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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화 〉창관의 성모 (21) (62/82)



〈 62화 〉창관의 성모 (21)

고요한 새벽이었다.

통유리 창에 드리워진 커튼, 그 사이로 스며든 어스름이 해무의 눈꺼풀 위에 깔리고 있었다.

그리고 해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높은 천장이었다. 커다란 침대 위에서는 새하얀 이불이 자신의 몸을 덮고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새벽 빛을 바라보던 해무가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지?"


"다섯 시간 정도."

짙은 그림자 속의 소파에 앉아있던 단하가 답했다. 밤새도록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같은 모습이었다.


해무는 이불을 걷어냈다. 그 아래에서 드러난 자신의 몸에는 헐렁한 파자마가 입혀져 있었다. 총상을 입은 팔뚝에는 어느새 붕대가 감겨있었다.


"총알은 빼냈어. 깊지 않아서."

단하의 말대로, 상처에는 기본적인 처지가 되어있었다. 적어도 총알 파편이 남거나, 곪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몸에 남아있는 데미지는 총상 뿐만이 아니었다. 침대에서 몸을일으키려던 해무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이를 악물었다. 어깨부터 등과 허리를 지나,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욱씬거림은 마치 말발굽에 채인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것은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의 원인이 무엇인지, 해무는 알고 있었다.

남자에게 범해졌다. 그것도 아주 무력하게.


미약을 주사당했을 당시에는 반쯤 의식이 없었지만, 부조리하게도 그 때의 기억은 머릿속에 똑똑히 남아있었다. 옷이 찢겨져나가고, 남자의 손길이 비부를 스칠 때마다 허리를 젖히며 절정했다. 그리고 남성기가 격렬하게자신의 몸 안쪽 깊숙한 곳을 찔러댈 때마다, 몸부림치는 자신의 입술 사이로는 기쁨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기억은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 한가운데를 차지한 채, 패배감과 굴욕감을 진하게 남기고 있었다.

깨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증오가 솟아올랐다. 자신을 범한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나약한 자신의 몸을 향한 것이었다.


고작 약물을 주사당한 만으로도 자신이가진 여성의 몸은 본능에 잠식되었고,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남자를 갈구했다. 남성이었을 때에는 전부 있을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

그 사실에 차오르는 분노를, 해무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항생제랑 피임약."


단하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먹어두는게 좋을 거야."

그제서야 해무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의 테이블. 그 위에 알약이 놓여있었다.

해무는그것을 천천히 집어들었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서 인공적인 색을 띠고 있는  개의 알약을 말없이 응시했다.


"너에게 상황을 알리지 않아도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이야기하는 단하의 목소리에는 피로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업을 끝내고, 너는 치료제를 찾고. 그러고 나면 아무런 문제 없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 믿었지."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자신의 개입을 들킨 탓에 단하의 업은 꼬여버렸고, 에이시스에 걸린지 두 달이 거의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도 해무는 아직 치료제를 찾지 못했다. 처음에 세웠던 계획들은 점점  엉클어져만 갔고, 마치 이 새벽처럼 어두운 심연 한가운데로 추락하고 있었다.

"형이 나를 돕기 위해 움직인게 아니라는걸 알아."

해무는 손에 쥔 알약을 꾸욱 움켜쥐며 말했다.


"형이 저격한 놈들. 걔네들은 누쿠로의 부하였어. 형에게는 굳이 놈들을 적대할 이유가 없지."


단하는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해무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럼에도 형이 놈들을 죽인 이유는 하나뿐이야. 나를 살려두는 것. 내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둔 다음, 목표를 일망타진 할 생각이었겠지. 마치 미끼처럼 써서."


알약을 부술 듯 움켜쥔 해무의 주먹은 하얗게 질린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하는 해무의 얼굴을 마주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해무의 눈에 원망이나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건조한 시선이 있을 뿐이었다.


저런 눈빛을 언제 봤었을까. 적어도 최근 몇년간은 아니었다.

처음 해무를 만났을 때가 기억났다. 그 때의 해무는 상처입은 소년이었다. 부모를 잃은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과는 달리, 이 성채의 가장 밑바닥에서 하루하루 생존하기 위해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시절의 기억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리던 단하가 입을 열었다.

"일을 하다 보면, 예상 밖의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지."


"그래. 일을 하다 보면."

해무가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손 안에서 바스러진 알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씁쓸한 입맛이 목구멍 안쪽까지 퍼졌다. 그것이 약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의 상황 때문인지는  수 없었다.

"어디 가."


방을 나서는 해무를 향해 단하가 물었다.

"찾을게 있어."

"그 호두라는 애?"

해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무도, 단하도 알고 있었다. 호두가 지금 사건의 연결고리이자 실마리라는 사실을.


"걔는 창관에 없었어."

해무의 뒷모습을 향해 단하가 말했다.

"내가 갔을때는...... 너 뿐이었지.

"나도 알아. 분명 누쿠로가 데려갔을 거야."


어젯밤에 되돌아갔던 창관. 그곳에 호두는 없었다. 고작해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모습을 감추었다. 누군가가 먼저 침입했던 흔적을 봤을 때, 스스로 도망친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누쿠로가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찾을 수 있겠어?"


"놈의 아지트로  거야."

갑종살수들 사이의 관계는 동료라기보다는 경쟁자에 가까웠고, 때문에 지속적인 견제가 이어져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서로의 정보도 습득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각자의 본거지와 같은 정보들을.


더군다나 누쿠로는 부하들이 많았고, 세력의 덩치가 컸다. 때문에 자신들의 정보를 완전히 숨기는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놈들의 아지트를 찾아내는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걸 입어. 대충은 맞을 거야."

단하가 벽에 걸려있는 옷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회색의 쓰리피스 수트. 단하의 여벌 옷이었다. 잠시 그 앞에 서있던 해무는 입고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파자마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풀러냈다. 그러자 벌어진 앞섶으로 여성의 몸이 드러났다.


해무는 상의를 완전히 벗어 내려놓았다. 얇은 파자마가 바닥 위로 스륵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하의까지도 벗고 나자,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단하의 시선이 해무의 뒷태를 천천히 훑고 내려갔다. 목에서 어깨를 지나, 등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시선에 욕정은 없었다. 대신, 단하의 눈은 상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에 해무의 몸에 가해졌던 폭력이 남긴 붉은 손자국들을.

하지만 해무는 그것을 신경쓰지 않은 채, 맨 위에 단하의 셔츠와 수트를 걸쳤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색이 아닌 회색의 수트를 걸친 자신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사이즈는 조금 커서 헐렁했지만 아예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해무, 나는  일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어."

거울을 바라보는 해무를 향해 단하가 말했다.

"너는 이번에야말로 치료제를 찾아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지. 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한 거야?"


하지만 해무는 단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적막한 공기가 둘을 휘감았다.

그리고 해무는 끝내 답을 남기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단하의 집을 나섰다.


혼자 남은 단하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성채의 고층 빌딩들이 만들어내는 윤곽 위로, 붉은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ㅇ 





가을로 접어드는 성채의 아침은 눈부실 정도로 밝았다. 해무는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쌀쌀한 공기가 얇은 셔츠 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거리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해무에게는 무언가가 다르게 느껴졌다.처음에는 그저 계절의 변화, 혹은 단하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뒤 깨달았다. 자신의 몸과 정신이 그 어느때보다도 맑다는 사실을. 동시에, 그동안 불안정했던 감정과 흐릿한 판단력의 원인이 계속해서 쌓여온 성욕 탓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사실에 기뻐하지는않았다.


대로를 지나 뒷골목으로 들어가자 주변은 순식간에 어둑어둑해졌다. 가을의 아침 햇살도 성채의 좁은 뒷골목 구석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도 확 줄어서, 마주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도시 전체가 우범지대인 구룡성채 중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위험한 길인 탓이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한 해무는 멈춰서서 가게를 바라보았다. 부서진 간판이 간신히 매달려있는 정육점의 모습은 폐가나 마찬가지였다. 녹슨 쇠의 냄새와 썩어가는 고기의 악취가 입구에서부터 풍겨왔다. 그 뒷문을 열고 해무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을 걷는 해무의 발걸음 소리는 어느새 조용히 억눌러져 있었다. 안주머니에 넣은 오른손은 총을 쥐고있는 채였다.

창고를 지나 홀로 이어지는 문으로 다가가자,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에 몸을 숨긴 해무는 고개를 반쯤 내밀어 안쪽을 살폈다. 러닝셔츠 한 장을 걸친 뚱뚱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의자에 앉은 채 식기를 연신 움직이며 식탁 위의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해무는 안쪽을 향해 한발짝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제서야 뒤늦게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챈남자가 요란하게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식탁에 꽂혀있던 육중한 중식도를 뽑아 해무를 향해던졌다.


하지만 그것이 해무의 머리에 박히는 일은 없었다. 고개를 틀어 간단히 피하자, 뱅글뱅글 돌며 날아온 중식도가 벽에  하고 꽂혔다. 이어서 남자는 괴성을 지르며 커다란 몸을 이끌고 돌진했다.


해무는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한 차례 총성과 함께 남자의 몸에 퍽 하고 피가 튀었다. 그것으로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콧김을 씨익씨익 내뿜던 성난 얼굴이 점점 풀리며,  몸뚱아리가 바닥으로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털썩 쓰러진 남자의 시체를 앞에 두고 해무는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남아있는 것은 발치에서 천천히 피를 흘리며 식어가는 지방덩어리의육체 뿐이었다.


더이상 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해무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주방 한쪽 구석에서 쓰러져있는 호두의 모습을 발견했다.

해무는 호두의 맥박을 확인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가느다란 맥박이었다. 발가벗겨진 몸에는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무참하게 윤간당한 흔적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무의 손길을 느낀 호두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조금만 기다려. 병원에 데려가 줄 테니까."

지금 시간이면 이리나는 자신의 오피스에 있을 것이다. 당장 옮기면 곧바로치료를 받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두는 자신을 업으려는 해무의 등에 올라타는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너는...... 에이시스 환자를 찾고 있었지."

그렇게 말하는 호두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작았다.

"셴이 환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만, 틀려. 셴은...... 에이시스 환자가 아니야."

"괜찮으니까 입 다물고 있어."


"내가 환자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돌아온 그 대답에 해무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섰다.

"에이시스에 걸리고 몸이 바뀌자, 얼마 뒤 그들이 나를 찾아왔지. 나를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고...... 하지만 떠나는 대신, 나는 이곳에 남는걸 선택했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었으니까......"


"그들이 대체 누구지? 너는 누구와 협력해서 여자들을 성채 밖으로 내보내 왔던거지?"

"넌 이미 알고있어......."


이미 알고있다. 그 말에 해무의 눈빛이 떨렸다.

"성당으로  봐."


성당.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 그리고 자신이 데려간 셴이 머물고 있는 곳.


그리고 호두는 지금까지 구룡성채의 여자들을 바깥으로 몰래 탈출시켜온 조직의 정체가 성당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셴을 도와줘."

점점 초점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호두의 시선은 해무를 향해 있었다.


"셴은 불쌍한 아이야. 방주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계속해서 쫓기는 삶을 살아왔지. 그리고 결국은 엄마도 잃고, 목소리도 잃게 된거야. 그러니ㅡ"


그렇게 말하는 호두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어서, 이제 소리없이 입모양만 간신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셴을...... 이곳에서 내보내줘."

그리고 호두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가늘게 이어지던 맥박도 서서히 느려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멈추었다.


해무는 자신의 품에서 숨을 거둔 호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제서야 그녀의 얼굴은 평온함을 되찾아 있었다. 한껏 일그러진 해무의 얼굴과는 다르게.

깊은 심호흡 끝에 해무는 조심스레 호두의 몸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눈치챘다. 그녀의 목에도 자신의 것과 같은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점점 차가워져가는 호두의 손에 해무는 십자가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은 누쿠로의 아지트를 조용히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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