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창관의 성모 (29)
천연두. 저주받은 병마(病魔). 동시에 인간이 처음으로 정복했던 전염병.
하지만 정복이라는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전부 인간이 가진 한순간의 오만이었다.
갑작스레 발발한 중-한 전쟁으로 인해 대륙은 혼란에 휩싸였다.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폭동은 도시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각국의 연구소에 보관되어있던 바이러스는 외부로 유출되었다. 그리고 수십년 만에 다시 자유를 되찾은 바이러스는 이전보다도 더더욱 격렬하게 활개치고 있었다.
누쿠로는 그것을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했다.
번식하고 확산하기위해 존재하는 바이러스들. 그것을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는 누쿠로에게예상 밖의 영향을 끼쳤다.
뒷골목의 길거리에서 태어난 누쿠로의 몸은 어릴 때부터 허약했다. 하루하루 죽음의 위협을 느껴야 할 정도였다. 때문에 그가 천연두에 걸렸을 때, 가족들은 이번에는 분명 죽을 것이라며 그를 버리고 떠났다.
하지만 누쿠로는 죽지 않았다. 고열과 수포에 시달리면서도 누쿠로의 숨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처음 걸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천연두의 증상은 갑자기 사라졌다.
병마가 지나간 온몸에는 마치 화상 자국 같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천연두와의 사투에서 살아남은몸은 이전까지와는 달리 강해져 있었다. 평범한 인간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떻게 허약했던 그가 천연두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로 인해 강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
그것이 누구의 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누쿠로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걸맞는 말이었다. 누쿠로는 자신을 휩쓸고 간 병마와, 이상할 정도로 강해진 몸이 필연적인 관계로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모든 일은 필연적이니까.
그리고 이번 일 또한, 필연적인 결론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강공원 한가운데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검은 사신과 같았다.
"보스."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말했다.
"놈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말에 누쿠로는 눈을 뜨고 바람의 방향을 읽었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매연과 비릿한 강물 냄새가 섞여들어 있었다.
"자네들은 자리를 지키도록 하게. 나는 여기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누쿠로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누쿠로가 배치한 부하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여의도의 한강공원을 따라 배치된 감시망. 그 촘촘한 그물을 피해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감시망을 눈치채고 움직인다 하더라도 결국 당도하는곳은 이곳, 누쿠로가 직접 기다리고 있는 장소였다.
마치 거미줄에 휘감긴 벌레처럼, 그리고 벗어나려 할수록 더더욱 깊숙이 파고드는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오늘의 사냥감 또한 자연스레 이곳으로 도착하게 될 것이다.
누쿠로는 다시 눈을 감은 채 기다렸다. 차가운 강바람이 잔디밭을 쓸어넘기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초가을의 풀 벌레 소리, 밤 이슬이 풀잎을 따라 굴러떨어지는 소리마저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아주 희미한 소리. 그것을 눈치챈 누쿠로가 입을 열었다.
"이런, 내 예측이 틀린 모양이군."
짐짓 실망한 어투였다. 그렇게 말하며 누쿠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참 아쉬운 일이야. 그대는 내 관심사가 아니거든."
눈을 뜬 누쿠로의 앞에는 해무가 서 있었다. 해무는 무감정한 얼굴로 누쿠로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럼 대체 뭘 기대했지?"
"그야, 구룡방에 반기를 들고 사람들을 외부로 내보내려 하는 무도한 세력들이지."
"그렇다면 잘 됐군. 서로 볼일 없으니, 이만 나는 지나가지."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네. 이미 자네가 반란 세력에게 협조했다는정황을 입수했거든."
누쿠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겠지.
해무의 예상대로였다. 어차피 지금 상황을 편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설령 아무런 마찰 없이 지나갈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녀석을 놔둬봤자 카밀라를 방해하러 갈 뿐이다. 게다가 이 녀석을 지금 이 자리에서 제거하지 못하면, 치료제를 챙긴다 하더라도 구룡방의 전방위적 추적을 당하게 된다.
피차 서로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해무는 누쿠로를 응시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총을 꺼내들지는 못했다. 이곳은 탁 트인 공원 한가운데. 짙은 어둠 속이었지만, 총을 쓰게 된다면 이곳에 퍼져있을 놈의 부하들이 모여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해무와 누쿠로는 서로를 마주했다. 축축한 강바람이 둘을 휘감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해무 쪽이었다.
날카로운 선공. 갑작스레 달려든 해무의 주먹이 누쿠로의 턱을 노리고 쇄도했다. 그 공격은 누쿠로의 팔뚝에 막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공격에 누쿠로는 잔디 위를 주욱 밀려났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사방으로 튀며 새하얀 안개를 피워올렸다.
"약해졌군."
누쿠로가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 반응에 해무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약해졌다는 것.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흔한 을종들을 상대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아무리 육체가 약해졌다 하더라도, 몸에는 지금까지 익힌 경험과 기술들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을종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격차를 만들었다.
하지만 상대가 갑종이라면 얘기는 달랐다. 갑종 대 갑종의 싸움에서는 사소한 차이만으로도 승부가 결정된다. 그 정도로 아슬아슬한 싸움일진대, 여자의 몸이라는 육체적 페널티가 결과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침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것은 지난번 페이 롱과의 싸움에서도 충분히 느꼈다. 혼자 싸운 것도 아니고, 남한의 요원과 함께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열세는 명확했다. 이대로라면 갑종으로 버티는 것도 곧 한계가 찾아올 것이다. 치료제를 확보해야만 하는 이유들 중 하나였다.
해무의 공격을 막아낸 팔을 털어내며 누쿠로가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다. 한없이 편안한 발걸음이었지만 해무에게는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둘 사이의 간격이 좁아들자, 두 번째 접전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선공을 차지한 것은 해무였다.
하지만 이번의 공방은 짧았다.
해무의 선공을 받아낸 누쿠로의 반격이 이어졌다.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빠르게 이어지는 주먹을 해무는 계속해서 쳐냈다. 하지만 그 속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가.
그런 차이가 주먹이 오가며 계속해서 쌓이자, 둘 사이의 속도는 유효한 공격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틈을 노리고 파고든 누쿠로의 주먹이, 마침내 해무의 옆구리에 직격했다.
얇은 근육과 갈비뼈. 그리고 그 아래의 폐까지 충격이 관통했다. 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한 공기가 해무의 입술 사이로 터져나왔다.
젖어서 미끄러운 잔디 위를 해무는 미끄러지며 한참을 굴렀다. 주변으로 일제히 벌레들이 튀어올랐다. 그 짧은 틈을 누쿠로는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거리를 좁혀온 누쿠로의 발차기가 코앞으로 날아왔다. 해무는 재빨리 양 팔을 교차해 방어했다.
우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뼈가 부러지는 통증에 해무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공격이 팔이 아닌 가슴에 꽂혔다면 분명 즉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몇 차례를 굴러 거리를 벌린 해무는 몸을 일으키며 숨을 헐떡였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는 데미지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거기에 방금 입은 타격이 방점을 찍었다. 반면 누쿠로의 데미지는 전무했다. 그것만으로도 결과의 상당 부분이 결정된 셈이었다.
하지만 불리한 점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해무에게는 시간이라는 또다른 적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싸움의 결과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목적과는 멀어진다. 그 사실에 해무는 초조함을 느꼈다.
해무는 누쿠로의 어깨너머를 슬쩍 확인했다. 여의나루역으로 입구의 희미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가려는 건가. 그 쪽에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누쿠로가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긴 어딜 가. 네놈을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여길 떠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말했지만 해무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패배하고, 치료제를 손에 넣을 기회는 사라지게될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해무는 이를 악문 채 생각했다.
그리고 누쿠로가 결착을 짓기 위한 마지막 공방을 교환하려 다가오는 순간,
돌파구는 예상치 못하는 방향에서 다가왔다.
푸슛 하는, 파공음과 함께 누쿠로의 몸뚱이가 잔디 위를 굴렀다.
ㅇ ㅇ ㅇ
한강공원 가장자리의 풀숲. 그곳에 납작 엎드린 단하는 호흡을 멈추었다.
야간용 스코프는 없었다. 때문에 단하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직후, 스코프 안의 누쿠로가 쓰러졌다. 하지만 단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방금의 저격이 유효하지 못했다는 것을. 설령 빗나가지는 않았더라도, 놈을 죽이기 위해서는 아슬아슬하게 부족했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잔디 위를 구른 누쿠로는 단하가 두 번째로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일어나 몸을 숨겼다. 동시에, 주변의 어둠 속에서 일제히 움직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단하는 혀를 찼다.
방금 전의 저격으로 위치가 드러난 탓이었다. 소음기를 달았지만 드라구노프 저격소총이 내뿜는 소음은 조용한 새벽의 공원에서는 천둥처럼 컸다. 이윽고 누쿠로의 부하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가하필 한강공원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둔치를 따라 우거진 나무와 수풀 탓에, 강변의 아파트나 한때 학교로 쓰였던 건물에서는 저격을 위한 시야가 확보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저격 포인트만 차지할 수 있었더라도 일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단하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누쿠로를 제거하지 못하면 일이 피곤해진다.
스코프 안에서 보이는 해무는 일 초의 지체도 없었다. 누쿠로를 향한 저격이 벌어지자마자 곧바로 상황을 눈치채고 여의나루역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교전으로 절뚝이는 다리는 빠르지 못했다.그 뒤를 누쿠로가 바짝 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단하는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한발, 두발, 세발.
이어지는 저격이 아슬아슬하게 누쿠로의 발치를 따라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의 빠른 움직임 탓에 저격은 빗나갔지만, 결국 누쿠로는 해무를 쫓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단하가 누쿠로의 위치를 다시 포착하려는 순간, 누쿠로의 부하들이 도착했다. 단하는 재빨리 몸을 굴리며 총을 들어 발차기를 막아냈다. 그리고 숫자를 확인했다. 주변을 둘러싼 적들은 전부다섯 명. 일 초가 아까운 순간임을 고려한다면 적지 않은 숫자였다.
단하는 몸을 일으키며 이어지는 공격을 개머리판으로 쳐냈다. 누쿠로의 부하들답게 잘 훈련된 연계공격이었다. 하지만 갑종인 단하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하의 반격에 적들이 차례차례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번 쓰러진 적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상대마저 쓰러지자, 주변은 다시 침묵으로 잠들었다.
짧은 순간에 다섯 명을 쓰러뜨린 단하는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해무는 어떻게 됐지? 무사히 빠져나갔으려나?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도와야 한다. 해무가 이렇게까지 무리하면서 움직이는 목적이라면, 분명 치료제 때문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단하가 다시 움직이려 했을 때는, 이미 누쿠로가 눈앞에 당도한 후였다.
"이런, 단하. 예상치 못한 만남이로군."
누쿠로가 말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다는 내용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이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였다.
단하의 예상대로 저격은 누쿠로에게 유효한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양복의 어깻죽지를 따라서 피가 번져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 정도로는 누쿠로에게 충분한 기능 장애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도 구룡방에 반기를 들기로 결정한 건가? 저 아이보다는 사리분별이 잘 될거라 생각했는데."
"반기라니? 나는 업을 행하는 중이야."
"자네에게 주어진 업은 방주의 사생아를 쫓는 것이 아니었는가?"
그 말대로였다. 누쿠로의 업은 구룡방에 반기를 든 세력을 처분하는 것. 그리고 단하의 업은 구룡방주의 사생아를 확보하는 것. 카밀라가 셴을 데리고 있는 지금, 둘의 목표는 같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목표와는 멀리 떨어져있는 셈이었다.
"목표를 놓친건 나 혼자만이 아닌 것 같은데? 정작 당신도 이곳에 있지 않나."
업을 실패하게 될 당사자답지 않게 단하가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 그 말에 누쿠로는 큭큭 하고 웃음을 흘렸다.
"글쎄...... 어떨른지."
무언가 속내를 숨긴 듯한 말. 하지만 누쿠로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단하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제안을 하나 하지. 지금이라도 자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겠다면, 지금까지의 일은 전부 눈감아 주도록 하겠네."
"나도 하나 제안해 볼까? 저 녀석은 가게 두고, 너는 나에게 죽는거야. 그리고 모든 업은 내가 차지하는 거지. 어때?"
명백히 수용할 수 없는 제안. 그 말에 누쿠로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누쿠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즐겁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자네의 제사를 치뤄주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