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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화 〉회색의 단하 (7) (80/82)



〈 80화 〉회색의 단하 (7)

기록보관실을 떠나는 단하의 자켓 안주머니에는 서류 한 장이 들어있었다. 신임 갑종살수에 관한 문서. 네르귀가 들어온 순간 잽싸게 챙긴 것이었다.

문서에는 신임 갑종 후보의 신상에 대한 내용이 빼곡히 작성되어 있었다. 이름은 물론이고 어디에 사는지, 이력은 어떻게 되는지, 추천한 이유는 무엇인지까지. 덕분에 단하는 남자의 이름이 기온이라는 사실과 거주지를 파악할  있었다.

동시에 의문을 느꼈다.


안드레이에게 주어진 업의 문서와 마찬가지로,  건도 결재선이 검열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전체 결재선  앞쪽의 단계만이 검열되어 있었다. 그 뒤로 찍혀있는 네르귀와 살수회주의 직인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채였다.

전체도 아니고 굳이 왜 결재선의 앞쪽만이 검열되어 있는 것인지, 단하는 그럴만한 이유를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의문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전의 대화에서 살수회주가 했던 말을 단하는 기억하고 있었다.

'부족한 갑종살수는 새로 뽑으면 된다.'


회주는 그렇게 말했었다.


마치 앞으로 새 갑종을 뽑을 예정이라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이미 진행중에 있다는 사실을 지금의 단하는 알고 있었다.


과연 그 시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재 진행중인 신임 갑종살수 선임이 해무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이미 오조라는빈자리가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하는 그것이 해무를 대체하기 위함이라는 의심을 쉽사리 지워낼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의심이 사실이라면, 신임 갑종살수 선임을 기획한 담당자는 해무가 함정에 빠지게 될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담당자가 해무를 낚기 위한 함정을 설치한 스파이일지도 모른다ㅡ 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도한 비약일까?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었다. 이 또한 스파이를 찾는 과정에서 해결해야할 의문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빠진 채 길을 따라 걷던 단하가 멈춰선 곳은 성채 외곽의 판자촌이었다.


한강변의 축축하고 무른 땅. 허약한 기반 위에 판자로 지어진 가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허술한 슬레이트 지붕은 바람이 불 때마다 덜그럭거리며 흔들렸고, 건물 사이로 흐르는 도랑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거주구역의 단칸방조차 구하지 못하는, 성채의 가장 하층민들이 기거하는 구역이었다.


단하는  중에서도 눈에띄게 음침한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공간이 단하를 맞이했다. 동시에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바깥의 도랑에 흐르는 물보다도 훨씬 지독한 냄새였다.

냄새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발걸음을 내딛자, 컹,  하는 개 짖는 소리가 이리저리 메아리치며 머릿속을 울렸다. 쇠사슬이 찰랑거리며 콘크리트 바닥을 쓸어내는 소리도 함께였다.


잠시 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안쪽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 앞의 좁은 복도 양쪽으로 쇠창살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마치 감옥 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쇠창살뒤에서는 수많은 개들이 진득한 침을 흘리며 마구 짖어대고 있었다. 로트와일러, 도사견, 셰퍼드....... 한 눈에 봐도 사나운 맹견들이었다.


복도 양쪽 가장자리에 파인 홈을 따라서 물이 졸졸 흘렀다. 개의 분뇨와 오물이 뒤섞인 물이었다. 쇠창살 안의 개밥그릇 안에서는 사료가 천천히 썩어가고 있었다.

개는 많았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의 주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단하는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양쪽의 창살 너머로 개들이 미친듯이 짖어대고 있었다. 안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겨오는 악취도 점점 진해져왔다.

그 때,

뒤쪽에서 무언가가 땅을 박차고 도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카만 짐승이 단하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로 단하의 얼굴을 물어뜯기 직전, 멈춰섰다. 목에 걸린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목줄이 한 치만  길었어도 얼굴이 찢겨나갔을 뻔한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하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 발짝의 물러남도 없이, 눈앞에서 미친듯이 짖어대며 뜨거운 숨을 토하는 개, 도베르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미안하게 됐군."


태연한 목소리가 개의 머리통 뒤에서 들려왔다. 단하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시야를 가리고 있던 개 뒤에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얗게 탈색된 짧은 머리카락. 그리고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피어싱. 귀와 코 뿐만이 아니라 눈썹과 입술, 그리고 그 사이로 반쯤 드러난 혀에도 은색의 고리를 매달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얼굴에는 히죽 하는 웃음을 흘리는 채였다.

"우리 강아지가 워낙 활동적이라서 말이야. 하지만 자네도 멋대로 이곳에 들어왔으니 서로 비긴 셈 치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손에 쥔 쇠사슬을 끌어당겼다. 도베르만은 끌려가지 않기 위해 저항하며, 아직도 단하의 얼굴을 물어뜯기 위해 몸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한 손만으로도 그보다 큰 완력을 발휘하여 쇠사슬을당겼다. 그리고 끌려온 개의 배를 발로 걷어차자, 도베르만은 깨갱거리며 황급히 남자의 발치에 납죽 웅크렸다. 그러자 쇠창살 뒤의 개들도 짖어대던 것을 하나둘씩 멈추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던 소음이 그제서야 잦아들었다.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적막한 침묵 속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 집에는 무슨 볼일이지?"


집이라.

단하는 얼굴에 튄 개의 침을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한번 주변의 모습을 확인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개를 가둔 쇠창살들 뿐. 적어도사람의 집으로 삼기에 알맞은 곳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거대한 견사(犬舍)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단하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당신이 기온인가?"


"그런데?"

"살수회의 신임 갑종후보로 등록되어 있더군."

"아."

그제서야  사실을 떠올린 듯,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게 있었지."

기온의 태도는 신임 갑종 선임에 관한 일을 마치 사소한 일과처럼 취급하는 듯 했다. 의도한 행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살수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명백히 불손한 태도였다.


하지만 단하는 그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다. 기온이 살수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자신이  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걸 신경쓰지 않는건 기온도 마찬가지인듯, 무릎을 꿇은 채로 조금  걷어찬 개의 배를 긁어주고 있었다. 개는 이제 기분이 좋아진 듯, 혀를  늘어뜨린 채로 숨을 헥헥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단하가 말했다.

"흥미롭군. 살수회의 신임 갑종 후보가 개장수라니."


히죽 하는 웃음을 띠고 있던 기온의 얼굴에 순간 균열이 일었다.


"개장수......? 나는 그런게 아니야. 그저ㅡ 조금 열성적인 애견인일 뿐이지."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단하는 이어서 말했다.

"개를 키우느라 바쁘겠지만, 한번 둘러보러 왔어.  후보가 과연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서 말이지."

"소감은?"


"당신에 대한 기록을 대충 살펴봤는데, 특별한 이력이 없더군."

그렇게 말하며 단하는 문서에서 확인한 내용을 읊었다.


"어린시절 사설 조직에서 행동대원으로 있다가 독립하여 해결사로 일함. 구룡방 외청의 의뢰를 받아 수행한 경험이 있음. 하지만 최근 몇년간은 특별한 활동 기록이 전무함. 갑종 후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소박해. 일은 그만 뒀나?"


"나에 대해 꽤 알고 있군. 나는 당신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데 말이지. 즐거운 기분이 아니야."


기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치에서 웅크리고 있던 개도 고개를 들어 단하를 바라보았다. 짖거나 으르렁거리지는 않았지만, 드러낸 송곳니가 빛을 반사하며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살수회 소속이라는 정도만 밝혀두지."


"아,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나와 '같은' 살수회 소속이라."

"같은 살수회라고? 당신은 아직 후보일 뿐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검증만 걸치면 나도갑종살수가 될텐데."


기온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검증. 기온의 말대로였다. 갑종살수를 선임하기 위해서는 검증 절차가 필요하다. 단순히 뒷조사만 거치는게 아니었다. 과연 그가 충분한 능력이 있는지, 충분한 무력을 지녔는지, 어둠 속에 쉽게 녹아들 수 있는지, 그리고 문제없이 목표를 암살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살수회는 후보에게 업을 내린다. 이미 단하도 과거에  차례 겪었던 과정이었다.

"검증 절차가 쉽지는 않을 텐데. 일개 '개장수'가 통과하기에는."

그 말에 또다시 기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보이던 실실거리는 웃음은 한순간에 지워져 있었다. 주인의 분노를 눈치챘는지, 쇠창살 뒤의 개들도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컹컹 짖어대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울려퍼지는 개 짖는 소리 한가운데서 기온이 단하를 쏘아보며 말했다.


"신경을 거스르는 재주가 있군."


"그런 얘기 많이 들었지."

단하가 싱긋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내 결론은 이거야. 이력도 딱히 화려할게 없고, 보여준 활동도 전무하다. 그렇다면 살수회 안에 연줄이라도 있는건가? 누가 당신을 추천한거지?"

"그걸 모른다는건, 당신이 살수회의 인사담당자가 아니라는 뜻이로군."

"그래, 아니야."

단하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기온은 단하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자신이 질문을 던졌다.


"담당자도 아니면서 왜 그걸 궁금해 하는거지?"


"개인적인 흥미라고 해 두지."

"개인적 흥미라......"

기온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으음...... 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그렇다면 딱히 나도 답해줄 필요가 없겠군. 당신이 아무리 살수회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지. 이건 기밀이니까."

"기밀. 그래, 좋지. 좋은 자세야."


고개를 끄덕이며 기온의 말에 동의한 단하는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단하의 모습에 도베르만이 몸을 일으켜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하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기온을 스쳐지나갔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군."


그렇게 기온에게 말을 남고 단하는 그대로 그곳을 떠났다. 등 뒤로는 수많은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ㅇ   ㅇ


견사 밖으로 나온 단하는 깊은 숨을 토했다. 성채의 우중충한 하늘마저도 밝게 느껴졌고, 먼지 가득한 공기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몸에 배인 악취도 불어오는 바람에 천천히 씻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바깥바람을 만끽하던 단하는,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꺼내든 전화의 화면에 표시되어 있는 이름은 고석. 단하가 해무의 재판과 관련된 정보를 의뢰했던 정보원의 전화였다.

"나한테 전화한걸 보니 일을 끝냈나보군."

[어...... 그런 셈이지.]


단하의 질문에 고석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셈이라니. 나는 돈을 냈어. '돈을 낸 셈'이 아니라."


[아니, 그러니까 찾은 거나 마찬가지야.]

고석이 당황한 목소리로 다급히 변명했다. 단하의 침묵에서 불쾌함을 감지한 듯한 기색이었다.


[나도 알고 있어 단하. 내가 조금 늦었지. 하지만  정보는 확실해. 자네가 원하는걸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았네.]


단하는 얼굴을 찌푸렸다. 고석은 응당 직접 정보를 찾아서 제공해야 했다. 정보를 알고있는 누군가를 소개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 만으로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 사실에 단하는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알겠어. 그럼, 그 사람은 누구지?"

[어...... 그건 나도 잘 몰라.]

"갈수록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제발, 단하. 나도 간신히 구한 정보야. 하지만 상대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단 말일세.]

고석이 우는 소리를 하며 애원했다. 통화로 쓸데없는 입씨름을  여유가 없었기에 단하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면 되는지나 말해."

[장소는ㅡ]


단하는 고석이 말하는 장소와 시간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성채 한가운데에 위치한 유흥가. 시간을 맞추려면 바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좋아. 아, 한가지 더."


황급히 전화를 끊으려던 고석을 향해 단하가 말했다.


"기온이라는 남자에 대한 정보도 찾아줘. 이번엔 후불이야."

[뭐?]

갑작스런 요청에 당황한 고석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후불이라니......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대체 이름만 갖고 어떻게 찾아내라는 건가?]


"성채 남서쪽의 판자촌에서 개를 키우는 작자야. 놈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남기지 말고 전부 찾아. 특히 과거 행적에 대해서."


[하지만ㅡ]

고석이 불평을 늘어놓기 전에 단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해무의 재판과 관련된 정보를 쥐고 있는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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