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란국연가-2화 (2/16)

二章. 불같은 사내

귀신 공주의 혼롓날답지 않게 장안은 시끌벅적했다. 재수가 없다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집 밖으로는 고개도 디밀지 않는 이들도 허다했지만, 호기심을 못 이겨 구경 나오는 이들도 허다했다.

아시타는 좌판 하나를 펼치고 앉아 그들에게 부적을 써주며 쉴 새 없이 눈을 돌렸다.

‘과연….’

귀신 계곡과 가까이 있는 곳답게 바글바글한 인파 속에는 인겁을 뒤집어쓴 요괴들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남방 땅에서도 이렇게 많은 귀물은 본 적이 없었다.

‘흉사가 일어나긴 할 모양이군.’

붓대를 이로 문 채 까딱까딱 흔들던 아시타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다른 법령사들과 달리 그는 요물에 대해 관대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요괴들이 하는 짓이란 건 대개가 사람들에게 들러붙어 싸움을 부추기거나, 마음을 갉아먹거나, 다른 모습으로 둔갑해 남을 속이거나, 때로는 잡아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러한 행위에는 악의가 없다. 제 그런 생각에 다른 법령사들은 반발하겠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보다는 요괴가 순수했다.

그야말로 순수한 욕망의 덩어리.

그들에게는 애초 선악에 대한 구분이 없었다. 악의에 대한 개념도 없고, 당연 선의에 대한 개념도 없다. 그들은 오로지 욕망의 춤을 춘다. 비대한 이기(利己)의 명령에 따라 원하는 것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절제 없는 욕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해로 돌아온다. 천진한 어린아이가 개구리를 짓이기듯이, 잔잔한 호수를 흙탕물로 만들어 버리듯이. 요괴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해를 끼치는 해충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다른 법령사들보다 그들에 대해 더 냉혹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속 깊숙이 동정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아시타는 귀물들에게 자비를 베풀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어떤 어리석은 자가 선의를 베푼다고 해도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타심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불가사의한 것일 뿐이다. 애초 그리 태어난 것.

별수 없는 일이지. 아시타는 어깨를 으쓱였다.

해를 끼치니 인간으로서는 구제(驅除)해야 함이 당연하다. 사실 토끼가 늑대를 동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물론 나는 송곳니가 달린 토끼지만….’

“여보게, 이 부적 정말로 효과가 있는 것인가?”

그는 상념에서 깨어나 좌판 앞에서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털이 덥수룩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히죽 웃자, 남자의 눈에 의심이 짙어졌다.

“이거 한 장을 얼마에 팔고 있나?”

“삼십 푼.”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여 주자 사내가 뭣 씹은 표정을 지었다.

“종잇장에 먹물 칠한 걸 가지고 삼십 푼이나 받아먹나.”

“두 장 사면 오십 푼이오.”

“그래도 비싸!”

“비싸다니 무슨 말을! 부적 한 장을 쓰는 데 얼마나 많은 영력을 소비하는지 알고 말하는 것이오? 고작 하루 술값에 온갖 잡귀들을 다 물리칠 수 있는 부적을 써주는데 비싸다니! 천만부당!”

짐짓 역정을 내며 좌판을 탁 내려치자, 사내가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은근하게 물어왔다.

“이게 그리도 효험이 좋단 말인가?”

“내 눈을 보시오.”

아시타는 최대한 눈을 순진무구하게 깜빡여 보였다.

“이게 거짓말을 하는 눈이오?”

“마, 맑긴 맑소만….”

“법력이 극에 달하면 이처럼 눈이 맑디맑고 초롱초롱해진다오. 마음에 정념이 없고 사사로운 욕심이 없다는 뜻이지.”

사내가 부적 한 장을 삼십 푼에 팔아 처먹는 주제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시타는 뻔뻔스레 고개를 치켜들었다.

“싫음 가시든가. 누가 사달라고 말이나 했소?”

“…정말 효험이 있는 게지?”

“어허, 말해 입만 아프지. 그 눈에 이 몸의 영험함이 보이기나 할까. 남방에서는 법령사 아시타가 부적을 써준다 하면 사람들이 은전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 저 성 밖까지 줄을 섰소. 그런 내가 희란국 흉흉한 소문을 듣고 와 이리 싼값에 봉사를 해주고 있는 것인데 이런 의심을 받아야 하다니…. 부정이라도 탈까 두려우니 저리 가시오.”

훠이, 훠이 손을 휘젓자 사내가 당황한 얼굴로 좌판을 꽉 붙들었다.

“아, 알겠네. 부적 두 장만 써주시게.”

“어허. 가래도.”

“의, 의심해서 미안하이. 요즘 하도 타국에서 잡상인들이 밀려와 사기를 친다고 하여…. 그러지 말고 두 장만 써 주시게. 아무래도 날이 날이니만큼 찝찝하여….”

“그렇게까지 말하니… 별수 있나.”

아시타는 마지못한 얼굴로 종잇장 위에 붓을 휘갈겼다. 그러고는 후후 입김을 불어 말린 뒤 사내에게 건넸다.

“속옷 속에 넣어 두면 되오.”

“고, 고맙네….”

사내가 덥수룩한 머리를 쓱쓱 쓰다듬더니 좌판 위에 열 푼짜리 동전 다섯 개를 두고 간다. 아시타는 그것을 돈주머니에 주워 넣으며 해죽 웃었다. 오늘은 술깨나 마실 수 있겠구나. 만족스레 주머니를 탁탁 두드린 뒤 다시 품속에 넣으려는데 머리맡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오늘 좀 장사가 되려나. 또 어디의 어수룩한 호구가 걸려든 것이냐. 방싯 웃으며 고개를 치켜드니, 까무잡잡한 피부의 젊은 여인이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다.

그 싸늘한 눈을 마주한 아시타의 얼굴은 흡사 저승사자라도 만난 양 허옇게 질렸다.

“새,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구나, 여란.”

“더 늦게 오지 못해 미안하군.”

여인이 비아냥거리듯 말하며 좌판에 쌓여 있는 종잇장을 껄렁하게 들춰 보았다.

“그래, 내가 없는 동안 실컷 재미 보셨나?”

“꼴랑 엽전 몇 푼 번 걸 가지고 재미는 무슨… 아하하하하….”

“내 기억에 이 짓 하다가 한 번 더 걸리면 그땐 파문이라고 경고 먹였던 것 같은데….”

느릿느릿 이어지는 말에 아시타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도망칠 길을 찾는 그의 앞을 여란이 척 가로막았다. 내려다보는 눈길이 실로 냉혹하였다.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사명인 자가 법력을 가지고 천박하게 장사치 노릇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천박한 장사치라니!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게 아니냐. 그럼 산 입에 똥칠하랴!”

“사문에서 충분한 양의 엽전을 지급해줬을 터. 네놈은 기생과 술 처먹을 돈이 모자라 이 짓거리가 아니더냐. 이런 썩어빠진 놈이 아시타의 칭호를 달고 있다니… 사문의 수치다.”

“자, 잠깐! 아무리 그래도 사형에게 말이 심하잖아!”

“곧 파문당할 놈이 사형은 무슨 놈의 사형.”

“지, 진짜로 사문에 찌르려고?”

“내가 못 할 거라 생각하나?”

아시타는 대경 질색해 여란의 팔에 매달렸다. 그 궁색한 모습에 여란의 눈은 더 싸늘해졌다. 위엄이라고는 개똥만큼도 없는 작자 같으니….

“이거 놔!”

“한 번만 봐줘라, 여란. 여행길에 도적을 만나 엽전을 다 잃어버리는 바람에 내 어쩔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한 일이다. 막말로 내가 사기를 친 것도 아니고, 부적이 효험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다 정당한 대가를 받고….”

“놓으라고 했다! 징그러우니 달라붙지….”

징징대는 사내놈을 발로 차서 떼어 내던 여란은 다음 순간 몸을 굳혔다. 매달리던 아시타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궁전에서 행사를 알리는 북을 친다. 둥둥, 하늘을 울리는 천둥 같은 소리에 장안에 스며든 사이한 기운.

‘한두 마리가 아니다….’

사방에 자욱이 어린 요기(妖氣)에 등골이 서늘했다. 인겁을 쓴 요마들이 사방에 드글드글하다. 많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이만한 수가 모여 있었던 건가.

“안 돼.”

그는 부적에 손을 대는 여란을 단호히 막아 세웠다.

“사람이 많다. 여기서 공격하면 저들이 한꺼번에 날뛰어 댈 거야.”

상상만으로 간담이 서늘해진다. 그로서도 이렇게 많은 요물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는….”

“일단 사람들을 피신시켜야 한다.”

“어떻게?”

여란이 눈을 가늘게 뜬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장안이 온통 귀신 판이니 사람인 자들은 모두 피하라, 한들 믿을 리가 없다. 아니. 그 전에 대피하라, 외쳐 댔다간 요괴들이 먼저 공격을 해올 것이다. 그렇다고 여란의 말대로 선제공격을 할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시타는 주먹만 움켜쥐었다.

“…다른 법령사들도 모두 들어왔나?”

“아직이다. 곧 도착할 거다.”

“그럼 그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끌자. 섣부르게 그들을 자극하지 마라.”

그는 부적 꾸러미를 챙겨 들고는 좌판을 접었다.

장안을 굽어보는 듯한 형세의 궁궐에서 풍악이 울려 퍼진다. 이곳의 혼례 절차에 따르면 식이 다 끝난 뒤 소루 공주가 가마를 타고 성 밖으로 나올 것이다.

아직까지 얌전한 것을 보아 놈들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테지.

“일단 모을 수 있는 법령사들을 모두 모아라. 최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만반의 대비를….”

“연락을 취하도록 하지.”

여란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재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아시타도 인파를 조심스레 헤치고 나아갔다. 그들의 수를 구체적으로 헤아리던 중에 불현듯 의구심이 밀려든다.

이렇게 많은 귀물들이 함께 작당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들은 그때그때의 욕망에 따라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던가. 저들끼리도 서로 잡아먹고 해치는 것들이었다. 협동이라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한데 어찌….

그는 곧장 그 의문을 지워 버렸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당장의 대책이었다. 후에 천천히 조사해 보면 될 일. 그는 행사가 잘 보이는 곳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는 높고 웅장한 연회장 상단에 발이 드리워지고, 그 뒤로 왕족들의 그림자가 어렴풋 비쳤다.

곧 활짝 열린 문으로 화려한 복장을 한 예인들이 입장해 흥겨운 풍악을 올리기 시작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왕실의 행사였다. 특히나 나라의 큰 영웅에게 귀신 공주를 신부로 준 왕의 부당한 처지에 수군거리는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어 준 것. 온 백성이 귀신 공주가 왕실의 애물단지인 줄 뻔히 아는데 마치 귀한 딸 시집보내는 양 꾸미니, 그 속내 한번 얄팍하기 그지없다.

혼례를 치르기 위해 성장을 하고 선 자현은 그럴싸한 행사에 왕의 속셈이 뻔히 보여 이를 갈았다. 발 너머에서 고소하다 웃고 있을 그 얼굴을 떠올리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켜보고 있던 비령이 친우의 낯이 살벌하여진 것을 보고 조마조마하여 참게나, 참게나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현은 시건방지게도 왕이 자리한 곳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평소라면 경을 쳤을 가륜 왕은 켕기는 게 있는지라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곤 딴청을 부렸다.

“어서 식을 시작하라.”

왕의 지시에 시녀들이 행사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귀한 술과 음식을 날라다 주기 시작했다. 연회장에는 온갖 귀족들과 왕족들이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물이 올라온다. 왕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려 단단히 작정한 것이다. 그가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다 참석하라는 엄포를 내렸다는 말을 자현도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누가 오만불손한 자현과 꺼림칙한 귀신 계집의 혼사를 보러 행차할까.

‘다들 속으로 꼴좋다 비웃고 있겠지….’

자현은 왕의 장단에 맞추어 샐샐 웃고 있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그들의 조소 어린 눈길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떤 수치도 참아내겠다는 다짐이 모래탑처럼 허물어지려 한다. 그는 필사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켰다. 그런 그를 도발하듯 왕이 여종에게 발을 걷어라 명한다.

“내가 한 잔 자네에게 따라줘야 할 게 아닌가. 이리 오라.”

그가 거만하게 팔을 들어 올리며 명을 내린다. 하지만 왕의 손짓에도 자현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가륜 왕의 곁에 저가 그리도 사모하는 가란 공주가 떡하니 자리하고 앉아 있다. 마치 약이라도 올리듯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화사하여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곱디고운 모습을 보며 자현은 이를 악물었다.

가냘픈 몸에는 붉은 비단을 휘감고, 매끄러운 머리채를 진주와 금장식으로 곱게 치장하고서, 그 곱디고운 꽃 같은 얼굴에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서 가란 공주가 부왕의 잔에 술을 채운다.

그 모습을 보니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저치가 곁에 두고 하하 호호 웃고 있는 저 공주, 본디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할 이가 아니던가. 그것이 본래 약조가 아니었느냔 말이다.

뭣 하느냐 어서 오지 않고, 하는 왕의 재촉에도 그는 가만히 서서 주먹만 움켜쥐었다. 하객 중 하나로 참가해 앉아 있는 비령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대놓고 약을 올리고 조롱하는 왕의 처사에 간이 철렁 내려앉는다. 참말로 오늘 일이 나는 것인가. 저놈 성미에 이젠 다 틀린 것이 아니냐 벌벌 떠는데, 거기에 기름을 붓듯이 왕이 느물느물 외친다.

“좋아. 더는 권하지 않겠다. 가례를 시작하라. 공주는 들지 않고 뭐 하는가. 한시바삐 혼례를 치르고 초야를 치러야 하지 않느냐.”

비령은 맙소사, 하며 머리를 짚었다. 자현의 움켜쥔 주먹 위에는 핏대가 다 서 있다. 설마 왕에게 달려들어 주먹질을 하지는 않겠지? 저놈 성질에 그러고도 남는다. 대체 이를 어찌해야 하나. 방석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뛰어들어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궁녀들이 들어와 신부가 당도했음을 알려 온다.

회장에 모인 이들이 일제히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며 치렁치렁한 소매로 얼굴을 반쯤 가린 소녀가 연회장의 한가운데까지 한 발 한 발 차분히 걸어 들어왔다.

‘저게… 귀신 공주인가?’

왕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소녀를 바라보며 하나같이 맥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온갖 흉흉한 소문과 달리 귀신 공주는 그저 평범해 뵈는 소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하니 반쯤 드러난 조막만 한 얼굴은 그 신율 왕제의 딸이 맞느냐 싶을 정도로 수수하고, 자그마한 몸뚱이는 다 자란 게 맞느냐 싶을 정도로 왜소하고 빼빼 말라 영 볼품이 없다. 그 어설픈 모습을 보며 비령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리 조그만 계집이 그리 무서워 난리를 떨었던가, 역시 소문이라는 게 믿을 게 못 되는 구나,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데 소녀가 왕의 부름에 머리를 들어 올렸다. 온전히 드러난 그 얼굴을 보고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하얗고 조그만 얼굴에서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눈동자가 마치 색을 잃은 듯 잿빛이었던 것이다.

귀신에게 눈을 빼앗겼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웃던 이들이 바로 꺼림칙한 얼굴로 돌아와 쑥덕거린다.

가륜 왕만이 그 불길함을 흡족한 듯 내려다보며 태연히 식을 재촉했다.

“서로 맞절하고 예물을 나누어라. 이는 왕실의 혼사라 백성들 앞에 선을 보여야 할 것이다.”

명에 따라 시비들이 공주를 이끌어 자현의 곁으로 인도했다. 자박자박, 느린 발걸음이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선다.

이것이 내 신부인가, 하고 자현은 제 앞에 선 소녀를 빤히 살폈다. 저만치에 있는 가란 공주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소녀의 모습에, 안 그래도 불쾌했던 기분이 더 가라앉는다. 애초 귀신 공주가 천하절색일지도 모른다는 비령의 흰소리를 귀담아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처럼 덜 자란 계집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흘려들었던 귀신 공주의 연령을 새삼 떠올리며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는데 문득 소녀가 눈을 들어 저를 본다.

아니, 소경이라 하니 저를 볼 리가 없지. 그저 눈을 들어 올렸을 뿐이다. 그럼에도 일순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저를 샅샅이 꿰뚫어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현은 거의 본능적인 불쾌감에 사납게 내뱉었다.

“…고개를 숙이라는 명을 못 들었나. 네가 귀까지 먼 것이냐.”

그것이 제 신부에게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할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소녀가 놀란 듯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으나 자현은 아예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원치 않는 혼사였다. 모욕의 의미로 내밀어진 계집이었다. 그는 이 조그만 것에게 일말의 관심도 두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식만 끝나면 다른 곳으로 보낼 거….’

이 초라한 소녀를 제 아내로 여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행사 절차에 따라 한껏 굳은 얼굴로 맞절하곤 공주와 술을 나눠 마셨다.

가륜 왕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즐거운 모양이지. 그는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속이 부글부글 끓던지 어서 이 지긋지긋한 혼례 절차를 끝내고 궁궐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는 식이 진행되는 내내 입을 꾹 다문 채 신부와 왕에게 눈길 주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시진 동안 길고 지루한 연회가 지속되었다. 입에 발린 축하의 말을 귓등으로 넘겨들으며 그는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한 시진을 더 견딘 끝에 마침내 고문 같던 예식이 끝이 났다. 남은 것은 행렬뿐이다.

그는 어서 끝내고 돌아가자, 하며 연회장을 나와 미리 준비되어 있던 말 위에 올라앉았다. 행렬을 이끌 하인들과 가마꾼들, 노비들이 결혼 선물을 짊어진 채 성문 앞에 길게 줄을 선다. 그것들을 돌아보며 자현은 냉소했다. 요란도 하다. 그래도 혼례식이라고 맨손으로는 올 수는 없었나 보지?

물론 돌아가는 길에 뭐가 됐든 다 태워 버릴 셈이었다. 아주 재수가 없다. 그는 이를 갈며 행렬의 맨 앞에 섰다.

군병들이 성문을 열어준다. 말을 재촉해 그 앞으로 나아가는데 돌연 등골이 서늘해진다. 아직 그가 감당해야 할 수치는 끝난 게 아니었다.

‘젠장….’

왕과 귀족들의 조롱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경사가 났다고 이리 모였는지 혼례 행렬을 구경 나온 사람들로 장안이 북적북적했던 것이다.

저들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고? 상상만으로 온몸의 솜털이 다 곤두섰다. 저들이 영웅 자현이 불쌍하게도 귀신 공주와 혼례하는구나, 그리 측은하게 바라볼 게 아닌가. 그 굴욕을 정녕 견뎌야 하는 건가. 자현은 막막함에 두 눈을 끔뻑거렸다.

비록 세도가들에게는 별 볼 일 없다 무시당하는 처지였지만 그는 귀족이었다. 날 때부터 조부에게 자호 가문은 나라 제일의 무장 가문이다.

네 아비가 일찍 죽어 가세가 기울었지만 이 집안은 뼈대 있는 가문이며 너는 이 집안의 장자다. 자부심을 가져라. 귀가 닳도록 듣고 자랐다. 그 말을 뼈에 새겼다. 저 잘났다 하는 것들 사이에서도 한 번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하물며 천것들에게 동정의 시선을 받다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그는 억세게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그가 출발하지 않고 그리 서 있기만 하자 좌우에 선 이들이 당황한 얼굴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마음을 굳혔다. 저는 참을 만큼 참았다. 이따위 원치도 않는 혼례 때문에 그런 수치를 견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현은 망설임 없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당황하며 술렁이는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둔 채 뒤돌아섰다. 왕이 무어라 하든, 주변에서 무어라 씨부렁거리든 상관없다. 난 이대로 돌아가겠다, 그리 말하려는데 돌연 등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놀라 몸을 돌리니 벌떼처럼 모인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칼을 뽑아 마구 휘둘러 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은 옷의 사내들이 대도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성문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어 온다.

병사들이 그걸 보고 황급히 봉문하려 했지만 개떼처럼 밀려드는 것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마치 홍수처럼 어마어마한 인파가 궁궐 안으로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궁궐이 아비규환이 되었다.

“여, 역적 떼다!”

환관들이 혼비백산하며 외치었다. 신부가 탄 가마가 엎어지고, 여종들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자현은 그들을 제치고 달려가 대번에 눈여겨보았던 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제게 달려드는 불한당을 향해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일도에 남자의 몸이 깨끗하게 두 동강이 난다. 그 무시무시한 완력을 본 이들이 경악하며 그에게서 물러섰다.

“무슨 목적으로 쳐들어온 것이냐?”

“…….”

“대답하지 않겠다 이건가?”

자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살폈다. 추레한 몰골. 누덕누덕한 옷차림. 복면을 뒤집어쓴 얼굴에서 댕그라니 나와 있는 두 눈만 이상하게 형형하다.

도적 떼인가? 아니. 어느 멍청한 도적 떼가 겁도 없이 궁궐에 쳐들어온단 말인가. 누군가가 모반을 일으켰나? 대체 누가 음모한 것인가. 왕에게 반감을 가진 이가 자신 외에 누가 있더라. 모르겠다. 정치판과는 연이 없어 판세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자현은 곧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알 게 뭐냐. 한바탕 하고 싶은 참이었다. 어떤 뒷배가 있든 나는 분풀이를 하면 그만이다.

그는 주춤한 이들에게 달려들어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한 번의 칼질에 셋이 동강 난다. 그 무시무시한 힘에 병사들도 새파래졌다. 자현은 피로 흠뻑 젖은 칼을 들고 사방에 일갈했다.

“우왕좌왕 뭣들 하는 겐가! 예인들은 무릎을 꿇어라! 닥치는 대로 벨 것이니 바닥에 납작 엎드리라, 서서 도망가고자 하는 놈은 베여도 좋다는 뜻인 줄 알겠다!”

이처럼 무식한 말을 지껄이나, 어디 겁이 나 도망치기 바쁜 이들이 듣겠는가? 허나 정말로 가리지 않고 베어버릴 기세로 그 대단하다는 무용을 펼치니, 저게 정말 사람 구별하여 휘두르는 게 아니구나 싶어 다들 몸을 납작 숙인다.

“군병들은 뭐 하는가! 어서 봉문하지 않고! 한 놈도 도망 못 친다.”

한 놈이라도 놓아줄 성싶으냐. 잘근잘근 다져주마. 내 분 풀 곳을 찾았으니 제대로 풀리라. 자현은 얼굴 가득 미소마저 머금은 채 마구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쫓아 나온 비령은 대경 질색했다. 사람을 베어 넘기며 웃어 재끼는 저 흉악한 버릇이 또 나왔구나. 오늘로 영웅 소리도 끝인가.

“…대신 인간 백정 자현이라 불리게 되겠지.”

“뭘 멍하니 있는 거냐! 어서 도와라!”

그를 발견한 자현이 사납게 외쳤다.

비령은 긴장감도 없이 예이, 예이 중얼거리며 검을 뽑아들었다. 혼비백산하던 병사들도 그들을 따라 침입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얼마 못 가 형세가 뒤집어졌다. 하도 자현이 요란하게 날뛰니, 쳐들어온 놈들의 기세는 꺾이고, 군병들은 의기양양하여진 것이다.

역적 놈들도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도망하려 성벽을 타고 기어오른다. 그리로 병사들이 화살을 쏘았다. 맞고 굴러떨어진 이들도 있고 끝까지 올라가 성 밖으로 뛰어내린 이들도 있다. 그런 놈들 중 하나가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직전 봉화를 뒤집어엎었다. 거기서 쏟아져 나온 불씨가 사방으로 튀어 순식간에 궁전이 화마에 휩싸였다. 불길이 음식과 비단, 그리고 술, 기름에 빠르게 옮겨붙었다.

“뭐 하는 거냐! 어서 불을 끄지 않고!”

노비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비령이 외쳤다.

노비들이 허겁지겁 물통을 깨트려 불길 위에 물을 쏟아부었다. 병사들도 황급히 연못물을 퍼다 날랐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역적 놈들이 성문을 열어젖히고 달아난다.

자현은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놈들은 이미 다 뿔뿔이 흩어진 상황. 거기에 설상가상 대로와 장터에도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놈들이 도망하며 사방에 불을 지른 것이다.

‘…쫓을 때가 아닌가.’

우선은 진화부터 해야 한다. 그는 칼을 내려놓고는 혼비백산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일갈했다.

“불을 끄지 않고 무엇 하는 건가! 수로에서 물을 퍼다 날라라!”

그 호랑이 같은 음성을 듣고 우왕좌왕하던 이들이 번쩍 정신을 차린다. 그는 뒤따라온 병사들에게도 불을 끄도록 지시하고는 가까이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려 몸에 흠뻑 뿌렸다. 그러고는 매캐한 연기 속을 뚫고 들어가 솔선수범하여 불을 끄기 시작했다.

장 내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곧장 그를 뒤따라 불이 난 곳마다 물을 퍼 나른다. 그중에는 물과 바람을 부려 진화를 돕는 주술사들도 있었다. 얼마 전에 희란연을 구경하러 남방 법령사들이 떼로 들어왔다더니, 그들 덕에 인명 피해가 적은 모양이다.

‘천운이라면 천운이군.’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자체는 불운일 테지만… 피해도 크지 않겠다, 저는 속풀이를 실컷 하였겠다, 이만하면 운이 좋은 셈이지. 남몰래 한 번 웃은 뒤, 자현은 병사들에게 불이 번지지 않도록 불씨를 하나 남기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법령사들의 도움 덕택에 오래 걸리지 않아 화마를 모두 진압할 수 있었다. 역적 놈들은 놓치고 말았지만 애초에 궁궐이 쑥대밭이 되든 말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는 대충 상황이 정리된 것을 확인하곤 검댕이가 묻은 얼굴을 씻으러 우물가로 갔다. 커다란 바가지로 머리에 물을 쏟아 붓고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도 탈탈 털어 내리는데, 바쁘게 오가던 병사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레 묻는다.

“장군… 이제 어찌할까요?”

내가 군병 지휘관도 아닌데, 왜 나한테 묻는 것인지. 짜증으로 눈을 가늘게 뜨다가, 제가 먼저 이래라저래라 마구 명령질해댔던 게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장군?”

“…어찌하긴, 시신들을 태워 버리고 혹시 숨이 붙어 있는 놈은 투옥시켜라.”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그의 말을 마치 어명처럼 받들고는 다른 병사에게로 간다. 그 우러르는 듯한 태도에 너덜너덜해진 자존심이 조금 회복되었다. 그래. 나는 동정의 대상이 결코 아니야. 경외의 대상이지. 의기양양한 얼굴로 히죽 웃으며 돌아서는데, 비령이 다가와 수고했다 하며 어깨를 툭, 하고 쳤다.

“그나저나 느닷없이 이게 대체 무슨 변고인지….”

“아무렴 어떤가. 인내심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참 내… 운은 무슨 놈의 운. 혼롓날에 이게 뭔가. 몰골이 말이 아니구만.”

“흥. 치렁거리는 옷차림보다야 이편이 나아.”

비령이 그편이 더 어울리긴 하네, 하며 씩 웃는다. 빈정거리는 말에도 자현은 눈 하나 까딱 안 했다.

“재빨리 진화하긴 했다만… 피해를 수습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군.”

“바깥은 오히려 양호한 편이야. 궁궐 연회장은 아예 숯 더미가 됐네. 가륜 왕이 아주 사색이 된 꼴을 자네가 보았어야….”

문득 비령이 말을 멈추고 인파 속을 가리킨다.

“저기, 자네 신부가 아닌가?”

자현은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혼자 나다니다 넘어졌는지 소루 공주가 인파 속에 주저앉아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병사들, 하물며 종들조차 제 주인이나 지인을 챙기느라 정신없는데, 저 눈먼 계집은 아무도 보살펴 줄 이가 없어 혼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나. 그 조그만 것이 어지럽고 혼란한 것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더듬더듬 걸음을 옮기는데, 그도 사람인지라 조금의 연민은 느끼었다. 저걸 보면 제가 받은 모욕이 생각나 속이 뒤틀리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오늘부로 제 아내가 된 저 계집, 부축 정도는 해주었을 것이다.

“뭐 하는 건가, 가서 챙기지 않고.”

“걱정되면 자네가 가보게. 자네 말대로 혼례만 치르고 멀리 치워버리려 했던 계집. 상관하고 싶지 않다.”

“이보게, 왜 그리 사람이 매정하게 구는가. 보낼 때 보내더라도….”

“나를 보낼 건가.”

기이할 정도로 청아한 목소리가 바로 지척에 울려 퍼졌다. 그는 휙 고개를 돌렸다. 어찌 여기까지 찾아온 것인지, 저쯤 어디에서 허우적거리던 것이 어느새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채 사이로 잿빛 눈동자를 기묘하게 빛내며, 공주가 제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정녕 나를 보낼 것이냐.”

자현은 숨조차 멈춘 채 멍하니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코도 입술도 다 자그마해 꼭 아기 같은 얼굴에서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큰 눈이, 그렁그렁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희미한 햇빛에 옅은 회색 눈동자가 꼭 유리알처럼 반짝거린다. 그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고여 있던 물기가 이내 주르륵 긴 줄기를 이루며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계집은 소리도 흐느낌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리는 음성을 토해 냈다.

“부탁이다, 나를 곁에 머무르게 해다오.”

수수하니 화사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인데 무엇이 그리 사람 혼백을 쏙 빼놓는 것인지. 순간 정신이 아찔하였으나 그 애원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자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는 귀신 들렸다 하는 계집이다. 만나자마자 이런 우환이 터지는 것만 보아도 불길하기 그지없다. 곁에 두고 보다니, 그리 찝찝한 짓을 할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내뱉었다.

“내가 너를 원하여 아내로 맞이한 줄 아느냐? 너를 보면 울화가 치민다. 너를 곁에 두고, 어리석게 속아 귀신 공주와 혼례 한 자현이라 세상이 조롱하는 것을 참으라고? 귀신 공주도 여자라고 버리지 말라 애원을 하는 것이 그저 우습구나. 여태까지처럼 죽은 듯이 살라.”

그 말이 어찌나 살벌하고 찬지, 곁에 선 비령도 치를 떨었다. 이놈이 그리 악한 놈은 아닌데 왕 때문에 단단히 심사가 뒤틀리어 이리 박정스레 구는구나.

“가자, 비령”

휙 돌아서는 그를 소녀가 허겁지겁 붙잡아왔다. 곧장 사납게 그 손을 뿌리치려 하였으나 매달리는 그 얼굴이 어찌나 간절한지, 저도 모르게 몸이 얼어붙는다. 소녀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안다.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내로 취급하지 않아도 좋다. 곁에만 있게 해다오. 네가 원하는 대로 죽은 듯이 있으마. 없는 듯 여기어도 좋다. 그저 네가 머무는 처소에 내가 머리를 뉘일 수 있는 작은 공간 하나만 허락해 다오. 그 외엔 아무것도 원하지 않겠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꺼림칙하다고 피붙이도 돌보지 않는 것을 내가 돌볼 이유가 무어냔 말이다! 내 집에 어떤 화가 미칠 줄 알고 너를 곁에 두느냔 말이다.”

말이 심하기는 하나 사실이다. 온갖 불길한 소문이 줄줄이 엮여 있는 소녀다. 가솔들에게 어떤 해가 미칠 줄 알고 저걸 달고 사느냔 말이다. 어림도 없다.

“왕이 준 것이니 받겠으나 귀하게 대접해 줄 것을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거기서나 여기서나 너는 근심거리다.”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는 것을, 소녀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움켜쥐듯 억세게 붙잡았다.

“너는 괜찮다. 너는 나 때문에 해를 당할 일이 없을 것이다.”

“젠장, 이리 말귀 못 알아먹는 계집은….”

“정말이다! 너 같은 이는 처음이다. 생전 처음으로 보았어.”

기가 막히어 무어라 쏘아붙이려 하는데, 소녀의 하염없는 눈길에 일순 말문이 막힌다. 멀었다는 그 두 눈이 저를 낱낱이 헤아려 보는 듯했다.

소녀는 마치 제 밑바닥까지 들여다 본 뒤에, 그 안에서 무언가 한줄기 희망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간절하고 맹목적인 눈을 하였다.

일순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냐. 왜 오늘 처음 만난 제게 그런 얼굴을 하는 건가. 그 의문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가 열띤 어조로 내뱉었다.

“너는 불같은 이다. 꼭 태양 같다. 네가 호령하자 귀신들이 모두 달아났어. 그 어떤 요물도 네게 대항하지 못한다. 네, 주변만, 네 주변만 하염없이 밝아서… 그들은 가까이 오지도 못할 거야.”

“…….”

“그러니 나를 곁에 두어라. 너와 네 집엔 여느 귀신들도 얼씬 못할 것이다. 설령 거기에 내가 있더라도… 네 곁에서라면 나도… 나도, 사람처럼 살 수가 있다.”

“…네 말이 맞다 치자. 내가 왜 네 말을 따라야 하느냐.”

음산하리만치 낮은 음성에 공주의 낯빛이 흐려진다. 그것을 냉혹하게 내려다보며 자현은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같잖게도 저가 정말 왕족인 줄 아느냐? 어디에다 대고 명령하는 것인지. 우습다. 너를 거두어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대체 뭐가 있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실(失)뿐이다. 모욕의 증거인 너를 곁에 두어 수치를 당할 생각 추호도 없어.”

“하지만….”

“더는 귀찮게 굴지 마라.”

그리 매몰차게 말하고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 성큼 걸음을 옮기자, 굳어 서 있던 공주가 곧 다급하게 그 뒤를 쫓는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인파 속에 갇혀 우왕좌왕하였다.

그 모습에 시선도 주지 않고 그는 저벅저벅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비령이 뒤에 남겨진 소녀를 향해 측은한 시선을 보내며 중얼거린다.

“이보게, 곁에 두건 두지 않건 일단은 챙겨 데려가야 할 것 아닌가.”

“정 신경이 쓰이면 자네가 챙기게. 난 술이나 한 상 해야겠다.”

“자네 정말….”

“지금 기분이 말이 아니니 닥치고 있어라. 내 지금 심정 같으면….”

“기다려라!”

저것이 정말 눈이 먼 것이 맞는가. 저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저리 잘 뒤쫓아 오는 것인지, 그새 또 몇 번을 넘어진 것인지 흙투성이가 된 소루가 달려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흙먼지가 얼룩덜룩한 얼굴로 공주가 열 살배기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며 외쳤다.

“나는 내 여종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세 살배기 아들을 잃고 통곡하는 것을 들었다. 내 곁에서 속살거리던 요물이 그 어린 것을 집어삼키며 말하였다. 너를 대신하여 이것을 먹는다, 그리 말하였다.”

“…….”

“나는 내 식사를 나르던 어린 종이 발치에서 엎드려 목 놓아 우는 소리를 들었다. 제발 살려 달라 그만하여 달라 비는 것을 들었다. 그 계집 머리에 올라앉아 웃고 있던 요물이 말하기를 소루 공주 대신이라 하였다. 내 대신이라고… 내 대신이라고 하였다. 그 종은 바짝 말라 정말로 죽어버렸다.”

그칠 줄을 모르는 듯 소녀의 커다란 눈이 물줄기를 주룩주룩 쏟아내었다. 마치 막 악몽에서 깬 아이처럼 무방비하게 울며 외치는 그 처절한 말을, 자현은 망연히 서서 듣기만 했다.

“헤아릴 수가 없다. 내 업을 다 헤아릴 수가 없어. 네 말이 맞다. 나는 우환거리이며 근심거리이다. 죽은 듯이… 죽은 듯이 살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차마 채 말을 잇지 못하며 소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도 해치고 싶지 않다. 네 곁에서라면 그것이 가능해.”

“그런 시답잖은 소리를….”

“정말이야. 부디 나를 도와다오. 너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나도 노력하겠으니 곁에만 있게 해다오. 부인으로 대접해 주길 바라는 게 아니다. 여종 중 하나처럼 여기어도 좋다. 네 집에서 가장 누추한 곳이라도 상관없으니 내게 머물 곳을 허락해다오. 있는 듯 없는 듯 그리 살겠다.”

파르르 입술을 떨며 울먹울먹거리던 소녀가 무거운 듯 고개를 떨군다. 질퍽한 땅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허울뿐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왕족이 아닌가. 이리 자존심도 없이 애원해도 되는 건가. 자현은 어찌하질 못하고 거절당하면 당장이라도 죽을 듯한 그 절박한 모습을 그저 멍하니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자그만 손이 차마 놓을 수가 없다는 듯 여태 제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매달리는 그 모습이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쭐한 기분이 드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그가 아무 대답도 않고 있으니 거절인 줄 알았는지, 소녀가 다시 눈물을 쏟아내며 토해 내듯 말했다.

“내가 아무런 쓸모도 없어 그러느냐? 내게도 한 가지 쓸모쯤은 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곁에 서 있던 비령의 팔을 덥석 잡는다. 비령이 기겁하여 뿌리치려 하였으나, 소녀가 신통하게도 싸움 중 스친 제 상처를 콕 집어내는 것이 아닌가. 놀라 머뭇거리는 사이 손끝으로 팔에 난 상처를 더듬던 소루 공주가 거기에 입을 가져다 댄다.

“……!”

그 괴상한 행동에 비령이 이번에야말로 화들짝 그녀를 뿌리쳤다.

“갑자기 이게 무슨…!”

“귀신들이 말하기를 내 피는 영수요, 내 살은 영약이라 하였다.”

그녀가 입 안을 깨물어 피를 낸 듯, 입술을 훔치며 말했다. 비령은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하며 제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한데 소루의 말처럼 상처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아물어 있는 게 아닌가. 망연자실하여 팔뚝을 쓱쓱 쓸어보았다. 멀끔하다. 경악한 눈으로 돌아보자 소루가 간절한 음성으로 호소해 왔다.

“이렇듯 내 피를 바르면 어떤 상처도 낫는다. 이쯤이면 나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충분하다.”

부릅뜬 눈으로 비령의 상처를 면밀히 살피던 자현이 답했다. 꺼림칙한 혹을 갖다 붙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꽤 쓸모 있는 수확을 얻었는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에 자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다, 내 집에 머물러라. 단, 네 말대로 안주인 대접을 기대하지 마라.”

“걱정 말거라. 너에게서 무엇도 탐내지 않겠다.”

그의 허락에 공주가 울던 것도 잊고 활짝 웃는다. 가늘어진 눈꼬리에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려 턱 끝에 맺혔다. 계집아이는 닦을 생각도 않고 제 옷자락만 움켜쥔 채 고개를 연신 숙였다.

“감사하다. 자현. 정말로 고맙다.”

자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진해서 이용당할 처지에 뛰어들어 놓고는 무엇이 그리 감사하다는 것인지. 그의 뒤틀린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공주가 말하였다.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