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란국연가-4화 (4/16)

四章. 흉흉한 일

막 하루 일과를 끝낸 듯 보이는 사내 셋이 주막으로 들어섰다. 찝찌름한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며 구석진 곳에 자리한 남자들이 대뜸 술부터 주문한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듯 하나같이 햇볕에 탄 벌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리고서 씩씩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조그맣게 욕설을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그지 같은 군병 놈들….”

창가에 앉아 소면을 후룩거리던 아시타는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복장을 보아 셋 다 목수인 듯 보였다. 화재로 인해 일거리가 많아지는 바람에 어디를 가나 목수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들이 술을 따라 마시며 툴툴거렸다.

“사내 다섯 이상이 한자리에 모이지 말라니 그게 말이나 되냔 말이다. 집 한 채를 지으려 해도 최소 열은 있어야 하는데.”

“염병할 놈들 같으니.”

아무래도 군병들에게 심하게 시달림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시타는 국물을 마시는 척하며 흥미진진하게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역적 놈들이나 처잡을 것이지, 남 먹고사는 일 방해나 해대고….”

“에이, 시팔. 기분 뭣 같아서.”

술잔에 술을 콸콸 쏟아 부으며 씨부렁대던 이가 문득 주막 벽에 붙어있는 역적의 그림 중 하나를 손바닥으로 탁 내려쳤다.

“이 못생긴 얼굴을 잘 보란 말이다. 이놈과 내가 어디가 닮았다는 거냐! 애꾸눈들 같으니라고.”

“뱀처럼 쫙 찢어진 눈꼬리가 비슷한 것도 같구먼.”

“이놈이! 그러는 저는… 요 그림, 요 뚱땡이 놈과 쏙 뺐구먼! 두꺼비 같은 것이.”

“뭣이라!”

“어허, 벌써들 술에 취했나. 그만들 하게.”

그중 가장 점잖아 보이는 이가 말리자 둘 다 꿍얼거리며 술을 푸기 시작한다. 아시타는 피식 웃었다. 그날 궁궐을 습격한 무리를 찾는다고 군병들이 혈안이었다. 의심을 받고 질질 끌려갔다가 매질을 당하고 돌아왔다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화재 수습을 한다고 백성들은 잔뜩 애를 먹고 있는데, 정작 조정은 도움은 안 주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기만 하니 다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리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귀신들 활동하기가 좋아질 터인데….’

그는 욕설을 해대는 사람들의 얼굴을 걱정스레 살피었다. 요마들은 음의 기운을 좋아한다. 사람의 마음에 음기가 서리면 그것들도 기세등등하여져 보통 골치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사건 사고가 잦아지겠군.’

사발 그릇에 고인 국물을 싹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아시타는 삿갓을 집어 들었다.

엽전을 주고 가게를 나오는데 때마침 한 무리의 군졸들이 거리를 떵떵거리며 걷고 있었다. 뒷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고 선 이들이 지나는 사람마다 무섭게 눈을 부라려댄다. 조금만 수상하면 끌고 가 심문한다더니 과장된 소문이 아닌 모양이다.

아시타는 쯧쯧 혀를 찼다. 참 저놈들도 딱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놈들을 잡아들이지 못했으니 위에서 얼마나 닦달을 해댈까. 아주 속이 타들어 가는 중이겠지.

‘그 많던 무리가 다 인겁을 뒤집어쓴 요물이었다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까.’

이미 껍질을 벗고 새 인겁을 뒤집어쓴 요물들을, 눈이 어두운 인간들이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나조차도 아직까지 꼬리를 밟지 못했는데….’

“이봐.”

삿갓 아래로 군병들에게 측은한 시선을 보내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다. 아시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니 최근 들어 아무렇지도 않게 하극상을 해대는 난폭한 성질머리의 사제(師弟)가 한껏 불손한 얼굴을 하고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괜히 수상쩍어 보인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지 마라.”

“…여란, 이제 그만 호칭을 좀 어떻게 해 보아라. 사형에게 ‘이봐’는 너무하지 않느냐.”

“당장 사문에 네놈 행태를 찌르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한 줄 알아라.”

지독한 계집 같으니라고. 아시타는 눈물을 삼켰다.

“뭣 좀 알아낸 건 있나?”

“…이제는 하대가 너무나 자연스럽구나.”

“뭣 좀 알아낸 게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고압적인 태도를 버릴 의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시타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했다. 도성 전체가 요기에 뒤덮여 있어 찾는 것이 쉽지가 않아.”

“…찾는 시늉만 하다 어디서 술 푸다 온 것은 아니겠지?”

“어허! 나를 어찌 보고!”

“네놈을 잘 보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여란이 정말로 의심스럽다는 듯 킁킁거리며 옷자락에서 술 냄새를 맡았다. 주막에서 냄새가 밴 것인지 계집의 눈초리에 날이 섰다.

아시타는 기함하며 손을 내저었다.

“출출하여 국수 한 그릇 먹은 것이 다다! 정말로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어!”

증명이랍시고 코앞에다 하아, 하고 입김을 불었더니 여란이 기겁을 하며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시궁창 냄새난다! 어디다 입을 대는 거냐!”

“시궁창 냄새가 나다니! 말이 심하잖아!”

충격 받은 얼굴로 버럭 언성을 높이자 지나는 이들마다 뭔 일인가 하며 그들을 힐끔거렸다. 아시타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여란이 살벌하게 노려보다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질질 끌고 갔다.

“소란을 부려 눈에 띄지 말라 말한 건 네놈이 아니냐! 좀 주의를 해라.”

“네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해서 그런 게 아니냐. 지독한 사제 때문에 내 여린 마음이 아주 너덜너덜해졌다.”

“여린 마음 좋아하시네.”

여란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앞으로 어째야 좋을지 구체적인 계획이나 말해 봐라. 언제까지고 이렇게 시간만 허비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놈들이 아주 꼭꼭 숨었는데 나라고 별수가 있겠느냐. 실마리를 잡을 때까지 이리 조사하는 수밖에는….”

여란이 도움이 안 된다 하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시타는 정말로 울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러는 그쪽에는 별다른 일 없느냐?”

“최근 들어 오가는 이가 많아졌다는 것밖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오가는 이가 많아지다니?”

아시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요괴들의 행방을 조사하는 동안 여란은 소루 공주의 신변을 살펴왔다. 요괴들이 근처에서 얼씬거리면 붙잡을 생각으로 요 며칠 동안 자호 주변을 잠복해온 터라 수척해진 얼굴로 그녀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원래가 방문자가 많은 집안이니 그리 큰 변화는 아니다. 다만 이전에는 양민들이나 소상인들이 자주 들락날락했다면, 요즘에는 호화로운 가마가 자주 출입한다.”

“…요마가 둔갑한 것처럼 보이는 이는 없었나?”

“어느 요마가 감히 거기에 숨어들 수 있겠나. 요력이 느껴지는 이는 없었어. 그냥 그 집안이 아주 잘나가는 모양이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 아시타는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가 찝찝하다. 영웅의 명성이 자자하니 단순히 집안이 부흥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제 그 집안은 살펴볼 필요 없잖아.”

가슴께에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시타는, 여란의 불만스러운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어떤 요괴도 그 집안에는 얼씬 못 한다. 뭐 때문에 이리 감시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군.”

“…귀신들은 소루 공주를 노리고 그 작당했던 것이다. 언제고 다시 기회를 노릴 거야. 동태를 살핌이 당연하다.”

“어차피 그 남자가 있는 한 소루 공주는 안전하다. 더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나도 요마 추적을 돕겠다.”

여란이 평소보다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어지간히도 맡은 일이 싫은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였다. 그들은 음(陰)과 양(陽) 중에서도 음을 갈고 닦는 법령사였다.

요괴들과 자주 접하며, 피안 가까이에서 사는 인간. 자연히 수양을 하다 보면 음기가 몸 안에 축적되게 되어 있었다. 법력을 길러 마도의 길로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술법은 음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그 자현이라는 자는 참으로 껄끄러운 대상이었다.

그 사내가 한 무리의 귀신들을 일갈에 내쫓았던 일을 떠올리며 아시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양기가 극성을 이루어 화마와 같은 인간이라니….’

장안에서 그 남자를 보았을 때 아시타는 오한마저 느끼었다. 불같은 기세. 사내는 존재감만으로 사방을 압도했다.

천하를 휘어잡고자 태어난 인간이란 저런 것인가.

그 기운이 어찌나 드세던지 어설픈 잡귀들은 곁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음이 모두 닳아 없어져 소멸해 버렸다. 큰 요마는 아예 접근이 불가능할 것이다.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반발이 강해지니… 아마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을 입겠지. 음은 양보다는 불안정한 기운이 아니던가.

한마디로 어떤 마(魔)도 그자를 해치지 못하는 것이다.

‘귀(鬼)를 끌어들이는 소루 공주와는 천생연분이라면 천생연분이군.’

그렇다고 해도 그 사내만 믿고 소루 공주를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짐짓 엄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힘든 것은 알겠다만… 그래도 당분간은 살펴봐 주어라. 그자가 집을 비울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자의 기운이 집안에 너무나 강하게 머무르고 있어 요마는 숨어들 수 없어.”

“요력이 강한 요괴라면 얘기가 다르다.”

여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천기를 타고난 자를 가까이했다간 도리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상하고 만다. 요괴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소루 공주를 노릴까?”

“그러고도 남지.”

확신을 담은 대답에 여란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시타는 소란 중에 보았던 소루 공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인파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을 멀리서 언뜻 본 것이 다였지만 그는 곧바로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야 이 모든 소란이 이해가 되었다.

“그 사내가 천기를 타고난 인간이라면… 소루 공주는 천인 그 자체다. 귀신들이 그리 쉽게 포기할 리가 없지.”

“…뭐?”

덤덤히 내뱉은 말을, 여란이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한다. 아시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줄줄 말을 이었다.

“수천 년에 한 번씩 천인이 사람으로 잘못 태어난다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본 것은 나도 처음이다. 천인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어느 요물이 이를 놓치려 할까. 스승님의 말씀대로 이 나라에 큰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

“자, 잠깐…! 사람들이 귀신 공주라 부르는 이가… 사실은 천녀란 말이냐?”

“천녀라고 해도 불완전하다. 신력이 미미해.”

아시타는 계속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계곡에서 귀신들이 부른다는 그 노랫말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소루 공주의 신력은 ‘눈’에 있었던 거겠지. 요괴가 그것을 훔쳐 달아나는 바람에 신력을 잃은 것이 아닌가 싶다.”

“요력과 신력은 한데 섞일 수 없다! 가져가도 제게는 독밖에 되지 못할 터인데 뭣 때문에 그걸 가져갔단 말이냐.”

“후에 소루 공주 잡아먹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미리 빼앗아 둔 것이겠지. 아마 보통 요괴는 아니었을 것이야.”

아시타는 일전의 사건을 주모한 것이 바로 그 요괴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직감일 뿐인지라 거기까지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여란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믿기지가 않는군…. 천인이라니. 그런 이를 두고 다들 불길하다 떠들고 있었던 건가.”

“불길한 것이 아니면 무어냐.”

아시타는 심드렁하니 말했다.

“천기를 타고난 이는 영웅이 된다. 그 기운을 천하에 떨치라 하늘이 내린 것이지. 하지만 인간으로 잘못 태어난 천인은 섭리에 어긋난 존재. 그 태생부터가 오류다. 천계의 것이 천계에 있지 않고 땅 위에 났으니, 이처럼 천지가 술렁거리며 시끄러워지는 게 아니냐. 눈이 밝은 귀신은 귀신대로 탐심에 애를 절절 끓고, 눈이 어두운 인간은 인간대로 그것들 법석에 죽어 나가니… 소루 공주는 실로 불길한 것이 맞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천인이다. 몰랐으면 몰랐으되 알면서도 그리 말하는 것은 심하다.”

“요괴든 천인이든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면 무슨 차이가 있나.”

“차이가 없다니! 천인과 요괴를 어찌 동일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단 말이냐! 더군다나 그 공주는 의도하고 주변에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다. 다 탐욕스러운 요괴들이 멋대로…!”

버럭 언성을 높이던 여란이 갑자기 말을 멈추며 휙 고개를 돌린다. 흉흉한 기운을 느끼고 아시타도 번쩍 고개를 돌렸다. 섬뜩한 독기가 느껴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악취처럼 은근하게 퍼지고 있는 음산한 공기. 얼마 가지 않아 도성 외곽, 개울물이 흐르는 곳에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그 주변으로 스멀스멀 탁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저기가 이 독기의 근원지인가.

아시타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군병 둘이 뭔가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로 시선을 내린 아시타는 흠칫, 등을 굳혔다.

날짐승에게 물어뜯긴 듯 너덜너덜한 시체 한 구가 자갈밭 위에 널브러져 있다. 이제 서른이나 되었을까. 피가 다 빠져 허옇게 질린 얼굴이 꼭 귀신의 것처럼 실로 참혹하였다. 기울어 가는 해의 붉은 기운이 그 얼굴 위에 사이하게 어린다.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리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죽어간 건가.

군병들이 그 시체의 몸을 뒤집었다. 모여선 이들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온갖 흉한 꼴에 익숙한 아시타조차도 토기를 눌러 참아야 했다.

그 시신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꼭 짐승이 파먹은 것처럼 움푹 파인 가슴팍 안에는 심장 대신에 허언 구더기가 드글드글하다.

그것을 본 몇몇이 자갈밭 위에 왈칵 토악질을 했다. 등을 돌려 황급히 자리를 뜨는 이도 있었다. 제법 담력 있는 사내들은 어떤 흉악한 짐승이 여까지 내려와 사람을 잡아먹은 것이냐며 분개하였다.

‘짐승이 한 일이 아니다.’

아시타는 여란을 돌아보았다. 시체에서 풍기는 독기에 입을 틀어막고 있던 여란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는 요괴가 한 짓이다.

아시타는 이를 갈았다. 요마 놈들, 대체 무슨 작당을 한 건가. 스승이 예고했던 흉사가 이제 시작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예감에 등줄기가 서늘하였다.

***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

또다시 그 꿈인가.

소루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바닥없는 굶주림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도무지 채울 길이 없는 깊고 깊은 허기가 비통하게 요동친다. 그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가 집요하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를… 먹고 싶은 것이냐.’

그녀는 그 절절한 어둠 속에 움츠리고 있는 귀신을 향해 물었다. 불같이 끓어오르는 두 눈을 마주 본다.

‘그리도 나를 먹고 싶으냐.’

그 물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어둠 속에서 검은 손이 뻗어져 나왔다. 크고 앙상한 손가락이 시야를 검게 물들인다. 그 거대한 몸에 짓눌린 순간, 소루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다음 손님이 오셔서….”

지척에서 들려오는 굳은 음성에 소루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새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의자 위에 늘어진 몸을 바로 세우자 곁에선 시비가 그럼 모셔오겠습니다, 하고는 후다닥 방을 나섰다.

소루는 반쯤 꿈의 잔상에 취한 채 솜털이 보스스 일어나 있는 팔을 매만졌다. 그러다 화끈한 통증을 느끼고 화들짝 손을 떼어낸다. 칼자국으로 손가락이 거슬거슬했다. 아팠지만 그래도 그 통증이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여기는 왕실 사당이 아니다. 귀신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도 모르고 중얼거리며 불안감을 잠재웠다. 잠시 뒤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온다. 소루는 말없이 앉아 방문자를 맞았다.

***

뒤채에 사람이 늘었다. 말수가 적고 태도가 조심스러운 시비 셋과 본채를 오가며 잡일을 하는 남자 일꾼 하나, 그리고 감시하듯 입구를 떠나지 않는 무인 한 명까지…. 그리 넓지도 않은 건물에 사람들이 복작복작 늘었음에도,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의 거처는 염이와 단둘이서 지낼 때보다 조용하고 삭막하여졌다.

소루는 소리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필요한 것을 두고 나가는 인기척을 느끼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새로 온 시비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결코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사당에서 저를 돌보던 무녀들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가까이 오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 태도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새삼 외롭게 느껴지는 것을 보아 그새 염이의 재잘거림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나도… 배가 불렀구나.’

그녀는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시비가 두고 간 약과 붕대를 집어 들었다. 익숙하게 상처에 고약을 바르고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붕대를 감았다. 손가락이 뻣뻣하여 매듭을 묶는 것이 조금 어려웠다. 딱지 때문에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을 힘주어 구부리자 투둑, 하고 뭔가가 찢어지는 느낌이 났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소루는 미간을 찌푸렸다. 만져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물어 가던 것이 터졌나 보다.

소루는 거기에도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고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팔과 손목도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손바닥은 상처가 아무는 게 더딘 탓에 건들지 않아 비교적 양호하였지만 더는 생채기 낼 곳이 없으면 거기에도 칼을 대야 할지 모른다.

몸이 아픈 이들이 제 거처를 찾아오기 시작한 지 벌써 보름째. 손가락에서부터 시작된 상처는 어느새 팔을 타고 서서히 올라와 양팔을 가득 메운 상태였다.

“…다음 분께 들라 이를까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소루는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았으면 터진 상처에 약을 바르지 않았을 텐데….

손가락을 매만지길 잠깐, 그리하라 답하자 문이 열린다. 다리가 불편한 자인지 절뚝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선 이가 어색한 듯 흐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도움을 받으러 왔소이다.”

나이 지긋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소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소매를 걷어 성한 부위를 찾아 조심스레 칼을 대었다. 차가운 쇠붙이가 살갗에 스며든다. 그 오싹한 감촉에 가볍게 진저리치며 소루는 더듬더듬 조그만 술잔을 찾아 그 위에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그것을 앞으로 내밀자 사내가 말없이 받아들었다.

한참 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망설이고 있는 것이리라.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것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 안에 핏방울을 털어 넣는다. 방문자 역시 망설임을 떨쳐냈는지 꿀꺽, 하는 소리를 내더니 탁, 하고 탁상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뒤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박자박, 발소리가 이어졌다. 서탁 주변을 고른 소리를 내며 한참을 걷던 남자가 이윽고 조그만 목소리로 내뱉었다.

“…고맙소.”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꽉 잠긴 음성이었다. 더는 말을 잇지 못하는 남자를 향해 그녀는 조심스레 웃어 보였다.

곧 남자가 조용히 방을 나간다. 그가 오늘의 마지막 방문자였던 듯 시비가 문을 걸어 잠갔다.

인기척이 멀어지고 그녀는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조심스레 상처를 지혈했다. 피부 위에 난 상처 하나하나가 마치 기록처럼 느껴지었다.

누군가의 열병, 누군가의 병든 눈, 성치 못한 다리, 혼미한 정신, 마비된 팔, 굳은 혀, 머리통만큼 커져가던 혹, 누렇게 곪아 가던 피부, 제 기능을 못하던 심장….

그런 것들이 제게는 작은 생채기가 되었을 뿐이다. 그 작은 흔적이 거듭 쌓여 보기 흉하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마치 피부 위에 연륜처럼 새겨진 흉터를 쓸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늘 남에게 해악을 끼치며 살아가던 저다.

누군가를 도왔다고 하는 기록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 자랑스럽게 느껴지지 않나. 어차피 누구에게도 아름답다 여겨질 일 없는 몸이었다. 열병에 걸린 어린 소녀를 치료해주었던 그날 이후 한 번도 찾아온 적 없는 자현을 떠올리며 소루는 낯빛을 흐렸다.

서툴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손길을 떠올리며 제 머리를 한 번 쓸어 본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고, 어색한 손길이었지만 그 손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는 그랬다. 저를 성가셔 하고 불쾌해 하는 기색은 있을지언정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하긴, 그 사람이 귀(鬼)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아마 그는 세상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돼….’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곳에 있는 것 같다. 보송보송 마른 양지 위에 누운 것처럼 따뜻하고 평온한 세계. 소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듬더듬 창가로 걸어갔다.

스르륵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바라 마지않던 적막감. 슬프게 느낄 이유가 없었다. 상처가 화끈거리고 쓰리지만 사당에 갇혀 의미 없이 흘려보내던 하루하루보다는 낫다. 혼자인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두렵다.

그러니까 어떤 취급을 받아도 괜찮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뻐.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여태까지의 부질없는 삶도 조금의 의미가 생긴다. 나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살아온 거였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만나러 와주지 않아도, 나를 이용할 뿐이라고 해도, 여전히 당신은 내 은인이야. 당신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이 깜깜한 암흑 속을 밝혀주었다. 아무런 쓸모도 없던, 저주받은 계집에게 가치를 부여해 주었다. 나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

‘그러니까, 이런 상처쯤은 얼마든지….’

그녀는 창가에 엎드려 눈꺼풀 위를 만져보았다. 어둠 속이 환하게 밝아지던 광경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생경한 감정으로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 어린 날 사당의 좁은 창틀 사이로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안타까움에 목이 메여 오는 듯한….

‘생에 처음으로 느껴본 찬란함이다. 그리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녀는 점점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본능적으로 억눌렀다. 그 사람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곁에 머물게 해주는 것 그 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슴 한편에 아른아른 피어오른 열기는 가실 줄을 몰랐다.

***

“최근 들어 자네의 집에 오가는 이가 그리도 많다면서?”

드디어 인내심이 닳아 없어지셨나. 억지웃음으로 뒤틀린 왕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자현은 속으로 조소했다. 웬일로 궁궐에 불렀나 했더니만 드디어 트집을 잡아 주실 작정인가 보다.

“다들 자현이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 둔 것 아니냐며 쑥덕거리더란 말이지.”

“보잘것없는 지방 출신 귀족의 집, 뭐 대단한 게 있겠습니까.”

과거 그가 직접 제게 해주었던 말을 그대로 읊자 가륜 왕의 미소가 일그러진다. 근엄해 보이는 그 얼굴 위로 치졸함이 언뜻 드러났다. 마치 장군과 같은 풍채. 위압감을 풍기는 선이 굵은 얼굴과 엄격해 보이는 눈매. 그 사내다운 풍모와 달리 가륜 왕은 소인배였다. 그러니 나라의 지존이란 자가 별 볼 일 없는 무관 하날 어쩌질 못해 앓는 게 아니냐. 자현은 냉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저 사교활동에 새롭게 재미를 들린 것뿐입니다. 좋은 이들과 친분을 쌓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까.”

“놀랄 노자로군. 자현이 사교에 흥미를 가지다니. 심경의 변화를 준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진심으로 묻는 건가. 자현은 빈정거림을 삼켰다. 술잔을 기울이던 가륜 왕이 돌연 느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결혼을 하더니 자네도 좀 차분해진 모양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중매를 서 줄 것 그랬군.”

움켜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가륜 왕이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처가 생긴 것만으로 이럴진대 후사를 본다면 어찌 될지, 실로 궁금하구나. 곧 확인할 수 있을 테지?”

자현은 이를 악물었다. 태연한 척 가장하고 싶었지만 절로 어깨가 부르르 떨리었다.

그리 날 물 먹여 놓고, 이제는 그것으로 조롱까지 해? 양심도 없는 작자 같으니.

불손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왕의 얼굴에 만족감이 서린다. 제가 분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을 흠뻑 즐기는 것이 분명하다. 자현은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소인의 가족계획이 궁금해 부르셨습니까.”

“어찌 지내는지도 궁금하기도 하였고.”

그가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용건도 있어 겸사겸사 불렀네.”

“…하명 하시지요.”

“자호가에 뛰어난 무인들이 그렇게나 많다지? 명성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내 귀에도 들려오더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의심스레 눈을 가늘게 뜨는데 왕의 덤덤한 목소리가 고막을 찌른다.

“그 대단하다는 자호가의 무인들을 써볼까 하고 말이야. 알다시피 아직까지도 역적패당을 붙잡지 못했네. 자네가 도와준다면 일에 진척이 있을 테지.”

“소인은 전쟁터나 누벼온 일개 무관일 뿐입니다. 제 집안사람도 마찬가지. 이제 막 훈련을 시작한 햇병아리들이 태반인데 조사를 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지요.”

“겸손을 떨다니 정말 자네답지가 않군. 내게 이휼의 목을 베어 바치던 그 패기는 어디로 갔나?”

왕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면… 돕고 싶지 않은 다른 이유라도 있나?”

그제야 자현은 왕이 역모의 뒷배로 저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실소를 흘릴 뻔하였다. 자현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짐짓 심각한 낯을 해 보였다.

왕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의심이었다. 제가 드러내는 적의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노골적이다. 더군다나 갑자기 제 집안에 유력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한 데다가 무인들의 수가 배로 늘었다.

동기도 있겠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만한 일을 꾸밀 만한 여력도 있어 보이니, 이놈이 자작한 게 아니냐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면 어찌해야 좋을까. 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냉큼 그러마, 하고 협조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음모한 것이라 믿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증거가 없다. 오히려 얕은 생각으로 협조하마, 했다가 누명을 쓸 수도 있는 일. 제게 거스르는 이를 찍어 누르는 왕의 간계는 궁궐에서도 유명하지 않던가. 무엇을 음모했는지 알 수 없는 일. 이래저래 얽히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자현은 결론을 내리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질문이 참으로 이상하십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이냐?”

“돕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냐니… 차라리 돕고 싶은 이유가 있냐고 물어보십시오. 제가 집안사람들을 내어주면서까지 폐하를 돕고 싶겠습니까?”

왕의 곁에 대기하고 선 환관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켠다.

왕의 얼굴이 노기로 시뻘게졌다. 술잔을 움켜쥔 손에 부들부들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제게 집어 던진다.

자현은 일부러 피하지 않고 맞았다. 댕, 하고 이마에 묵직하게 날아든 것이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다.

“불측하고 오만한 놈! 네놈이 진정 불경죄로 옥에 갇혀 봐야 고분고분해지는 것이냐!”

“저 나름대로 왕께 성심을 다하는 것이니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헤아려 주시지요. 속내를 감추고 음흉을 떠는 것이 진정 충심이겠습니까?”

“이… 고얀! 고약한!”

왕이 큼지막한 손으로 탁상을 탕탕 두드렸다.

당장이라도 저 불경한 놈을 당장 끌어내라 외치고 싶겠지.

경련을 일으키는 입꼬리를 보며, 자현은 웃음을 삼켰다. 현재 민심이 궁궐에 적대적인 것을 가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라의 영웅이라 칭송받는 자를 벌해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잠깐의 후련함뿐.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전처럼 제가 정치판에서 고립되어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자호가를 방문하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고관 대신이 줄을 이루고 있다. 제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구해 줄 것을 약조 받았으나 그리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은밀히 소문이 나도는 것까지 다 막을 수는 없는 일. 다 죽어가던 이가 씻은 듯이 낫고, 근심 걱정으로 안색이 어둡던 이가 환한 얼굴로 나다니니 대체 무슨 일이냐, 어찌 된 것이냐, 주변에서 얼마나 달달 볶아댔겠는가.

그들의 지인 중에는 저처럼 가족이나 친인척이 병을 앓고 있는 이도 있을 터. 그들이 울며불며 비법을 좀 알려 달라 애걸복걸하는데 당해낼 수 있겠는가. 마지못해 너에게만 알려주는 것이다, 자호가에는 만병을 치료하는 영약이 있다,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 보아라 그리 언질을 주었다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 덕에 명부에도 없는 이들마저 제집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자현에게 신세 진 고관 대신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어지간한 명분이 없이는 저를 어쩌질 못한다는 것을 자현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붉으락푸르락하던 이가 더는 호통을 치지 못하고 네놈 얼굴 더는 마주 보고 싶지 않다, 어서 물러가라 일갈한다.

자현은 꾸벅 고개를 한 번 조아리고는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등 뒤로 물건 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지간히 속이 타는 모양이군.’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몸을 돌렸다. 머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히죽 웃고 있는 제 모습이 꽤나 음험해 보였는지, 문 앞에 대기하고 서 있던 궁녀들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자현은 그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은 앞으로 왕이 어찌 나올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 성질머리에 저를 곱게 두고 보지는 않을 터. 앞으로 무슨 트집을 잡으려 들지 모르니 방비를 단단히 해야겠다, 그런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데 저편에서 누군가가 시녀들을 이끌고 오는 것이 보인다. 무심코 고개를 든 자현은 곱게 차려입은 가란의 화사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녀 역시 제 모습을 발견한 듯 걸음을 멈춘다.

“…오랜만입니다, 장군.”

머루처럼 까만 눈동자를 당혹스레 깜빡이던 것도 잠시, 평소 처세에 능한 사람답게 가란이 곧장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 태연한 얼굴에 속이 뒤틀리어 자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본래 속 감정을 쉬이 내비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처음 청혼을 넣었을 때도 싫은 기색도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입가를 가리며 온후하게 웃던 사람이다. 그 모습에 막연히 제가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해왔건만, 그저 아둔한 사내놈의 착각이었던가. 자현은 쓰게 웃었다. 그러니 제가 원치도 않는 혼례를 치렀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리 평온한 얼굴을 하는 게 아닌가.

태연하게 웃는 여자에게 의례적인 인사말을 하고 싶지 않아, 그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고는 벽 쪽으로 비켜섰다. 그냥 지나가라 한 뜻이었건만 가란은 스쳐 지나가는 대신 사분사분 다가와 그의 얼굴을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얼굴에… 피가 흐릅니다.”

자수가 새겨진 노란 천 조각이었다. 그것을 곱게 접어들어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부드럽게 훑어 올리더니 상처를 조심스레 누른다. 그녀의 단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흉이 지면 어쩌시려고요. 어서 의원에게 가보세요.”

“…동정이십니까.”

그는 제 얼굴에 와 닿는 그녀의 손을 움켜쥐며 다소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녀의 낯빛이 흐려졌다.

“무슨….”

“아니면 이리된 제 처지에 죄책감이라도 느껴 이러십니까.”

“…….”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습니다.”

아내 삼으려고 결심하였던 이다. 몹시도 탐내어 손에 넣으려고 했던 여인. 그런 이의 얄팍한 호의에 넋 빠진 얼굴을 하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손을 냉정하게 밀어내고는 몸을 바로 세웠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폐하를 만나러 오신 모양인데… 현재 심히 언짢으신 상태일 테니, 부디 마음을 잘 달래 주시지요.”

“자, 장군! 어찌 이리 무엄할 수 있단 말입니까!”

파리하게 질려 아무 말 못 하고 서 있는 공주를 대신해, 그녀의 시녀가 경을 쳤다. 자현은 그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한 번 던지고는 휙 그녀들을 지나쳐갔다.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몸을 뜨는 순간 그녀의 슬픈 듯한 얼굴이 언뜻 눈에 들어왔으나 그는 모른 척 쿵쿵 걸음을 옮겼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령이 난간 위로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미움받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나.”

“…싸구려 동정을 받을 바에야 그편이 낫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단 말 못 들어 봤는가.”

자현은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 푸대접으로 한을 품을 정도라면 제 안에 쌓인 앙금은 한여름에 서리가 아니라 폭설을 내리게 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는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그녀를 원한다고 해서 아양을 떨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하하, 과연.”

비령이 부채를 펼쳐 들며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가란 공주에게 품은 감정은 연정이라기보다는 정복욕에 가까운 것이로군.”

놈을 지나쳐 저벅저벅 궐문을 향해 걸어가던 자현은 우뚝 멈춰 섰다.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의 의미일세.”

“어처구니가 없군. 그녀를 얻고자 목숨도 내걸었다. 그것이 연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정복욕과 소유욕 그리고 왕에 대한 반감과 오기에서 기인한 집착이 아닌가.”

자현은 이놈이 또 흰소리로 내 머릿속을 어지럽혀 놓을 심산이구나, 하고 크게 코웃음을 쳤다.

“사내가 여인을 제 것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연정이다. 남방에서 온 괴상한 연애론 따위가 도성에서 유행이라더니, 네놈도 그런 헛소리에 넋이 빠졌나.”

“연애론 따위라니… 어디로 보나 사랑에 빠진 사내의 발언은 아니구먼.”

“쓸데없는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앞으로의 일이나 생각해라.”

매몰차게 쏘아붙이자 비령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자현은 인상을 쓰며 휙 몸을 돌려 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 옆을 비령이 촐랑거리며 뒤따라왔다.

“그래서… 우리의 왕께서 무어라 하시더냐.”

“예상했던 대로다. 집에 오가는 이가 왜 그리 많느냐 속을 떠보려 하더군. 아직까지 소루의 비밀이 알려진 것 같진 않아.”

“하하, 아무렴. 다들 이쪽에 하나씩 약점이 잡혀 있는 처지라 자네에게 불리한 짓은 하지 않을 걸세.”

몇몇 놈들이 친지들에게 자호가에 가면 병을 고친다 조심스레 귀띔하기는 하였지만, 약속대로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언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령이 병을 고치고 난 다음 입을 싹 닫지 못하도록 가문의 인장이 찍힌 각서나 비밀문서를 미리 받아 낸 덕이다. 그 능수능란한 수법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간 대화는 그게 다인가?”

“또, 나에게 반역자들을 잡아들이는 데 협조하라 하더군.”

의외의 말에 비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군병 지휘관 자리에 자네를 임명하겠다는 뜻인가?”

“그럴 리가 있느냐. 내 직위는 그대로 두고 집안의 무인들만 맘대로 가져다 쓰겠다더군.”

비령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무어라 답했나.”

“내가 미쳤냐고 했다.”

“…그래서 그 꼴이구만.”

비령이 피딱지가 굳은 이마를 가리키며 혀를 끌끌 찼다. 자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술잔에 얻어맞은 부위를 소매로 대충 쓱쓱 닦아내었다. 그 모습에 비령이 한숨을 푹 내쉰다.

“아프지도 않나. 우악스럽기는.”

“흥, 이까짓 것도 상처라고.”

“안 그래도 살벌한 얼굴에 흉까지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나. 기껏 훤칠하게 태어나서는 그렇게밖에 사용을 못 하는가?”

“계집도 아니고… 사내 얼굴에 흉터 한두 개쯤 생기는 게 어떻다는 거냐. 시답지 않은 소리 마라.”

“제법 길게 찢어졌네. 가륜 왕, 왕년의 실력이 죽지 않았어.”

놈이 놀리는 것인지 걱정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투로 지껄인다. 그는 손끝으로 상처를 더듬어 보였다. 그 말대로 제법 흉터가 길다. 일부러 피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다. 쯧, 하고 혀를 차며 얼굴에 굳은 피딱지를 긁어내는데 비령의 경박한 목소리가 고막을 자극해 왔다.

“뭐, 자네 집안에 만병통치약이 있으니, 괜한 걱정인가. 어서 가서 부인에게 도움을 받게나.”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줄곧 의도적으로 생각지 않으려 했던 여자가 불쑥 머릿속에 떠오르자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자현은 식은 음성으로 내뱉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 떨지 마라.”

“호들갑이라니… 금방 낫게 할 수 있는데 뭣 하러 상처를 끌어안고 있나.”

그는 대답 대신 발걸음을 빨리했다. 저를 향하던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동자가 떠오르자 더욱 불쾌한 기분이 든다. 정말 보이지 않는 게 맞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곧게 향하던 눈길.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 한편이 뒤숭숭해졌다. 실로 생경하고 낯선 감각. 그것이 싫어 자현은 일부러 방문하는 이들의 관리도 비령에게 떠넘긴 채 뒤채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는 이를 만나는 경우는 있었지만 치료 행위를 하는 자리에는 가지 않았다.

그 웃는 얼굴도, 초연한 태도도 보고 싶지 않았다. 조그만 계집애가 덤덤히 제 몸에 칼을 대는 것도 보고 싶지 않다. 모순적이고 옹졸한 감정이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 여자가 꺼림칙하고 싫어 참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제가 왕에게 받은 모욕이 떠올라 불쾌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란 공주가 아니라, 노비도 꺼리는 귀신 공주와 혼례하게 된 제 처지에 새삼 화가 치밀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고맙다. 자현….”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여자의 말과 태도를 떠올리며,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주름이 잡히며 이마가 쓰라려 왔다. 하지만 그 여자에게 발걸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리 둘 것이다.

너같이 괴상한 여자, 나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그는 소루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떨치듯 뚜벅뚜벅 성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

최근 들어 도성에 흉흉한 일이 있는 것을 모르느냐, 네가 이 시간에 어딜 나간다는 것이냐 만류하는 친구를 뿌리치고, 련은 으슥한 밤 몰래 기루를 빠져나왔다. 그녀의 달처럼 고운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났다.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라 주체할 수 없어 련은 달뜬 숨을 몰아쉬었다.

늘 검은 장포를 입고 저녁에 들러 술 한 병을 마시고 가는 이. 교태를 부리는 기녀들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오로지 술 한 상을 비우면 덤덤히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는 그이. 그이를 사모하는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매일 밤 그가 찾아오면 기녀들은 앞다투어 신경전을 벌였다.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홍릉의 기녀들이 그 얼굴 한 번이라도 훔쳐보려고 안달복달을 하였다.

그 앞에서는 체면도 자존심도 챙길 수가 없다.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리도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녀는 달빛을 받으며 으슥한 골목에 기대서 있는 이를 발견하고는 황홀한 낯을 하였다.

백자 같은 피부, 길고 우아한 목덜미, 훤칠한 키와 늘씬한 몸매…. 머리칼은 또 어떤가. 궁궐에 납품하는 어느 비단도 저 폭포수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비견 될 수 있을까. 그 윤기 흐르는 까만 머리채 사이에 언뜻 보이는 우아한 목줄기는 또 어떻고.

기녀는 숨조차 멈추고서 그 모습을 탐닉하듯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듯 사내가 돌아본다.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그 얼굴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조각장이가 평생을 다듬은 조각상도 저보다 정교할 수 있으랴. 시원하게 뻗은 반듯한 이마에 사내치곤 좀 가는 우아한 눈썹, 오뚝하고 곧은 콧날에 요염한 입술, 무엇보다… 무엇보다, 그 두 눈. 혼백을 쏙 빼앗아 갈 듯 아름다운 그 눈.

련은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한달음에 달려가 사내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는 마주 안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것만으로 가슴이 녹아내렸다. 닿는 것만으로 황홀해지는 아름다운 사람.

“저를 불러 주시다니… 꿈만 같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표정 없는 얼굴.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눈길. 어째서 이리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얼마나 애를 태웠던지… 사모하는 마음이 이리도 깊은 것인지, 천녀(賤女)는 생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련은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황홀히 말했다. 하룻밤 유희의 대상일 뿐이라도 좋다. 이 품에 안길 수만 있다면, 하고 얼마나 바라왔던가.

“공자님을 사모하고 또 사모합니다.”

“사모… 해?”

낮게 울리는 그윽한 음성에 그녀는 눈을 들었다. 사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사내의 물음에 련의 꽃 같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을 친다. 치렁치렁한 소매로 수줍게 얼굴을 가린 채 그녀는 앙탈을 부렸다.

“심술궂으신 분. 뻔히 알면서 물으십니까.”

사내의 눈이 어둠 속에서 신묘한 빛을 머금는다. 넋을 잃을 것만 같다. 황홀히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사내가 말한다.

“날 사랑한다면… 입을 맞추어 보아라.”

낮게 울리는 음성에 간장이 다 흐물흐물해진다.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련은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치켜들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온 마음을 다 빼앗길 듯 매혹적인 그 입술 위에 살그머니 제 입술을 대었다.

얼음장처럼 차갑다. 데워주고 싶다.

뜨겁게, 데워주고 싶어.

그녀는 입을 벌렸다. 풍류 공자들도 살살 녹였던 기교는 어디로 가고 그저 마음이 달아 서툴게 혀를 밀어 넣는 것이 전부인 입맞춤. 제 몸만 뜨거워질 뿐 사내는 차갑다. 애달픔에 련은 몸서리쳤다. 무정할 정도로 반응 없는 몸을 끌어안고 격렬히 입을 맞추다가 가쁜 숨을 내쉬며 슬며시 떨어지었다.

그가 품에 안아 준다. 열넷이 되던 해부터 수없이 반복해왔던 일에 어째서 눈물이 날 것 같은지 알 수 없다. 가슴이 북받쳐 올라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 부둥켜안고 있길 잠시, 이윽고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역시…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

“공자… 님?”

차가운 음성에 몸을 굳힌 것도 잠시, 옷고름을 풀어헤치는 손길에 련은 다시 녹아내렸다. 사내가 봉긋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련은 황홀하게 신음을 토해 냈다. 사내는 거칠었다. 그녀는 매달리듯 단단한 등을 꽉 끌어안았다. 격정적으로 몸이 떨렸다.

거칠다. 이리 격정적인 이였던가. 너무나도 거칠….

‘…어?’

얌전히 몸을 내어주던 련은 우악스러운 통증에 눈을 부릅떴다. 배 속이 불편하다. 대체 무엇인가. 그녀는 풀어헤쳐진 옷가지 사이 드러난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쥐어 뜯겨져 덜렁거리는 살덩어리, 가슴을 찢고 살 속으로 파고드는 손.

“아, 아….”

어째서인지 비명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련은 어둠 속에서 멍하니 사내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그 눈. 마치 달과 같은 황금색 눈동자.

사내가 더 깊이 들어온다. 몸을 찢고, 더 깊이, 더 깊이. 목으로 넘어오는 피를 왈칵 토해 내며 그녀는 바르작거렸다. 마치 사랑을 나누듯 그의 몸에 붙어 꿈틀꿈틀, 육체를 뒤틀었다. 사내의 얼굴에 제 피가 튀어 오른다. 뼈가 우지끈 부서졌다. 가슴을 들썩였다.

사내의 손가락이 몸 안에서 거칠게 움직인다. 절정을 느끼는 것처럼 그녀는 몸을 휘었다. 그가 가슴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내었고, 련의 낭창한 몸은 완전히 뒤로 넘어갔다. 사내는 그 육체를 미련 없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안에 쥔 것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뜨겁고 붉은 살덩어리. 손아귀에서 제멋대로 박동하는 것을 곧 게걸스레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뜨거운 살점을 뜯고 씹어 목 안에 넘긴다. 잠시간의 포만감. 또다시 밀려드는 허기.

비리다. 쓰다.

먹는 게 고역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맛없는 살덩어리를 질겅질겅 씹어 넘기던 그는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달이 빛나고 있었다. 온몸에 뜨끈한 피를 뒤집어쓴 제 모습을 고스란히 비추며.

그것을 희번덕이는 눈으로 올려다보던 사내는 이내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을 찾아 발걸음을 내디뎠다. 술에 취한 사람의 것처럼 위태로운 걸음걸이가 느릿느릿 이어진다. 그는 무심결에 벽을 짚었다. 거기에 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비대하고 흉측한 몸뚱이.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고 긴 팔다리. 거대한 요괴의 머리통. 그림자가 주린 배를 움켜쥔다.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손을 뻗어 그것을 긁어내렸다.

“…아직 턱없이 모자라다.”

그르렁거리듯 중얼거린 사내는 다시 휘청휘청 유령 같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모습이 어둠 속에 점차 희미해졌다.

***

또 가슴에 구멍이 뚫린 시신이 발견되었다. 장안에서 가장 큰 기루가 자리한 골목, 오물이 쌓여 있는 곳에 널브러진 기녀의 시체. 여인의 옷은 풀어 헤쳐져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고 허옇게 드러난 두부 같은 가슴은 우악스레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반쯤 찢어진 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사이한 음심을 품고 한 행동은 아닌 듯싶었다.

아시타는 가슴골 사이에 움푹 파인 구멍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부러진 갈비뼈 사이로 핏덩어리가 잔뜩 고여 굳어져 있었다. 심장은 보이지 않았다.

“법령사님, 무엇 좀 알아내셨습니까?”

시체를 발견한 이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발견된 시체가 이것으로 아홉 구. 들리는 말에 의하면 실종되어 보이지 않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라 한다. 산짐승의 소행이 아닌 것을 눈치챈 몇 군졸들이 황급히 수사를 시작하였지만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수사하는 군졸 수도 턱없이 모자랐다. 하찮은 양민들 죽는 일보다야 나라님에게 반역한 무리를 찾는 게 우선이다 여기는 것인지, 조정에서는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겁에 질린 백성들이 먼저 저를 찾았다. 한동안 이 사람 저 사람 부적을 써주었더니 도성에 영험한 법령사가 있다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조사하는 데 쓸데없는 의심을 사지 않아도 되고, 편하긴 하지만….’

나랏일에 조정 관료보다 타국의 법령사를 더 의지하는 백성들 처지가 딱하였다.

“아무래도 이리 된 지 하루가 지나지 않은 것 같군.”

“…이, 이런 소행을 벌인 자가, 이 근방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까?”

모여 있는 이들이 겁에 질려 웅성웅성거린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제에는 동문 근처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으니… 확신할 수는 없네.”

“혹 여럿이서 하는 것은 아닙니까?”

“가능성은 있지만….”

말끝을 흐리자 모인 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불안하게 쳐다본다. 아시타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선 무엇 하나 분명한 것이 없어. 범인이 잡힐 때까지는 서로서로 조심하게나. 밤에는 되도록 다니지 말고 가능한 서넛이 함께 있도록 하게.”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정이라도 탈까 두려운 듯 후다닥 흩어진다.

아시타는 다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여인의 붉은 입술에 핏자국이 선연하다. 온몸의 피를 모두 쏟고도 붉은빛을 잃지 않은 입술. 화장을 한 건가. 그는 찢겨진 옷가지를 보았다. 너덜너덜하지만 언뜻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었던 듯 보인다. 정인을 만나러 가다 봉변을 당하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이봐.”

부르는 소리에 아시타는 고개를 돌렸다. 여란이 골목 밖에서 고갯짓을 하고 있었다.

“뭐라도 발견했느냐?”

“이걸 봐라.”

그는 발걸음을 옮겨 여란이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벽돌을 쌓아올린 높은 벽. 기루 홍릉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허름한 벽에 핏자국이 선명히 나 있다. 검붉게 굳은 그 핏자국과 움푹 팬 흔적을 아시타는 눈으로 하나하나 더듬어 나갔다. 다른 이들이 이것을 눈여겨보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거겠지. 하지만 아시타나 여란은 그 흔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손톱자국.

보통 사람의 것보다 네 배는 크고 앙상하며 기괴한 모양의 손톱자국이었다.

“…무슨 요괴인 것 같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손자국은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어떤 귀물의 모습과도 맞지 않았다.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군.”

피안의 것이 차안의 세계에 남긴 발자취, 귀흔(鬼痕)에는 그 요괴의 요력이 남는다. 아시타는 그것을 신중히 더듬어 보았다. 살(殺)이 잔뜩 서려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기에 손자국만으로도 이런 살기를 풍기는 건가.

아시타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런 놈이 인겁을 뒤집어쓰고 사람들 속에 숨어 살고 있다니. 생각만으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주술을 통해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낼 수는 없나?”

여란의 말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장소에 새겨진 기억을 읽어 내려면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 엉켜있는 념들이 정돈이 되어야 한다. 현재에는 죽어간 이의 념과 요괴의 살기가 강하게 남아 있어 읽어내기가 힘들다.”

“그래도 한번 시도해 보는 것이….”

“자칫하다가는 심계에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어.”

“쯧, 역시 추적술밖에는 도리가 없나.”

지난 며칠 동안 추적술을 펼쳐보았지만 헛물만 켜왔던 여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물이 사람을 해치는 것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지만, 이리 지독한 짓을 하는 놈은 또 처음이군. 인간의 심장만 빼어 먹다니… 도대체 목적이 무엇인 거 같나?”

아시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말대로 단순히 파괴 충동에 휩싸여 이런 일을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시타는 줄곧 생각해왔던 것을 내뱉었다.

“요괴들 사이에 전해지는 몇 가지 속설이 있다.”

“…속설?”

“그래. 환생에 관한 속설이지.”

여란은 들어 본 적 있다는 듯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시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첫째는 천인을 잡아먹으면 새 몸 얻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덕망 높은 승려 백 명을 잡아먹으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람의 심장 천 개를 먹으면 인간의 몸을 얻을 수 있다…. 귀물들 사이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다.”

“그러니까… 어느 요괴가 인간이 되길 원하여 이런 짓을 한단 말이지. 대체 무슨 이유로 사람이 되려는 거지?”

“새삼스러운 질문이군. 본디 피안의 것은 차안의 세계에 끌리게 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 답해놓고는 무언가가 석연치 않아 아시타는 다시 귀흔을 올려다보았다.

끌림.

그런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한 집념이 거기에 어려 있었다. 이토록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인가. 그것은 생소한 호기심이었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이유를 궁금해 하는 이가 어디 있던가. 그와 마찬가지. 요괴가 인세에 집착하는 것은 그 본능에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줄곧 그렇게 여겨 왔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다일까?’

갑작스럽게 고개를 치켜든 의문에 아시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문득 계곡에서 들려온다는 요괴들의 노랫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요괴는 무슨 이유로 그리도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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