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회색의 단하 (5)
단하는 용 모양의 작은 도자기 분수가 뽀글뽀글 물을 뿜어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용의 입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는 그릇을 채우고, 또 빨려들어가 다시 뿜어져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을까. 낡은 괘종시계가 텅, 하는 둔중한 종소리를 울렸다. 단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시계의 바늘은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회주의 비서가 단하에게 들어가라는 말을 전했다. 단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접견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회주의 접견실. 그곳에 있는 것은 회주 뿐만이 아니었다. 옆의 소파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허리를 곧게 편 채 앉아있었다.
단하의 눈에도 익숙한 상대.
안드레이였다.
"단하."
"안드레이."
그렇게 둘은 짧은 인사를 교환했다.
"중국에서의 단독임무는 끝났나봐?"
"그런 셈이지. 중국 오지에서 지내다가 성채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하군."
"잘 됐네."
단하는 건조한 감상을 표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더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세 명이나 있었음에도 방은 적막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못박혀 서서,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단하의 모습에 회주가 얼굴을 찌푸렸다.
"갑종살수 단하, 무슨 일로 본노를 찾아왔지?"
하지만회주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단하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안드레이가 말했다.
"내가 있으면 불편한가보군. 이만 가 보도록 하겠네."
후후, 하고 웃음을 흘리며 안드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안드레이가 떠나고 나자, 방 안에는 회주와 단하 둘만이 남았다.
"고(告)하라."
회주의 말에 단하는 그제서야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성당 사건의 사후 처리가 궁금해서 왔어."
"그걸 왜 관심갖는 거지? 네놈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상관이 없다니, 그 업에는 분명 나도참여했을텐데."
"참여라고......?"
단하의 대꾸에 회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는 네 업을 완수하지 못했다.방주의 사생아는 안드레이가 처리했고, 성당의 반란 세력은 누쿠로와 공안청이 담당했지. 그런데도 이제와서 뻔뻔스럽게 업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 얘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나?"
불쾌해하는 회주의 기세와는 달리, 단하는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
"내가 업을 달성하지 못한건 누쿠로 때문이야. 놈이 제멋대로 나를 막아선 탓이지."
일전의 업에서 누쿠로는 성당을, 단하는 회주의 사생아를 맡았다. 하지만 누쿠로의 행동은 성당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 자신에게 주어진 업의 범위를 넘어서, 단하가 업을 행하는걸 제지했다. 자신이 모든 업을 처리하고 공을 챙기려는 속셈에서였다.
때문에 단하는 업을 실패했다. 결과적으로는 회주가 비밀리에 보험으로 투입시킨 안드레이가 완수하기는 했지만.
"누쿠로는 욕심이 과했어. 본인의 업만 처리하면 될 것을, 내 업까지 넘보려 했지. 결국 실패한건 누쿠로의 일탈이 원인이야. 책임을 물으려면 내가 아니라 누쿠로에게 해야겠지."
단하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누쿠로가 자신을 막아섰다는 것도, 일탈을 저질렀다는 것도, 전부 거짓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단하는 진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고 누쿠로는 이미 구룡성채의 차가운 흙 속에 파묻힌 후였다. 그러니 진실을 밝힐 자는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 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내는 것은 회주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을 부라리며 한참 동안 단하를 노려보던 회주가 입을 열었다.
"네놈, 제멋대로 날뛰지 않는게 좋을거다. 누쿠로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게 내 책임이라는걸 증명할 방법이 있나?"
그렇게 대꾸하는 단하의 모습에, 회주는 콧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거두었다. 심증은 있으나, 업이 마무리된 상황에서 당장은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화제가 일단락되자 단하는 이어서 말했다.
"사실 나는 업의 성공 여부야 아무래도 좋아. 이번 업을 실패했다는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설령 갑종이 막아서더라도 갑종은 자신을 일을 해야하지. 그런데도 핑계를 대면서 뻔뻔하게 성공 판정을 내려달라고 요구할 생각은없어."
그리고 한 차례 숨을 가다듬은 단하는 이어서 말했다.
"내가 궁금한건 이거야. 해무, 그 녀석의 처분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
그 말에 회주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뒤늦게 꺼낸 해무에 대한 화제. 그것이 단하가 자신을 찾아온 본래의 목적임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궁금할 여지가 있는가? 놈은 반역자다.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는 네놈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신도 진짜로 믿는건 아니겠지. 녀석은 치료제를 찾으려 한 것 뿐이야."
"놈은 성당과 내통했다."
"그건 녀석이 성당 출신이라 그런거고."
그렇게 단하는 해무를 두둔했다. 지나치게 변호하려는 태도를 숨기고, 최대한 사실만을 전하려는 모습으로. 하지만 그런 시도는 회주에게 유효하지 않았다.
"애를 쓰는군."
회주의 말에 단하는 입을 다물었다. 불만스런 기분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반면, 회주의 단호한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구룡방 뿐만 아니라 살수회의 입장에서도 놈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중죄를 저질렀다. 그것도 하필 이 시점에 공안청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단하가 물었다.
"공안놈들 좀 죽인게 그렇게 큰 사건이야? 별 대수롭지 않은 일 같은데. 업을 행하다 공안들 몇을 죽이게 되는건 누구에게나 흔히 벌어지는 일이지."
단하의 대답에 회주의 얼굴이 꿈틀했다. 불쾌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짐작할 정도였다. 하지만 회주는 격노하는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안들 몇몇이 문제가 아니다. 네놈도 우리 살수회와 공안청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을 터."
물론 단하도 잘 알고 있었다. 살수회와 공안청. 구룡방의 가장 큰 무력단체로서, 견제하는 관계.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조직 단위에서만이 아니라, 살수회주와 공안청장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해무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 탓에, 회주의 분노는 사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단순히 공안들을 죽인걸 넘어서, 살수회의 갑종살수가 공공연히 반란 세력을 도왔다. 그로 인해 공안청 놈들에게 꼬투리를 잡히게 되는게 문제인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직접 놈을 참수하고 싶군."
"참수라니. 말이 심하네."
그렇게 볼멘 소리를 중얼거린 단하는 이어서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공안청과의 관계를 신경쓰는 거지?"
단하의 질문에 회주가 입을 다물었다.
단하는 회주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회주는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지만, 단하의 질문에 답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질문과는 관계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어차피 놈은 사형이다. 놈의 죄목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으리라."
"그거야 만들기 나름이겠지."
단하가 다리를 꼬아앉으며 말했다.
"살수회주나 되는 분께서 하고자 마음먹는다면 못 할 일이 있으실까? 당신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해무가 풀려나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뭔가 착각하는군. 본노가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걸 전부 꼭 해야만한다는 것은 아니다."
"갑종들이 많이 죽었어. 당신에게 있어서도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 말에 회주의 얼굴에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단하의 말대로였다. 지금의살수회는 유례없을 정도로 큰 전력의 부족을 겪고 있었다.
고작해야 두 달이 조금 안되는 기간동안, 살수회는 세 명의 갑종살수를 잃었다. 오조를 시작으로 페이 롱, 그리고 누쿠로까지. 비록 숫자는 적다 하더라도, 갑종살수가 살수회의 전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의 상황은 회주에게 있어서도 뼈아픈 타격이었다.
"당신 말대로, 살수회와 공안청은 관계가 그닥 좋지 않아. 그런데 보유한 전력마저도 밀린다면? 분명 당신의 입지도 줄어들 거야."
"갑종살수야 더 충원하면 그만이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걸 당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텐데. 해무는 뛰어난 살수야."
"허! 고작 그런 이유로 반역자를 살려내라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말했잖아? 가능한지 아닌지는 당신이 만들기 나름이라고."
단하의 말대로 회주의 권한이라면 충분히 해무를 살려낼 수 있었다.물론 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어느정도의 정치적 손실은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단하는 그 정도 손실이라면 충분히 감수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회주의 태도는 완고했다.
"불가! 놈은 이미 선을 넘었다. 설령 놈을 살려낼 필요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 건은 나의 손을 떠난 후다. 본 업과 관련된 사안들은 방주께서 직접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다."
"방주가ㅡ 직접?"
예상 밖의 내용에, 단하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구룡방주. 구룡방이라는 조직의 피라미드 제일 꼭대기에 위치하는 자.
한-중 전쟁이 휴전 상태에 들어가고 무법 지대가 된 여의도에서 처음으로 세력을 규합하고, 그러한 세력을 이끌어 빈 집이나 다름없던 이 땅을 차지했으며, 잔혹한 무력을 이용하여 구룡성채를 통치해왔고, 동시에 최근 몇 년간 일반 성채민들에게는 물론이고 간부진들에게도 일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은거중인 존재.
만약 그가 정말로 재판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정말로 커다란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런 방주가 왜 하필 이제와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지?"
"그럼 구룡방의 일개 판관 따위가 주관할까? 아님 공안청에서 주관할까. 이건 본노와 공안청장놈 사이의 일이다. 절대 하찮은 사안이 아니다."
해무에 대한 재판은 성당 사건과 관련된 논공행상의 일부였다. 공(功)이 있다면 과(過)가 있는 법. 성당 세력을 와해하고 방주의 사생아를 처리한 것이 공이라면, 갑종살수 해무가 저지른 일은 과에 속했다. 때문에 논공행상을 가르는 자리에서 해무의 처분에 관한 재판도 함께 진행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공안청도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리는걸 포기했다. 놈들도 부담스러운 게지. 제깟놈들이 감히 본좌의 살수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는게 말이야."
갑종살수.
그 이름이 지닌 무게감은 을종 살수들이나 구룡방의 다른 병력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단순히 무력의 차이 탓이 아니었다. 갑종살수를 선발하는 기준 때문이었다.
단독으로 구룡방의 요인을 암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
그것은 공식적인 기준은 아니었다. 애초에 살수회는 갑종살수 선발에 대한 기준을 대외적으로 드러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구룡방과 그 산하의 조직들이라면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갑종살수로 선정되기 위해서라면, 단독으로 구룡방의 요인을 암살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구룡방의 요인' 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은 명백했다. 1급 관리에 해당하는 부방주, 살수회주, 공안청장.
그리고 어쩌면ㅡ 구룡방주 마저도.
때문에 공안청은 갑종살수의 존재를 불편해 하면서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했다. 자신들이 갑종살수의 표적이 되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기에.
물론 이러한 상황으로 인한 반작용도 있었다.
대마불사. 커다란 돌은 쉽게 죽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과도하게 큰 존재감을 지닌 것들 또한 쉽게 스러지지 못하는 법이다.
일본은 지난 2차 대전에서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대형 전함을 건조했다. 야마토. 그것이 전함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전함이 실전에 참여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일본 해군의 최고 전력이라는 상징성을 지닌 전함이 혹여 피격당해 침몰하면 사기가 침체될 것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비슷한 상황은 구룡성채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성채 안에서 갑종살수는 2차대전의 전함에 비견될 만큼의 전력이었다. 때문에 살수회는 갑종살수라는 전력의 손실을 입는 상황을 최대한 피해왔다. 설령 위험도와 난이도가 높은 업을 맡길지언정, 그 수준을 넘어 목숨을 감수할 정도의 업에는 갑종살수를 투입하는 것을 꺼려온 것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갑종들의 죽음이 대부분 다른 갑종에 의한 것이었다는 과거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결국 갑종살수라는 존재는 허울뿐인, 어찌보면 정치적인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에 불과하다는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그 사실을 잠시 머릿속으로 곱씹던 단하가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방주가 주관한다는 재판. 그 재판에는 당연히 나도 함께겠지?"
"말도안 되는 소리!"
단하의 질문에 회주가 자르듯이 답했다.
"재판에는 나와 네르귀가 참석할 것이다. 네놈은 자격이 없다."
회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번의 재판은 각 조직의 총 책임자들이 모이는 자리다. 아무리 갑종살수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참석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단하도 그 사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재판에는 공안청 놈들도 오겠지. 공안총장은 물론이고, 부총장도 올 거야. 그 놈들을 호위할 공안들도 오겠고...... 그렇지 않나?"
회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단하가 지적한 내용은 그도 이미 생각해 본 후였다. 하지만 단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런 자리에 살수회주씩이나 되는 분께서 행차하시는데, 고작해야 을종들을 대동할 수는 없겠지. 자리의 격이라는게 있으니까. 그렇다면 회주께서는 누굴 데려가실 생각일까? 달마? 그는 아직 업이 끝나지 않았지. 안드레이를 데려가면 되겠지만, 그 하나만으로는 부족하겠고 말이야."
"설령 호위 병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네놈은 안 된다. 지금 본노의 앞에서도 건방지게 입을 놀리는 주제에, 그 자리에서 어떤 사고를 또 치려고?"
"정말로 해무를 쳐낼 심산이로군."
"그 질문에는 이미 몇 차례나 대답했다."
단하는 입을 다물었다. 예상대로였지만, 회주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주변 여건 또한 좋지 않았다. 무리해서라도 해무를 살려낼 만한 당위성이 부족한 것이었다.
결국 단하는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 해무가지금의 상황에 처한 이유가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라면?"
"본노의 갑종살수라면 사소한 함정 따위에 휘말려서는 안되는 법이다."
"그건 그렇지."
단하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단하의 말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스파이가 있어."
단하가 담담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회주의 얼굴이 일변했다.
"물론 스파이 놈들이야 언제나 있어왔지.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라. 당신도 알겠지만, 이 건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사건과 관계되어 있었지만 전면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리나를 협박한 자와, 성당의 밀고자, 그리고 그를 끌어들인 정체불명의 남자.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 명이었다. 아직 파악하지 못한 곳에는 얼마나 더 많은 비밀이 더 숨겨져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종합한 단하는, 이미 조직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후였다.
"혹시ㅡ 당신인가?"
방 안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
짐승같은 기세로 몸을 일으킨 회주가 단하의 얼굴을 콱 움켜쥐었다. 회주의 커다란 손이 단하의 얼굴을 으스러뜨릴듯이 부들부들 거렸다.
"나를 능멸하지 마라, 살수."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단하의 눈을 바라보며 회주가 말했다.
"본노가 갖고있는 관용에도 한계가 있다."
단하는 회주의 손길을 뿌리쳤다. 얼굴에는 붉은 손가락 자국이 남았다. 단하는 욱씬거리는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냈다.
그리고 잠시 후,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힌 단하가 물었다.
"스파이, 어떡할 거야?"
"......본노는 네놈에게 업을 내리지 않는다."
짧은 생각끝에 회주가 말했다. 긍정도, 부정도 담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단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그렇게 말하며 단하는 몸을 일으켰다.
"대신 재판에는 나를 꼭 데려가야 할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단하는 접견실을 떠났다.
혼자 남은 회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재판. 갑종살수. 구룡방주. 공안청장...... 그런 단어들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회주는 마침내 조용히 읊조렸다.
"스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