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회색의 단하 (9)
단하는 시계를 확인했다. 조금 전, 구룡방 경호대의 감옥에서 해무가 요청한 물건을 전한 참이었다.
고작해야 며칠 사이에 해무의 얼굴은 한층 더 초췌해져 있었다. 눈 밑에도 진한 그늘이 걸려있는 채였다. 하지만 단하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잠시 해무의 모습을 지켜보다 헤어진게 전부였다.
물론 간수들에게 돈을 찔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무를 잘 대해달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얼마나 먹힐지는 알 수 없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마치고 단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의 만남에서, 세브린은 자신이 도와줄 만한게 뭐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성의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빨랐다. 고작해야 헤어진지 하루만에단하에게 시간과 장소를 알려왔다.
이번의 접선 장소는 한 중식당이었다.
붉은색 카펫과 벽지로 장식된 복도를 지난 단하는 예약된 방 앞에 멈춰섰다. 관복 차림의 공안들이 굳게 닫힌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공안의 손짓에 단하가 양 손을 들었다. 그러자 공안이 단하의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목깃과 어깨, 겨드랑이와 허리, 엉덩이를 지나 허벅지까지. 그리고 자켓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한 발짝 물러섰다.
단하는 품 안에서 천천히 총을 꺼내들었다. 검은색 베레타 한 정. 그것을 받아든 공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공안들이 비켜서며 길을 틔웠다.
그 과정을 전부 거친 후에야 단하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팔각형의 룸. 그 가운데 놓인둥근 테이블 뒤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빛의 머리칼과 눈썹. 해무보다 조금 체구가 작고, 공안청 관복 차림인 것만 제외한다면 꼭 닮은 모습.
해무의 동생. 해연이었다.
"단 둘이서 만나는건 처음이로군."
단하를 바라보며 해연이 말했다.
단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단 둘은 아닌 것 같은데."
해연의 주변에는 다섯 명의 공안들이 서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을 단하에게 향한 채였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단하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들은 떼로 움직이는걸 참 좋아하는군. 혼자서는 누굴 만날 용기도 없는 모양인가봐?"
노골적인 조롱에 하나둘씩 가까이 다가온 공안들이 어느새 단하를 둘러쌌다. 팽팽한 긴장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단하는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장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 하지만 소란은 예상과는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
쾅, 하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공안들이 잽싸게 총을 꺼내 문 쪽을 겨누었다.
잠시 후, 천천히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붉은색 치파오 차림. 한 손에는 반쯤비워진 술병을 든 채 비틀거리는 여자.
세브린이었다.
"어, 다 와 있었네?"
혀 꼬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세브린은 잠시 후, 발이 꼬여 철푸덕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우당탕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몇 차례 사지를 허우적거린 끝에야 세브린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꼴사납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안녕, 자기? 잘 지냈어?"
술냄새를 풍기며 인사를 건넨 세브린이 해연의 등을 손바닥으로 퍽퍽 때렸다. 그럴 때마다 해연의 몸이 앞뒤로 들썩였다.
단하. 해연. 그리고 공안들.
그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긴장감 어린 분위기는 느끼지도 못 하는지, 세브린은 흐느적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여기 짬뽕 있지? 하나 줘. 그리고 고량주도 한병 더."
그렇게 말하며 세브린은 치파오의 치맛자락 안쪽, 허벅지의 밴드 안에서 구겨진 지폐 몇 장을 꺼내 공안의 품 속에 찔러넣었다.
공안이 찌푸린 얼굴로 세브린을 노려보았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지, 세브린은 의자에 앉은 채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술기운에 취한 몸이 이리저리 휘청였다.
"나가 봐. 전부."
해연이 말했다. 하지만 공안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험악한 시선으로 단하와 세브린을 계속해서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해연이 재차 턱짓하자, 불만족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나갈 수 밖에는 없었다.
이제 방 안에는 셋만이 남았다. 하지만 해연과 단하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는 것은 세브린 혼자 뿐이었다.
"참, 그 얘기 들었어? 성채 남서쪽 구역에 새 카지노가 생겼다는거?"
술에 취한 목소리로 세브린이 말했다.
"그런 곳이 생겼는데 도박사인 내가 안 가볼수가 없잖아. 그런데 웃긴게, 거기에 들어가려면 지인 추천을 통해서만 된다고 하더라고. 아니, 손바닥만한 성채에서 무슨 지인 추천이야. 장사를 할 생각은 있는거야?"
정말 아무래도 좋을 무가치한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고, 그 모습에 지금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던 해연조차도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는 채였다.
"그 짓거리를 보고 느꼈지. 아, 이 성채의 도의와 정의가 땅에 떨어졌구나. 부패한 사업가들이 도박에 대한 내 순수한 열망을 탄압하는구나! 상황이 그러니, 옳게 된 사회, 정의가 바로 선 구룡성채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래서 한마디 했지. 이 우매한 놈들아, 너희들은 도박장을 차려뒀으면서 성채의 고명한 도박사인 이몸, 세브린을 모르느냐! 당장 들여보내지 못할까!"
거기까지 말했을 때, 문이 열리며 점원이 들어왔다. 그리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대는 세브린의 앞에 짬뽕과 술을 내놓았다.
세브린은 짬뽕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고량주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신의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미 만취에 가까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독한 술이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그 무도한 카지노 놈들에게 내가 호통을 쳤다고 했지. 그랬더니 이 미친 놈들이 떡대들을 데려와서는 나를 내던지더라니까? 그러면서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손님, 행패는 다른 곳에서 부리시라고?"
단숨에 비운 술잔을 테이블에 쾅 하고 내려놓으며 세브린이 열변을 토했다. 그때까지도 해연과 단하는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였다.
"건방진, 괘씸한 놈들 같으니라고. 구룡방은 대체 뭘 하는거야? 그런 악덕 사업자들을 당장 조사해서 감옥에 처넣지 않고. 그런 놈들을 내버려두는 구룡방도 문제야. 내가 보기에 썩어빠진 구룡방 놈들도 싹 물갈이를 해야 해. 어떻게 생각해? 그렇지 않아?"
그 대목에서는 단하마저도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는 해연의 미간도 이따금 움찔거리며 경련하고 있었다.
대체 몇 잔이나 연신 독주를 들이켰을까. 마침내 세브린이 쓰러지며 테이블에 머리를 쾅 하고 찧었다.
그제서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흑단같은 머리카락을 짬뽕 그릇에 반쯤 담근 채, 세브린이 음냐음냐 잠꼬대를 흘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단하는 생각했다.
대체 저 여자의 정체는 대체 뭐지?
갑종살수인 자신이라 하더라도 해연같은 유력자와는 쉽게 만날 수 없다. 살수회와 공안청 사이의 민감한 관계를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도 저 여자는 이런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도 고작해야 하루만에. 단순한 도박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 사실에 의문을 느끼던 단하를 향해 해연이 말했다.
"무슨 일로보자고 했지? 나는 바쁘다. 짧게 끝내도록."
"성당 일. 네놈들이 꾸민 일이더군."
세브린에 대한 생각을 급히 머릿속에서 지워낸 단하가 말했다.
성당 일. 정확히는, 성당과 엮어서 해무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 공안청의 짓이었다는 사실을 뜻했다. 물론 그 일에는 살수회도 한다리 걸치고 있었다. 실제로 해무를 억류한 것은 네르귀와 타오 슌이었으니까. 하지만 뒤에서 수작질을 벌인 것이 공안청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도 해연은 태연한 기색으로 반문했다.
"꾸몄다는 표현은 이상하군. 무도한 반역자들을 처단한 것을 어찌 부정한일처럼 말하는 것이지?"
"방식이 틀렸으니까. 아무리 네놈들이라 하더라도 살수회의 집안일에 끼어들 자격은 없어."
"궤변이로군. 반역자들을 처단하는건 본디 우리 공안청의 일. 오히려 네놈들이 끼어들어 공안청을 방해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지."
해연의 말은 일견 맞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것이야말로 궤변이었다.
반역자를 처단하고 치안을 유지하는건 공안청의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반란 세력의 요인을 은밀하게 처리하는 것은 살수회의 일이었다. 게다가 구룡방주의 사생아를 암살하는 업까지 엮여있었으니, 살수회가 공안청의 권한을 침범했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었다.
하지만 단하는 굳이 그 사실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대신 본론을 꺼냈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아. 내가 관심있는건 업의 결과도 아니고, 살수회와 공안청 사이의 마찰도 아니야."
그렇게 대꾸한 단하는 이름 하나를 꺼냈다.
"해무. 그 녀석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알겠지. 구룡방의 감옥에 억류되어 있어. 성당 사건과 관련된 일 때문에."
성채 안의 여자들을 몰래 밖으로 내보내온 성당. 그 일을 몰래 도왔다는 것이 현재 해무가 받고 있는 혐의였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단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마음 속에서는, 어쩌면 정말로 해무가 성당을 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실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각 세력이 지닌 정치력과 무력의 크기였으니까.
"그래서? 내 도움을 구하러 온 건가?"
"아니. 그냥 알려주러 왔다."
무심한 태도로 단하가 말했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녀석을 구할 수도 있겠지. 나는 알려줄 뿐이고, 그걸 들은 너는 행동하는 것 말이야."
"타인에 대한 기대가 과도하군. 어디서 인간에 대한 신뢰라도 배웠나?"
"그럴리가. 그저 가능성을 말했을 뿐이야.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해무가 사형당할 거라는건 단순한 가능성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이 되겠지."
"관심없다. 법도에 따라 처벌받는건 당연한 일. 그 또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정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해연의 목소리는 단조로웠지만, 그 내용은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의 목소리처럼 무겁게 공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재판이 열릴 거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방주께서 직접 진행하시는 재판이라더군.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현명하신 방주께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실 테니까."
방주가 객관적인 판단으로 올바른 판결을 내릴 거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다. 거짓말이다. 그것도 아주 뻔한.
설령 방주가 판결을 내린다 하더라도, 결론은 살수회와 공안청 사이의 힘겨루기에 의해서 지어질 것이다. 그리고 해연 또한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뻔한 연막을 치는 것이다.
그 사실에 단하는 불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걸 단하도 알고 있었다.
대신 단하는 조심스레입 속으로 말을 고른 후에 이야기를 꺼냈다.
"설령 방주께서참석하신다 하더라도,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겠지. 해무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정보 말이야. 그리고 약간의 가공을 거친, 해무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방주께 제공하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가공이라....... 참으로 흥미롭군."
"뭐가 흥미롭다는 거지?"
"네놈이 그렇게까지 해서 해무를 구해내려는 이유가 흥미롭다는 뜻이다. 놈을 둘러싼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게다가 그가 성당과 함께 움직였다는건 이미 밝혀진 사실 아닌가?"
"그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에 방문했을 뿐이야. 성당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 너도 한때는 그곳에서 살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단하는 해연의 얼굴을 주시했다. 과거의 기억. 그것이 그에게 일말의 감정을 드러내도록 할 수 있을지.
하지만 해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유리알 같은 눈으로 단하를 마주할 뿐이었다. 확실히, 찔러도 피 한방울나지 않을 것만 같은 공안청의 부총장에게 이런 수작 따위는 먹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단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고작해야 성당에 방문했다는 이유로 해무가 반란을 시도했다고 말하는건 증거없는 모함에 불과해. 명백히 잘못된 주장이야."
"증거야 찾아보면 나오겠지."
"장담할 수 있나?"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다."
"......."
단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새삼 다시한번 떠올렸다. 눈앞의 상대가 단순히 해무의 형제가 아니라, 공안청의 부총장이라는 사실을.
증거가 없으면 만든다. 그것이 공안청의 방식이었다.
반동 분자가 발견되면 증거를 날조하여 사형에 처한다. 정적이 나타나면 헛소문을 퍼뜨려 실각시킨다.
오랜 과거부터 이어져왔던, 독재자들의 흔한 방식이었다.
물론 살수회는 그마저도 필요 없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움직여 상대방의 숨통을 끊는 것이 살수회의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공안청은 치안을 관리하는 조직이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안청의 정보 조작과 무력을 통해 반동분자를 제거하는 것을 주 업무로 삼고 있었다. 사실상 구룡방의 체제 유지를 위한 조직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직의 간부인 해연은 짧은 고민끝에 질문을 던졌다.
"만약 내가 네놈을 도와준다면, 나는 뭘 얻을 수 있지?"
"사랑하는 너의 형을 구할 수 있겠지."
그 말을 들은 해연의 얼굴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해무와 해연. 둘에게 형제로서의 우애는 없다. 오히려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관계였다. 그러니 해무를 구하겠다는 이유만으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좋아."
해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대답에 단하는 얼굴을 찌푸렸다.
미심쩍은 대답이었다.
자신이 아는 해연이라면 지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해무와의 관계는 둘째 치더라도,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권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런 결정을 내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단하의 의심을 증명하듯, 해연이 추가적인 조건을 붙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래를 위해서는 나 뿐만 아니라 상층부도 설득해야 하니."
"상층부......?"
해연은 공안청의 부총장이다. 그가 말하는 상층부라 하면 단 하나뿐이다.
공안청의 수장이자, 구룡방을 통틀어 고작 5명도 안되는 1급 관리들 중 하나이자, 살수회주의 유일한 경쟁자.
공안총장.
"그래, 공안청장. 내 유일한 상관. 나는 그에게 바칠 미끼가 더 필요해."
진심일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청장의 핑계를 대는 것일까. 어느 쪽이던 간에 단하는 해연에게 무언가를 제공해야만 했다. 공안청이 군침을 흘릴만한 미끼를.
그리고 마침 단하에게는 교섭거리가 있었다. 그것도 공안청이 아주 탐낼 만한.
"이번 반란세력 축출의 공. 그것을 너희들이 처리한 걸로 해 주지."
그 대답에, 지금까지 무표정하던 해연의 얼굴에 감정이 서렸다. 미미한 분노, 그리고 불쾌함이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떠들어 대는군. 네놈 권한 밖의 일을 섣불리 떠벌리지 마라."
"맞는 소리야."
단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하지만 회주에게 제안해볼 수는 있어. 지금 살수회에 남아있는 갑종살수가 몇 명인지는 너도 알고 있겠지? 해무를 제외하면 고작 셋 뿐이야. 그런 상황에서 회주도 함부로 내 말을 무시할 수는 없어."
"회주를 설득하겠다는 뜻인가?"
"네 도움이 충분하다면 말이야."
"도움이라...... 예를 들면?"
"내부에 스파이가 있어."
스파이. 그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살수회도, 공안청도, 서로가 서로에게 스파이를 심어두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출하지 않았던 것은 상호간에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선을 넘었어. 단순히 정보 수집을 넘어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통해 살수회의 핵심 전력을 건드리는 일을 저질렀지."
핵심 전력. 당연히 해무를 뜻하는 것이었다.
살수회의 힘을 유지하는 원천은 무력. 즉, 살수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에 위치하는 갑종살수를 위협한다는 것은 곧 살수회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네놈들에게 있어서도 위험한 일이야. 자칫하면 살수회와 공안청 사이의 전면전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정녕 그게 네가 원하는 일이야?"
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단하는 해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 아래에서는 제안을 받아들일지, 혹은 거절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계산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팽팽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침묵을 깨고 해연이 답했다.
"검토해 보도록 하지."
검토. 정제된 표현이었지만 해연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사실상 단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이상으로 확실한 대답을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대화는 끝났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단하는 먼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자는 안 데려가나?"
해연이 말했다. 세브린을 뜻하는 것이었다.
단하의 시선이 세브린을 향했다. 깊은 잠에 빠진 그녀는 이제 드르렁 드르렁 코까지 골고 있었다.
"네 친구니까 네가 알아서 해."
그렇게 매몰찬 대답을 남기고 단하는 방을 떠났다.
팔각형의 방. 그곳에 남겨진 해연은 세브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도박사는 여전히 무방비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조용한 방에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