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창관의 성모 (12)
해무는 셴을 데리고 창관 단지를 나섰다. 아직 개점하기 전의 이른 시간인 탓에, 셴을 들키지 않고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해무는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은 떠올렸다. 우선 집으로 갔다가, 이리나에게 셴의 검사를 받는다. 만약 에이시스환자라면, 윤과 호두의 행적을 조사해서 셴이 어디서 왔는지를 역추적한다. 만약 아니라면, 다시 창관을 탐문한다.
간단한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향하는 와중에, 해무는 자신이 셴같은 어린아이와 함께해 본 적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소녀와 보폭을 맞추는 것은 영 까다로운 일이었다. 걷다가 뒤처진 셴을 기다리고, 또 다시 걷다가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결국 몇 차례 그 과정을 거친 후에야 해무는 셴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
하지만 셴은 해무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지금까지처럼 멍한 시선을 한 채, 반사적으로 터덜터덜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해무는 소녀의 손을 먼저 잡아들었다.
작은 손이었다. 나이는 열넷, 열다섯 쯤? 아직은 어렸지만 조금만 더 나이를 먹는다면 매력적인 여자가 될 것이다. 창관주들이 키워서 일꾼으로 쓰려 했을지 모를 정도로.
과연 창관에서 나와 자신과 동행하게 된 것이 셴에게 좋은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건 창관은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셴도 문제없이 빼내왔고, 호두도 사정을 아는 만큼 스스로 입조심을 할 것이다. 납치범의 시체는 적당히 처리했다. 성채 외곽의 쓰레기 더미 안. 그곳에서 시체썩는 냄새가 좀 난다고 해서 신고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굳이 시체가 없더라도 그곳의 악취는 지독했으니까.
그보다 해무에게는 더 중요한 고민거리가 있었다.
과연 저 어린 실어증, 자폐증 소녀가 에이시스 환자일까?
이리나는 에이시스 환자가 구룡성채에서갈 곳은 많지 않다고 했다.그 중 하나로 예를 든 곳이 창관이었다. 물론 셴이 창관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었다. 창관주들 몰래 호두에게 보호받고 있었을 뿐.
그럼에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셴을 사건의 핵심 인물로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 너무 성급하게 확신하지 말자.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판단하자.
갑작스레 나타난 소녀를 에이시스 환자라 믿고서 앞으로의 계획을 전개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미약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알고 움직일 뿐이다.
그렇게생각하며 해무는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다행히 고민거리는 셴의 정체에 대한 것 뿐만이 아니었다.
호두가 셴을 보호하는 이유. 범인의 정체. 그리고 목적.
그 모두가 지금은 베일 속에 숨겨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바로 저격수의 존재였다.
인신매매는 성채에서 흔하디 흔한 사건이다. 어린 아이와 여자에 대한 인신매매는 하루에도 수백 건씩 일어난다. 그리고 지금의 사건 또한 수많은 인신매매들 중 하나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사건들과 완전히 다르게 만드는 것은 바로 '저격' 이라는 요소였다.
성채 안에서 권총은 일상적인 물건이었지만, 그것은 권총 한정이었다. 저격총과 같은 물건은 구룡방에서 엄중히 관리하는 물품들 중 하나였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구룡방의 고위층들은 저격을 두려워했다.
구룡방은 이 성채를 자신의 손 안에 거머쥐고 있었지만, 동시에 언제든 자신을 위협할만한 세력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남한 혹은 중국에서 잠입한 세력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부에서 발생한 반란 세력일 수도 있었다.
때문에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수단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관리했고, 저격총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구룡방으로부터 직접 허락을 받은 극소수의 사람들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해무를 포함한 다른 살수들도 암습에는 대비할지언정 저격은 고려하지 않았다. 허가되지 않은 저격이 벌어지는 순간, 비상이 걸린 구룡방이 공안들을 일제히 움직일 테니까.
그럼에도 지금 사건에 저격이 개입했다는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을 뜻했다.
저격수가 구룡방에게 추격당할 위험을감수하고서라도 저격을 강행했거나.
혹은 저격수가 구룡방에서 관리하는 병력이거나.
두 가능성 모두 해무에게 있어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상대할 적이 구룡방을 무시하고 저격을 할 정도로 미친놈이거나, 혹은 구룡방 그 자체라는 것을 뜻하고 있었으니까.
저격과 관련한 의문점은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어째서 자신은 살아남았을까.
상황이 종료되고 난 이후, 해무는 저격수가 숨어있던 공간을 찾아냈다. 현장으로부터의 거리는 고작해야 이백 미터 남짓. 저격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터무니없이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노을의 반사광이 비치는 좁은 창문을 통해 정확히 목표물의 가슴팍을 꿰뚫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저격수의 실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리고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자신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저격수가 현장의 목표를 전부 제거하고 싶었다면, 먼저 자신을 쏘고 난 다음에 묶여있는 납치범을 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납치범만을 쐈다는 것은, 저격수가 자신을 일부러 살려뒀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이 가리키는 사실은ㅡ
"정보 은폐인가."
납치범은 죽이고 자신은 살려두었다. 그렇다면 저격수는 해무를 죽이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동시에 납치범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는 것은 막고 싶어하는 자일 것이다.
과연 그런 의도를 품은 사람이 누구일지는 아직 감조차 잡히지 않았지만 말이다.
해무는 주머니 안에서 조그마한 비닐 파우치를 꺼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탄자(彈子)였다. 저격당한 납치범의 몸에 박혀있던걸 꺼낸 것이었다. 구경은 7.62mm. 워낙 사용되는 곳이 많아서, 저격이었다는걸 감안해도 총기를 특정하기 어려운 종류였다. 하지만 보관해둬서 나쁠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정체불명의 저격수를 또다시 마주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어쨌든 모든 의문이 지금 당장 해결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이런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셴이라는 존재가 필수적일 것이다.
곁눈질로 소녀의 아슬아슬한 걸음걸이를 바라보며 해무는 기도했다. 부디 이 소녀가 자신의 모든 의문을 풀어주기를, 그리고 에이시스 치료제를 향해 이어진 길을 안내해줄 실마리가 되어주기를.
ㅇ ㅇ ㅇ
해무의 집은 구룡방 관리들이나 다른 갑종 살수들이 사는 고급 단지가 아니었다. 보통의 성채민들이 사는 싸구려 아파트였다. 건물 옥상에 세워진, 지금은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는 '삼우 모텔' 이라는 간판을 보건대, 이십 년 전 지어졌을 당시에는 아마 모텔로 쓰였을 것이다.
물론 더이상 그 간판에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구룡성채의 전력이 불안정할 때마다 파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불꽃이 튈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낡은 아파트 앞에 도착한 해무는, 눈앞에 펼쳐진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긴장하며 멈춰섰다.
언제나 을씨년스럽고 적막하던 아파트. 하지만 오늘의 모습은 달랐다. 아파트 입구 앞에서는 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인파가 모여서 웅성대고 있었다. 순간 시위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해무는 그 인파의 뒤에 서서 사람들의 면면을 주시했다. 불안감이 깃든 공기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해무는 그 무리 속으로 조용히 섞여들었다. 귀를 기울이자 오가는 대화의 내용이 들려왔다. 불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겁에 질린 사람도 있었다.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며 항의하는 남자도 있었고, 아이들을 감싸며 보호하는 여자도 있었다.
그리고 무리 속의 사람들 중 한명이 뒤늦게 섞여든 해무의 모습을 눈치채고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도 여기 사나?"
그렇게 묻는 남자를 향해 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해무의 눈에는 익은 남자였다. 이웃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몇 차례 마주쳤던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 남자의 몰골은 흉측했다. 몸에 걸친 것은 고작 팬티 한 장 뿐. 그 위로는 배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드러난 가슴팍과 다리에는 털이 수북이 돋아나 있었다. 이유는 몰라도 옷을 챙겨입을 여유조차 없이 황급히 방에서 뛰쳐나온 모양새였다.
"무슨 일이지? 이 아파트 앞이 이렇게 붐비는건 처음 보는데."
"전부 여기 주민들이야."
평소에는 있는듯 없는듯 그 존재마저 희미했던 거주자들. 그들이 동시에 몰려나와서 입구에 진을 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까 전 아파트 전체에 경보가 울렸네. 수상한 사람이 침입했다더군."
설마 지금 당신 몰골만큼 수상하겠냐ㅡ 하는 생각이 해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가 근처의 정육점 주인이라는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보다는 남자의 말에 의문을 느꼈다. 수상한 사람이라니?
이곳은 경호원은 커녕 담장조차 없는 싸구려 아파트였다. 도둑이나 건달패들이 수시로 들락이며 소란을 피워대는 것은 물론이고, 칼부림과 살인 사건까지 심심치않게 일어나는, 말하자면 할렘가와 같은 곳이었다.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는 아파트라기보다는, 남의 집에 침입할만한 수상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었다.
그런데 고작해야 수상한 사람 몇 명이 들어왔다고, 이 많은 주민들이 전부 집을 빠져나왔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도 지금 상황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좀 심각한 것 같네."
그렇게 말하는 정육점 주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전기가 끊겨 냉동고에 보관해 두었던 돼지고기가 전부 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보다도 더 심각한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놈들이길래?"
"목격자가 말하기를. 마치 커다란 포탄 같은걸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더군."
"포탄?"
"그래. 포탄에 전선을 이어붙인 모습이 마치ㅡ"
남자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귀를 찢는 폭발이 머리 위를 가득 채웠다. 충격파에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불기둥이 솟아오르며 퍼지는 뜨거운 열기에 해무는 셴을 감쌌다.
그리고 남자는 멍하니 폭발이 일어난 아파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폭탄 같다고......."
깨진 창문을 통해서 새카만 연기가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날름거리는 불길도 그 뒤를 이었다. 폭발 때문에 날아간 창틀, 판자 따위가 뒤늦게 아스팔트 도로 위로 떨어지며 텅, 텅 하는 소리를 냈다.
충격과 열기가 가라앉은 후에야 해무는 폭발이 일어난 위치를 확인했다. 아파트의 8층 복도 끝.
해무의 집이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저 집 주인은 안됐군."
불길을 바라보며 남자가 말했다.
"그렇네."
해무도 옆에서 조용히 맞장구쳤다.
고작해야 몇 초 사이에 완전히 불타버린 자신의 집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