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창관의 성모 (24)
한낮의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무는 그 사이를 걸었다. 한 손에는 셴의 손을 꼭 쥔 채였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며, 해무는 셴이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느꼈다. 지금까지 그 나이대의 애들처럼 울거나 떼쓰는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기에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3일 뒤에 성채 탈출이라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있었음에도 해무가 셴과 밖에 나온 이유는 카밀라 때문이었다. 카밀라는 자신에게 셴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라고 말했다. 셴이 성채를 떠나고 나면 더이상 볼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대체 뭘 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은 이처럼 어린 아이와 시간을 보낸 경험이 없었다. 비슷한 경험이라고는 고작해야 창관의 여자들과 몇 차례 데이트나 했던게 전부였다.
그런 해무가 떠올릴 수 있을만한 '소녀와 시간을 보내는 법' 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선물을 사 주는 것이었다. 선물이라면 누구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걸 선물할지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셴의 뺨은 티 없이 뽀얬지만, 옷은 그에 어울리지 않게 낡은 티가 났다. 한 눈에 봐도 군데군데 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분명 오랫동안 숨어다니느라 새 옷을 사지 못한 탓이리라.
그러한 이유로, 셴과 함께 외출한 해무는 옷을 사러 향했다. 거리를 따라서는 싸구려 옷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해무는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이왕 선물을 해 줄거라면 더 좋은 걸로 해주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시장을 지나친 해무는 남서쪽 블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름 성채의 상류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구역이었다. 그리고 그 구역을 채우고 있는 건물들 중 백화점을 향해 직행했다.
유리나 콘크리트로 씌워진 대부분의 건물들과 달리, 백화점은 외관부터가 고색창연한 개화기 시기의 양식을 갖고 있었다.
다른 것은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플라스틱 박스에 옷이 대충대충 널려있는 시장과 달리, 백화점 안의 매장에는 쇼윈도가 있었고 마네킹까지 진열되어 있었다. 꽤나 구색을 갖춘 모습이었다.
몇 개의 매장을 지나친 해무는 여성복 코너가 나타나자, 쇼윈도를 슬쩍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들이 입는 옷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점원이 고개를 숙이며 해무를 맞이했다. 그러다 옆에서 따라 들어오는 셴을 보고는 순간 당황해서 굳어섰다. 셴의 옷차림은 거만하고 콧대높은 성채의상류층들과 섞이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하지만 점원은 셴의 보호자로 보이는 해무의 모습을 다시한번 슬쩍 확인하고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백화점의 점원들이란 상대의 외견을 훑어보고 재력이나 지위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법이었다.
해무는 매장 안의 푹신한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셴에게 사줄 옷을 직접 골라주는 대신, 점원에게 주문했다.
"쟤한테 맞는걸 꺼내줘."
그 말에 점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꺼내온 옷은 트렌치 코트였다. 점원들은 셴의 낡은 옷을 벗기고, 검은색 셔츠와 짙은 갈색의 트렌치 코트를 입혀 해무의 앞에 대령했다.
그 모습을 본 해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옷 자체는 괜찮았지만, 자그마한 셴에게는 너무 커서 마치 자루를 뒤집어 쓴 것 같았다.
"다른거."
두 번째로 내온 것은 치파오였다. 하얀색 치파오는 매장의 조명 아래서 고급스러운 광택을 흘리고 있었다. 벌어진 앞섶의 트임 사이로는 셴의 납작한 가슴이 비치고 있었다.
"에......."
그렇게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리며, 셴이 허전한 자신의 가슴팍을 꾸욱꾸욱 눌렀다. 그럴 때마다 불룩 튀어나온 옷이 안으로 푹푹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해무는 황당한 기분을감출 수 없었다.
"진심으로 저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다른거."
점원들이 셴을 순식간에 세 번째 옷으로 갈아입혔다. 푸른 색의 원피스였다. 마치 수국의 빛깔과 같은 옷은 셴에게 잘 어울렸다. 조용하고 침착한 그녀의 이미지와도 잘 맞았다.
해무의 눈에도 나쁘지 않은 선택처럼 보였다. 곧바로 그 옷으로 달라고 하려 했지만, 이내 한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셴은 곧 있으면 성채를 탈출하게 될 것이다. 그 여정이 얼마나 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경의 감시원들에게 발각되지 않으려면 눈에 띄는 옷은 피해야 할 것이다.
"혹시 같은 디자인에 검은 색은 없나?"
해무의 말에 점원이 검은색 옷을 꺼내왔다. 네 번째로 옷을 갈아입는 셴이, 머리부터 원피스가 뒤집어 씌여진 채 우...... 하는 불만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해무는 검은색으로 완전히갈아입은 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막상 입혀놓고 나자, 검은색 원피스는 마치 장례식에 입는 상복 같았다. 해무 자신이 입고 있는 검은 양복과 마찬가지로.
해무는 불온한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냈다.
"그걸로 하지. 벗어둔 옷은ㅡ 포장해 줘."
버려 달라고 말하려던 해무는 급히 말을 바꾸었다. 비록 낡고헤진 옷이지만 과거의 추억이 남아있는 물건일지도 모른다. 버리는건 알아서 결정하게 하자.
쇼핑백을 들고 매장을 나온 해무는 이후로도 양말이나 속옷, 그리고 새 신발 따위를 잔뜩 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해무가 물건을 집어들고 보여줄 때마다, 셴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선물의 대부분은 셴에게 뭔가를 해줬다는 해무의 자기 만족을 채우는 용도였다.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듯, 셴의 얼굴에는 선물을 받은 기쁨 대신 점원들에게 시달린 피곤함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꽤 많은 것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또 무엇을 사줘야 할까 고민하던 해무의 시선이 보석점의 장식장에 전시되어 있는 반지와 목걸이를 향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떠올렸다. 셴에게 줄 것이 있다는 사실을.
해무는 자켓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목걸이를 꺼냈다. 가느다란 사슬에 십자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
호두의 유품이었다.
모양은 자신이 갖고있는 것과 흡사했다. 호두도 성당을 위해서 일했으니, 아마 같은 물건일 것이다. 해무는 그것을 조심스레 셴의 목에 걸어주었다.
"오......"
셴이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며, 작은 손으로 십자가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해무는 생각했다.
과연 셴은 알까. 이것이 호두의 유품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호두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 모를 것이다. 자신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셴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해무는 그 사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셴의 눈. 그 눈은 마치 깊은 호수처럼 조용했다. 그리고 마치 알리지 않은 진실 - 호두의 죽음 - 에 대해서 자신은 이미 전부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자신을 조용히 책망하는 듯한 그 눈빛에, 해무는 견디지 못하고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호두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노력하면서.
ㅇ ㅇ ㅇ
백화점의 최고층, 하늘정원.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가을 바람이 해무와 셴을 휘감았다. 무거운 백화점 안의 공기에서 해방된 해무는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정원 한쪽의 자리에 이리나가 앉아서 둘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무는 셴과 함께 그 맞은편에 앉았다.
"우선 검사 결과부터."
이리나는 서론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검사 결과?"
"그 아이의 정밀 검사를 의뢰했잖아?"
이리나가 턱짓으로 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서야 해무는 자신이 부탁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셴이 에이시스 환자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정밀 검사를 요청했었다.
"예상보다 결과를 빨리 받았어. 그랬는데......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야. 이 아이는 에이시스 환자가 아니야."
이리나의 말에도 해무는 놀라지 않았다.
만약 셴이 에이시스 환자였다면, 그렇게 중요한 사실은 필연적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구룡방주의 사생아가 남자아이였고, 에이시스에 걸려 여자가 되었다면 그 또한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고, 때문에 해무는 셴이 에이시스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던 참이었다.
"실망스러운 소식 아니야?"
"조금은. 환자를 통해서 치료제를 찾을 실마리를 얻을거라 기대했으니까."
"그랬겠지. 하지만 대신 이걸 찾았어."
그렇게 말하며 이리나가 주머니에서 꺼내든 것은 작은 앰플이었다. 해무는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들었다.에이시스 바이러스를 담고 있던 파란색 앰플과 달리, 치료제는 연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이걸 주사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거야?"
"아니."
이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샘플이야. 희석된 물건이지. 효과는 없어."
이리나의 말대로, 샘플에 붙어있는 라벨에는 식염수로 50배 희석된 주사제라는 설명 쓰여 있었다. 그 소식에 해무는 내심 실망했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대로 된 치료제는 없는 건가?"
"이 샘플, 정밀검사를 의뢰한 중국 쪽으로부터 받은거야. 놈들도 물건이 없어서 샘플부터 받았지."
티 스푼으로 밀크티를 천천히 저으며 이리나가 말했다.
"지금은중국에서 본품을 확보한 상태야. 다만 샘플과 달리 본품은 쉽게 들여올 수 없다는게 문제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구룡방이 이 물건에 대해서 수입제한조치를 두고 있어."
해무는 처음으로 에이시스 주사제를 목격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선반을 채우고 있던 푸른색 앰플들. 그 많은 물건들을 구룡방은 조용히 자신의 손 안에 넣었다. 구룡방이 하는 대부분의 일이 그렇지만, 뭔가 구린 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치료제의 수입제한조치를 두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의혹을 해결하는건 지금 할 일이 아니었다. 우선은 치료제를 확보하는게 급선무다.
"물건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밀수해야지."
이리나가 간단하게 답했다.
"업자들이 들어오는 일정은 받아뒀어. 3일 뒤야."
3일 뒤. 그 말에 해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성당의 아이들을 탈출시키는 날과 같은 날짜였다.
"왜 하필 그 때야?"
"그날이 대규모 무역허가ㅡ"
"무역 허가일이라 이말이지. 빌어먹을."
해무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말했다. 성당의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날. 그리고 이리나가 밀매상을 통해 치료제를 밀수하는 날. 그 날이 겹치는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업자들은 지금까지 나한테 의료용품을 공급해오던 자들이야. 지금까지도 별 문제 없었으니까 믿을만 할 거야."
"장소는?"
"여의나루 역."
여의나루 역에는 중국의 마포역으로 이어지는 지하터널이 있다. 예전에 그곳을 지나던 지하철의 운영은 당연히 중단되어 있는 상태였다. 철로 또한 관리가 되지 않아 군데군데 유실된 채였다. 하지만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역할은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물론 공안들은 모든 국경을 통제하고 있었고, 때문에 보통이라면 그 터널을 드나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몇몇 밀수업자들은 자신과 커넥션이 있는 공안들에게 뇌물을 주고 물건을 들여올 수 있었다. 이리나가 거래하는 업자 또한 그럴 것이 분명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내가 직접 받으러 갈 수는 없어."
"그렇겠지."
이리나의 말에 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나는 평범한 의사에 불과하다. 그런 그녀가 밀수 현장에 가서 직접 물건을 받아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약을 가져오기는 커녕,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이 확실한 선택이었다.
"3일 뒤, 여의나루 역이야. 명심해."
그렇게 말하고, 이리나는 먼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리나가 완전히 떠나고 나서도 해무는 한참 동안을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서는 셴이 이리나가 남기고 간 밀크티를 맛보고는 오, 하고 감탄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테레사의 계획을 돕지 않기로 한 것. 그것은 갑종살수로서의 입장도 있었지만, 에이시스 치료제를 찾기 위함도 있었다. 어디서 새로운 실마리를 찾아야할지 막막한 참이었는데, 이리나가 예상치 못하게 실마리를 물어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테레사를 돕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겹친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장소는 비슷하다. 치료제를 입수할 장소는 여의나루였고, 성당의 아이들은 여의도 북쪽의 모처를 통해 이동할 터였다. 그렇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일정이 조금 빡빡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실에 해무는 고민했다. 손으로는 목걸이의 십자가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리고 셴이 홀짝이던 밀크티 잔을 전부 비웠을 때 쯤, 그제서야 결론을 내리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