 쓰레기통에 돈을 버리는 짓이다.
"창관주들에게 요청해 보겠어. 너라면 돈을 지불할 거야."
"사양하지."
해무는 마담의 제안을 거절했다.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야. 나는 할 일이 있어."
해무가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일. 동시에 지금의 해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 바로 에이시스 치료제를 찾는 것이었다.
치료제 탐색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다음 업이 떨어지기 전 까지의 짧은 시간 뿐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창관 경비 따위에 낭비할 수는 없었다.
"아쉽게 됐군."
마담은 재차 권하지는 않았다.
해무는 밤이 점점 찾아오는 창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살인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창관은 붉은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며 한창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도 이곳의 여자들은 손님을 받으며, 내일 하루를 살아갈 양식을 마련할 것이었다.
ㅇ ㅇ ㅇ
구룡성채를 비추는 달은 유난히 크고 밝았다. 해무는 자신의 방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는 오늘 있었던 사건을 생각하면서.
창관의 살인. 괴한. 팔다리가 이리저리 꺾인 시체. 그리고 자신의 요청을 거절한 마담. 그런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치료제를 찾기 위한 실마리는 자신과 같은 환자를 찾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마담으로부터 수색을 거절당한 지금 상황은, 더이상 일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 없음을 뜻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마담의 제안 - 창관 거리에서 경호원으로 일하는 것 - 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다른 실마리를 찾는 것이었다.
다른실마리라ㅡ
아예 없는건 아니었다. 얼마 전에도 단하와 이야기했던 방법, 공안청에 잠입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살수회와의 관계를 고려했을때 리스크가 너무 크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공안청에 잠입하는 대신, 해연에게 형제로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연에게도움을 요청한다고?
거기까지 생각한 해무는 실소를 흘렸다. 서로 찢어죽이지 못해 안달인 이부(異父)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꼴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 놈은 도와주기는 커녕 멸시를 담아 비웃을 것이다.
결국 해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마담이 제시한 선택지를 고민했다.
창관에서 경호원 노릇을 한다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자질구레한 일에 시달리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정으로 결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일분 일초가 아까운 시간. 치료제를 찾기 위한 최단 거리를 판단해서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고민하며 방으로 들어오는 해무의 발에 무언가가 걸려 쓰러졌다. 발치에는 봉투가 쓰러져 있었다. 오늘 하루종일 쇼핑을 하며 산 물건들이었다. 봉투 밖으로 쏟아진 생리대와 콘돔이 바닥을 굴렀다.
잠시 그것들을 내려다보던 해무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주워담았다. 그러다 그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이는걸 발견했다.
머리핀이었다. 해무의 은발에 어울리지도 않는 싸구려 머리핀. 잡화점에서 메이린과 수아가 제멋대로 선물이라며 봉투에 집어넣은 것들 중 하나였다.
해무는 그것을 집어들어 달빛에 비추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머리핀을 바라보며, 자신의 선택에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