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란국연가-6화 (6/16)

六章. 누더기

그날 밤의 일이 아무 탈 없이 지나가자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귀신 공주 방에 숨어 들어가면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몇몇 대범한 이들이 서로 순서를 정하여 그녀의 방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어디가 요즘 좋지가 않다. 어디가 아프다. 그리 주절주절 우는소리를 해 피를 받아가는 이도 있었고, 아무 말 없이 상처를 쥐어짜 훔쳐가는 이도 있었다.

깊은 밤이면, 살을 받으러 몰래 찾아오는 이도 있었다. 제 눈이 보이질 않으니 누가 누구이고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지, 보통 둘이나 셋이 함께 들어와 허벅지나 엉덩이 살을 도려 갔다. 그리고 그들이 일을 마치고 방을 나간 뒤에는 시비들이 들어와 향로를 피우고 상처를 꿰매었다.

그들은 더 이상 들킬까 염려하지 않았다. 벌벌 떨지도 않았고, 미안하다고 하지도 않았다.

하나둘씩 늘어가는 누덕누덕한 상처.

아침저녁으로 나오는 아편이 든 찻물.

매일같이 오고 가는 방문자.

그들에게 피와 살을 쥐어뜯기며 그녀는 왜 창문에 창살이 달렸는지를 깨달았다. 왜 문에 걸쇠가 걸렸는지. 왜 문 앞에 감시병이 서 있는지.

그녀는 이제 사람과 귀신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분명 귀신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음산한 인기척에 시달리었다. 그들이 나를 탐식한다. 어둠 속에서 호시탐탐 저를 노리고 있다.

평생 사람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소루가, 이제는 사람이 두려워 덜덜 떠는 처지에 놓였다. 슬그머니 가까워지는 그 발걸음이 두려워 잠을 못 이루고 살이 닿을라치면 소스라친다.

사당에 있을 때와 같이, 아니, 그보다 더한 공포감에 시달렸다. 인간에게 주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 것인가.

그녀는 나날이 초췌해져 갔다. 진통제에 취해 머릿속은 늘 몽롱하였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몸은 점점 야위어갔다. 그것이 확연히 눈에 보였는지 이른 아침 들꽃을 잔뜩 꺾어온 염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마님, 얼굴이 말이 아니십니다.”

“…어제 잠을 잘 못 자 그런가 보다.”

“상처가 많이 아프셔서요?”

코를 훌쩍거리며 하는 말에 소루는 애써 웃어 보였다.

“바람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뤘을 뿐이다.”

“어제… 바람 한 점 없었는데….”

소루는 둘러댈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머릿속이 멍하여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유일한 이, 슬프고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가물가물 눈꺼풀을 움직이던 소루는 짐짓 어색할 정도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보다 오늘은 유난히 꽃향기가 좋구나. 매번 어디서 이렇게 꺾어오는 것이냐. 아직 뒤뜰에 뿌린 꽃씨에서는 줄기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꽃향기가 맡고 싶으시다 하셨잖아요. 밖에 들판에서 꺾어오는 거예요. 귀한 것은 아니지만….”

“꽃에 귀하고 귀하지 않고가 어디 있느냐. 참으로 좋다. 물병에 꽂아 주겠니?”

“…네.”

소녀가 코를 한 번 더 훌쩍이더니 자박자박 발소리를 내며 방 안에서 물병을 찾는다.

소루는 의자에 앉아 그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산스러운 인기척에 마음이 놓인다. 유일하게 두렵지 않은 사람의 기척이었다. 그녀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며 탁상에 살짝 몸을 기댔다. 무거운 몸을 잠시만 쉬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점점 아래로 처진다. 의아한 낯으로 다시 몸을 일으키려 탁상에 손을 짚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부들부들 팔에 힘을 주던 소루는 결국 콰당, 하고 상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놀란 듯 염이가 후다닥 곁으로 달려온다.

“마, 마님, 왜 그러세요?”

그냥 기운이 없을 뿐이다, 나는 괜찮아, 그리 말하려고 했지만 목이 꽉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만 힘겹게 달싹였다. 그 순간 토기가 치밀어 오른다. 소루는 시비가 새벽녘에 준 찻물을 왈칵 다 토해 냈다.

염이가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몸을 어떻게든 추슬러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마님! 마님!”

염이가 깜짝 놀라며 제 몸을 흔들었다. 소루는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가늘게 신음했다. 손으로 매만져 보니 끈적끈적하게 피가 배어 나온다. 구역질을 하다 상처가 터졌나 보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멍하니 매만진다. 그렇게 내고도 마르질 않는 것이 신기하다.

대체 얼마나 몸 밖에 내야 나는 죽는 것일까.

느릿느릿, 눈꺼풀을 위아래로 움직이던 소루는 곧 의자 아래로 축 늘어졌다.

어둠 속 깊이 굴러떨어지는 듯한 감각에 어째서인지 안도감이 들었다.

***

가륜 왕이 아주 약이 바짝 오른 모양이었다. 한비가 보내온 보고서를 읽으며 자현은 웃음을 흘렸다. 보고에 의하면 신료들과 정국을 논하는 자리에서 그 남자가 서방의 야만족들이 판을 치는 변방으로 자현을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 말을 꺼냈다고 한다.

자현은 입술을 비틀었다. 당연히 그 제안은 한비를 포함하여 제게 신세를 진 다섯 명의 관료가 무산시켰다. 자현이 가까이에 있어 백성들이 안심하고 있질 않습니까, 거기에 바로 얼마 전에 역적들이 그 난리를 쳤습니다, 도성의 안보가 불안하고 민심이 뒤숭숭한 와중에 영웅을 멀리 보내어 좋을 게 없습니다, 그리 점잖게 조곤조곤 반론을 했더니 가륜 왕 더는 말 못하고 언짢은 얼굴로 입을 다물더라는 것이다.

‘어지간히도 독이 올랐겠군.’

부당한 제안인 줄 저도 알고 있으면서도 작정하고 꺼낸 것일 텐데, 그리 일갈에 묵살 당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속으로 이를 갈고 있겠지.

‘꽤나 조급해진 모양이군.’

현재 민심은 왕실에 적대적이었다. 흉악한 강도가 기승을 부려 백성들은 불안에 떨고 있는데, 정작 왕실에선 역모 죄인 잡아들인다고 애먼 사람이나 데려다 처벌하고 있으니, 오죽 불만이 쌓였겠는가. 그 와중에 나라를 구한 영웅을 부당하게 좌천시킨다면 이래저래 반발이 있을 터.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저를 밟아 놔야겠다 생각한 것이겠지만, 어림도 없다.

자현은 보고서를 양초에 태우며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시지. 이전처럼 두 눈 멀쩡히 뜨고서 그리 억울한 일을 당하진 않을 것이다.’

조만간 한비가 자현의 직위를 올려주어야 하지 않느냐, 넌지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그만한 공을 세워 온 이에게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포상을 내리지 않은 것은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그리 운을 떼고 몇몇이 동의한다면 어렵지 않게 대장군의 칭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 말대로만 된다면 왕이라 해도 저를 개 부리듯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할 수 없게 될 테지.

‘그리만 된다면….’

자현은 눈을 빛냈다. 물론 가륜 왕이 순순히 동의할 리는 없다. 대장군이 되면 최소 만 명의 사병을 거느릴 수 있게 된다. 그 꼴을 가만 보겠는가. 찔리는 게 있는지라 강경하게 반대하진 못하더라도 쉽게 승낙해 주지도 않을 터.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들을 끌어들여 놓아야 한다.

‘좀 더… 좀 더….’

더 힘을 키워야 한다. 다시는 그 같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그 누구도 두 번 다시 저를 비웃을 수 없도록.

그는 서탁 위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종잇장이 손 아래에서 형편없이 구겨진다. 지그시 그것을 움켜쥐다가 곧 내던져 버리고는 새 종이를 꺼내 들었다.

한비가 남구파 관료들을 은밀히 소개해 줄 터이니 약속 시간을 정해 달라 요청해 온 터였다. 남구파 관료의 대부분은 가륜이 즉위한 뒤에 관직에 올라온 자들이었다. 당연 그들은 왕에게 우호적이다. 그런 이들을 제게 협조하게 만들려면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자현은 적당하다 생각하는 시간을 적어 넣은 뒤 봉투에 넣어 인장을 찍었다. 그것을 수하에게 전달시키고 그들에게 먹일 두둑한 뇌물을 직접 챙기기 위해 방을 나서는데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소란스러운 곳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주인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럽니다!”

“멋대로 행동하지 마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잠시만 허락해 주세요!”

정원 한가운데에서 한 여종과 일꾼들 두어 명이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나.

자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종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막아 세우려는 놈들의 태도도 심상치 않다.

“주인님께서는 너 같은 걸 상대할 시간이 없으시다!”

“잠시면 된다잖아요! 급한 일이란 말이에요!”

“조용히 못 해!”

사내놈 하나가 그리 호통을 치고는 그 어린 계집종을 밖으로 질질 끌고 가려 한다. 그 벌어지는 소동을 잠자코 지켜보던 자현이 이내 그를 막아 세웠다.

“무슨 일이냐.”

“주, 주인님….”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린 계집종이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려….”

그들이 당황하며 고개를 푹 숙인다. 입을 틀어 막힌 채 붙들려 있던 여종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꾼들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주, 주인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이것이!”

한 놈이 퍼렇게 질린 얼굴로 계집의 입을 틀어막는다.

자현은 무섭게 눈을 내리깔았다.

“놔둬라.”

“주, 주인님….”

“놔두라고 했다.”

싸늘한 음성에 놈이 찔끔하며 여종을 놓아준다.

그는 가슴께에 팔짱을 끼고서 심드렁하게 고갯짓을 했다.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냐. 해봐라.”

“저, 저는….”

기세 좋게 발악하던 소녀가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서 고개를 떨군다.

이제야 겁이 난 건가. 쯧, 하고 혀를 차는데 결심을 한 듯 여종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당차게 외치었다.

“저는… 주인님께서 소루 마님께 붙여주신 여종, 염이라고 하옵니다. 주인님께 간청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말해보라.”

소녀가 꿀꺽 침을 삼킨다. 무어라 말문을 터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던 계집이 이내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마님을 이제… 그냥 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현은 귀를 의심하였다. 기가 찬 얼굴로 내려다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집종이 감정에 북받친 듯 봇물 터지듯 토해 냈다.

“해도 해도 너무… 너무 하시지 않습니까. 부,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아내에게… 사람에게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리도 가녀린 분께….”

“…지금 나에게 훈계를 하는 것이냐.”

점입가경이라더니 이어지는 말들이 하도 기가 막혀 자현은 헛웃음만 흘렸다. 이리 주변을 시끄럽게 만든 것만으로도 경을 칠 일인데, 감히 제게 훈장질을 해? 이 여종은 모가지가 서너 개라도 되는 건가. 어느 안전이라 겁도 없이 떠들어 댄단 말이냐. 그는 음산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가상하나… 어이가 없군.”

“소, 송구하옵니다만….”

“그 여자가 힘들다 우는소리라도 했나. 그 말을 듣고 쫓아와 이리 소란을 부리는 것인가. 제게도 쓸모가 있다 하며 스스로 자진한 일이 아니던가. 이제 와서 감히 내게 시비를 보내어….”

“그, 그분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게는 아무런 말씀도…!”

시퍼런 얼굴을 하던 시비가 무슨 배짱인지 겁 없이 언성을 높였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시는 걸… 제가 멋대로 와서 떠드는 것입니다.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더는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목숨을 내걸고 찾아뵌 것입니다. 열병이 나 쓰러지신 분 몸에 또 칼을 대라 하시다니…. 해도 해도,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다른 분들께서 병을 고치기만 한다면… 마님께서는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것입니까! 온몸이 그리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의식도 없는 분께 어찌 그리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러다 정말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자현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 목소리가 하도 음산하여 정신을 못 차리고 흐느끼며 떠들던 계집이 뚝 눈물을 그친다. 자현은 그 앞에 한 걸음 나아가며 살벌하게 물었다.

“…열병이 나서 쓰러져?”

“오, 오늘 아침에 마님께서 쓰려지셔서….”

“듣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분명히 주, 주인님께 알렸다고….”

자현은 휙 고개를 돌려 제 거처를 관리하는 하인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런 말은 전해 듣지 못했다며 손사래를 친다.

어디선가 누락된 건가? 아니면 전하지 않았나? 대체 왜?

이마에 심각하게 주름을 잡던 자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염이란 시비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의식도 없는 채로 방문자를 받았다는 건가? 대체 어떻게 치료를 했다는 거지?”

“대, 대신 일꾼들이 칼을 대어서….”

소녀가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자현은 몸을 굳혔다. 몸져누운 그 여자의 몸에 몸종이 칼을 대었단 말인가. 순간 머리털이 주뼛 곤두섰다.

“…내가 그리 시키더라고 하더냐?”

시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자현은 다음 순간 휙 몸을 돌렸다. 뒤채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울던 계집이 몸을 일으켜 황급히 쫓아온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곧장 별채를 지나 집 안에서 제일 초라한, 소루의 거처에 발을 들였다. 제 모습을 보자마자 문가를 지키던 이들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황급히 숙였다.

“주, 주인 나리께서 어쩐 일로….”

그는 대꾸도 않고 그를 지나쳐 활짝 문을 열었다. 방문 앞을 지키던 시비들의 낯빛도 창백하다. 그는 그들을 싸늘하게 노려본 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씁쓸한 냄새가 얼굴 위로 매캐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는 방 안에 부옇게 고인 연기에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문 옆에 향로가 놓여진 게 보인다.

왜 이런 게 여기에 있나.

그것을 발로 엎어 향불을 끈 뒤 창가에 처져있는 발을 걷었다. 연기가 가득한 방 안에 탁한 빛줄기가 아지랑이처럼 부유했다.

어째서 환기도 제대로 시키지 않은 건가.

인상을 쓰며 좁고 어수선한 방을 쭉 살피던 그는 우뚝 멈춰 섰다. 길게 늘어진 발 너머로 침상에 누워있는 자그만 그림자가 눈을 찌른다.

굳은 듯 서 있던 그는 그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발을 걷으니 식은땀에 흠뻑 젖은 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무의식중에 얼굴에 들러붙어 있는 새까만 머리칼을 걷어내 주었다. 젖살이 덜 빠진 듯 둥그스름하던 뺨이 해쓱하다. 움푹 파인 눈. 버석한 입술.

여자의 모습을 훑어 내리던 그는 이불 아래 드러난 자그만 손에 멈칫 시선을 고정시켰다. 거기에는 불그스름한 상처가 가득했다. 그는 천천히 그 소매를 걷어 올렸다. 칼자국은 손등, 팔목, 팔꿈치를 지나서까지 계속되었다. 앙상한 양팔에 빼곡히 새겨져 있는 흉터.

왜 등줄기가 굳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되어 있을 줄 몰랐나?

오가는 이가 하루에 몇이나 되는 줄 모르고 있었나?

이 여자가 뭘 어찌해서 그들을 치료해 주는지 몰랐느냔 말이다.

자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자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가시처럼 눈을 찔렀다.

이렇게까지 되어있을 줄은 몰랐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지껄여 본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누르던 그는 곧 여자의 몸을 안아 들었다.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란 게… 이렇게까지 가벼울 수도 있는 건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주, 주인님, 어디로….”

그녀를 안아든 채 문을 나서자 엎드려 있던 시비가 벌벌 떨며 묻는다. 자현은 싸늘한 눈으로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네놈들에게 일일이 보고 해야 하나?”

“죄, 죄송…!”

“어째서 이 일을 내게 알리지 않았는지, 후에 따로 묻겠다.”

시비들의 낯이 시퍼레진다.

자현은 몸을 돌려 성큼 본채로 향했다. 여자의 팔이 아래로 축 늘어진다. 가냘픈 목이 뒤로 꺾였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이 조그만 머리통의 무게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끊어져 버리는 게 아니냐. 그는 재빨리 여자의 자그만 머리를 제 어깨 위에 얹었다. 손가락에 검은 머리칼이 휘감긴다. 베일 듯이 서늘하고 섬세한 감촉에 순간 몸이 굳는다.

목덜미에 여자의 여린 숨이 슬긋 쏟아져 내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감각에 자현은 이를 악물었다. 자기로 된 것을 가슴에 안아 들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어서 떨치고 싶어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렇게도 가벼운데도 들고 있기가 힘이 들었다. 품에서 바스락거리면서 당장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아서… 께름칙하고, 기분이 나빠.

그는 제 방으로 들어가 여자를 침상에 눕히고는 곧바로 의원을 불러오라 명했다. 대기하고 있던 시비가 후다닥 달려간다. 그 잠깐의 시간조차 길게 느껴져 그는 초조하게 이마를 쓸었다. 여자의 팔 가득한 상처가 그물처럼 시선을 옭아매었다.

제가 그렇게 하도록 요구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리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인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머리를 감싸 쥐던 자현은 결국 방을 나왔다.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마치 뭔가가 발목을 죄고 있기라도 한 듯 더 나아갈 수 없다.

문가에 기대어 발을 타닥타닥 두드리던 그는 다음 순간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그래서 이러나. 웃기지도 않는다. 여자가 어찌 되든지 모르는 척 신경도 쓰지 않았던 주제에, 이제 와서….

‘젠장.’

그는 쾅 기둥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뱃속이 불쾌하게 들척거린다. 저 여자는 왜 자꾸 이런 기분이 들게 하는 거지? 속이 술렁거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에 휩싸인다. 낯설고 불쾌한 감각.

‘그게 싫어서….’

거슬리고 짜증이 나서,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부, 부르셨습니까?”

자현은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에서 의원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제가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인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늙은이가 눈에 띄게 굳어진다. 그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문가에서 비켜섰다. 안으로 들어가 보아라 눈짓하자 의원이 고개를 한 번 꾸벅하고는 냉큼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뒤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의원이 왔으니 이제 괜찮겠지. 나는 대체 왜 저 여자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제게 알리지 않았나 추궁이나 하자.

‘괜찮다, 별것 아니다, 하는 말만 듣고 난 다음에….’

의원이 그리 말하는 것만 들은 뒤에 가자.

그는 어거지로 웃어보았다.

그래. 원래 계집들은 체력이 병아리만도 못해서 픽픽 잘도 쓰러지고 그러질 않나. 좀 쉬면 괜찮아질 거다, 의원이 그리 말하면 호들갑을 떤 시비에게 무어라 한마디 해주고….

“나리… 잠시만 이리 들어오시겠습니까?”

그는 상념에서 깨어 몸을 바로 세웠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의원의 얼굴이 심각하다. 가슴이 기분 나쁘게 덜컥거렸다.

“왜 그러지?”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의원이 들어오라는 문을 열고는 한쪽으로 비켜선다. 잠시 굳어서 있던 자현은 이내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의원의 재촉에 못 이겨 침상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의원이 슬쩍 이불을 걷어 내려 여자의 얄팍한 허리를 보여주었다.

“…피부가 어긋나있는 것을 보아 살을 도려내고 꿰맨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이 여섯 군데나 있습니다.”

그는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 같은 얼굴로 멍하니 여자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몸에 듬성듬성 나 있는 흉터. 엉성하게 꿰맨 실 자국이 하얗게 도드라져 있었다. 그가 허벅지에 덮여있는 천도 걷어내 상처를 드러내 보였다.

“이건 최근에 난 상처 같습니다. 상처가 덧나서 염증이 심한 상태입니다.”

그의 눈에도 시뻘겋게 부어올라 짓무른 상처가 꽤나 심각해 보인다. 몇 번 터졌는지 잔뜩 부르튼 상처 위로 엉망으로 꿰맨 실이 언뜻 보였다.

저리 부어오른 상처를 바늘로 아무렇게나 찔러 댔을 걸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졌다. 자현은 떨리는 손끝으로 입술을 눌렀다. 전쟁터에서 이보다 더 심한 상처도 실컷 봐왔다. 그런데도 이 자그마한 여자의 몸에 자리한 참혹한 상처에 목 안으로 역한 기운이 치밀고 올라왔다.

“무엇보다 약에 중독이 되어서 내장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약?”

“진통제로 아편을 사용한 모양입니다. 그 밖에도 어설픈 지식으로 이 약 저 약을 함께 먹인 것 같은데….”

향로와 사색이 되던 시비들의 얼굴, 부자연스러운 일꾼들의 태도, 제게 알리지도 않고 멋대로 방문자를 받았던 일 등등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를 온전히 깨닫고 몸서리를 쳤다.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누가 걷어차기라도 한 것처럼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마치 누덕누덕 기운 헝겊 인형 같은 여자의 모습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

“이 일에 연관된 게 한둘이 아니다.”

탁상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고 있는 자현에게, 비령이 한숨 쉬듯 말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어떻게 집안의 하인들이 한꺼번에 작당을 할 수가 있는 것인지… 심지어는 문을 지키던 이까지….”

비령도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양 머리를 문지른다.

자현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감히 모시는 주인을 해한 시비들과 뒤채를 지키라 세워두었던 무인들은 깡그리 옥방에 가둬 둔 상태였다. 거의 반나절을 매질을 시켰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비령이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날이 새도록 때리게 했을 것이다.

“심문해 보니 뒤채에 몰래 들락날락한 이가 이 집안 하인의 절반은 되는 모양이야. 대체 이를 어찌해야겠나?”

자현은 대답 없이 깍지 낀 손 위에 쿵쿵 이마를 박기만 했다.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비령은 잔뜩 긴장했다.

이놈이 이럴 때면 그 이후에 어떤 참사가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혹 칼을 뽑아들고 온 집안을 피바다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며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는데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자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축으로 여긴 거야.”

“…뭐?”

“다 같이 미쳐서 그리 한 게 아니다. 그리 해도 되는 줄로 알았던 거야. 왕족으로도, 내 처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집에서 키우는… 가축 정도로 여겼던 거야.”

느릿느릿 쏟아지는 음산한 음성에 비령은 입을 다물었다.

자현이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지 않고서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 감히 종들이 주인을… 주인이라 여기지 않았던 거야…. 집 뒷구석 허름한 곳에 처박아 두고는 물과 먹이만 챙겨주면 되는… 그러고는 매일매일 조금씩 피와 살을 도려내어 먹는, 그런 가축으로 여겼던 거다. 하하, 종놈들이 그리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내가 그렇게 여기게 했다. 그리 대우하였어.”

“자현, 이보게….”

“그 여자가 나한테 뭐라고 말했었는지 기억하나?”

“…….”

“내 집에 머물게 해 달라 애원하면서 무어라 했었나. 네 곁에서라면 나도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 말했었지.”

그는 이마를 감싸 쥐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처럼…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너덜너덜해진 여자의 모습이 떠올라 속에서 무언가가 치받아 올라온다. 울며 제게 고맙다 하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매달리듯 제 옷가지를 움켜쥐던 일도…, 그 자그맣고 하얀 손에 비수를 쥐여 주던 제 모습까지도….

자현을 이를 악물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비령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그리 자책하지 말게. 자네도 이렇게까지는….”

“자책?”

자현이 휙 고개를 들었다. 그 형형한 눈길에 비령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속사포처럼 퍼부어댔다.

“그래. 종놈들이 살을 베어 먹는 걸 허락하진 않았지! 재물이나 권력을 가진 놈들에게만 그리하게끔 했다. 사람을 정해서 줄줄이 보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자책한다고?”

“…….”

“웃기지 마라! 나는 네놈 같은 위선은 떨지 않는다. 자책 따위를 하는 게 아니야. 겁도 없이 뒤로 내 것을 축낸 놈들을, 용서할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화가 난 거야. 너무나 화가 나서….”

제 말처럼 그가 치미는 화를 주체 못하고 탁상을 쾅 내리쳤다. 그 무지막지한 힘에 상머리가 주먹 모양대로 움푹 파였다.

“참을 수가 없는 거다.”

잇새로 살벌하게 새어 나온 음성에 비령은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물론 기함할 만한 일이기는 했지만 이는 지나치게 격한 반응이 아닌가. 소 닭 보듯 관심도 두지 않았던 계집, 비록 참혹한 꼴을 당한 것이 가여우나 이리 열 내는 이유가 뭔가.

“…어찌할 셈인가?”

“우선… 뒤채에 드나들었던 일꾼들을 전부 조사해, 가담하였던 놈들은 철저히 처분하겠다.”

“내가 하겠네.”

자현은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비령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자네보다는 내가 더 냉철히 대처할 수 있을 걸세.”

“내 집안일이다.”

“이제 와 새삼스럽게 무슨 말인가.”

비령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종들을 감정적으로 징벌하여 좋을 것이 없다. 자네보다는 내가 이성적으로 처리할 수 있네.”

“지금 내가 이성적이지 않다는…!”

“어디로 보나 그러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한 비령은 곧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군다나 소루 공주의 일은 내가 제안한 것이 아니던가. 네 말대로 나는 얄팍하고 위선적인 인간이라… 마음 한편이 불편하고 묵직한 것이 싫어. 죄책감을 덜게 해주게.”

자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죄책감. 그런 것을 느끼는 놈이던가. 입에 발린 말 지껄이지 마라.

그런 빈정거림이 혀끝에 맴돌았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비난하는 말을 해 보았자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이었다.

“…맘대로 하게.”

이를 악물기를 잠시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령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제가 정말 칼부림이라도 할까 걱정했던 건가. 자현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런 짓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리 말하려는 순간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주먹을 펴 보았다.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가 있었다.

‘자책 같은 거….’

이를 꽉 악문다. 여자의 몸에 가득했던 상처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듯 그는 눈을 감았다.

***

여자는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현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그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의원이 제대로 된 약을 달여 먹이고 상처를 봐주었다더니 혈색이 다소 돌아와 있었다. 아직 힘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열이 아직 내리지 않은 건가?’

그는 손을 뻗어 여자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미지근하게 식은 섬세한 피부 감촉에 손끝이 저릿하다. 꼭 아기 피부같이 보들보들하다. 원래는 손가락도, 팔목도, 이 자그마한 몸뚱이도 이랬을 테지.

‘사실은… 이런 꼴이 될 이유가 없었다.’

여자의 상처투성이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자현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여자를 보면 제가 당한 일이 떠올라 분이 치밀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너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너라고 원했던 혼사였을까. 나를 모욕주려는 왕의 목적에 멋대로 이용당해졌을 뿐…. 너는 내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화가 나서 어찌하지를 못하고… 그런 나를 두고 웃는 이 여자가, 모진 대우에도 고맙다고 하는 이 여자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슬려서… 너무나 거슬려서… 그래서….’

두서없이 이어지던 생각들이 불현듯 뚝 끊어졌다. 그는 여자의 투명한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건가. 빛을 잃은 그 두 눈이 고요히 저를 향해온다. 제 무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 기묘한 눈동자.

여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가 어디냐?”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아차린 것인지 여자가 덤덤하게 묻는다. 굳어서 있던 그는 머뭇머뭇 답했다.

“…내 방이다.”

제 목소리에도 여자는 그다지 놀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곁에 있다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알아차린다. 여자의 그런 기묘한 면에 익숙해진 것이지 그게 더는 이상하고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현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너는 의식을 잃었었다. 네 시비가 사색이 되어 내게 달려와 알렸어.”

여자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가만히 제게 고정시킨 채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멀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 눈앞에 서면 늘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 든다.

무력하게 고개를 숙인 채 자현은 그녀가 원망의 말이나 비난, 혹은 호소를 쏟아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깊은 침묵만이 계속되었다. 기진맥진하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인가. 그는 초조하게 몸을 돌렸다.

“땀을 많이 흘렸다. 물을 좀 줄 테니….”

“혹 이대로 죽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가느다란 음성에 그는 물병을 향해 뻗던 손을 멈춰 세웠다. 여자의 부챗살처럼 기다란 속눈썹이 느릿느릿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꺼질 듯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어.”

“…너를 해코지한 하인들은 모두 처벌할 거다.”

그는 굳은 어조로 내뱉었다. 여자가 의아한 얼굴을 한다. 왜 그리하느냐 하는 듯한 그 표정에 속에서 울컥 뭔가가 치밀고 올라왔다. 그는 다소 거칠게 물었다.

“왜 진작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나?”

“…….”

“그… 염이라는 시녀에게 진작 이 사실을 알려라 했더라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바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나.”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일인 줄 몰랐다.”

그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한 얼굴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도와 달라고 했다면, 도와주었을 거였구나.”

“그럼, 이 지경이 되기까지…!”

제가 내버려 두리라 생각했던 건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그 말을 삼켰다. 한 번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뒷방에 처박아 두고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따금 생각이 나더라도 바로 떨쳐 버렸다. 제 입으로 있는 듯 없는 듯 그리 살겠다 하지 않았느냐. 신경 쓸 것 없다. 그리 지워버렸다.

저라고 몰랐을까.

제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왜 내게 진작 도와 달라 하지 않았느냐고, 진심으로 따지는 것인가.

자현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불덩어리가 목에 걸린 듯 쓰리다. 이런 꼴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얄팍한 변명이 목까지 치밀어 오른다. 그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삼키며 딱딱하게 내뱉었다.

“보상하게 하라.”

“…무엇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말에 그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너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

“내가… 하인들의 관리를 소홀히 하였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몰랐던 것은 분명한 나의 실책. 원하는 것을 말해라. 내가 어찌 보상해 주길 바라나.”

제 귀에도 정떨어지는 말투였다. 비령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니다. 나는 보상을 해주고 이 찝찝한 마음을 떨치려 하는 게 아닌가. 스스로에게 조소하는데 여자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뭐든지… 들어주는 것이냐?”

“그래.”

바라는 것이 있나. 안도감으로 어깨에 힘이 빠지었다. 그는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마.”

여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나 대단한 것을 바라기에 이러나.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오더라도 들어 줄 터이니 말해 보라, 그리 재촉하려는데 여자가 입술을 달싹인다.

“네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

“…뭐?”

머뭇머뭇 흘러나온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여자가 제 쪽을 향해 조심조심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네 얼굴을 만져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못 박힌 듯 서서 그 손을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길 잠깐,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 조금 격양된 어조로 쏘아붙였다.

“뭐든지 들어 주겠다 하였다. 제대로 된 것을 말해라. 정말로 뭐든….”

“나는 항상 어둠 속에 있었다.”

여자가 빛을 잃은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며 말한다.

“그리고… 더 깊은 어둠으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어. 두 번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있었다.”

“…….”

“깨어나 보니, 네가 있었어.”

“나는….”

어째서인지 목이 아프도록 조여 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 그는 입술만 달싹였다. 여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린다. 그 미소가 칼날처럼 뱃속을 찔렀다.

어째서 너는 웃는 건가. 그런 꼴을 당했는데… 그처럼 참혹한 일을 당했는데… 이해할 수 없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 말하는 여자의 눈에 물기가 고인다. 그렁그렁 고인 것이 웃음기로 가늘어진 눈매 안에서 넘쳐흘렀다.

“참으로 이상하지. 그저 거기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니. 눈을 뜨는 게 무서웠다. 그런데… 네가 옆에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놓였어. 안도하고… 그것이면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

“너는 꼭 어둠을 밝혀주는… 해님 같아. 보이지도 않는 이 눈에도, 네 빛만은 또렷하다. 그러니까 무엇 하나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해는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냐. 그저 거기에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 그래서 그 빛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나는 그것만으로도 어떤 아픔도 참아 낼 수가 있다.”

젖은 속눈썹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거기 맺혀있던 물방울이 주룩,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너는 흐느끼는 법을 혹 모르는 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그를 향해 여자가 미소 지었다.

“다만… 한 번만, 너에게 닿아 보고 싶다. 네 얼굴을 보고 싶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는 그 손길을 향해 몸을 숙였다. 여자의 손가락이 스르륵 흘러내린 제 머리칼에 와 닿는다. 그것을 매만지다가 여자가 몸을 일으켜 제 얼굴에 손을 대었다.

상처가 가득한 가느다란 손가락과 여윈 팔목이 시야를 그물처럼 옭아매었다. 자욱한 안갯속을 걷고 있는 것처럼 머릿속이 흐릿해진다. 여자의 손바닥이 뺨을 감싸고 광대뼈를 손끝으로 더듬어 나갔다. 마치 나비를 쓰다듬듯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숨을 멈추었다.

이처럼 깨어지기 쉬운 것을 접하듯 저를 접해 온 이가 세상에 또 있던가.

여자의 상처가 가득한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마를, 그 아래 숱 많은 눈썹을 더듬다가 천천히 코를 타고 내려왔다. 조심스러운 그 손길에 뱃속이 불편하게 꼬여온다.

거리감을 제대로 재지 못한 것인지 무방비하게 가까워진 그 얼굴을 그는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수수하고, 아이 같아 볼품없다고 여겨온 용모다. 하지만 곳곳에 묘한 미려함이 숨겨져 있었다.

오뚝한 코, 완만한 뺨, 둥그스름한 이마와 자그만 입술, 그리고 유리알 같은 두 눈…. 오싹하게 느껴질 정도로 맑은 그 두 눈은 귀신이 탐을 내 빼앗아 간 것도 무리가 아니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다.

“더… 험상궂은 얼굴일 줄 알았다.”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낯선 감각에서 깨어나 입술을 떨었다. 여자의 손가락이 거기에 와 닿는다. 그는 어색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부러 퉁명스레 말했다.

“…험상궂은 얼굴 맞다.”

“인상을 자주 써서 그런 거야.”

여자가 미간에 팬 주름을 매만졌다. 얼굴의 생김새를 마치 손에 새기듯이 신중하게 더듬어 나가며 미소를 짓는다.

“웃으면, 분명 다를 거다.”

“…….”

이윽고 창백한 손가락이 제게서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붙잡았다. 여자가 의아한 얼굴을 한다. 스스로도 왜 붙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실타래가 엉켜 있는 것처럼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러다 돌연 그런 혼란스러움에 화가 났다.

“이런 건… 아무런 보상이 되지 못한다.”

“…나한테는 되었다.”

“내게는 되지 않아. 다른 것을 말해라. 제대로 보상하겠다.”

강경하게 말하자 여자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한다. 그에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여자에게 마구 퍼부어대고 싶었다.

바보 같다. 미련스럽다. 이따위 것으로 되었다고 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웃지 마라…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그러면… 가끔씩… 생각날 때 한 번씩만, 내게 들러다오.”

그런 식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라.

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빛이라는 듯.

그는 여자의 손을 놓았다. 여자의 고요한 얼굴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모래를 삼킨 것처럼 목 안이 꺼끌꺼끌하다. 굉장히 무력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바보 같아서, 너덜너덜해진 꼴을 하고서도 제게 웃어 보이는 이 여자가 너무나도 어리석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

만복은 밤거리를 바쁘게 달리고 있었다. 심장이 격하게 두방망이질을 쳤다. 그는 품 안에 넣은 것이 온전히 제자리에 있는지 쉴 새 없이 손을 넣어 확인했다.

그는 원래가 간이 작은 사람이었다. 잔걱정이 많고 우유부단하여 뭐든 결정하기를 미적거리는. 머뭇거리다 좋은 기회를 놓쳐 버렸던 게 몇 번이던가. 그는 이번에야말로 그런 어리석은 손해는 보지 말자고 다짐하였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잖은가.’

그는 누구에게 변명하는지도 모르고 속으로 외치었다.

그래. 나는 나쁘지 않다. 다들 좋다고 귀신 공주의 방에 숨어 들어가지 않았던가.

물론 저는 아픈 곳도 없었고, 가족 중에 아픈 이도 없었지만… 옆방의 삼구는 소변 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별 시답잖은 이유로 귀신 공주 피를 훔쳐 마셨다.

고 계집 피를 먹으면 병이 낫는 것뿐만이 아니라 몸이 더욱 건강해지고, 피부에는 윤기가 흐르며, 좀 더 젊어지는 기분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런 소문 때문에 아프지도 않은데 꾀병을 부려 그 방에 들른 이가 제가 알기로만 다섯이다.

저처럼 돈 때문에 숨어 들은 이도 있을 것이다.

만복은 품 안에 넣은 것을 또다시 만지작거렸다. 헝겊 주머니에 넣어둔 엄지손가락만 한 귀신 공주의 옆구리 살이 몰캉몰캉 만져진다.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말로 친구의 협력을 구해 얻어낸 것이다. 물론 병든 어미 따위는 없었다. 제가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은자 오십 개는 주겠지.’

만복은 씩 웃었다.

잘하면, 은자 백 개까지 흥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뱃속이 자르르 떨려온다.

현재 장안에는 자호가에 만병을 고치는 영약이 있다는 소문이 은근히 퍼져 있었다. 골골거리던 이가 그 집을 들어갔다가 나오면 딴사람 된 듯 두 발로 뛰쳐나오니 제아무리 입단속을 한다 해도 어디 말이 안 퍼질까. 당연, 자호가의 종놈들을 데려다 대체 그 집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냐 은근히 캐묻는 이도 생겨났다. 만복도 그런 이에게 불려갔다.

‘그 정도 살았으면, 조용히 갈 것이지….’

탐욕이 좔좔 흐르던 노인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만복은 속으로 이죽거렸다. 그에게 자호가의 영약을 빼다 달라 의뢰한 이는 대대로 고위 관료를 지내온 집안의 팔십이 넘은 꼬부장한 늙은이였다. 저치는 뒤로 천금을 쌓아놨을 거다, 저치가 죽으면 재산 싸움 볼만하리라 장안에서도 아주 소문이 자자한 벼슬아치 노인네.

‘그 많은 재산 두고는 차마 눈이 안 감기는 게지.’

만복은 손안에 쥔 것을 꾹 움켜쥐었다. 그는 더 젊어지고, 더 건강해지는 것보다는 돈이 더 좋았다. 돈만 있으면 남의 종노릇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내 이놈의 종놈 팔자를 필히 벗어나리라.

‘오늘 내로 은전을 받아서 남방으로 도망하면… 주인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문득 수라와 같던 주인의 얼굴이 떠올라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뒤채 드나들던 일꾼들을 바닥에 꿇려 앉혀 놓고는 죽일 듯 노려보던 그 기세가 어찌나 살기등등하던지, 제 몸에서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내장이 다 덜덜 떨려왔었다.

그리 화가 나시었으니 뒤채를 지키던 하인들만 벌하고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돈을 챙겨 들고 바로 이 나라를 떠야 한다. 멀리멀리 남방에라도 가서 장사라도 시작하자. 향신료 장사라도 시작하면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리라.

‘그래! 이게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그는 마음을 다잡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천금을 날릴 수야 있나. 오늘 내로 도성을 떠나면 문제없다. 비록 늦은 밤이었지만 그 늙은이가 약을 구하는 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 찾아오라 일렀던 터이니, 제가 가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대문을 활짝 열어 맞이할 것이다. 그가 돈 자루를 던져주면 잽싸게 챙겨 들고 바로 성문을 나가는 거다. 근래에는 오가는 상인들이 많으니 말 한 마리쯤이야 금방 얻을 수 있겠지.

‘아니면 상단에 끼어 가도 좋고….’

아, 그게 좋겠다. 그들과 함께 남방에 있다는 대도시로 가는 거다.

만복은 헤죽헤죽 웃었다. 대상인이 된 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그는 걱정을 떨치고는 아이처럼 껑충껑충 뛰었다.

그때 누군가가 좁은 골목길에서 슬그머니 걸어 나온다. 만복은 놀라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 야밤에 이런 외진 길을 어슬렁어슬렁 뭐 하는 것인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둘 다 어지간히도 취한 모양이었다. 걸음걸이가 위태위해하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 보기에도 옷가지가 풀어헤쳐져 엉망이었고, 어딘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혹여 괜한 시비라도 붙을까 그는 몸을 사렸다.

‘길을 좀 돌아서 가야 하나.’

그 짧은 고민은 금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오늘 내로 도성을 떠야만 한다. 되돌아갈 여유는 없었다. 만복은 어깨를 한껏 웅크리고서 골목 벽에 붙었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조심스레 그들의 옆을 지나려 하는데, 덥석 가까이에 서 있던 이에게 어깨를 붙잡히고 말았다. 만복은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오늘만 벌써 두 번째군.”

“왜, 왜 이러시오?”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는 뒷걸음질을 치자 그들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못으로 쇠를 긁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장안에 흉악한 놈들이 판을 치고 있다더니 혹시 그놈들이 아닌가 하며 만복은 몸을 덜덜 떨었다.

“품 안에 든 것을 이리 내놓아라.”

아무래도 강도가 맞나 보다. 만복은 더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돌려 왔던 길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려나갔다. 하지만 대로와 이어진 길목 끄트머리에도 누군가 우뚝 서 있었다. 걸음을 주춤한 것도 잠시, 뒤에는 두 명이고 앞에는 한 명이다. 저놈을 제치고 도망치면 될 게 아니냐. 만복은 놈을 밀치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의 코앞에 도달 하자마자 발바닥이 땅에 들러붙은 것처럼 옴쭉도 하지 않는다. 제가 왜 멈춰 섰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만복은 돌처럼 굳어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천인인가.’

기묘하리만치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 범상치 않은 용모에 압도되어 만복은 공포심도 잊었다. 사내가 느린 걸음으로 제게 다가선다. 어둠 속에서도 남자의 황금색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머릿속에서 달아났다. 마치 뱀 앞의 쥐가 된 양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두 눈만 슴벅거리고 있는 만복의 앞에 선 사내가 당연하다는 듯 그의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일확천금의 기회를 두 눈 뜨고 빼앗긴 만복은 황망히 눈을 부릅떴다.

“인간 놈들… 우리가 다가갈 수 없다고 아주 좋다꾸나 공주를 뜯어 먹는구나.”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뒷전에 있던 이들 중의 하나가 제 어깨 위로 고개를 내밀고서 코를 킁킁거리며 말한다. 그 서늘한 숨결에 오금이 다시 저려오기 시작했다.

“우리 요괴들은 닭 쫓던 개 신세나 다름없다.”

또 다른 이가 중얼거리며 덥석, 제 어깨를 움켜쥐었다.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투실투실한 손이었다. 꼭 진흙 덩어리 같은 그 차고 축축한 손이 느릿느릿 기어 올라와 제 목을 움켜쥔다.

만복은 끅, 하고 숨을 들이켰다.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룩주룩 비 오듯이 흘렀다. 그런 저를 조롱이라도 하듯 끈적거리는 차가운 혀가 목덜미 근처를 느릿느릿 기었다.

“제법 맛이 있겠는데….”

“먹으면 안 된다. ‘그’의 용건이 우선이다.”

“아니.”

아무 말 없이 주머니를 들어 보이던 사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소름 끼칠 만큼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무감정한 금색 눈동자로 그를 돌아보며 사내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내 ‘용건’은 마지막으로 해도 좋다. 숨만 붙여 놓아라.”

온몸의 피가 식는다는 게 이런 것인가. 제 몸을 붙든 이가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사양 않고.”

그러고는 덥석, 커다랗고 축축한 입으로 제 어깨를 깨물었다. 가시같이 날카로운 이빨이 살 속으로 파고든다. 그는 비명을 지르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입 안으로 거침없이 나뭇가지 같은 뻣뻣한 손가락이 기어 들어왔다.

“나는 혀가 맛있더라.”

우두득, 하고 혀가 마치 찰흙 덩어리처럼 쥐어 뜯겨 나갔다. 울컥울컥 넘쳐흐른 피가 기도로 넘어와 만복은 쿨럭쿨럭 기침을 하였다. 어마어마한 고통에 얼이 나간다. 양측에서 그들이 제 몸을 꽉 붙들고서 나는 여기, 나는 저기 하며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지금 나… 산 채로, 산 채로 잡아먹히고 있는 건가? 어째서?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악몽을 꾸는 듯하였다. 정신이 반쯤 나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우물우물 소리가 들린다. 제 고기를 먹는 소리다. 만복은 눈을 까뒤집으며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마치 끓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처럼 버둥거리며 피가 가득 고인 입을 뻐끔거렸다. 그륵그륵거리는 초라한 비명이 목 안에서만 울린다.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사내가 이윽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아….’

그는 가슴에 박힌 팔뚝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것치고는 조금 가느다란 손이 제 가슴 속에서 뭔가를 움켜쥐더니 곧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그것으로 그의 의식은 완전히 끊어졌다.

축 늘어진 만복을 움켜쥔 이가 쩝쩝 입맛을 다신다.

“산 것이 맛있는데.”

“…버리든 먹든 마음대로 해라.”

뜨끈뜨끈한 심장을 꺼내 든 사내가 무감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은 흥미를 잃은 듯 그것을 바닥에 내버렸다. 그러고는 어슬렁어슬렁 다시 골목으로 기어들어 간다. 축 늘어진 처참한 인간의 시체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사내는 곧 손에 쥔 것을 질겅 씹었다.

“여태껏 먹은 것 중에서 가장… 맛없다.”

그는 비난하듯 늘어진 시체를 한 번 노려보고는 뒤돌아섰다. 그들의 처참한 행각에 노한 듯 달빛이 불그스름해진다. 사내는 개의치 않고 홀연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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