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회색의 단하 (8)
살롱 페트뤼스. 고석이 알려준 접선 장소.
밖에서 보이는 모습은 다른 클럽들과는 조금 달랐다.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며 대놓고 유흥가라는 느낌을 풀풀 흘리는 클럽들과 달리, 살롱의 입구는 은은한 조명으로 밝혀져 있었다. 물론 실제로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른 클럽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것이다. 여자들이 있고, 술을 마시고, 난교를 벌인다. 다만 포장만을 좀 더 고급스럽게 해놨을 뿐.
안쪽으로 들어가자 원피스 차림의 여직원이 단하를 맞이했다. 프릴이 잔뜩 달린 코르셋 위로 어깨를 내보이고, 짧은 치마 아래로는 가터벨트를 드러낸 복장이었다.
"회원증은 있으신가요?"
여자가 물었다. 서비스직 특유의 만들어낸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였다. 하지만 단하에게 회원증이 있을리 만무했다.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
"방 번호가?"
"8번."
직원은 예약 명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후, 눈꼬리를 한껏 늘어뜨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단하에게 말했다.
"손님, 말씀하신 방에는 초대 손님 예약이 없네요. 8번 방이 맞으신가요?"
단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기억대로라면 고석이 알려준 방 번호는 8번이었다.
재차 명부를 확인한 여자의 얼굴이 곤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 뜻을 눈치챈 단하가 물었다.
"거기에 이름이 없으면 못 들어가나?"
"저희 살롱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회원이거나 회원의 초대를 받은 분들만 입장이 가능하세요."
친절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단하는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대신 차분한 태도로 기다렸다. 그 모습에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어내던 여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단하가 다시한번 입을 열었다.
"만날 사람이 있어. 양해해 줬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저희 살롱의 운영 원칙이라, 저도 어쩔 수 없네요,"
단하는 고민했다. 지금 만날 상대는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자였다. 아니면 타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을 정도로 콧대가 높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지금 만나지 못한다면 다시 보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강제로 들어가야 하나.
그렇게 단하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커다랗고 두꺼운 손이 단하의 어깨 위에 턱 하고 놓였다.
"손님, 이만 돌아가시죠."
단하는 굵직한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는 누가 봐도 바운서라고 짐작할 법한 모습이었다.
남자가 단하를 향해 이어서 말했다.
"저희 업장에는 룰이 있습니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적당히 하시는게 좋을 겁니다."
"당신 말이 맞아. 미안하군."
단하가 사과했다. 직후, 단하의 손이 남자의 넥타이를 콱 움켜쥐었다. 그리고 딸려온 머리를 잡고 벽을 향해 내리찍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이마를 찧은 남자가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축 늘어진 사지는 더이상 미동조차 없었다.
여자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단하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오만원짜리 지폐 열 장을 꺼내, 남자의 등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그럼, 안내를 부탁하지."
그렇게 단하의 요청을 받은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말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단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앞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짧은 스커트의 뒤쪽은 전부 트여있었다. 덕분에 한껏 치켜올려진 엉덩이와, 가터벨트가 가로지르는 탄력있는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여자가 또각또각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탐스러운 엉덩이가 눈에 띄게 좌우로 흔들렸다.
여자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8번 방. 문은 없었다. 대신 두꺼운 커튼이 입구를 가리고 있었다.
단하는 커튼을 젖히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색의 벨벳 소파 위, 그곳에서는 치파오 차림의 여자가 앉아서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손으로는 양쪽에 앉아있는 여자들의 허리를 휘감은 채였다.
단하도 이미 구면인 얼굴. 세브린이었다.
"늦었네?"
"쓸데없는 장난을 벌인 당신 탓이지."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한 단하가 말했다. 늦은 시간은 고작해야 일 분. 하지만 어쨌든 늦은건 사실이었다.
"밖에서 뭔 일이 있었나? 미안, 몰랐어."
세브린이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성의한 태도였지만, 단하는 대꾸하지 않고 맞은 편에 앉았다.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재미있다는 듯 끈적하게 상대를 훑어보는 세브린과, 차갑고 무감정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단하. 커다란 온도차를 지닌 두 개의 시선은 서로가 처한 입장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단하 쪽이었다.
"당신이었군, 드래곤 레이디."
"아, 제발. 그렇게 좀 부르지 마. 나는 가짜라니까?"
세브린이 질색한 얼굴로 손을내저었다.
"그렇다면 진짜는 누구지?"
"글쎄? 재수없으면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낄낄 하는 경박한 웃음을 흘리며 세브린이 말했다.
'진짜' 드래곤 레이디.
그 소문에 대해서는 단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여자인지는 의문이었지만. 하지만 단하는 그것에 대해 재차 묻지 않았다. 드래곤 레이디라는 웃기지도 않은 헛소문의 진상을 캐는 것은 자신이 이곳을 찾아온 목적이 아니었다.
"전해듣기로는 당신이 내가 필요한 정보를 갖고있다 하더군."
"잠깐잠깐. 좀 천천히 얘기하자고. 굳이 매 순간을 일에만 치여 살 필요 없잖아?"
그렇게 단하의 이야기를 끊은 세브린은 밖을 향해 손짓했다.
잠시 후, 두 명의 여자가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끌고온 카트 위에 놓인 것들을 차례차례 테이블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길쭉한 크리스탈 플루트 잔 두 개. 은쟁반 위에 가지런히 줄세운 딸기 한 접시. 그리고 얼음이 가득 담긴 버켓과 샴페인 보틀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단하는 속으로 콧웃음을 흘렸다. 세브린이 벌이는 귀족 놀이. 그 광경이 같잖은 탓이었다.
샴페인이야 그렇다쳐도, 딸기는 성채 안에서 가장 값비싼 사치품들 중 하나였다.
중국을 통해 육로로 수입하면 그만인 술들과는 달리, 신선한 딸기는 성채에서 구경하기 힘든 물건이었다.과거에는 흔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한 접시에 수십 만원은 족히 나갈 것이다.
하지만 세브린은 그런 사치가 익숙한지, 손가락 끝으로 딸기 한 개를 집어들어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여직원이 차갑게 식혀진 샴페인을 아이스 버켓에서 꺼내들고 라벨을 보여주었다.
Krug, 1998.
그리고 세브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익숙한 움직임으로 나이프를 꺼내 금박을 뜯어내고, 와이어를 풀고, 코르크를 뽑았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보틀이 열리며 입구에서 차가운 김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두 개의 잔에 샴페인이 채워졌다. 새하얀 거품이 잔의 입구까지 부글부글 솟아올랐다. 직원은 그 위에 꼭지를 떼어낸 딸기를 퐁당 하고 떨어뜨렸다. 거품에 둘러싸인 딸기가 한 차례 샴페인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한잔 해. 내가 사는거야."
먼저 잔을 든 세브린이 단하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단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여주던 무감정한 눈빛으로 세브린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마주하던 세브린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내 말을 따르는게 좋을걸? 원하는게 있어서 나를 찾아온 거라면 말이지."
짧은 망설임 끝에 단하는 잔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입술을 적실 정도로만 잔을 기울인게 전부였다.
서빙을 마친 여자들은 룸을 떠나는 대신 단하의 양 옆에 앉았다. 그녀들의 모습을 힐끗 곁눈질한 단하는 다시 세브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잔을 비운 세브린은 접시 위의 딸기를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여기가 마음에 들어."
세브린이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물론 카지노도 좋은 곳이지. 그치만 도박사인 내게 있어서 거긴 직장이나 마찬가지야. 직장에서 맘 편히 못 쉬는건 누구나 마찬가지잖아?"
세브린의 말에 단하는 딱히 공감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은 살수회 본부에 상주한 적이 없었다. 그때그때 업을 전달받아 움직이는게 전부였다. 그러니 머무는 직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반대로 말하면 성채 전체가 일터인 셈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다르지. 우선, 내가 잭팟을 터뜨리는게 아닐까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나를 감시하는 딜러들이 없어. 나를 이겨서 유명해지려는 잔챙이 도박사들도 없지. 대신 좋은 술이랑ㅡ"
그렇게 말하며 세브린은 옆에 앉아있는 여자의 치마 속으로 슬금슬금 손을 밀어넣었다.
"깜찍한 아가씨들이 있다는게 큰 장점이지."
허벅지 안쪽을 간지럽히는 손길에 여자는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그리고는 세브린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세브린도 그에 응하며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온 혀가 엉키며 타액을 교환했다.
눈 앞에서 거리낌없이 벌어지는 광경에 단하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세브린은 단하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혀를 섞는데 열중했다.
"참,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나는 레즈비언이 아니야."
긴 입맞춤을 끝내고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낸 세브린이 단하의 찌푸린 얼굴을 보고 말했다.
"이미 남자들이랑은 실컷 자 봤어. 그러니 색다른 경험을 즐기는 거지. 온갖 산해진미를 다 맛볼 수 있는데 굳이 하나만 골라먹을 필요가 없잖아?"
"제멋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군."
"하지만 네가 나와 자고싶다면 환영이야. 갑종과의 잠자리라면 흥미가 있거든."
"사양하지. 나는 일 얘기를 하러 왔어."
"그놈의 일, 일, 일."
세브린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당신들, 갑종살수란 놈들은 전부 일 중독이야. 업을 맡으면 뭘 하지? 사람을 죽여. 업을 끝내고 나면? 그때도 사람을 죽여. 그걸 나는 이해할 수 없거든. 사람을 죽이는게 재미있나봐?"
"재미로 하는 일이 아니야."
"그럼 재미는 언제 봐?"
단하는 침묵했다. 이런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곳에 온 이유는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세브린에게 본론으로 들어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에 단하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봐, 갑종. 너무 초조해할 필요 없어. 이곳에서 보기로 한건 내가 여길 좋아해서도 있지만, 당신을 위한 이유도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세브린이 턱짓을 하자, 단하의 오른쪽에 앉아있던여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하의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이어서 여자의 손이 조심스레 단하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하지만 단하는 그 손길을 매몰차게 밀쳐냈다.
"나는 바빠.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여유는 없어."
"이미 한번 말했지? 내 말을 따르라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세브린의 입가는 여전히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라곤 없었다. 마치 사자가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단하도 물러서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했다.
"뭐 해? 어서 저 재미없고 멍청한 살수에게 좋은 선물을 주지 않고."
세브린의 재촉에 여자는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단하도 거부하지 않았다. 여자가 천천히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두터운 커튼으로 둘러싸인 방. 그 안에서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그리고 벌어진 틈으로 여자는 조심스레 단하의 성기를 꺼냈다. 평소의 이완된상태였다. 하지만 여자는 신경쓰지 않고 입을 맞추었다. 가장 끄트머리에서부터 제일 아래쪽까지. 그러자 이완되어 있던 성기는 자연스레 빳빳해지며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험악한 시선을 거둔 세브린은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그래, 그거야.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마음껏 휴식을 즐기라고, 갑종. 너무 뻣뻣하게만 굴면 사람은 미쳐버리는 법이거든."
그렇게 말하며 세브린은 잔을 비웠다. 동시에 여자가 샴페인을 채웠다. 짙은 거품이 다시 부글부글 솟아올랐다.
"그래서, 나를 보자고 한 목적은?"
마침내 세브린이 본론을 꺼냈다.
"얼마전 벌어졌던 일은 알겠지."
성기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무시하며 단하가 말했다.
"아."
기억났다는 듯 세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당 말이지. 참 안됐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말투는 가볍기 짝이 없어서,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구룡방에게 진작 복속되었더라면, 종교는 좋은 사업이 됐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거부했지. 바티칸이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고 믿은 탓일까? 아무래도 좋아. 그들을 둘러싼 상황은 기대와는 달랐고, 결과는 순리대로 흘러갔지. 성채 안에서 구룡방에 반기를드는 자들은 모두 차가운 땅 아래 깊숙한 곳에 묻히게 된다는 순리 말이야."
세브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 사건으로 해무는ㅡ"
이어서 말하려던 단하는 이야기를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끈적끈적한 침과 혀가 점막에 얽혀드는 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이제 완전하게부풀어오른 단하의 성기를 여자는 혀로 핥아가며 촉촉하게 적셨다. 실크 장갑을 낀 양손으로는 뿌리쪽을 정성스럽게 쓰다듬는 중이었다.그럴 때마다 까슬까슬한 천이 민감한 피부를 스윽, 스윽 하고 스치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무표정하던 단하의 얼굴에 초조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얘기하도록 해. 해무가 어떻게 되었다고?"
세브린이 얼굴에 빙글거리는 웃음을 띈 채 물었다.
단하는 심호흡을 하며 가늘게 떨리는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재판을 받을 예정이다. 살수회주를 포함한 간부들이 참석하는 재판이지. 그리고 흘러가는 상황은 좋지 않아. 운이 좋다면 사형이겠지. 만약 운이 나쁘다면...... 여의대로를 건너게 될지도 모르고."
여의대로를 건넌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는 뜻과 달리, 지금은 단어 그대로의 뜻을 의미했다. 성채에서 추방되어, 여의도를 가로지르는 대로를 지나, B지구로 쫓겨나는 형벌. 성채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형벌들 중 하나였다.
단하는 해무와 함께 여의대로를 건너 B지구로 잠입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고작해야 두 달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그래서는 안 되지. 나는 그녀에게 받을 게 있거든."
세브린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내며 말했다.
세브린이 해무에게 받아야 할 것.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단하도 알고 있었다.
카지노에서 둘 사이에 있었던 거래. 그 거래에서 세브린은 도박으로 남한의 요원들을 상대하고, 대신 해무는 세브린에게 몸을 제공하기로 계약했었다. 하지만 단하는 그 내용보다는 세브린이 사용한 그녀라는 표현에 불쾌함을 표시했다.
"그 녀석은 남자다."
"그럴리가."
세브린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단하의 말을 부정했다.
"그녀를 만난 순간 느낄 수 있었지. 뛰어난 미색이더군."
"잠시 병에 걸렸을 뿐이야. 원래는ㅡ"
"원래는 남자라고? 정신 또한 여전히 그렇고, 치료제만 찾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미 지금의 육체는 여성의 것인데. 이곳에서 개인의 과거나 자아 따위는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니야. 남자가 여자들에게 궁금해하는건, 그저 그 몸으로 얼마나 자신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지, 그것 하나뿐이지."
세브린은 차근차근 말했다. 그리고 단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계속된 자극 탓에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느낌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쾌감 탓에 세브린과의 대화 내용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여자는 단하의 성기를 입에 문 채 앞뒤로 움직이며 훑고 있었다. 입 안에서 혀를 굴려 민감한 끄트머리를 자극하다가도,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을 듯이 가까이 가져가, 목 안 깊숙한 곳까지 성기를 받아들이기를 반복했다.
규칙적이었던 단하의 호흡이 조금씩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그 탓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단하에게 세브린이 말했다.
"당신도 궁금하지 않나? 그녀가 어떤 여자일지. 반반한 얼굴 뿐만 아니라, 얇은 천 아래에 숨겨진 그녀의 몸이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얼마나 남자를 기쁘게 해 줄 수 있을지 말이야."
단하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과 달리 귀는 닫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이어졌던 대화와는 다르게, 지금 세브린이 해무에 대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는 과할 정도로 명료하게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단어들은 머릿속에서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유치장에서, 그리고 창관에서 해무가 험한 꼴을 당했던 날. 그 때 옷을 벗기고 목격했던, 자신의 유일한 동료이자 의형제인 해무의 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은 세브린이 한마디 한마디 말할 때마다 점점 선명해져갔다.
"작지만 부드러운 유방은 손에 딱 맞게 잡히겠지. 물론 살수였으니 탄탄한 근육에는 생기가 넘칠테고 말야. 하지만 무엇보다 궁금한건, 남성의 자아를 지닌 그녀가 뱃속 깊숙한 곳까지 남성기를 받아들였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야. 당신도 그렇지?"
세브린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 단하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단하의 손이 황급히 움직여 여자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쾌감이 등줄기와 머릿속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입 속에서 격렬하게 움찔거리며 정액을 뿜어내는 성기의 움직임에, 여자는 눈웃음을 흘리며 단하를 올려다보았다. 혀를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였다.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던 반작용으로, 고삐풀린 성기는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정액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토해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여자의 움직임이 그것에 박차를 가했다. 입 속에서는 이미한가득 품고있는 정액이 침과 혀, 그리고 성기와 끈적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음란한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거기에 단하의 사정을 지켜보는 세브린이 내뿜은 담배 냄새가 섞여들었다.
이윽고 사정이 천천히 잦아들기시작했다.
"이제 그만ㅡ"
단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멈추지 않았다. 사정으로 한껏 민감해진 성기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자극은 의식마저도 희미하게 만들었다.
단하의 무릎이 가늘게 떨렸고, 젖혀진 허리와 등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어느새 입술 사이로는 괴로운 신음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괴롭히듯이 한참동안가학적으로 이어지던 후희(後戱)가 마침내 끝났다.
단하의 성기에서 입을 뗀 여자는, 옷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한가득 머금고 있던 정액을 목 안으로 삼켰다.
그제서야 해방된 단하의 몸이 소파 위에 축 늘어졌다. 풀린 눈과 헐떡이는 숨.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언제나 단정하던 옷매무새도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였다.
가느다란 담뱃대를 입에 문 채,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 모습을 관찰하던 세브린이 말했다.
"너도 나 못지않게 궁금한가보군? 그녀의 몸이."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해무는 내 의형제다. 여자로 보지 않는다. 제멋대로 지껄이지 마라.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단하는 입을 열지 못했다. 가쁜 호흡을 가라앉히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을 고르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에이시스에 걸린 해무와는 달리, 단하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완전한 남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색기 띈 모습은 남자라기보다는 방금 막 범해진 여자의 모습과 비슷했다.
"너희들은 언제나 날 곤란하게 해.가져오는 일거리들 하나하나가 까다롭거든. 게다가 위험하기까지 하지."
부채를 펼쳐들어 눈 아래를 가린 세브린이 말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
부채 너머로 흐릿하게 비치는 세브린의 입가에는 웃음이 띄워져 있었다.
"네가 원하는게 뭔지는 알겠어. 그녀의 재판을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세브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뒤를 네 명의 여자들이 따라 움직였다.
"내가 도와줄게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 말을 남기고, 세브린은 그대로 방을 떠났다.
혼자 남은 방에서 단하는 주저앉은채 이를 악물었다. 굴욕감과 패배감, 그리고 사정 직후의 나른함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바지 사이로 튀어나온 성기에서는 아까전 미처 다 사정하지 못한 정액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단하는 분노를 삭였다.
눈앞의 잔에 남아있는 샴페인의 거품이 부글거리며 천천히 꺼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