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회색의 단하 (2) (75/82)



〈 75화 〉회색의 단하 (2)

이리나는 청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노파의 가슴팍에서는 여러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 박동 소리. 거품낀 침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산소를 빨아들인 폐가 느릿하게 팽창했다가 수축하기를 반복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증상은 얼마나 됐어요?"

청진기를 끌러내며 이리나가 물었다.

"글쎄.....  삼일 쯤 되었나. 이 나이가 되면 기억이 깜빡깜빡 해서......"

노파가 자신감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 내용을 들으며 이리나는 생각했다.


단순한 감기 증상이다. 날씨가 갑작스레 쌀쌀해진 탓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노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조금만 방치했다가는 금세 폐렴으로도 발전할  있었다. 특히 의료 환경이 열악한 성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지금 시점에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리나는 진료 내용을 차트에 하나하나 기록했다.


 때, 진료실의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나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리나의 얼굴에 짜증의 기색이 비쳤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방문자의 정체를 확인하자, 그녀 얼굴은 금세 창백하게 물들었다.

이리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노파도, 회색 양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당황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위해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천천히 해. 기다릴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단하는 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노파는 어쩔 줄 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이리나가 침착한 목소리로앉으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노파는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하지만 노파는 이제 더이상 진료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초라도 빨리 이곳에서 떠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리나는 초조함과 불안감을 머릿속에서 떨쳐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마저 남은 진료를 이어갔다.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일주일  약이에요. 식후 삼십 분 이내에 드세요. 증상이 나아지지 않으면 다음 주에 다시 찾아와요."


노파는 대답을 하는둥 마는둥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겨 떠났다. 그리고 진료실에는 단하와 이리나만이 남았다.


"아침부터 바쁘군."

단하가 말했다. 하지만 이리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묻고싶은거 없나? 예를 들면, 당신과 가깝지도 않은 내가 왜 갑자기 찾아왔는지."

여전히 이리나는 대답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단하는 대신 답했다.

"해무."


그 이름 하나를 꺼낸  만으로 무거운 침묵이 진료실 안을 짓눌렀다. 피도 폭력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리나는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정작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마치 목소리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단하는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겨 이리나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를 배신했지?"

"나는 아무것도ㅡ"


와장창,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상 위의 물건들이 바닥을 굴렀다. 이리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날카로운 소음이 귀를 찔러댔다.

물건을 전부 쓸어낸 단하는 자켓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총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어둡고 둔중한 빛을 발하는 쇳덩어리. 그것을 본 이리나의 시선이 떨리기 시작했다.

"왜? 하던 말 계속 해. 편하게."


단하의 차분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리나의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질식할 듯한 분위기 속에서 이리나는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누가 찾아왔었어."

"누가?"


"모르겠어. 살수인지, 아니면 구룡방의 관리인지....... 그가 말했어. 자신의 지시에 따르라고."


그리고 이리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진료실을 찾은 누군가가 해무와 잘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는 것.그리고 해무에게 치료제를 찾았다는 거짓말을 전하라고 시켰다는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을 죽이겠다 말했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어지는 내용을 묵묵히 듣고있던 단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배신했나? 죽는게 두려워서?"


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배어나온 피가 새하얀 앞니를 붉게 물들였다.


"너와 해무가 무슨 관계인지는 관심 없어. 네가 해무의 주치의건 정부(情婦)건, 내가  바는 아니지. 하지만 놈은 절박했고, 너를 신뢰했어. 그리고 너는 배신했지."


해무에 대한 배신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단하의 말에, 이리나는 눈에 띄게 불안정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비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시야에 담으며, 단하는 계속해서 말했다.


"설마 배신이라는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랐다고 변명하지는 않겠지?"

침묵이 다시 진료실 안을 채웠다. 이리나는 단하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발 끝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습을 바라보며 단하는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이제 시간이 얼마 없어."


이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해무가 치료제를찾겠다고 한지 벌써 두달 째.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 치료제가 유효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한 달 남짓. 그러나 지난 두 달간 찾지 못한 치료제를 한달 안에 찾을 수 있을거란 장담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갈수록 병을 치료할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치료제를 찾는데 전력을 쏟아야하는 상황. 하지만 단하는 치료제를 찾을 방법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동안 속에 품어왔던 다른 의문을 꺼냈다.

"네가 말하는 치료제라는게 진짜 있기는 한 건가?"


예상 밖의 질문에 이리나가 멈칫했다. 그런 이리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단하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의학에 대해서는 몰라.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고 있지. 물건을 부수는건 간단하지만, 원래대로 복구하는건 골치아픈 일이라는 것. 사람도 마찬가지야. 죽이는건 쉽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건 어렵지."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사실이었다. 오랜 기간동안 살수로 살아온 단하에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살리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무언가를 망가뜨리는 것은 쉬웠어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그 웃기지도 않는 병이 멀쩡한 사람을 여자로 바꿔놓는다는건 믿을 수 밖에 없겠지.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니까. 하지만 다시 남자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치료제가 있다는게 정말 사실일까? 나는 그게 의문이야. 치료제, 어쩌면 그것 자체가 달콤한 속임수나 함정이 아닐까...... 하고 말이지."

"치료제는 실존해."


단하의 이야기를 듣던 이리나가 망설임 끝에 말했다.


"에이시스는 애초에 성채에만 있는 병이 아니야. 과거 중국이나 소련에서도 오랫동안 연구해왔어. 덕분에 치료제가 개발될 수 있었던거고."


그리고 이리나는 에이시스의 치료제가 개발된 경과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에이시스라는 병이 어떻게 처음 발견됐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으로 퍼져나갔고, 어떤 과정을 거쳐 연구자들이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었는지를.

그러한 설명은 적어도 단숨에 지어낼  있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리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정도 납득한 단하는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있다고 치고. 치료제를 찾으면? 녀석에게 주사만 하면 치료가 되는건가?"


"치료제를 주사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힘든 과정을 거칠 거야. 신체의 변화 자체도 고통스러울 테고, 그 동안 계속해서 관리를 받아야 해."

"그게 꼭 너여야만 하는건 아니겠지. 다른 의사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렇지 않나?"


그 질문에 담긴 뜻을 이해한 이리나의 숨이  막혔다. 단하는 이리나의 얼굴을 주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뻣뻣하게 고개가 굳은 이리나의 시선이 책상 위의 총으로 향했다. 단하의 검지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진료실 한 가운데에서, 긴장한 이리나의심장이 격렬하게 박동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무나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은 아니야."


머릿속으로 대답을 정리한 이리나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치료제를 얼마나 주사해야 할 지, 그리고 이후 어떤 처치가 필요한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진료한 내용을 참고해야 할 거야. 이후의 경과에 따라 치료 방법이 바뀔 수도 있고."

"결국 네가 필요하다는 얘기로군."

단하의 말에 이리나는 딱딱하게 굳은 목을 움직여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좋아. 나도 한번 믿어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단하는 총을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제서야 이리나의 긴장이 일부 풀렸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단하는 진료실을  차례 둘러보았다. 좁은 진료실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선반에는 약품들이 늘어서 있었고, 구석에는 작은 침대가 하나, 책장에는 진료 기록이 적힌 차트가 한가득 꽂혀 있었다.

"담당하는 환자가 많군."

꺼낸 차트를 넘기며 단하가 말했다. 차트에는 그녀를 찾아온 환자들의 진료 내용이 꼼꼼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종잡을  없는 단하의 행동에 이리나는 침을 삼키며 그의 모습을 주시했다.

마치 문학 소설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트를 한장한장 음미하며 넘기던 단하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까 말했던 치료제, 찾아."


순간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이리나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네가 찾아와. 기한은 1주."

"하지만 치료제는ㅡ"

"너를 찾아온 놈이 뭐라고 협박했지? 너를 죽인다고 했나?"


탁 하고 차트를 덮은 단하가 이리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조금 다른 제안을 하지."


단하는 뚜벅, 뚜벅, 하고 발걸음을 옮겨 이리나를 향해 다가갔다. 이리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진료실은 좁았고, 이내 등받이가 책장에 부딪히며 멈춰섰다.

"여길 다녀간 네 환자들 전부 죽이겠어. 감기로 찾아온 사람. 약을 타러 온 사람. 죽을 뻔 했던걸 수술해서 간신히 살려낸 사람. 전부 죽이고, 그 다음에 여기도 불태우겠어. 네가 모은 약과 도구들, 진료 기록들. 가리지 않고 전부 다."

이리나의 눈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단하가 또박또박 말했다.

"그 잿더미 위에서 울건 아님 자살하건, 그건 네가 알아서 해. 그러기 싫으면, 찾아."

그렇게 말한 단하는 손에 들고 있던 차트 뭉치를 탁, 하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리나는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뻣뻣하게 굳어선 몸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1주야. 명심해."

이리나를 냉랭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단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몸을 돌려 그대로 진료실을 떠났다.

 하고 문이 닫혔다.

차트에서 빠져나온 종이가 허공에 휘날렸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던 이리나의 몸이 의자 위에 축 늘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온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이리나는 젖어서 뺨에 달라붙은 금발 몇 가닥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떼내어 뒤쪽으로 넘겼다. 볼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는 채였다.


잠시 후,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이리나는 천천히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이윽고 어깨가 들썩이며, 억누른 흐느낌이 흘러나와 진료실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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