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란국연가-5화 (5/16)

五章. 사람의 독니

스르륵, 천을 풀어내리는 소리에 소루는 눈을 떴다. 누군가 제 팔에 꼼꼼히 약을 바르고 있었다.

염인가.

잠자코 있는데 잠시 뒤 훌쩍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루는 당황하여 물었다.

“왜 우느냐?”

“마님….”

소녀가 울음 섞인 음성을 서럽게 토해 냈다.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런 외진 곳에 두고 발걸음도 한 번 안 하시는 것도 모자라서….”

염이 제가 다 서럽다는 듯 제 가슴을 팍팍 쳤다.

“성한 곳이 어디 하나 없습니다. 여인의 몸에 이게 무슨 짓이랍니까. 아내에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정말 너무하십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난 괜찮다. 얕은 상처일 뿐이야. 곧 아물 거다.”

“아물 새도 없이 계속 칼을 대고 또 덧대고 하는데 어느 새에 아문답니까. 이러다 정말 큰일 나십니다. 곪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상처가 덧나서 온통 벌겋게 부어올랐습니다.”

“매일 약을 바르지 않느냐. 네가 매일 붕대를 갈아주지 않느냐. 괜찮아질 거야.”

“마님… 제발, 며칠만이라도… 상처가 아물 때까지만이라도… 쉬게 해 달라, 방문하는 이를 줄여 달라, 주인님께 말씀하십시오.”

“나는….”

소녀가 엉엉 목 놓아 우는 것에 소루는 어째야 좋을지 몰라 말을 삼켰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준 적이 있던가? 당혹스러워 소루는 쩔쩔맸다.

“내가 돕지 않으면 당장 숨이 넘어갈 이도 있다.”

“그럼 세상천지에 아픈 사람이 하나 없을 때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치료해 주시려구요? 그럼 마님께서는 평생 상처투성이로 사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찌 그리 삽니까. 그게 사는 거랍니까.”

“보기에만 이렇지 그리 심한 것은….”

소루는 말끝을 흐렸다. 보기에 어떠한지 눈이 보이지도 않는 이가 말해 보았자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 괜찮다. 정말… 괴롭지 않아.”

진정한 괴로움은 이런 것이 아니다. 귀신들에게 밤낮없이 시달리던 날들. 다른 이들의 절규와 비명, 통곡 소리에 자고 깨던 날들에 비하면 이까짓 것쯤이야 고통이라 할 수도 없다. 그녀는 이제야 제가 사람처럼 살고 있다고 느끼었다. 나는 괴물도, 시체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가 처음으로 가치가 있게 느껴졌다. 이 정도야 참을 수 있다.

“더군다나 나는….”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는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제가 쓸모가 있기 때문에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한 것이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거처를 찾아오는 이들 모두가 자현이 보낸 것임을. 그가 치료하라고 제게 보내오는 이들이었다. 거스를 수 없다.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래서 이 집에 머무르게만 해준다면….

“네 말대로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래도 걱정해 줘서 고마워.”

“마님….”

소녀가 목이 멘 듯 더는 말을 잇지 못한다. 소루는 훌쩍거리는 그녀를 다독여 주려다가 손이 약투성이임을 깨닫고 다시 팔을 내렸다. 어찌 달래야 좋을지 몰라 그리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한참을 훌쩍거리던 염이가 이윽고 눈물을 추스르고는 다시 손에 붕대를 감아주기 시작했다.

“너무… 깊이 찌르지 마셔요.”

“그래….”

“그냥 살짝만… 조심해서….”

“응.”

소녀가 다시 훌쩍 울음을 삼킨다.

너는 정말로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구나. 나 같은 것보다 좋은 주인을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소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뒤 문밖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다른 시비들이 옷과 식사를 챙겨주러 왔나 보다. 그녀는 염이를 달래듯 토닥이며 다정하게 말하였다.

“고맙다.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마님….”

울먹거리던 소녀가 곧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자박자박 다른 시비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팔이 이리 된 뒤로는 그들이 일일이 얼굴을 씻기고 머리를 만져주고 옷을 갈아입혀 주고 있었다.

말없이 제게 와 닿는 손길에 그녀는 얌전히 몸을 내맡기며 무의식중에 어깨를 움츠렸다. 괜찮다 한 것이 무색하도록 양팔이 불붙은 듯 화끈거렸다. 그녀는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괜찮아.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서다. 구하기 위해서야.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 것보다는 낫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며 방문자를 맞이하기 위해 탁상 앞으로 걸어갔다.

***

자현은 경계 어린 낯을 하고 소화루에 발을 들였다. 무릉도원같이 꾸며진 화려한 정원에 대궐 같은 가옥, 호수 위에 지어진 아름다운 정자. 고관 대신들은 물론 왕족들도 은밀히 즐겨 찾는다는 도성 제일의 기루답게 실로 규모가 웅장하다.

‘대낮부터 기루라….’

일꾼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며 자현은 미간을 모았다. 술을 즐기기는 했지만 그는 주로 친우나 같은 군사들끼리 마셨다. 목석처럼 여인을 아주 멀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체질적으로 아양을 떨며 교태를 부리는 여인네들이 불편하였다.

사실 가란 공주를 만나기 이전에는 여인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여본 적도 없었다. 당연 이런 장소에 익숙할 리 없다. 그는 거북스레 눈을 굴렸다.

‘무슨 속셈인지….’

일꾼이 안측에 자리한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문 너머를 향해 들겠다 이른 뒤에 슬그머니 장지문을 연다.

그는 수행하는 무인들을 대기시켜 두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관료들이 은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방인지 문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고, 다른 방과 거리도 떨어져 있다. 무의식중에 주변을 살피던 자현은 들려오는 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일꾼들이 안측에서 문을 열자 잘 차려진 술상과 그 중간에 떡 자리하고 앉은 이가 드러났다. 희끗한 머리. 잘 정돈된 수염. 잉어가 수놓아진 금의를 잘 차려입은 노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와 주어 고맙네. 자, 이리 와 앉게나.”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 다소곳이 선 기녀가 술잔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약주를 채워 넣어주었다. 자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하자는 거지?’

자신을 불러낸 이를 의심스레 바라본다. 그의 이름은 한비. 현직 관료들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왕의 최측근이자 자신과는 오랜 앙숙이었다. 그토록 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놈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자현은 술잔에 손을 대지 않은 채 퉁명스레 말했다.

“무슨 일로 나를 다 보자 한 것이오.”

“다들 이 소화루의 기녀들이 아름답다 예찬하기 바쁘지만, 사실 이 기루는 음식과 술이 더 훌륭하네. 하나같이 정갈하고 모양도 아름다우며 풍미도 뛰어나지. 한번 맛을 보게나.”

내가 당신 얼굴을 보며 밥을 먹게 생겼느냐, 하며 이죽거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하지만 표정에 다 드러났는지 남자가 쓴웃음을 짓는다.

“자네에게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것일세. 성의로라도 한 술 들어 보게나.”

“내게 식사 한 끼 대접하기 위해 부른 것은 아닐 테지. 본론을 말하시오.”

퉁명스러운 말에 한비의 낯이 흐려진다. 그가 술을 한 모금 벌컥 들이켜더니 한숨 쉬며 내뱉었다.

“그래. 자네는 속을 떠보는 것도, 서론을 길게 늘어놓는 것도 싫어하였지. 내 길게 빼지 않고 솔직히 터놓고 말하겠네. 오늘, 자네의 도움을 얻고자 부른 것일세.”

가슴께에 팔짱을 끼고서 무어라 하나 보자, 하던 자현은 실소를 흘렸다. 느닷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는 한비가 뒷말을 잇기도 전에 냉랭하게 내뱉었다.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정말로 당신을 도와주리라 생각하진 않으시겠지?”

노골적으로 비웃자 사내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현은 냉랭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이자가 어떤 자이던가. 왕의 곁에 붙어 살랑살랑 알랑방귀 뀌느라 제 험담을 입에 달고 사는 인간이었다. 오죽했으면 공을 세워 오라며 저를 사지로 밀어 넣어라 가륜 왕 부채질한 게 한비란 말까지 나돌까. 그런 놈을 제가 도와? 웃기지도 않는다. 이놈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왕과 작당해 뭔가 수를 쓰려는 것이겠지. 그는 더는 들을 것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 일인가 싶어 여까지 왔다만… 괜한 발걸음을 하였군. 그 귀한 음식, 혼자 맘껏 드시오. 나는 일어나지.”

“요즘 자네의 집에 오가는 이가 그리도 많다지?”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자현은 돌아서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얼마 전 왕이 저를 부른 일이 떠오른다. 그것을 떠보려고 저를 부른 것인가. 입꼬리를 비트는데, 그가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상인 주호, 백가의 천지호, 민씨 일가의 당주인 민오랑, 동부 유력자인 마장주, 북구파 관료인 이월….”

제집을 방문한 이들의 이름이었다.

“그 밖에도 다 헤아릴 수가 없더군. 자네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조사를 하다가…나는 한 가지를 알아차렸네.”

“…대체 무엇을 알아냈다는 거요?”

자현은 경계 어린 눈으로 그를 살폈다. 한비가 덤덤하게 내뱉었다.

“하나같이 본인이나 혹은 가족이 몸이 아픈 이들이었네.”

“그랬소? 거 참 재밌는 우연이군.”

시침을 뚝 떼며 말하자 남자의 눈이 가늘어진다.

“얼마 전 자네 집에 남태후도 들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그를 찾아가 보았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네.”

자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남태후라면 대대로 고위 관료를 배출해온 문관 집안의 가주로, 몇 년 전에 퇴역하고 은거한 고위 관료였다. 희귀병을 고치기 위에 얼마 전에 제집을 방문한 자이기도 했다. 그가 입을 가볍게 놀린 것인가. 제아무리 각서를 받는다고 해도 그들의 입을 다 간수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언제고 누군가의 실수로라도 말이 퍼질 것을 예상하기는 하였으나 하필이면 한비라니. 이 인간이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걸 모르느냔 말이다. 속으로 욕설을 퍼붓는데, 한비가 더는 발뺌 말라는 듯 집요하게 말을 잇는다.

“예상은 하고 찾아간 것이었지만… 내 눈을 의심하였어. 자네도 알다시피 남태후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네. 피부 껍질이 돌처럼 굳어 썩어 들어가는 괴이한 병이었지. 그 때문에 이른 퇴역을 하고 집 안에서 두문불출한 것이 아니던가. 한데, 이번에 찾아가 보니 피부가 어린아이의 것처럼 깨끗해져 있더군. 소매 안쪽에 얼룩덜룩 곪아가던 상처까지 멀끔히 아물어 있었어. 남태후뿐만 아닐세. 자네 집안을 방문한 이들 모두 거짓말처럼 병을 고쳤어. 내 이미 이를 확인했지.”

“…….”

“자네 집에… 사람의 병을 고치는 무언가가 있는 게지?”

자현은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이자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발뺌해 보았자 의미가 없다. 아직 소루의 효험까지는 모르는 듯싶지만 이 남자의 수완은 비령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비밀을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성가시게 되었구나, 하고 이를 가는데 한비가 소매를 걷어 올린다. 무얼 하나 자현은 의심스레 바라보았다. 그가 제 팔을 내밀어 보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네.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왔지. 남태후 말고는 아무도 몰라. 그와는 약을 찾다가 우연히 서로의 병을 알게 되었지.”

자현은 눈을 크게 떴다. 한비의 팔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시커먼 자국이 가득했다. 그가 몸을 돌려 왼쪽 어깨를 보여주었다.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피부가 심각하게 패여 있었고, 반대편도 잔뜩 짓무른 상태였다.

“남태후와 같은 병일세. 이런 게 복부와 다리에도 수도 없어. 거기에 날로 날로 커져가고 있지.”

“…용케도 숨겨왔군.”

“언제 어디서 누가 치고 올라올지 모르는 게 정치판이 아니던가. 애를 좀 먹었지. 숨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숨길 생각이었네만, 병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서… 최근에는 별수 없이 퇴역해야 하나 하고 있었지.”

한비가 씁쓸하게 말하며 소매를 내렸다.

“한계를 느끼던 참이었어. 그러다 멀끔히 병이 나은 남태후를 본 내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겠나? 체면도 집어 던지고 비밀을 알려 달라 애걸복걸했네만, 굳게 다물고는 열지 않더군. 저는 어찌 병을 고쳤는지 말해 줄 수 없다. 직접 자호가에 가서 도움을 요청해 보게나, 그리 말했네. 그래서 고민하다가….”

“…나를 불러냈군.”

잘 차려진 호화로운 상을 내려다보며 남자의 말을 대신 끝맺어준다.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내 비위를 맞추려고 이런 준비를 하며 대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별것도 아닌 주제에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자현이라 그리도 깔보던 이가, 이제는 아쉬운 입장이 되어 우는소리나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다니, 속이 아주 타들어 갔겠군.

비웃는 기색을 느끼었는지 한비의 낯이 어두워졌다.

“자네가 나를 고깝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네. 나도… 자네를 싫어하였지. 그걸 새삼 감출 생각은 없어. 누구에게도 아부하지 않고, 비위 맞출 줄도 모르고, 늘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여 모난 돌 같은 자네가 참으로 거슬렸네. 건방지다 본때를 보여주자, 작당까지 했었지.”

그가 고해라도 하듯 덤덤히 말을 이었다.

“자네도 내가 밉고 싫겠지. 그걸 뻔히 알면서도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세. 죽어가는 마당에 자존심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를 좀 살려주게. 내 무엇이든 하겠네.”

그러고는 꾸벅 상 위로 머리를 숙인다. 자현은 한참 동안 내려다보기만 했다. 마냥 후련하지만은 않았다. 그 뻣뻣하던 고개를 푹 꺾은 모습에 묘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이 작자가 어떤 작자던가. 온갖 암투가 난무하는 궁궐 정치판에서도 꼿꼿하게 살아남아 온 노장이었다. 자존심으로 치자면 저 못지않은 이. 그런 자가 앙숙처럼 여겨온 새파란 놈에게 고개를 다 조아린다. 몸의 아픔이란 그토록 괴로운 일인가.

‘…어찌할까.’

그는 턱을 쓰다듬었다. 동정심은 동정심. 실리는 실리. 이 남자에게 손을 내밀어 줄 의리는 없었다. 제게 품은 적의가 더 거세어지는 것은 성가시지만 어차피 죽어가는 노인네다. 적수가 못 된다.

‘속풀이라도 하게… 벌떡 일어나 나가버려?’

허나 앙심을 풀기 위해 그냥 버리기에도 아까운 패다. 그는 입꼬리를 당겼다. 이 남자는 왕의 최측근이오, 남구파 관료의 머리였다. 제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이보다 쓸모 있는 이가 또 있을까.

“내가 어찌하면 당신을 믿을 수 있겠소?”

슬쩍 운을 떼자 남자의 얼굴이 밝아진다. 자신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 예상이라도 한 듯 한비가 냉큼 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이것은 여태까지 나에게 은밀히 청을 넣었던 이들의 명부일세. 그리고 이것은… 내가 기록해 온 장부지.”

한비가 그것을 제 쪽으로 내민다.

“이것을 맡기겠네. 내 정치적 생명은 물론이고… 내 생명도 날릴 수 있는 물건일세.”

자현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뒤로 얼마나 받아 챙겼기에 그러나.

“당신답지 않게 대범하군. 이걸로… 내 쪽에서 뒤통수를 후려치면 어쩌려고 조심성 없이 덜컥 내미는 거요?”

“자현이 그런 비겁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이제 와서 띄워줘 봤자.”

혀를 차자 한비가 씨익 웃어 보인다. 자존심을 접고 앙숙에게 목숨을 애걸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니, 닳을 대로 닳은 모사꾼다웠다.

“어차피 이대로는 얼마 못 살고 죽을 팔자일세. 이판사판이지.”

“…….”

“더군다나 자현은 성질은 급할지언정 바보는 아니잖은가. 그걸 쥐고 있으면 나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가 있는데 허투루 날릴까? 이 한비는 제법 쓸모가 있는 인간일세. 이왕이면 건강하게 살아있는 편이 자네에게도 더 도움이 되겠지.”

“…자기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하는 건가.”

“필요하다면 해야지.”

태평스레 하는 말에 자현이 오만상을 썼다. 역시 저는 정치에 물든 인간과는 체질적으로 맞지가 않는다.

“어쩌겠나?”

한비가 대답을 재촉했다.

자현은 부러 그의 애를 태우려 뜸을 들였다. 이 남자에 대한 감정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믿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잠자코 턱을 쓰다듬던 자현은 이내 장부를 받아들었다.

“내일 중으로, 내 집에 찾아오시오.”

“…고맙네.”

그가 다시 한 번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비령은 박장대소했다. 참으로 대단한 작자다. 그리 얼굴을 붉히던 이에게 하루아침에 낯을 싹 바꾸어 그런 거래를 해올 수 있단 말인가. 보통 이가 아니야. 우하하하, 하고 웃어대는 것에 질려 자현은 귀를 틀어막았다.

거리에 바글바글한 이들이 힐끔 시선을 보내온다. 자현은 그들에게 무얼 보느냐 눈을 한 번 부라려 주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들은 남방에서 좋은 명마들이 대거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마시장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상단들이 물건을 대거 들여왔다는 소식이 그새 퍼지었는지 시장은 온통 북새통이다. 그 복작복작한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며 비령이 재주 좋게 떠들어댔다.

“일이 점점 재밌게 돌아가는군. 북구파에서 발언권이 센 관료들과도 줄줄이 연줄을 만들어 두지 않았나. 거기에 남구파의 한비까지 손아귀에 쥐게 되다니… 잘만 하면 조정판도 손아귀에 쥐락펴락하게 되는 거 아닌가. 가륜 왕 허수아비 만드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일세.”

“설레발치지 마라. 가륜 왕 무시하지 말라 한 건 너였다.”

“물론 가륜 왕은 권모술수에 있어서 자네보다 세 발은 앞서가는 인물일세. 하지만 말이야….”

비령이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린다.

또 뭔 흰소리를 늘어놓아 내 허파에 바람을 넣으려고. 자현은 미심쩍게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잇는다.

“자네에 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으로 군단 말이야. 때로는 경솔하게 느껴질 정도로 헛발질을 해대지.”

“원래가 경솔하고 감정적인 인물이다.”

“설마. 가륜 왕은 기본적으로는 냉정한 사람이야. 물론, 자존심이 지나치게 세고 관대함이 좀 모자란다는 게 흠이지만….”

“좀 모자라?”

자현은 언성을 높였다.

“관대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작자다! 속 좁기로는 천하에…!”

“진정하게나. 내 말은, 그가 자네에 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평상심을 잃는다 하는 거야. 물론 자네의 태도에도 심각하게 문제가 있지만… 유난스럽단 말이야. 자현의 일이라고 하면 필요 이상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거기까지 말한 비령이 제가 너무 나갔다 싶었는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일이 아주 잘 풀리고 있으니 인상 풀게. 한비를 다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입장이 되다니 좋지 않은가! 귀신 공주가 이런 복덩어리일 줄 누가 알았겠나.”

비령이 가볍게 지껄이는 말에 자현은 코웃음을 쳤다.

“복덩어리? 웃기지 마라. 애초에 그 여자와 억지로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런 굴욕적인 처지에 놓이는 대신에 약속대로 가란 공주와 결혼하였더라면, 이런 성가시고 번거로운 일에 정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확실히 그 일이 아니었으면 가륜 왕과 자네의 사이가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소루 공주가 아니었으면 이만큼이나 가문이 흥할 수 없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가문을 흥하게 하는 데 이처럼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자현이 고집스레 말했다. 비령이 눈가를 찡그린다.

“자네, 소루 공주에게 너무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도움이 되어 주고 있는데….”

너무해? 지금 이놈이 제게 너무하다고 하였나?

자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비령이 한 점 부끄럼 없는 얼굴로 멀거니 저를 탓하듯 보고 있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이놈의 무서운 점은 제가 얼마나 비정한 놈인지 자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생각하는 척 말하지 마라! 이 가증스러운….”

울컥하여 버럭 언성을 높이는데 문득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현은 또 무슨 소란인가, 하며 휙 고개를 돌렸다. 골목길에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싸움이라도 났나 보네, 하며 비령이 냉큼 그리로 달려가 사람들 틈에 고개를 비집어 넣는다. 경박스러운 놈 같으니, 하고 자현은 혀를 찼다.

“쓸데없는 데 시간 허비하지 말고 어서 가자. 말을 고른 뒤에 서둘러 자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그래, 바쁘신 몸이셨지. 잠깐만 기다리게, 구경 좀 하고….”

자현은 저놈을 데리고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비령이 듣는 척도 않고 인파를 연어처럼 뚫고 들어간다. 그냥 두고 혼자 가버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새 저만치 앞으로 간 비령이 심각한 음성으로 이리 와보게나, 한다. 무슨 일이냐 물어도 대답이 없다.

자현은 의아한 얼굴로 그리로 다가갔다. 유난히 키가 큰 자현인지라, 작달막한 이들의 머리 너머로 골목 안의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시커먼 길모퉁이에 관졸 둘이 굳은 낯을 하고 서 있었다. 자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 앞에 네 명의 사내가 늘어져 있었다.

‘피 냄새….’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아차린 자현은 사람들을 제치고 성급히 그 안으로 들어섰다. 조사하던 군졸이 막아 세우려다가 제 얼굴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린다.

“자현 장군님….”

“어찌 된 것이냐.”

“가, 강도인 거 같습니다.”

“강도?”

“최근 강도가 기승을 부려….”

군졸이 쩔쩔매며 말을 흐린다. 자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일이 잦았단 말이냐.”

그들이 서로의 얼굴만 살필 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그렇다는 뜻이겠지. 자현은 짜증스레 그들을 제치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피 웅덩이가 발치에 끈적하게 굳어있었다.

강도가 성인 남성 넷을 이리 다 죽여 놓았단 말인가?

그는 몸을 수그려 시체를 살폈다. 한 놈은 팔이 덜렁덜렁거리고, 나머지 둘은 비교적 멀쩡하다. 가슴만 움푹 파여 있다. 정확히 심장을 공격한 상처였다.

어떤 무지막지한 놈이기에….

“신분을 알 수 있는 소지품은?”

“없습니다. 넷 다 천민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길게 수색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자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괜히 고개를 디밀었다는 후회로 비령을 노려보는 눈길에 절로 살기가 서린다. 골치 아픈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은데….

“혹시 모르니 지인이나 가족을 찾아 시신을 수습해 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더는 말해줄 것이 없다. 제가 저들의 직속상관도 아니고 이래라저래라 지시를 내리는 것도 우습겠지. 자현은 몸을 돌렸다. 재수가 옴 붙어 흉한 것을 보았구나 하고 혀를 차며 걸음을 옮기는데 어째선지 등줄기가 스산해진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지 몰라도… 심상치 않은 솜씨다.’

골치 아픈 놈이 도성에서 판을 치는 모양이다. 눈가를 찡그리던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비령의 뒷덜미를 낚아채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어쨌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

오늘은 겨우 세 명이 왔다 갔지만 팔에 상처가 너무 많아 결국 손바닥에 칼을 대어야 했다. 붕대를 꽉 매어 놨음에도 감각이 예민한 부위인지라 통증이 다른 데보다 심하다. 화끈거리는 통증에 한참을 뒤척이던 소루는 결국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밤바람이라도 좀 쐬려고 더듬더듬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덜커덩 소리만 들릴 뿐 열리지 않는다. 소루는 시비를 불러 문을 열어 달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역시… 이 늦은 밤, 괜히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

천천히 뒤돌아서는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녀는 몸을 돌려 더듬더듬 창문을 찾았다. 창살이 대어져 있었다. 흔들어 보았지만 굳게 잠겨 열리지 않는다. 다른 창문을 찾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더듬더듬 뒷문으로 걸어가 잡아당겨 보았다. 역시나 걸쇠가 걸려있다. 순간 머릿속이 까맣게 된다.

혹시, 나는 감금되어 있는 것인가.

허, 하고 황망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여기 머물게 해 달라고 한 것은 저였다.

도망이라도 치리라 생각하는 건가?

방문자가 모두 돌아가고 난 다음이면 시비가 항시 문을 걸어 잠근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으나 왜 잠그느냐고 물은 적은 없었다. 드나드는 이가 많으니 혹여 사고라도 생길까 그리하는 것이겠지. 엉성하게 한 번 생각하고 넘긴 게 다였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도망칠 만하다 여겨지는 대우를 받고 있었던 건가….’

물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칼을 쥐고 제 살을 베어 내는 게 어찌 쉬운 일일까. 그래도 나는, 기쁘다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 기쁘다고… 이 집에 머물게 되어 진정으로 평온하다고… 그리 여기고 있는데….

‘어째서… 나를 가둬두는 건가. 나는 겨우 내 생에 의미를 찾았는데….’

등골이 얼어붙는 듯해 소루는 어깨를 한껏 웅크렸다.

여기가 사당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녀는 황급히 그 생각을 떨쳐냈다.

아니, 아니다. 그런 배부른 생각하지 마라. 여기는 나를 괴롭힐 귀물들이 없다. 진득하게 들러붙는 그 시뻘건 눈알들이 없다. 귀를 괴롭히는 그것들의 못된 소리도 없다. 누구와도 닿지 않으려고, 말도 섞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나에게 고맙다고, 많은 이들이 고맙다고 하였다. 울며 감사한다 하였다. 그러니 괴롭지 않아. 아프지 않아. 제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괴롭혀 왔던가.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어떤 대우를 하더라도… 불평할 자격이 없다.

소루는 떨리는 어깨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으며,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삼켰다. 속이 뜨거웠다. 팔과 손이 불붙은 듯 화끈거린다.

‘나는 괜찮아.’

이런 거, 아무렇지도 않아. 그동안 저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나를, 억지로 떠안게 된 사람이다. 내가 얼마나 싫고 밉겠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은 나쁘지 않다.

“…주무십니까?”

어둠 속에서 몸을 떨던 소루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동요한 탓에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문가에 두어 명이 서 있었다. 이 깊은 밤, 대체 무슨 일인가.

“…왜 그러느냐?”

서둘러 감정을 추스르고 차분한 어조로 답했지만 문밖에서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재차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들이 허락도 없이 덜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목소리를 낸 사내는, 그 기운으로 보아 제 거처를 드나드는 남성 일꾼, 그 뒤를 따라 들어선 여인은 저를 시중드는 이 중 하나였다.

“이 밤에… 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는 불안하게 말을 흐렸다. 그들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선 순간 음산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오싹한 기색을 느끼고 한 걸음 물러서는데 사내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머니께서 병이 드셔서….”

굳어서 있던 이가 느닷없이 쿵,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곧, 도,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러고는 발치에서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낸다.

“도와… 제발, 도와주십시오. 어, 어머니를 살려 주십시오.”

소루는 당혹스레 손을 내저었다.

“아, 알겠으니 이러지 마라. 내일이라도 이리 모셔오면 내가….”

“제겐… 이곳에 드시는 다른 분들 같은 재력도 권력도 없습니다. 주인 나리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피를 내어 줄 테니 가져가서….”

“피는… 금세 굳어버리고 말 겁니다.”

“허면….”

어찌하면 좋겠느냐 물으려던 소루는 다음 순간 숨을 멈추었다. 무릎 꿇고 있던 사내가 제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등줄기가 오싹하였다. 뭐 하는 것이냐. 뿌리치려는데, 잠자코 있던 여종이 등 뒤에서 양팔을 꽉 붙잡더니 천 같은 것으로 제 입을 틀어막는다. 소루는 당황하며 몸부림쳤다. 사내가 억세게 제 몸을 붙잡아 바닥에 눕혔다. 우악스러운 손이 치맛자락을 거침없이 걷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잔뜩 겁에 질린 음성으로 쉴 새 없이 흐느끼듯 말하며 사내가 버둥거리는 제 다리를 잡아당긴다. 소루는 공포로 얼어붙었다. 피부를 움켜쥐는 거친 손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내가 치마를 걷어 올리고 다리를 벌려 제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었다. 딱딱한 손가락이 거기에 말랑말랑한 살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얼음처럼 차가운 것을 들이댄다.

그가 무얼 하려는지를 깨닫고 그녀는 온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웅웅거리는 소리만 흘러나온다. 몸부림치지 못하게 뒤에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여인네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제 몸 위에 올라타 다리를 붙잡은 사내는 손을 덜덜 떨며 한참을 망설였다.

귀기(鬼氣). 요괴와 같은 음습한 귀기가 그들에게서 스멀스멀 피어 올라왔다. 소루는 공포에 질려 창자가 끊어질 듯 온몸을 뒤틀었다. 빛을 잃은 두 눈에 시커먼 귀물의 윤곽이 차오른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음습한 기운이 마치 괴물의 형상처럼 느껴지었다. 분간할 수 없다. 나를 붙잡은 것이 사람인가 귀신인가.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사내가 그렇게 중얼중얼거리고는 이내 그것을 살 속으로 박아 넣었다. 소루는 끔찍한 고통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칼날이 살을 스걱스걱 베었다. 그녀는 목구멍 안에서만 비명을 내질렀다.

아프다. 아파. 아파!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조금만… 주십시오. 어머니를… 어머니를 살리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십시오.”

그가 칼을 이리저리 움직여 살점을 도려낸다. 입 안에 들어찬 천을 턱이 아프도록 악물고서, 소루는 온몸을 뒤틀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사내가 손을 덜덜 떨었다. 터져 나오지 못한 비명소리가 점점 부풀어 올라 목구멍이 찢어질 듯했다. 그만하라는, 하지 말라는 애원이 입 안에서만 진동한다.

“다, 다 되었다.”

한참 만에 칼을 내려놓은 사내가 제 몸을 붙든 이에게 말했다. 소루는 축 늘어진 채 멍하니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어마어마한 통증을 도저히 어쩌질 못하고 가늘게 흐느끼자, 제 입을 틀어막고 있던 이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손을 떼어도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머뭇거리던 이가 이윽고 떨어져 나갔다. 비명을 지를 기운도 없었다. 그들이 후다닥 달아난다.

소루는 어둠 속에 멍하니 누워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허벅지를 만져 보았다. 피가 흥건하다. 아직도 흐르고 있었다. 더듬더듬 손에 잡히는 천을 아무렇게나 주워들어 상처를 틀어막았다.

아프다. 아파. 너무 아파.

고통을 어쩌질 못하고 짐승처럼 등을 웅크리고서 온몸을 뒤틀었다. 입에서는 흐느끼는 듯한 소리만 흘러나온다.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거친 숨을 토해 내길 잠시, 소루는 까무룩 의식의 끈을 놓았다.

***

“이, 일단 상처를 꿰매야….”

“정신을 차리기 전에 어서 처치해야 한다.”

“어쩌자고 겁도 없이 이런 짓을….”

“어, 어쩔 수가 없었어. 하도 간곡히 부탁하여….”

소루는 가물가물 들리는 말을 멍하니 들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향기가 머릿속을 매캐하게 메운다. 그녀는 그 향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사당의 무녀들이 저를 잠재울 때 피우곤 하던 것이었다.

“어, 어차피 주인 나리께서는 발걸음도 아니 하시니… 들킬 염려도 없잖아….”

차가운 손가락이 제 다리를 벌리고 허벅지 안쪽의 상처를 매만졌다. 소루는 약으로도 채 가시지 않은 통증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여자들이 젖은 천으로 조심스레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알게 되신다고 해도, 뒤탈 없을 거야. 그분께서 왕의 명에 의해 억지로 혼인한 사실을 모르는 이가 있어?”

약을 뿌리는 듯 상처 위에 간질간질 뭔가가 와 닿는다. 약을 잘 스미게 하려는 듯 그들이 그 위에 젖은 천을 올려놓았다.

“주인님은 가란 공주님을 사모하고 계시잖아. 그분 얻겠다고 사지에 자진해서 뛰어들 정도인데… 본채 일꾼들 말에 의하면, 궁궐을 자주 드나드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신 거 같더래. 그 와중에 여기에 신경 쓰시겠어?”

“그래도… 이곳에 방문하려고 고관대작들이 줄을 서 있는데, 감히 일꾼이 이런 짓을 한 줄을 아시면….”

“그이는 노모를 모시고 오늘 내로 도성을 떠나겠다 했어. 내 목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혹 문제가 생긴다 해도 내가 다 책임질게.”

아무래도 그들은, 제가 이 약에 내성이 있는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의식이 있는 줄도 모르고 마음껏 떠드는 것이겠지.

‘…원래는 이리도 말이 많은 이들이었구나.’

소루는 멍하니 누워 생각했다. 그들이 살을 도려낸 피부를 당겨 상처를 쓱쓱 꿰맸다. 그러고는 그 위에 고약을 바르곤 붕대를 감아준다. 소루는 침상 위에 축 늘어진 채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나쁘지 않다.

그자는 어머니를 살리고 싶었을 뿐이다.

이들은 그런 그를 돕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소루는 되뇌었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아….

***

다음 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비들이 시중을 들기 위에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태연히 제 얼굴을 닦아주고, 머리를 만져주고,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소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늘 아침이면 마당을 쓸던 사내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 시비들의 몸에서 긴장이 풀어지는 게 느껴진다.

잠시 뒤 그들이 할 일을 끝내고 방을 나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자리에 앉아 방문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허벅지의 상처가 심하게 욱신거려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훑어 내리다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몽롱하다.

나는… 여기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애원하였다.

곁에만 있게 해달라고… 내가 애원한 것이었다.

여기는 내가 바란 장소다.

그러니….

두서없이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마님, 마님,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루는 망설이다 천천히 소리가 난 창가로 걸어갔다. 창틀 사이에 손을 넣어 문을 열자 불쑥 무언가가 얼굴 앞으로 내밀어졌다.

“이것 보셔요. 꽃이 잔뜩 피었습니다.”

밝은 염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그녀는 얼굴에 와 닿는 것을 만져보았다. 꽃잎인가. 곱고 부들부들한 감촉에 손끝이 사릇 떨린다. 소루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향기가 참 좋지요?”

“그렇구나….”

그녀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달콤하게 코를 간질이는 향기.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것을 감추려 꽃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무 좋다.”

“제가 매일, 매일, 꺾어서 선물해 드릴게요.”

소녀가 수줍게 말했다.

“그러니 힘을 내셔요.”

그녀는 꽃다발을 좁은 창틀 사이로 조심스레 받아 들어 소중히 품에 끌어안았다.

“그래.”

소녀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곧 창가에서 후다닥 멀어졌다.

그녀는 꽃 속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나는 견딜 수 있다.”

여기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 고독과 위로가 함께 있다. 그러니 조금쯤 무섭고 아픈 일이 있어도 괜찮아. 잠시만 빛을 쬐여 준다면…. 나는 계속해서 참을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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