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창관의 성모 (32)
해무는 다리를 절뚝이며 여의나루 역으로 향했다. 누쿠로는 자신을 더이상 쫓지 않았다. 분명 단하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리라.
얼마 전 관계가 틀어졌던 파트너의 난입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움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단하가 만들어준 틈을 타 치료제를 확보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공원을 지나 역으로 달리던 중,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성채 중심부 쪽에서의 폭발. 단숨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성당의 부비트랩이 폭발한 것이었다.
해무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아직 두 시 삼십분. 예정된 시점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테레사는 벌써 부비트랩을 작동시킨 것이다.
순간의 망설임.
하지만 그 끝에 해무는 움직이던 방향을 향해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테레사는 괜찮을 것이다. 분명 그럴 거다.
설령 무슨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이제 목적지가 지척이었다. 여의나루역에서 최대한 빨리 치료제를 받고 바로 돌아가면 테레사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해무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치료제만 손에 넣으면 자신을 둘러싼 엿 같은 상황이 전부 해결될 거라고, 그렇게 근거 없는 믿음을 맹신하면서.
그리고 도착한 여의나루역 입구에서, 해무는 창백한 형광등이 비추는 지하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내려갔다.
ㅇ ㅇ ㅇ
카밀라는 달렸다. 성당이 불타고 있는 모습이 점점 가까워져왔다. 그럴수록 뜨거운 열기와 타는 냄새도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성당에 도착한 카밀라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무너진 벽을 발견하고 몸을 붙였다. 안쪽에서는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부산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내밀자, 공안들이 성당을 수색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카밀라는 다시 벽 뒤에 몸을 숨기고 생각했다. 안에는 분명 테레사 수녀님과 아이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벌써 들키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무너진 벽 틈 사이로 들어간 카밀라는 고아원 쪽을 향해 조심스레 움직였다. 공안들은 예배당의 정문을 통해 진입했을 것이다. 만약 테레사 수녀님과 아이들이 아직 안쪽에 있다면, 그것은 성당의 가장 깊숙한 곳인 고아원 쪽일 것이 분명했다.
고아원을 목표로 삼고 움직이던 카밀라는 다시 모퉁이 뒤에 몸을 숨겼다. 공안들의 수색이 점점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카밀라는 빠져나갈 틈을 노렸지만, 공안들의 수색망은 촘촘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조여오고 있었다.
입술을 깨문 채 고민하던 카밀라는 결국 먼저 움직였다. 모퉁이 근처에 서 있던 공안의 옷깃을 움켜쥐고 목을 꺾자,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절명했다.
"저쪽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동시에 근처에 있던 공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공안들은 총을 난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많은 숫자를 무기로 앞세우며 카밀라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카밀라는 허벅지의 밴드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것으로 몇몇 공안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적들은 여전히 많았다. 자그마한 자동권총의 탄창으로 상대하기에는 불가능한 숫자였다. 결국 싸움은 백병전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카밀라의 주먹에 가슴팍을 맞은 공안이 컥 하는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가슴뼈가 부러지는 메마른 소리도 함께였다. 뒤이은 주먹과 발차기에 몇 명의 공안들이 나가떨어졌다. 대부분은 팔이나 다리에 복합 골절을 일으켜, 피부 밖으로 날카로운뼈가 튀어나온 채였다. 그 모습에 공안들은 주춤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자신을 둘러싼 공안들을 바라보며 카밀라는 숨을 헐떡였다. 수준급의 무력을 보유한 카밀라에게 일개 공안은 하찮은 상대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대일 전투에서의 경우였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좁은 복도에서 많은 숫자의 공안들을 상대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들어오는 공격이 이어지자, 결국 카밀라는 공안이 휘두른 곤봉에 맞고 입에서 피를 쏟았다.
이제 상대와 거리를 벌리는것은 카밀라 쪽이었다. 공안들과 대치한 카밀라는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함이 더해져갔다.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여유는 없다. 한시라도 빨리 테레사 수녀님을 만나 함께 탈출해야 했다.
하지만 공안들은 그녀를 놔 줄 생각이 없었다. 도망치려는 카밀라를 끈질기게 포위하며 따라붙기를 몇 차례, 계속된 시도에도 카밀라는 공안의 포위망을 뚫어내지 못했다.
결국 카밀라와 공안들 사이의 접전이 다시 이어지려는 순간,
"그만."
들려온 목소리에 공안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팔다리가 부러져 절뚝거리는 와중에도 공안들은 포위망을 풀고 도열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해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연과 대치한 카밀라는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쓰레기 자식. 네놈을 어렸을 때 죽였어야 하는건데."
"후회스럽겠군."
해연이 짤막하게 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카밀라는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지?
눈 앞에는 공안청의 부총장이. 양 옆으로는 수많은 공안들이.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 포위망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짧은 고민 끝에 카밀라가 물었다.
"테레사 수녀님은 어디에 있지?"
하지만 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감정한 시선으로 카밀라를 마주할 뿐이었다.
"말해! 테레사 수녀님은, 아이들은 전부 어떻게 했냐고!"
카밀라의 고함이 회랑에 메아리쳤다.
길게 이어지던 잔향이 잦아들고 나서야, 해연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너만 처리하면 여기는 이제 끝난다."
너만 처리하면.
그 말에 카밀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늙은 수녀는...... 아이들을 구할 힘이 없었지. 그녀가 믿었던 신과 마찬가지로."
"죽여버리겠어, 개자식아!"
분노한 카밀라가 해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많은 공안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도, 성당이 불타고 있는 모습도, 지금 그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카밀라가 해연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아무런 계산 없이, 순수한 분노와 증오라는 감정으로 움직이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해연에게 그 공격은 닿지 못했다. 공안들이 지켜보는 한 가운데서, 해연은 여유롭게 카밀라의 공격을 받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밀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자신의 공격 하나하나가 전부 해연에게 읽히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인 상황으로 되돌아왔다.
빈틈을 파고든 해연의 손아귀가 카밀라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하는 신음이 카밀라의입에서 흘러나왔다. 카밀라는 발버둥치며 저항했지만 해연은 손을 풀지 않았다.
"나를 죽이겠다고?"
해연이 물었다. 카밀라의 저항으로 해연의 팔뚝에 손톱 자국이 하나둘씩 새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연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상처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카밀라의 목을 움켜쥔 손은 마치 강철처럼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생사여탈권은 강자가 약자를 향해 행사하는 것이다. 네놈은 나에게 이길 수 없다. 힘으로도, 그리고 권력으로도."
해연이 손에 한층 더 힘을 넣으며 말했다. 목을 잡힌 카밀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갔다.
"죽어..... 죽어 개새끼야!"
"아직도 모르는군. 우리가 지금 이곳에 돌입했다는게 무엇을 뜻하는지. 너희는 전부 끝났다."
긴박한 상황과는 정반대로, 해연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어쩌면 너희들이 구룡방에 반기를 든 그 처음 순간부터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던 걸지도 모르지."
이제 카밀라의 입에서는 더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고, 대신 컥컥거리는 신음만을 내뱉었다.동맥이 억눌린 탓에 실핏줄이 터진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입가를 따라서 새하얀 거품이 흘러나왔고, 저항하지 못하는 몸은 이제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바티칸은 더이상 너희들을 감싸주지 못한다. 네놈들의 반역 행태는 곧 밝혀질 것이다. 하나도 빠지지 않고 낱낱이."
발버둥치던 카밀라의 움직임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치켜뜨고 있던 눈도 점점 초점을 잃고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런 카밀라의 모습을 바라보며 해연이 조용히 읊조렸다.
"이 일에 연관된 모든 자들 또한, 오늘부로 성채에서 그 존재가 지워질 것이다.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ㅇ ㅇ ㅇ
창관의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공안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창관을 헤집었다. 그 우악스런 손길에 한창 정사를 치르던 손님들도 놀라서, 황급히 방을 뛰쳐나가 알몸으로 복도를 내달렸다.
"마담, 이게 대체 무슨일이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창관 홍련의 포주가 물었다. 땀에 젖은 채 숨을 헐떡이는 그의 얼굴에는 혼란과 두려움이 짙게 배어있었다. 하지만 마담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길다란 담뱃대를 물고 연기를 빨아들일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포주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바로 옆에서 발사된 총알에 머리통이 뚫린 포주는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마담은 담배를 태우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흥분해서 침을 튀기며 소리치던 포주는 이제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바닥에 피웅덩이를 그리고 있었다.
그 시체를 넘어, 한 무리의 공안들이 창관 야화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공안들은 흙발로 이곳저곳을 헤집기 시작했다. 서랍이 열리며 서류더미가 휘날렸고, 옷장의 문이 뜯겨나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체의 제지 없이, 마담은 말없이 담배를 피우며 사태를 관망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공안이 마담의 앞에 섰다.
철컥, 하고 허리띠에서 총을 꺼내드는 소리. 이윽고 마담의 머리에 차가운 총구가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역시, 성채에는 믿을 놈 하나 없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담은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지워지고 있었다.
ㅇ ㅇ ㅇ
뱃사공은 계속해서 노를 저었다. 배는 찰박, 찰박 하는 물소리와 함께 앞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 그들은 원효대교의 중앙 지점을 지나 북단에 다다르고 있었다. 경계를 고려한다면 중국의 영토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장소였다. 적어도 성채의 공안들이 더이상 쫓아올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방해없이 수면 위를 조용히 나아가던 배는, 순간 한 차례 가볍게 출렁였다. 하지만 뱃사공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나도 고요한 출렁임이었기에, 이변을 깨닫지 못한 채로 노를 젓는데 집중할 뿐이었다.
"안녕하신가, 뱃사공."
짙은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부릅뜬 뱃사공이 품에서 잽싸게 총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상대 쪽이 한층 더 빨랐다.
"두려워 마시게, 카론이여."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낸, 칠흑같이 검은 정장을 걸친 노인이 총을 움켜쥔 채 말했다. 빗어넘긴 새하얀 머리칼과 단정한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노인이었다.
"내 이름은 안드레이 이바노프. 그냥 노인일세.그럼 이만, 잘 가게."
뱃사공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안드레이의 손에 우두둑 하고 목이 꺾여 털썩 쓰러졌다.
그렇게 뱃사공을 제거한 안드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서 있는 뱃머리의 반대편. 그곳에 아이들이 겁을 먹은 채 모여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자그마한 얼굴들이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들 앞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셴이었다.
셴은 다른 아이들처럼 겁먹지도 않고, 몸을 떨지도 않은채 조용한 시선으로 노인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모습을 안드레이는 이채를 띈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안드레이는 허리를 숙여, 이제는 더이상움직이지 않는 뱃사공의 손에서 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소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셴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담담한 얼굴로 노인을 마주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안드레이는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에 바닥을 향해 총구를 옮기고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나룻배의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안드레이는 처음 배에 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없이 원효대교 위쪽으로 뛰어오르며모습을 감췄다.
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속박에서 풀려난 듯 상황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눈물을 터뜨리고, 또누군가는 테레사 수녀님의 이름을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셴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을 한 채서 있었다.
배는 점점 느려지며, 동시에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검은색 에나멜 구두가 차가운 물에 젖어들었다. 해무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강하고, 동시에 깨질듯한 유리처럼 투명한 사람.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움을 준 사람.
그러한 해무의 모습을 떠올리며, 셴은 자신의 목에 걸린 십자가를 손 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셴은 눈을 감았다. 이제 배는 거의 가라앉아 있었고, 아이들의 우는 소리도 하나둘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은 셴의 구두와 치맛자락을 넘어서 목덜미까지 삼키고 있었다.
"오......"
그리고 얼마 뒤, 배는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았고, 아이들의 기척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내 수면 위에는 작은 거품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ㅇ ㅇ ㅇ
해무는 여의나루역 아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는 이미 멈춘지 오래였다. 계단을 걸어내려갈 때마다 텅 빈 공간에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메아리쳤고, 그럴 때마다 부러진 팔이 욱씬거렸다.
역 안에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푸르스름한 불빛을 밝히고 있는 형광등이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마포로 이어지는 터널이 있는 곳은 지하 5층. 지상으로부터 40미터도 더 아래에 위치하는, 한반도에서 가장 깊은 지하철 역 중 하나였다.
지하를 향해 내려가며 해무는 흥분으로 떨려오는 호흡과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저 아래, 치료제가 있다. 중국에서 온 밀매상들. 그들에게 물건만 넘겨받으면, 드디어 원래 몸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 좆같은 몸 때문에 더러운 꼴을당하는건 끝이다. 지난 시간동안 자신을 지독하게도 괴롭혔던 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성당을 외면했다는 죄책감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쓸어내리며 해무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다 잘 되고 있다. 불안할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내이면서도 불안감은 지워지지 않았고, 아래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마치 깊은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텅 빈 지하철역을가득 채운, 목을 조르는 듯한 침묵에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해무는 다른 생각으로 정신을 돌렸다.
생각해보면 개같은 일도 많이 겪었다. 다른 살수와 공안들의 조롱과 경멸어린 시선은 일상이었다. 주제를 모르는 개새끼들은 여자의 몸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얕잡아보고 덤벼들었다.
살수회합에서 다른 갑종들이 보이던 반응 또한 굴욕적이었다.
갑종들은 명목상으로 조직 내에서 같은 위계를 지닌다. 하지만 그들은 명백히 깔아보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몸으로는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기에 더더욱 굴욕적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강간까지 당했다.
여자를 강제로 범한 경험은 충분히 있었다. 때문에 강간의 즐거움이 어떤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당하는 것은엿 같은 기분이었다. 만약 가능했다면 기억속에서 지워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은 그렇게 편리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피를 많이 흘리고 미약까지 주사당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근본도 알 수 없는 길거리의 쓰레기에게 자신이 범해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머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전부 갑종살수라는 직함을 얻은 이후로는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더러운 경험들. 하지만 남자의 몸을 되찾고 나면 그런 일은 더이상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잠시 즐거운 기분마저 들었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우선, 자신을 무시했던 놈들에게 전부 되갚아 줄 것이다. 공안이나 을종 놈들은 물론이고, 다른 갑종들에게도 하나도 빠짐없이 그 얼굴을 발로 짓밟아 자신이 느꼈던 굴욕감을 그대로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갑종 살수로서 자신의 능력을 구룡방에게 다시한번 증명해보일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 누구도 더이상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달콤한 상상에 빠진 채 해무는 지하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다. 밀매상들이 드나들며 밀수품을 거래하는 곳. 그리고 자신을 여자의 육체에서 벗어나게 해 줄 치료제를 손에 넣을 곳.
마침내 그 장소에 도착한 해무는,
"구룡방 살수회 갑종살수 해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멍한 얼굴로 굳어섰다.
여의나루역의 끝자락. 그곳에 치료제를 거래하러 온 밀매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살수회의 참모장인 네르귀 다난과 자신의 담당관리인 타오 슌이 을종 살수들과 함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수회의 명령서를 손에 쥔 네르귀 다난이 말했다.
"그대의 혐의 다음과 같다.
하나, 살수회 갑종살수 누쿠로에게 주어진 업을 고의로 훼방한 것.
둘, 공안청의 공안을 참살하여 구룡방 내 분란을 조장한 것.
셋, 무도한 반란 세력과 내통하여 여자와 아이들을 성채 밖으로 내보내는 계획을 도모한 것."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의문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입 안에서 맴돌았다.
해무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나타난 살수들이 탈출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수많은 살수들은 어느새 개미 하나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에 그대를 구룡방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체포한다."
뭔가 잘못됐다. 이럴 수는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해무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어느새 마음속의 중얼거림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대는 구룡방의 재판에 회부될 것이며, 그때까지 감옥에 억류하도록 한다."
그렇게 참모장의 선고가 떨어지는 것을 뒤이어,
해무의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지하철역의 한가운데에 길게 메아리쳤다.
창관의 성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