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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화 〉회색의 단하 (6) (79/82)



〈 79화 〉회색의 단하 (6)

단하는 생각에 잠긴 채 회주의 접견실을 나섰다.



회주가 보여주는 태도. 그 모습에는 뭔가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 몇년간 회주를 마주해왔던 단하는, 그 이상한 점의 정체가 무엇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의 회주는 공안청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신경쓰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회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공안청과의 마찰이 발생하더라도 회주는 결코 타협하지않았다. 설령 전쟁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정도로 회주는 자신의 권위와 정치적인 영향력을 깎아내리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사람이 갑자기 공안청의 눈치를 살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회주는 공안청의 동향에 민감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자신의 휘하에 있는 갑종살수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설마 회주가 스파이여서?

충분히 해볼 만한 의심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진상을 밝히기 위해 몸부림쳐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회주는 살수회의 최고 책임자였고, 어떤 증거라도 은폐할 권한과 능력이 있었으니까.


때문에 단하는 어설프게  보는 대신 정면 돌파를 택했다. 대놓고 회주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하지만 돌아온 반응 하나만 갖고서 회주가 스파이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역시 불가능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좀 더 근본적인 방법 뿐이었다. 지금까지 살수로서 사용해왔던 방법. 몸을 써서 움직이는 것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걷던 단하는, 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에 멈춰섰다.


"단하 살수님!"


자신을 부르는 경쾌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서는 웬만한 살수 보다도 덩치가 큰 관복 차림의 소년이 허둥지둥 달려오며 단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단하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락부락한 덩치. 키는 단하보다도 컸고, 어깨 또한 넓었다. 하지만 굵은 목 위에 놓인 둥그런 얼굴은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의 것이었다.


훈. 전임자의 승진으로 인해 배정된 단하의  담당관리였다.

"안녕하세요, 단하 살수.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단하의 앞에 멈춰선 훈이 숨을 헐떡이며 인사했다.


지금의 만남이 딱히 우연은 아니었다. 이곳은 살수회의 본관이었고, 본관에서 담당 관리를 마주치는 것은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단하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단하 살수와 일하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제 생에 가장 기쁜 날이에요."


"음."


훈의 말에 단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도저도 아닌 대답을 내놓았다. 필요 이상으로 경쾌한 자신의 담당 관리에게 단하는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제가 갑종 담당 관리가 되다니. 사실 옛날부터 바라마지않던 일이긴 했습니다. 제 꿈이었거든요. 하지만 그 꿈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저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이미 몇 차례나 들었던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담당 관리는 같은 이야기를또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말단 관리로 살수회에서 일하기 시작한 자신은 언제나 갑종을 담당 업무를 선망해 왔다는 것. 그러나 막상 맡게된 업무는 첩보부서의 허드렛일이었다는 것. 하지만 실망하지 않고 성과를  끝에 차근차근 진급할 수 있었고, 수 년간의 고생끝에 지난주에 5급 관리로 승격되며, 드디어 갑종살수 전담 관리가 되었다는내용의 이야기였다.


수다스러운 담당관리의 모습에 단하는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훈은 그런 단하의 기색에 눈도 꿈쩍하지 않은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다.

"저는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처음이라서 정말 떨리는군요. 단하 살수의 담당이 되었으니 같이 행동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서로 일하는 방식도 익히고 말입니다."

"아니, 너는 담당관리니까...... 굳이 업에 동행할 필요는 없어. 위험하기도 하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열심히 하고 싶어요. 단하 살수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거든요."


과도하게 의욕이 앞서는 담당관리의 모습에, 단하는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대답을 이어갔다.

"그렇게 업에 참여하고 싶으면 아예 살수가 되는건 어때? 너, 아무리 봐도 관리 보다는 살수가 어울릴거 같은데."


"아이쿠, 그건 안돼요. 저는 싸우는게 무섭거든요. 피도 무섭고....... 아픈건 더더욱 싫어합니다."

훈이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런 소심해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훈은 살수라 하더라도 이상할게 없는 몸을 갖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와 탄탄한 팔뚝은 관복만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는다면 누구라도 살수라고 생각할  했다.

단하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훈은 눈을 반짝이며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단하 살수와의 협업을 위해서라면야, 함께 행동하는 것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좋아요."


"하지만...... 나는 지금 딱히 진행중인 업이 없어. 그건 당신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만약 업이 주어졌다면 저에게도 전달되었겠지요."

훈이 시원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현실을 조금 달랐다.

사실, 아예 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방금 전 있었던 회주와의 담판.  자리에서 단하는 하나의 업을 받았다.


살수회의 어딘가에 숨어있을 스파이를 찾아내는 것.

물론 그것은 정식으로 주어진 업이 아니었다. 거의 우기다시피  끝에 받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회주의 태도로 보건데, 그 또한 암묵적으로 허락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단하는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한가지 도와줄게 있긴 한데."



ㅇ  ㅇ 




"단하 살수, 이건 위험한 짓이에요."


서가(書架) 사이를 성큼성큼 걷는 단하의 뒤에서, 훈이 불안감을 담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마를 따라서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단하는 그러한 훈의 말을 신경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서가 사이를 걸었다.

지금 둘이 있는 곳은 살수회의 기록 보관실. 살수회에서 수행되는 모든 업에 대한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모든 살수는 허가 없이 이곳을 출입할 수 없었다. 이곳에 상시 입장이 허락된 것은 5급 이상의 관리들. 그리고 특별히 회주의 허가를 받은 사람들 뿐이다.


물론 단하는 회주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 대신 훈의 출입증을 이용해 들어올  있었다.


기록 보관실을 담당하는 관리는 둘의 입장에 눈을 찌푸렸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은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단하가 벌이는 짓은 논쟁의 여지 없이 규정위반에 해당되는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단하는 그러한 훈의 불안을 한 귀로 흘려넘기며, 도착한 서가 앞에서 멈춰섰다.


보관실의 서가는 방대했고, 그만큼 살수회와 관련된 모든 기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지금 단하가 멈춰선 곳은 업에 관한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단하는 가장 최근의 서류철을 꺼내들었다. 손가락  뼘은 족히 될 법한 두께였다. 그 서류철의 맨 뒤쪽, 가장 최근에 있는 문서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구룡방주의 사생아 처분에관한 업]

익숙한 제목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졌고, 안드레이가 마무리한 업. 이미 전부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단하는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장에는 문서는 누쿠로가 맡았던, 성당에 관한 업이 끼워져 있었다.


그것마저 지나 단하는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눈 앞에서 파라락, 하고 서류가 넘어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손을 멈췄다.


[■■■■■■■에 관한 업]


살수회에서 보관하는 문서가 검열되어 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 내용들 중에는 극히 위험한 것도 있었고, 기밀에 엄중을 다해야 할 필요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단하가 펼쳐든 문서는 그 정도가 특히 심했다. 내용의 대부분이 지워져, 식별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조사(助詞) 정도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문서의 기안자와 결재자마저 지워져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단하는 그 내용 만으로도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안드레이.......?"


안드레이가 중국에서 수행한 업. 그 내용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일을 하다보면 대부분, 특히 갑종살수끼리는 상대가 맡은 업이 무엇인지 어느정도 눈치채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예외였다. 안드레이는 갑종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게 움직이는 자였으며, 살수회주가 직접 업을 내리는 존재였다.

당연히 이 문서에도 안드레이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하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것은 결재선 때문이었다.

살수회의 모든 문서는 결재를 거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업에 관한 문서는 엄중한 절차를 따른다. 대부분은  단계의 결재선을 거쳤다. 5급 담당관리 - 참모장 - 살수회주 순이었다.


하지만 이 문서는 업에 관한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재선에 있는 것은 단  뿐이었다. 그렇다면 기안자와 결재자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참모장 네르귀 다난과 살수회주 주원형.


5급 담당관리 대신 참모장이 직접 기안을 올린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때문에 단하는 이 업이 특별한 위치에 있는 갑종살수, 즉 살수회주가 담당관리로 있는 안드레이에게 내려진 업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있었다.


단하는 문서를 주의깊게 문서의 내용을 살폈다. 물론 이 건은 지금 당장의 상황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안드레이의 업이 시작된 것은 것은 일 년도 더 전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안드레이는 이상할 정도로 절묘한 시점에 성채로 복귀해, 자신이 놓친 방주의 사생아를 처리했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알아둬야 할 필요는 충분히 있었다. 그것이 비록 대부분 검열된, 극히 일부의 정보 뿐만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내용을 전부 훑어본 단하는 다시 문서를 책장에 넣었다. 그리고 다른쪽 서고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살수회의 인사 정보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가장 최근의 문서를 꺼내어 넘겼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던 단하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신임 갑종살수 선임에 관한 건]

신임 갑종살수 선임.  제목을 본 단하의 시선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자세한 내용을 살피려는 순간, 보관실의 입구 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 뭘 하는 거지?"


보관실의 입구에 서서 그렇게 묻는 사람은, 살수회의 참모장. 네르귀 다난이었다.


"히ㅡ익!"

훈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뚜벅뚜벅 서가 사이를 걸어온 네르귀는, 겁에 질려 몸을 떠는 훈을 지나 단하의 앞에 섰다.


"갑종살수 단하. 어째서 자네가 이 곳에 있는건가."


"별 일 아니야."


질문하는네르귀를 향해 단하가 가벼운 말투로 답했다. 하지만 네르귀는 특유의 깐깐한태도로 재차 물었다.

"아무리 갑종살수라 하더라도 이곳에는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 어째서 여기에 들어왔지?"

"회주한테 허락을 받았어."

"회주께서......?"

예상 밖의 대답에 네르귀는 순간 멈칫했다. 그럼에도 단하를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의혹이 가득했다.

물론 단하가 회주에게 직접적인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살수회에 숨어있을 스파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기록의 조회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니 업을 받아낸 시점에서 보관실에 출입하는 것도 간접적으로 허락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ㅡ 라고 단하는 생각했다. 물론 제멋대로인 생각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크게 틀린 셈은 아니리라.

"정말 허락을받았다면 출입증을 보여라."

"아니, 됐어."


손을 내미는 네르귀를 향해 단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볼일은 끝났어. 이만 먼저 가 보지."

그렇게 말한 단하는 곧바로 발을 돌려 기록 보관실를 떠났다. 이도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훈을 남겨둔 채.

성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네르귀의 따가운 시선이 등 뒤로 계속해서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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